우리의 경배 대상이신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쉽다는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께 굴복하여 순종하기만 하면 누구든 저절로 알게 되기 때문이고, 어렵다는 것은 영적인 동의가 전제되지 않으면 정말로 알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이신 하나님을 종교적 인식방법으로 접근하려 할 때, 엄청난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어집니다.
모태신앙이 아닌 대부분의 성도들은 다양한 동기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며(전도 등 타인의 인도에 따르거나 예기치 못한 성령체험을 통해 시작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진하여 시작하기도 함), 이때부터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주위의 평신도들로부터도 상당한 영향을 받지만, 가장 결정적인 영향력은 목사님들(특히 담임목사)로부터 받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에 있어서 목사 직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도록 ‘가르침’의 책무를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성경을 통해 정확한 하나님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안내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수십 년 간의 신앙생활을 통해, 지역교회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인 목사들이 부여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가르치는 목사의 직위를 성경에 맞지 않게 너무 과도 평가하는 것입니다. 세상원리를 그대로 수용하여, 목사를 엄청나게 격상시킵니다. 그래서 평신도들의 존경과 대접을 당연히 받아 누릴 충분한 자격을 보유한 영적 존재로까지 변질시켜버립니다. 이는 아무리 치밀한 논리(신학)로 강조하더라도 성경과는 맞지 않는 거짓입니다. 목사가 중요한 직분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중요하다는 의미는 현재의 설명(신학/교리)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실 목사란 ‘스스로 중요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순간, 이미 타락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묘한 직분인 것 같습니다. 이 오류는, ‘목사직임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는 단순한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을 방해하는 최대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데에 그 심각성이 있다 하겠습니다. 목사의 위상을 바로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정확히 아는 것을 방해받습니다. 왜냐하면 목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아주 놀라운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경의 12가지 상징들을 가지고, 성도의 낮아짐에 대하여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인용하는 상징들은, 장식하지 않은 제단, 목자의 지팡이, 광야의 만나, 기드온의 나팔, 쉬운 멍에, 수건과 대야, 빌려온 나귀, 우는 닭, 육체의 가시, 어린 양, 빈 무덤, 질그릇 등 12가지입니다.
별 생각없이 볼 때, 평범하기 그지없는 상징들이지만, 성경은 이들을 통해 ‘끊임없는 낮아짐’의 교훈을 선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는, 이처럼 볼품없고 평범한 우리(성도)를 통해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을 이루신다는 개념으로까지 발전시킵니다(이는 발전이 아니라 참 진리의 발견입니다). 심지어 주님까지도 ‘어린 양’이라는 성상으로 완벽하게 낮아지셔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마지막 상징인 ‘질그릇’에 가서, 현대교회의 크나큰 오류인 목사숭배주의를 강하게 경계합니다. 몇몇 구절만 인용하겠습니다.
☉ “어떤 사람이 ‘님’이란 직함을 받을 때, 긴 가운을 입을 때, 짐짓 거룩한 몸가짐을 가지려 애쓸 때, 목소리를 깔고 지그시 말하며 사람들의 존경을 기대할 때, 그는 분명 하나의 ‘종교적 성상’이 되려고 갈망하는 것이리라. 어떤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하나의 ‘상징’이 되기 위해 무진 노력한다. 물론 교파의 전통에 따라 목회자의 의복이나 직함은 중요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숨기고 있는 야심은 동일하다. 그들은 사역이란 것을 자기 업적, 공로로 여긴다.”(p.197).
☉ “목회자 한 사람이 교회의 권위를 구현하고, 목회자 한 사람이 교회의 보편성을 제 한 몸에 인격화한다. 그리고 더욱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그런 사고방식을 기대하고, 그런 태도를 가지라고 힘을 실어준다.”(p.198).
☉ “교인들은 영적으로 목회자에게 거의 의존한다. 그들은 목회자의 ‘종교적’ 표현에 착 달라붙어 있어, 기도하는 법, 말씀 묵상하는 법, 남을 위로하는 법, 복음을 전하는 법을 모른다. 그렇게 이십 년, 삼십 년 신앙생활을 하지만, 정말로 신앙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슬프게도 교인들은 그들의 영적 강건함이 목회자에게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하나님이 아니라 목회자에게 의존되어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p.199).
☉ “종교는 목사와 평신도를 확연하게 구별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 목격하는 바, 믿는 자들에 관한 성경의 기술과 모순된다.”(p.199).
☉ “바울에게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아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만이 중요했다. 복음을 전하는 자신은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자기를 의지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인격적으로, 인간적으로 자기를 좋아해 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p.205).
☉ “요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는 대중적 인기, 물질적인 풍요, 사회와 교계에 대한 영향력을 하나님 축복의 징표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많다. 바울 시대 ‘지극히 큰 사도들’ 역시 우수성 이미지, 성공 이미지를 부각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들을 하나님 축복의 상징으로 존경하고 우러러보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p.205).
결론적으로, 저자는 “성경의 형상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낮아짐과 하나님의 높아짐을 예시하며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고 있다.”고 정리하면서, “이것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메시지는 바로 영적 ‘항복훈련’이다.”라고 마무리하고 있습니다(p.208).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이지 목사를 따르는 무리일 수가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스스로 낮아지셨다면, 목사 또한 진정으로 낮아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낮아져야 할 목사가 스스로 평신도 위에 높아져서, “목사를 존경하고 대접하라.”고 강요하는 현실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슬프게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물론 목사는 존경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존경은 지금 우리가 아는 그런 내용이 결코 아닙니다).
솔직히 저는 어떤 경건서적을 읽든지, 거기서 한 두 개 정도의 미비점은 찾아내곤 합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만큼은 단 하나의 미비점이나 반대견해를 낼만한 곳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성경에만 기초하여 숨겨진 보화(지혜)를 발굴해 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태생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신학이나 교리에 근거하여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누구든 아무 비판도 가할 수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교회의 지도자로 자임하시는 분들이라면 꼭 서재에 비치해 두고 수시로 읽어야 할 귀중한 책임을 확신합니다! 참 진리를 전해주신 저자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