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아멘넷에서는, 김삼 목사라는 분이 쓰신 ‘새해와 십일조’라는 칼럼을 중심으로 치열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거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칼럼 내용은, ‘히7:8절은 신약시대 십일조의 당위성을 보증한다.’는 것입니다.
조회수가 3000여 회를 훨씬 넘고 댓글도 거의 300여 개에 육박할 정도로 대단한 관심을 끌었습니다(조회수는 반복조회를 고려해야 하고, 댓글도 필자의 것이 과반을 상회하는 등 허수가 일부 포함되긴 했으나, 그래도 상당한 숫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주류는 김 목사의 견해를 지지하는 분들이 점하였고, ‘신약시대에는 십일조가 필요없다.’는 폐기론을 주장하는 분들은 소수에 머물렀습니다.
중간 이후에 토론에 참여한 저는, ‘신약에서도 십일조가 폐기된 것은 아니지만 구원의 필수요건이 아니며 각자의 자원에 의해 결정할 사안이다.’라는 중간적 견해를 피력했었습니다.
전반적 대세는 김 목사의 지식/논리/강도의 우월에 상대편이 밀리는 형국이었던 것 같습니다(제 중간견해도 같이 취급되었습니다).
아멘넷에 내용이 그대로 남아있으므로 관심 있으신 분은 참고하시면 될 것입니다.
저 개인 입장에서 보면, 비록 아직도 저의 십일조 이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객관적/논리적 측면에서 상대에게 압도당한 듯한 평가를 모면하기 어려운 것 같아, 무척 창피한 일입니다. 그러니 아무 말하지 않고 감추어 두는 것이 더 나을 듯도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토론을 계속 하자는 것도 아니고, 저를 코너(?)에 몰아넣은 상대를 원망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비록 볼썽사나운 모양새일망정, 주님은 묘한 가르침을 주신 것 같고, 어떤 경우든 우리를 성숙시키신다고 믿기에, 이를 나누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입니다.
저를 포함한 한국인들의 성격상 특징 중의 하나는, 토론문화에 익숙지 못하여 토론 과정에서 점차 고조되는 감정처리에 미숙하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번 토론에서도 이 특성은 여지없이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표현과 단어의 선택이 거칠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러다가 어느 젊은 성도님이 제 글에 대한 소감을 귀뜸해 주셨습니다. 제 글이 ‘무척 냉소적이고 마치 동네 불량 중학생 같은 느낌을 준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순간, 감전과 비슷한 정신적 공황을 맛보았습니다. 저는 단순히 보다 성경에 부합되는 해석에 접근하려 노력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읽는 이의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할 정도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 때, 성령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줄줄 암송하는 아홉 가지 열매를 생각나게 해 주셨습니다.
“십일조의 자원성을 침 튀기며 강변하는 네 글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몇 개나 나타나고 있느냐?” - 주님의 준엄한 질문이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Nothing!!! 단 한 개의 성령의 열매도 없었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겠다는 충정【이 충정을 보통 성도의 거룩한 의무로 여기곤 합니다. 그래서 자기와 조그만 견해차라도 보이면 이단을 대하듯 거룩한 분노를 표출하곤 합니다】 속에는 사랑도 참음도 온유도 절제도 없었습니다! 철저한 무(無) - 성령과 무관한 모습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직 어린 성도들을 위한 배려조차 없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즉각 사과하기로 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개 장소라 자존심 상하고 낯부끄러울지라도, 상대의 반응에 무관하게, 사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박 목사님께서는 과분하게도 제 육체연령을 목사님과 비슷하게 대우해 주시려는 것 같습니다만, 제 정신연령은 20대 수준입니다. 철딱서니 없는 짓거리 할 때가 한 두 번 아닙니다.
이번 사건도 그러한 해프닝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감추고 싶고 얼굴 화끈거리지만,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 잊지 않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언제쯤 이런 주책 부리지 않고 먼저 믿은 자다운 품위를 지킬 수 있을는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