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면서 왜 원수를 갚아주는가?
[질문]
제게 엄청난 상처들을 안겨 준 쓰레기 같은 인간들과 그 사건을 떠오를 때마다 너무 큰 수치심이 듭니다. 제가 받은 상처들을 되갚아 주고 싶은데 억울하게도 그럴만한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를 짜증나게 하는 건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거기다 하나님이 대신 복수해주겠다고 하시는데 참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대신 저의 원한을 갚아준다는 게 완전히 서로 모순되게 여겨집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는 건 그 쓰레기 같은 인간들도 잘 되길 바라야한다는 말인데 그럼 하나님이 저의 원한을 갚아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갚아주시겠다는 뜻인가요? 만약 그렇다 해도 저로선 여전히 너무 억울할 것 같습니다 그 쓰레기들이 벌 받지 않고 오히려 복 받는 셈이지 않습니까?
[답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세상에 오직 그 한 사람만 있는 양 간주해서 일대일로 친밀한 관계를 맺은 바탕에서 이끌어 가십니다.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택하여 구원을 베풀고 당신의 완벽하신 계획에 따라 그 인생 전부를 주관해주십니다. 그분의 신자를 향한 관심과 목표는 오직 신자 개인의 거룩한 성장과 당신의 충성된 일꾼으로 사역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에 부합한 삶을 살면 신자 주변의 모든 여건 사건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런 관계가 더욱 진전되어지는 방향으로 통치해주십니다. 요컨대 신자 한 명을 거룩하게 세우기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을 당신께서 책임지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계명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 첫째가는 의미는 인간끼리 절대 서로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는데 삼위 하나님이 그러하듯이 서로 사랑해야만 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함께 힘을 합쳐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려야하기 때문입니다.(창1:28)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기만 높이려했던 원죄 하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그런 본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최고가 되려면 자연히 이웃과 경쟁해야 하고 그럼 분쟁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다 모든 인간이 도덕적으로 너무 연약해 누구나 매사에 결점, 허물, 욕심, 고집, 죄악을 드러냅니다. 어떤 인간관계도 한쪽만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정도와 세기는 달라도 결국은 당사자들의 잘못이 함께 개입된 것입니다. 원수 관계란 상대 또한 자신을 원수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회구조적 문제로 일방적으로 억압과 폭력을 당할 수밖에 없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문제는 인간 공동체 전체가 개선해나가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일상적 개인적인 인간관계의 분쟁에선 아무리 미약해도 양쪽에게 다 잘못이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 사이에 함부로 비난 정죄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신자는 예수님 가르침처럼 남의 눈의 티끌보다 자기 눈의 대들보부터 먼저 볼 줄 알아야 합니다.(마7:1-5)
만약 신자가 원수에게 복수하는 순간 상대는 그 복수에 대해 복수하면서 끝없는 복수의 고리가 생깁니다. 대대로 원수 집안이 내려오는 이유입니다. 상대가 아무리 쓰레기 같은 자라도 똑같이 악으로 갚으면 자신도 그와 같은 위치로 비하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신자가 세상에서 어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신자 본인부터 거룩해지길 바랍니다. 다른 이가 주변 상황이 어떠하든 그분의 관심은 오직 신자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또 세상 사람들 전부도 그렇게 상대하시기에 신자들부터 개별적으로 당신 앞에 올바르게 서게 하는 방식으로 전체적인 문제도 해결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입장에선 그 원수 또한 불쌍하기 짝이 없으며 당신의 사랑을 베풀어줄 대상입니다. 신자가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주어야 할 또다른 이유인데 그렇다고 기독교 교세를 늘리려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원수에 대한 미움을 끝까지 품고 있으면 신자 본인부터 정서적 영적으로 피폐해집니다. 하나님이 죄에 필연적으로 수반되게 섭리해 놓으신 부정적 파괴적 성향 때문입니다. 반면에 원수를 용서하는 것 같은 진정한 사랑에는 반드시 성령의 역사로 큰 기쁨이 따르며 영적유익이 많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오직 신자 본인의 영성이 깨끗하고 성숙해지길 바랄 뿐입니다.
물론 인간이 영적 존재이지만 감정적 동물이기도 해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어지간한 믿음으로도 힘이 듭니다. 그런데 두 부류의 부모가 있습니다. 밖에서 억울하게 맞고 들어오면 반드시 가서 받은 것 이상으로 갚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부모와, 상대가 잘못했지만 어리석어서 그 사실을 모르니까 네가 참고 더 잘 대해주면 오히려 사이가 전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가르치는 부모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후자의 하나님입니다. 원수를 갚으려면 다른 신을, 정확히는 다른 종교를 믿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팔복강화의 마지막 여덟 번째 복을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0-12)라고 가르쳤습니다. 신자가 의를 위하여 즉, 복음을 전파하면서 하나님 뜻대로 세상의 타락한 흐름에 거슬려 살면 반드시 핍박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 때에 끝까지 참는 정도가 아니라 기뻐하라고 명합니다. 세상 앞에 하나님의 의를 증명했기에 나중에 그분의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은 모든 신자를 세상 앞에 선지자로 세우려고 세상에서 불러냈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십자가 복음을 위해 핍박 받는 것도 아니고 일상적 인간관계에서 상처 받은 것으로, 비록 억울하고 고통이 심해도, 복수하면 자청해서 같은 쓰레기가 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보다 훨씬 경미한 하나님의 수많은 계명들도 제대로 지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오직 예수 십자가의 긍휼만 소망하며 지금도 수시로 짓고 잇는 죄와 허물들을 용서해달라는 겸손한 자세로 그분 앞에 서야 합니다.
서두에 하나님이 신자와 개인적인 관계로만 신자의 일을 풀어나가시므로 신자가 당신의 뜻대로 순종하면 나머지는 당신께서 다 책임져 주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일단 신자가 원수를 사랑하게 되면 그 자체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더 이상 원수 관계가 지속되지 않습니다. 비가 온 뒤 땅이 더 굳는다고 두 사람 관계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격상 발전 지속됩니다. 만약 도무지 그럴 수 없다면 끝까지 복수하지 않고 참기만 해도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수에게 복수하는 모습이 천벌을 내려 죽이거나 괴롭게 하는 식이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천하의 죄인으로 도무지 용서할 여지가 없다면 당신만의 때와 방식으로 그를 징벌합니다. 무엇보다 신자와 원수가 되어 있는 그 자체로 즉,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으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굽어졌던 공의를 바로 잡는 방식으로 원수를 갚아주시지 신자의 감정 풀이를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 주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그렇게 하길 오랜 시간 기다려주고 마찬가지로 원수도 회개하도록 오래 기다려 주십니다. 무엇보다 두 원수 사이를 완벽하게 공정한 판결을 내리고 그에 적합하게 당신의 공의를 세우고 피해자에겐 긍휼을 베풀면서 억울했던 모든 사정을 바로 잡아주십니다. 따라서 염려한 대로 두 가지 진리는 절대 상충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 문제뿐 아니라 모든 인생사에서 광대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신자더러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허락하면서도 당신만의 계획과 뜻을 한 치의 차질 없이 완벽하게 이루십니다.
(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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