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결정적 증거

조회 수 3221 추천 수 239 2008.09.28 17:3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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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결정적 증거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고후5:16-18)


변화된 인생

거의 모든 신자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별다른 의심과 반발 없이 받아들인다. 정말 확신에 찬 것이라면 다행이려만 맹목적으로 수긍한 것이라면 문제다. 우선 그런 신자는 성경을 거의 읽지 않는다. 주일 설교의 본문 말씀을 따라 읽는 것 말고는 스스로 규칙적으로 읽으려 들지 않는다. 당연히 성경대로 따라 살지도 않는다. 성경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찌 성경대로 살 수 있겠는가? 그러니 목사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으로 그치고 불행하게도 그것을 역이용하는 삯군 목사도 간혹 나온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벧전 3:15) 하라고 했다. 여기서 이유라고 번역된 헬라 원어의 뜻은 변증(apology)이다. 세상 사람들의 온갖 의심과 반대되는 주장에 맞서 기독교 신앙을 정당하게 변호하고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모르는 자는 남들에게 변증할 수도 없다. 자신부터 무엇을 믿는지 왜 믿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남에게 자기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대답해줄 수 있겠는가?

물론 그런 확신 없이도 성경을 배울 수는 있지만 반드시 정말 그분 말씀인지 확신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배워야 한다. 그리고 정확하고도 체계적으로 정리된 기독교 진리를 충분히 숙지한 바탕 위에 자신의 신앙을 확고하게 세워야 한다. 신구약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여 불신자들을 전도할 수 있어야 한다. 최소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완전한 동의까지는 몰라도 여러 오해는 불식시킬 수 있어야 한다.

변증을 하라고 해서 성경 공부를 통해 교리를 습득하는 데 초점을 두어선 안 된다.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자신의 실증적 체험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교리부터 알게 되면 자연히 종교적 지식의 힘을 빌려 남들을 설득시키려 들게 된다. 반면에 성경을 통해 깨달은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체험으로 승화되면 그분을 대신하여 그분의 뜻을 전하는 자가 된다. 불쌍한 한 영혼을 살리려는 애끓는 마음으로 충만해져 듣는 자의 영에 십자가 예수님의 은혜를 전할 수 있다.    

문제는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에 틀림없다고 확신을 갖게 되고 또 남들에게 변증할 수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성경의 성경됨만을 증거 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미 그 내용만으로 하나님 말씀임을 충분히 자증하고 있지 않는가?

어떤 전도자가 공원에서 십자가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자 영원한 절대적 진리라고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자 한 불신자가 나서서 크게 반발했다. “성경은 전부 인간이 지어낸 이야기다.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으며 또 인간이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며 심지어 스스로 죽었다 사흘 만에 다시 살 수 있느냐?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는 그만하라.”는 식으로 떠들었다.  

그 전도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말도 안 될 것 같은 성경을 읽고서 인생이 거룩하게 변화된 자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 몇 백 명이라도 내일 이 시간에 이곳으로 데리고 나올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없기에 구세주 예수가 전혀 필요 없다는 당신의 주장이 옳다면 그 진리대로 살아 거룩하게 변화된 자를 데리고 나와 보시지요? 그럼 어느 쪽이 진리인지 증명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 불신자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베드로는 분명히 변증보다 먼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고 했다. 성경 말씀이 성경 안에 문자 상태로 계속 머물러 있다면 아무리 기독교에서 성경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해 봐야 큰 의미는 없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결정적 증거는 성경을 읽고 사람이 완전히 바뀌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 인류 역사는 둘로 나뉘었다. 마찬가지로 한 개인도 예수를 알기 전과 후는 완전히 다른 두 인생으로 구별되어진다.    

감동이 아니다.

성경을 마음을 열고 진정으로 읽은 자는 다른 여느 책의 경우와는 아주 판이한 반응을 나타낸다. 요컨대 성경은 “감동을 주는” 책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책이라는 것이다. 물론 성경 가운데 감동을 주는 부분도 간혹 있다. 그러나 소설, 시, 영화, 연극 등에서 받는 감동과 성경을 탐구해 받는 감동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이 저작한 문화적 창조물은 거의 대부분이 인간의 이야기다. 그것도 아주 훌륭하고 아름다운 일을 해낸 이야기다. 인간끼리 함께 나누는 수고와 희생과 사랑과 성취가 넘친다. 감동 받은 부분이나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모든 이에게 눈물이든 기쁨이든 때로는 회오와 각성이든 인간 감성에 깊은 자극을 남길 수 있다.  

반면에 성경에는 인간이 행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거의 없다. 거의 전부가 하나님의 일이자 말씀이다. 물론 하나님의 일이 현실적으로는 인간을 통해서 이뤄진다. 그러나 인간의 선한 면이 부각된 내용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구출한 사건 등 몇 가지 예외를 빼고는 거의 없다. 모두가 인간이 넘어지고 실패한 더럽고 추악한 이야기들뿐이다. 성경 전체에 걸쳐 일관된 감동을 받을 요소는 없다.

책에서 받는 감동은 흔히 지정의 세 요소 중 하나에 집중되며 또 그런 의도로 저작된다. 학술서나 정보지 같은 책은 주로 지성에, 시나 소설은 감정에, 처세술 건강지침서 같은 것은 의지다. 윤리지침서나 종교적 경건서적과 경전도 물론 의지다. 그러나 성경은 지식을 전하거나 감동을 주거나 종교적 훈련을 시키는 책이 아니다. 지성, 감정, 의지의 한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다. 그 셋이 다 합쳐진 전인격의 변화를 목표로 하는 책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마다 자기가 닮고 싶어 하는 Role Model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도 특정 분야에 한해서다. 예컨대 타이거우즈는 골프 선수라면 누구나 닮고 싶어 한다. 드라이버, 어프로치, 칩샷, 퍼팅, 게임운영능력, 과감한 승부수 등 기술적인 면을 흉내 내려 훈련한다. 그라는 인간 전부를 닮으려 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우즈에게 느끼는 것도 인간적 감동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성경을 통해 신자가 닮기 원하는 Role Model은 예수님이다. 그러나 그분의 초자연적 능력, 기도, 전도, 설교, 사역 중의 특정한 장점만 닮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라는 한 인격체 전부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예수를 닮아야 하는 내용을 오해하여 실패한 대표적인 한 인물이 있다. 바로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는 슈바이처 박사다. 세상에선 그를 위인으로 존경한다. 모든 부와 명성을 다 버리고 당시의 너무나 열악했던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그런 수고를 한 것은 분명히 예사 사람이 하지 못하는 위대한 희생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막상 그에게 치료를 받은 아프리카인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아주 냉정한 사람이라는 것이 주였다. 그는 정말 예수를 닮으려고 노력했지만 예수가 병든 자를 고치는 일부 모습만 닮으려 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를 최초로 탐험한 리빙스턴 선교사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엄청난 위험과 수고를 감내했다. 그가 죽자 아프리카인들이 자기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준 그가 못내 아쉬워 그의 심장만이라도 아프리카에 묻어 달라고 요청했고 그대로 이뤄졌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인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 주었지만 슈바이처는 단지 현대 의술의 혜택을 준 것뿐이다. 리빙스턴은 각 개인의 전인격을 사랑했지만 슈바이처는 병 든 모습을 불쌍히 여겼을 뿐이다.    

슈바이처 같은 실패는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관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인간은 선하므로 인간의 능력으로 인간 사회를 얼마든지 아름답게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자유주의 신앙의 대표자다. 또 그 같은 오류는 성경을 잘못 오해한 데 기인한다. 성경은 예수라는 위대한 인물에 대한 인간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경을 하나의 계명, 율법, 신조, 교리로 간주하여 스스로 노력하고 훈련하여 지키려고만 한 것이다.

계명과 율법은 일차적으로 선행을 강조한다. 슈바이처는 예수를 단지 타이거우즈 같은 인간적 Role Model로 삼아 그분이 이 땅에서 행하신 사역의 선한 모습만 따르려 했던 것이다. 또 선행을 하려면 당연히 자기 결점과 허물을 뜯어 고치고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는 작업을 병행해야 한다. 그는 자기에게 부족한 부분을 성경을 통해 발견하고 그 부분만 고치려 했던 것이다.  

Reform 이 아니고 Transform 이다.

예수를 믿어 변화되는 것은 Reform이 아니라 Transform 이다. 비유컨대 헌 옷의 낡은 부분을 깁고 새로 빨아서 입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극악무도한 사형수가 마지막 순간에 완전히 뒤집어지는 것과 같다. 곧 죽을 사형수가 지금부터라도 특정 분야를 고치고 훈련해 슈바이처나 타이거우즈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 존재 전부가 새롭게 바뀌는 회개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기에 그 지정의에만 영향을 끼치는 감동만으로 그분에 대한 믿음이 생길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반면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분의 영이 직접 인간의 영에 영향을 미친다. 또 인간의 영에 영향을 미치어야만 지정의를 전부 아우르는 인간존재의 심연이자 그 인격체 전부를 바꿀 수 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뜻을 분별하여 기록하였다.   또 성경이 완성된 이후의 신약 신자에게는 성령을 내주케 하셨다.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경 독자도 반드시 성령의 조명을 통해 읽고 배워 십자가 구원의 지혜를 능히 깨닫게 하려는 목적이다.

다른 말로 성경을 통한 인간의 변화는 오직 성력의 권능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슈바이처가 신학자로 성경에 능통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실패한 이유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예수를 닮으려 힘썼기 때문이다. 스스로 노력한다는 것은 자기는 원래 선하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말하자면 그의 치료 사역에는 하나님의 영이 그 환자의 존재 자체를 바꾸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고, 단지 한 성자 의사가 인간 병자를 고치는 역사만 있었던 것이다.    

성경은 확실히 증언하고 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아담의 원죄로 그 영혼이 완전히 타락했고 대신에 사단이 그 영을 미혹하여 노예로 조종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 영을 새롭게 해서 새사람으로 변모시킬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다.  종교의 의탁해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기의 지정의 능력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뿐이다. 당연히 인간이 저작한 책이나 경전으로는 감동을 주거나 Role Model의 역할까지는 할 수 있어도 인간 존재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나타나 있으며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관한 기록이다. 또 성령으로 기록되었기에 읽는 자도 성령의 깨우침으로 읽으면 성령의 역사가 인간의 영에 일어난다. 지혜의 영인 성령으로 인해 죄와 의와 세상 임금에 대한 전혀 새로운 깨우침을 받음과 동시에 전인적 변화가 수반된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읽고 인간의 영이 변한다는 본질은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뀐 다는 것이다. 자신이나 제 삼자가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외형적 변화는 이 큰 틀의 변화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작은 변화들이다.

창조 시에 하나님과 최초 인간은 완벽하게 화목한 상태였다가 원죄로 인하여 그 관계가 파괴되었다. 그러다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시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서로 원수 되어 막혔던 담을 당신 쪽에서 먼저 일방적으로 허물었다. 그 십자가 앞에 스스로 겸비하여 엎드리며 항복하는 어떤 죄인이라도 당신의 독생자와 함께 기업을 나눌 자녀로 받아 주시기 위해서였다.  

사형수가 감방에서 성경을 읽고 변화되는 모습이 무엇인가? 그의 현실적 형편은 전혀 변함이 없고 조만간 사형 집행을 받아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받아주어 용서 받았다는, 즉 그분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한 가지 확신만은 붙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방황과 죄악 가운데 살았던 지난 삶이 너무나 헛된 것임을 철두철미하게 깨달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영혼에 가득 차서 비록 이 땅에서의 현실적 복락은 더 이상 누릴 수 없어도 세상이 뺏어갈 수 없는 평강과 위로를 찾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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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된 결과

변화된 핵심 본질이 하나님과의 관계라면 그 외의 다른 부분에선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신실하게 동일한 모습으로 자존하신다. 그분에게 변화, 수정, 가감이 있다면 벌써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이 아니다. 신자 또한 믿기 전과 후에 객관적으로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다. 기질, 성품, 취미, 기호, 개성, 지성, 감성, 의지 등이 다 그대로다. 도덕적으로 아주 착해졌거나 종교적으로 신령하고 경건해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 변화는 정말 가히 혁명적이다. 정장 양복 한 벌로 일 년 내내 버터야 했던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단벌 신사복을 너무 오래 입다보니 때가 묻어 반지르르 하고 곳곳에 솔기가 터진다. 그러나 그 이면(裏面)은 멀쩡하다. 그래서 속과 겉을 완전히 뒤바뀌어 새로 재봉해 입곤 했다. 같은 천, 같은 색깔, 같은 모양이지만 겉이 속이 되고 속이 겉이 되어 완전 새 양복으로 변했다. 비유컨대 성경은 인간으로 이런 변화를 일으키게 만든다.

예수를 믿기 이전에는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었다. 존재의 내면에 오직 자아(ego)만 존재했다. 삶의 모든 부분을 스스로 판단 결정 행동했다. 인생은 이 땅에서 시작해서 이 땅에서 마치므로 오직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의 안락과 풍요만을 목표로 살았다. 눈에 보이는 물질계 안에서의 한시적 인생인지라 그저 자신과 자기 가족의 행복만 추구했다. 한 마디로 자기 지정의에만 전적으로 의존했다. 아주 가끔 인간끼리 감동을 받아 선을 행하기도 하지만 절대 완전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없거나 필요 없다고 믿기에 생기는 필연적 결과였다.  

반면에 예수를 믿으면 겉은 변함없되 내면 깊숙한 곳의 영혼은, 즉 자신의 진짜 실체의 겉과 속이 완전히 뒤집어진다. 앞에 열거한 모습과 정반대 상태가 된다. 존재 내면의 주인이었던 자아는 없어지고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다.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판단 결정 행동하거나 하려고 노력한다. 인생이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토록 이어짐으로 천국에 대한 소망을 키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영역이 오히려 더 소중할 뿐 아니라 이 땅의 물질계를 움직이고 있음을 깨닫는다.

따라서 영원에 맞닿은 인생을 살고자 노력하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게 된다. 한 마디로 자기 속에 내주하신 성령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다. 이제는 인간끼리의 감동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변화와 성숙을 더 소원하게 된다. 나아가 그분의 일에 쓰임 받고자 헌신하고 실천하게 된다. 그 영이 하나님과 화목한 이후의 당연한 결과다.  

물론 사람마다 그 변화의 동기, 과정, 수준은 다 다를 수 있다. 성경을 읽고 변화를 받은 말씀도 각양각색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신자에게 하나의 공통된 변화는 예수님이 자신의 주(主)로 받아 들였다는 사실이다. 예수가 바로 하나님 창조주요, 운행주요. 부활주요, 구세주요, 심판주가 된다. 이제는 그분을 닮고 그분의 뜻대로 살며 그분의 일을 하겠다는 소원이 생긴 것이다. 성경을 모르기 전에는 도무지 꿈도 꾸지 못하든 변화다. 예수를 까닭 없이 싫어, 아니 미워하다가 아무 이유 없이 좋아지게, 아니 사랑하게 된 것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 솔제니친이 반체제 운동으로 시베리아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일이다. 감방 동류 중에 나치 수용소에서도 살아남았지만 다시 소련 형무소에 갇히게 된 시린이라는 유대인이 있었다. 그는 나치 수용소에서 우연히 성경을 단편적으로 접하고 십자가 복음을 알게 되었다. 신학공부는커녕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할 기회라고는 아예 없었다. 그런데도 복음의 진리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성령이 성경을 통해 그를 변화시킨 것이다.    
하루는 솔제니친이 만약 수용소에서 석방이 된다면 무엇을 할 것인지 그에게 물었다. 그는 아무 주저함도 없이  성경으로 자기 자녀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금방 다시 잡혀 수용소로 돌아 올 것이라고 솔제니친이 염려했다. 시린은 다시 확신에 차서 자기는 절대 자식들이 거짓된 삶을 사는 것을 두고 볼 수 없기에 단 하루라도 무엇이 영원한 진리인지 반드시 가르치겠다고 대답했다.  

성경을 통해 생기는 변화가 바로 이것이다. 진리에 살고 죽는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시킨 복음을 위해 사나 죽으나 일생을 바치는 그런 변화다. 인간이 지은 책은 지정의에는 감동을 주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 밖에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한 죄인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한다.

그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을 바울 사도는 상기 본문에서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먼저 모든 사람을 육체대로 알지 않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인간의 학식, 교양, 재산, 가문, 건강, 외모, 신분, 계급, 권력 등 외적 조건을 전혀 감안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피조물이었지만 사단의 노예가 되어버린 불쌍한 죄인으로 대우하셨다. 그리고 구원을 주시기 위해 자신이 모든 죄책을 감당하시고 대신 죽으셨다.

따라서 신자는 이전에 자기 지정의에만 의존해 사람을 판단했던 것이 하나님 앞에서 큰 잘못이자 죄임을 철저히 깨닫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절실하게 필요치 않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는 안타까운 처지임을 알게 된다. 자기가 만나는 누구라도 그 영혼에 예수님의 은혜가 전해지기를 간절히 소원하게 된다. 그들로 십자가 복음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회복시키는 일을 자기 인생의 최우선 목표로 삼게 된다.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받은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밖에 있던 한 죄인을 성경에 드러난 예수를 통해 의인으로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에 틀림없다.

지금 단지 성경을 변호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자들 모두 정말로 그 존재와 삶과 인생이 바뀌어져 있어야 한다. 단순히 이전보다 좀 더 선하게 살거나 종교적 실력을 쌓아 더 경건해지려는 목적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슈바이처처럼 성경을 인간의 저작으로 본 것뿐이다. 아직도 자신은 선하고 얼마든지 더 선해질 자신이 있다는 생각이다. 예수님의 일부분을 닮으려는 마음뿐이지, 그분이 나라는 존재의 겉과 속을 완전히 뒤집어지게 해주실 변화에 대한 소원이 없다는 반증이다. 심지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종교적 실력만 가득 쌓아봐야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신자가 자신이 정말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지 점검하는 기준은 위에서 말한 두 가지면 충분하다. 자기 주위의 모든 사람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대하는지, 그래서 그 영혼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미치게 만드는 직책에 충성하고 있는지 여부다. 성경을 배우고 가르치는 자 또한 말씀을 통해 반드시 이 두 가지 변화가 이뤄져야 하며, 이미 변화된 자는 그 변화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더 성숙되어져야 한다.  

9/27/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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