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있는가?
창세기 강해 (72)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14:16-20)
뜬금없는 살렘 왕
창세기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의 시작을 설명해주는 책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물을 우상숭배의 땅에서 불러내어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심어줌으로써 처음으로 당신에 대한 믿음을 형성시켰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멸시 받고 기근이 닥쳐 애굽으로 가서 처참한 실패를 겪지만 원상보다 더 좋게 회복시킴으로 당신에 대한 믿음을 더 견고하게 성장까지 시켰다.
오늘의 본문은 그 견고해진 믿음이 세상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말해주고 있다. 시간관계상 봉독하지 않았지만 본문 사건이 있게 된 배경부터 알아야 한다.
사해 주변의 소돔과 고모라를 포함한 가나안 5개국이 12년 간 조공을 바쳐온 엘람 왕을 거역하려 시도했다. 엘람 왕도 그에 맞서 4개국을 연합하여 그들과 맞서 싸워 이김으로써 그 시도를 무산시켰다. 성경에 기록된 바로 최초의 세계대전이자, 최초의 약소국들의 독립전쟁이었지만 강대국들이 승리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그런 와중에 소돔에 거주했던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가자 아브라함은 집에서 기른 사병 380명으로 야반에 기습하는 작전으로 조카는 물론 소돔 사람과 재물을 모두 탈환했다. 큰 승리를 거두고 귀환하는 도중에 이 전쟁과 전혀 무관한 살렘(예루살렘)왕 멜기세덱이 그를 영접했다.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18절),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주었고(19절),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의 일조를 드렸다.(20절)
문제는 본문 사건이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 같다는 것이다. 멜기세덱은 이 전쟁에 어떤 모습으로도 개입하지 않았다. 가나안 연합이든 엘람 동맹군이든 어느 쪽과도 이해타산 관계가 없다. 단순히 아브라함을 승리케 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를 축복하러 등장했다.
믿음의 시작은 분명 아브라함부터였다. 당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경배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성경은 진술하고 있다. 믿음의 시조가 아브라함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 이전에 여호와에 대한 경배가 시행되고 있었던 것인가? 나아가 아브라함은 어떻게 멜기세덱을 보자마자 십일조를 드릴 수 있었는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본문의 진술이 없다면...
마치 멜기세덱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다. 그렇다. 바로 그대로다. 정말로 그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물이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이 예비해서 바로 지금 이 장소 이 시간에 아브라함을 축복하라고 하나님이 보낸 인물이다.
언뜻 보면 본문이 전체 문맥과 그 주제와 상이한 삽입절 같다. 그러나 창세기 14장이 정작 말하고자 하는 바는 최초의 세계 대전이 아니라 바로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만남이다. 오히려 나머지 구절들이 본문을 보충 설명하고 있다.
간단하게 이렇게 생각해보라. 본문을 빼고 14장을 읽으면 어떤 내용이 되는가? 아브라함은 단순히 의롭고 용감한 삼촌에 그친다. 조카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음을 무릅쓰고 가솔을 동원하여 모든 수고와 희생을 감내하며 구출한 의인이다.
소돔사람을 함께 구출한 것도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소돔 왕이 사람만 돌려주고 재물을 가지라고 제안을 했다. 아브라함이 승리해서 탈환했으므로 그의 노예로 삼아도 된다. 그러나 사람은 물론 재물까지 돌려주었다.
혹시 나중에 소돔 왕 때문에 거부가 되었다는 뒷말을 듣기 싫다는 것이다. 보상을 바라고 행한 일이 아니라 조카를 구출한 것만으로 만족하겠다는 것이다. 대신에 주인인 자기 때문에 엉뚱한 고생을 한 사병들의 몫만 받겠다고 했다. 굉장히 합리적이고 경우까지 발랐다.
물론 아브라함이 전쟁을 치르는 내용을 자세히 살피면 믿음이 없이는 행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긴 하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보면 이 정도는 하나님을 모르는 의로운 사람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모습이다. 지하철에 떨어진 아이를 생판 남인 청년이 구해내고 자기는 죽는 일을 실제 기사로 접하지 않는가?
성경에 본문 사건이 생뚱맞게 전개된 것은 독자더러 아브라함의 믿음의 실상을 정확히 알라는 뜻이다. 바꿔 말해 기독교 신앙은 도덕적인 선행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 불신자는 전혀 행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진리가 믿음의 본질이다. 성경에서 그런 부분을 찾아내어야 한다. 그렇다고 십일조 같은 경건한 종교적 행위가 그 본질이라는 뜻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
지금 성경은 세상 윤리로는 너무나 의로운 약소국가의 최초의 독립항쟁에 관해 어떤 방식으로든 격려나 고무하는 언급이 전혀 없다. 소돔과 고모라는 오히려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다.
오직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이라는 두 인물의 일대일 대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세속의 역사나 신자 주변의 여건을 풍성하게 변화시키는 데에 두지 않는다. 하나님은 신자를 세상에 오직 그 사람만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실제로 아브라함 때는 혼자뿐이었음,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교제 동행해주신다. 그분 쪽에서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고 그 신자에게 꼭 필요한 고유의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신다. 결국 신자 개인의 존재와 인생을 거룩하게 바꾸시려는 뜻이다.
비록 고대 왕들이 제사장을 겸했기에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길지 몰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이는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예루살렘은 아시다시피 아브라함 후 약 천년이 지나서 다윗 왕이 정복할 때까지는 이방인의 도성이었다. 다윗이 언약궤를 옮기고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의 도성이 되었고 시온 성으로 불렸다.
“천지의 주재”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별칭이다. 본문의 때에 벌써 멜기세덱에게 그런 믿음이 있었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의 출신과 신상명세에 대해 성경이 침묵하고 있고 신비하게 출현했다 퇴장했다고 기록한 것에 주목하여 예수님의 표상이라고 해석했다. (본문 외에 멜기세덱의 기록은 없는데 그 구체적 의미는 나중에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오직 아브라함 한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은 멜기세덱을 따로 준비시켜서 그를 만나러 보내어 그를 축복토록 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은혜인지 모른다. 아브라함이 목숨을 바쳐 조카 롯을 구출한 의로운 행위에 대한 단순한 보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시조로 세워 복의 근원으로 삼으려고 세상에서 따로 구별해 내었다. 그에 따라 지금 하나님은 그를 마땅히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른 신분과 위치로 대우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믿음의 후손인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바뀐 신분과 그분께 받게 될 특권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신자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겪는 모든 사건에는 하나님의 너무나 놀랍고도 오묘하고 풍성한 은혜와 권능이 숨겨져 있다. 심지어 도무지 끝이 나지 않고 덧나기만 하는 고난 중에도 그러하다. 신자는 내게 상처주고 손해 입히는 원수 같은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넘치도록 받을 수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원수는 철저하게 응징해야 할 대상이다. 신자는 원수마저 주님 주시는 은혜로 사랑할 수 있다. 나아가 그 원수로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런 놀라운 기쁨과 승리는 세상 사람은 누리기는커녕 알지도 못한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
제 사무실에 에어컨 받침이 떨어져 길 가던 여직원의 머리를 다치게 한 사건을 몇 주 전에 간증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 때에 저는 제 인생이 완전히 끝날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피해본 여직원의 아버지로 너무나 합리적이고 점잖은 분을 만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제 믿음이 아브라함처럼 얼마나 견고해졌는지 모른다.
그 때까지 저는 얼마든지 인생을 성공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세웠던 모든 계획들이 수로로 돌아갔다. 한 순간 내 인생은 쏟아진 물같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원상회복시켜 주셨다. 목사로 절대 과장하는 말이 아니다. 저는 예수를 믿은 것이, 그것도 실은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인 은혜로 이끌어주셨지만, 제 인생에서 최고로 잘한 일이라고 여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너무나 끔찍하고 상상조차 하기 싫다.
저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착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그 평판을 은근히 즐겼고 계속 그 평판이 유지되도록 힘을 썼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내 자신을 솔직히 바라볼 때는 세상의 평가와 크게 다른 두 가지 측면이 내 안에 존재했다.
첫째는 비겁하고 소심해서 제 멋대로 행동하며 일탈을 하고 싶어도 겁이 나서 못한 것이다. 둘째는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는 갈 수 없다는, 요즘 말로 컬리티 떨어지는 사람과 내처럼 하이 컬리티 사람이 어울릴 수 없다는 엄청난 교만이 있었다. 이 상반되는 두 측면이 서로 혼재해 있었다.
그러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인지 배워서 알게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 앞에 저라는 존재 전부가 있는 그대로 서게 되었다. 단순히 성경 지식이나 기독교 교리로 그분을 알게 된 것이 아니다. 성령이 역사하여 십자가의 구원 은혜로 내 심령이 완전히 발가벗겨지는 체험을 했다.
예수님 그분이 정말 저를 먼저 알고 찾아와서 따뜻한 사랑의 기운으로 품어 용서해주셨음을 확신할 수 있는 그분과의 일대일의 인격적인 만남이었다. 그 때 비로소 내 속의 추하고 더러운 실상을, 그 동안에는 어렴풋이 알고만 있었지만, 눈물 흘리며 입술로 그분 앞에선 고백 회개할 수 있었다. 그 때까지 “내가 내인데”라는 말도 안 되는 고집과 위선적 의로움이 내 속에서 솟아나는 썩어 진동하는 냄새를 틀어막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세상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었던 저 같이 교만한 죄인을 예수님은 단 번에 뒤집어서 새로운 사람으로 바꿔주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역 배반하고 몰랐던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게 되었다. 그 결과 감히 단언하건대 예수 안에 있는 것만이 인간이 정말로 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 후 하나님은 결국 저를 이런 모습으로 강단에서 설교하게 하는 도무지 감당 못할 영광스런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물론 목사가 된 후에도 여전히 본성이 연약하고 수시로 죄의 유혹을 받아 넘어진다. 계속해서 현실의 삶도 결코 녹녹하지 않다. 그럼에도 본문의 아브라함처럼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을 상관하지 않고 따로 떨어져서 하나님과만 일대일로 교제 동행하는 것이 생의 최고의 기쁨과 소망이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풍요롭고 형통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고난이 깊어질수록 그분의 은혜도 깊어졌다. 내가 힘이 빠지고 실망할수록 그분의 권능은 거꾸로 더 많이 작동하였다. 그래서 이제는 매일의 삶에서 인생을 정말로 멋지게 살아갈 소망과 힘은 더 늘어났다. 바로 그런 연장선상에서 이곳에서 여러분을 만났고 또 앞으로 이 적은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이 또 어떤 새롭고 오묘한 은혜를 베풀어주실지 기대가 되며 설렌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친 이유
그런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이 어떻게 곧바로 십일조를 바칠 수 있었을까? 사실 이는 어리석은 질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견고하게 성장시켜주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당신이 세운 종에게 알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아예 말도 안 된다. 하나님이 멜기세덱을 준비시켰다가 그곳에 그 시간에 등장시켰다면 당연히 그 현장에는 성령이 충만히 역사하여 아브라함으로 멜기세덱이 누구인지 알게 해주시지 않겠는가?
아브라함에게 처음 믿음을 형성시킬 때에 하나님은 축복의 약속도 함께 주었다. 그 중에 하나가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는 것이 있었다. 아브라함을 힘들게 했던 애굽의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림으로써 저주에 대한 약속은 일차 증험이 되었다. 멜기세덱은 지금 아브라함을 축복했다. 하나님이 멜기세덱을 직접 축복하는 모습은 없으나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간접적으로 그 축복의 약속도 성취된 셈이다.
더 중요하게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의 기도를 듣는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겠는가? 당시는 아무도 하나님을 모를 때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축복해주었다. 하나님과의 언약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약속으로 다른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멜기세덱이 바로 그 언약과 동일한 말씀으로 축복하지 않는가?
어쩌면 단어, 문장구조, 음성 톤까지 자기가 하나님께 처음 들었을 때와 동일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으로선 멜기세덱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아니고는 나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그는 완전히 두 손 두 발 다 들고 겸손하게 항복할 수밖에 없고 감사와 찬양이 절로 나왔을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떠나지 않았으며 종과 횡을 행하는 모든 땅을 내게 주신다는 약속이 바로 이런 모습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재확인했을 것이다. 하나님 당신이 하신 약속은 당신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당신께서 이루심을 확신하고 스스로 순종 헌신할 것을 다시 다짐했을 것이다.
십일조는 원칙적으로 하나님과 그분을 대신하는 제사장에게 바치는 것이다. 이 전쟁에 눈곱만큼도 관여하지 않았던 제삼의 완전히 엉뚱한 인물 멜기세덱에게 바쳤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서 하나님의 빛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 것이다.
아브라함은 사실 롯을 구출할 생각밖에 없었다. 이런 대면은 꿈도 꾸지 않았다. 롯을 구출할 가능성도 희박했다. 기록에는 없어도 그는 간절히 기도하며 전쟁을 수행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상 밖의 큰 승리를 거두었고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축복까지 받았다. 하나님이 그를 복의 근원으로 세워서 그 이름을 창대케 한 것이다.
아브라함 본인이 현실적으로 풍요해진 것이 아니다. 지금 육신적으로는 피곤하고 지쳐있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대면은 타락이 절정에 이르러 심판직전에 있는 소돔 왕과 그 사람들과 조카 롯 앞에서 이뤄졌다. 말하자면 멜기세덱과 함께 하나님께 경건하게 제사 드린 셈이다. 그러니 양심에 찔림을 받은 소돔 왕이 재물을 가지라는 제안까지 한 것이다.
지금 상황에선 전쟁을 치른 아홉 왕들보다 아브라함이 더 높아졌다. 고대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의 신이 더 힘세다고 인정해주었다. 당시로는 아브라함 한 개인이 세계 최강이 되었다. 이방의 왕들이 당장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어도 분명히 상천하지에 여호와 하나님이 최고의 신, 아니 진짜 주권자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브라함 본인도 자신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며 주신 하나님의 소명이 이런 일로 이루어짐을 깨달았을 것이다.
성령의 사람들
본문의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이 역사로 진행되었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은 생전 처음 만나는 사이임에도 서로가 서로를 바로 알아보았다. 두 사람 모두 세상에서 불려나와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세계 대전이나 최초의 독립항쟁이나 하나님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그런 세상의 큰일에도 거룩하게 구별한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사람 단 한명으로도 반드시 당신께서 뜻하신 대로 이끄신다.
지금 아브라함이 믿음의 영웅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후손인 저와 여러분이 갈수록 더럽고 추해지는 이 세태를, 불신자들마저 세상 돌아가는 꼴이 말이 아니라 인류 멸망이 다가오는가 보다 노심초사하고 있는 이 땅을 거룩하게 바꿀 사람으로 부름 받아 세워졌다.
우리가 인식하든 못하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우리를 통해 그분만의 방식과 시기에 당신께서 이루고 계신다. 단 아브라함처럼 스스로 여호와의 종이자 최초의 해외선교사로 부름 받았다는 확고한 인식이 있는 자, 최소한 가는 곳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단을 쌓는 자를 통해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요 은혜요 권능임을 정확히 깨달아야 한다. 신자가 밟는 모든 땅을 그분이 주신다. 그 보증으로 성령이 내주하여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 단순히 세상에서 받은 상처 억울함 손해 핍박 고난에 대해 주일 하루만 잠시 진통제 맞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결코 아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 털어 봐도 하나님은 한두 사람의 당신의 남은 자를 통해 이 땅을 다스리신다. 우리 모두 그런 위치와 신분으로 부름 받았다. 본문의 최초의 세계 대전의 주인공이자 승리자는 아브라함 한 명 뿐이었다. 아브라함은 이미 그 때에 예수님의 거룩한 빛을 소돔 왕 앞에 비추었지 않는가?
신자가 된 것은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세상사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제가 예수를 믿은 것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말한 이유도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 없는 사랑을 받았고 세상이 모르는 진리를 깨달았다. 인간이 정말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특별히 고난과 죽음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야하는지 알게 되었다.
목사가 되었어도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데는 막상 더디고 쓰러질 때가 많다. 그럼에도 제 나름 확고하게 붙들고 있는 진리는 있다. 세상 사람은 내 육신은 해칠지 몰라도 내 영혼만은, 예수님의 사랑의 품안에서 그분과 날마다 친밀하게 교제 동행하고 있기에, 결코 한 치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불신자 시절의 인생에 대한 원인모를 갈급함과 허망함도 사라졌다. 제 인생에 대한 구체적 소명과 목표를 정확히 세웠다.
신자는 성령의 사람이다. 종횡으로 행하는 땅을 다 주려고 성령이 내주하여 역사하고 있다. 세상을 거룩하게 뒤집어엎을 수 있고 세상 앞에 얼마든지 당당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그런데 세상을 뒤집을 신분과 권능을 소지했는데도 왜 거꾸로 세상 앞에 주눅이 들어있는가?
10/16/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