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4:1-6) 교회 안에 너무 많은 아무개 신자들

룻기 강해 (1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룻4:1-6)

 

나오미는 빈털터리였는가?

 

보아스는 룻의 구애를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일차 고엘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그 고엘에게 기업을 무를 의사가 없으면 자신이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본문은 그 약속대로 날이 새자 보아스가 곧바로 베들레헴 성문으로 올라가서 일차 고엘을 만나서 열 명의 장로들을 증인으로 세우고 담판을 짓는 내용입니다.

 

그 고엘은 처음에는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겠다고 승낙했다가 보아스에게서 엘리멜렉의 이름으로 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즉, 룻과의 계대결혼의무에 대한 설명을 듣자 그 의사를 번복했습니다. 그 고엘에게 이 두 제도가 각기 어떤 영향을 끼쳤기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긴 신성한 임무를 외면했는지 궁금해집니다. 오늘날 우리도 종종 하나님을 따르려고 결심했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 구체적으로 잘 따져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반영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잘못이 무엇인지 따져보기 전에 본문의 성경해석상의 난제 하나부터 해결해야합니다. 지금까지의 강해를 통해 나오미는 빈털터리 과부가 되어서 끼니를 걱정할 처지가 되었다고 설명 드렸습니다. 그런데 본문 3절 후반부는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라고 말합니다. 그럼 완전한 거지가 아니고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원문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고 실제로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팔려 하므로”의 원문시제가 완료형이라 영어 KJV 역본을 비롯해 일부 역본들이 ‘팔았다(sol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소유권이 나오미에게서 이미 다른 이로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한글 개역성경은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관할하므로”라고 번역했습니다. 원래 엘리멜렉의 기업이므로 나오미에게 무를 권리가 있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완료형은 미래에 완료될 것이 확실한 약속이나 결단 등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개정개역 같은 최근의 번역본들은 나오미가 이제 팔기로 결정했다는 뜻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두 번역 중에 저는 전체 문맥을 따져서 이전에 팔았다는 쪽이 더 타당하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우선 나오미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에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룻1:21)고 고향사람들에게 고백했습니다. 실제로 마침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와선 곧바로 룻이 이삭을 주우러 나가야만 했습니다. 당장의 끼니부터 해결해야만 하는 처지임을 뜻합니다.

 

만약 엘리멜렉의 소유지가 고향 땅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예수님의 비유에도 등장하는 부재지주(不在地主)이므로 누군가에게 관리를 맡기고 품꾼들을 두었을 것입니다. 그럼 구태여 룻이 이삭을 주우러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지난 십년 동안에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서 황무지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나오미가 엘리멜렉의 이름으로 기업을 갖고 있었다면 고엘로선 구태여 그것을 돈을 주고 따로 살 필요 없이 나오미나 룻과 계대결혼만 하면 됩니다. 반면에 본문은 고엘이 돈을 주고 사야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이미 다른 사람 소유로 넘어간 것을 다시 산다는 의미로 우리말은 ‘무르다’로 영어로는 buy back, 혹은 redeem으로 번역했습니다.

 

나오미는 땅을 소유했는가?

 

물론 나오미가 소유하고 있지만 과부 둘이서 그 땅을 도저히 관리할 수 없는데다 당장의 생활비를 조달하기 위해서 팔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때는 고엘이 그것을 살 수 있는 우선권을 가집니다. 그런데 고엘이 있는 줄 몰랐거나 값이 맞지 않으면 더 좋은 가격을 주는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에는 다른 가문에게 넘어갔어도 반드시 무상으로 원래 주인이 돌려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5절)라고 보아스가 그 땅의 판매자를 나오미와 룻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나오미의 손에서 사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기업은 반드시 아들자식이 유산으로 물려받습니다. 아들자식이 없을 때에 일시적으로 딸에게도 상속하는 예외적인 규정은 생겼지만 여전히 자기 가문의 남자와만 결혼하도록 해서 그 이름으로 기업이 이어지도록 했습니다.(민36장)

 

법적으로 따지면 죽은 엘리멜렉의 기업은 두 아들 말론과 기욘에게 상속되는데 두 아들마저 죽었기에 자연히 그들의 아내에게 넘어갑니다. 그런데 기욘의 아내 오르바는 모압 땅에 남았기에 말론의 아내 룻에게 넘어갑니다. 고향 땅에 엘리멜렉의 땅이 있었다면 나오미가 아니라 사실상 룻의 소유가 됩니다. 땅이 이미 다른 가문에 넘어갔다 해도 그것을 물려서 가문을 이어갈 권리와 책임도 룻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룻에게서 사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희년이 되면 무상으로 기업을 돌려받게 되니까 누가 기업을 이을 권리를 갖고 있느냐는 것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율법도 그래서 땅을 사고 팔 때는 반드시 희년까지 남은 햇수에 따라 시가를 정하라고 명했습니다.(레25장) 남은 햇수와 그 땅에서 매년 평균적으로 수확할 곡식이나 과일의 양을 곱하면 그 땅의 가격이 됩니다. 예컨대 희년까지 3년 밖에 안 남았으면 3년 추수분만 돈으로 쳐주면 되므로 30년 남았을 때의 가격의 1/10이면 됩니다. 기업을 무를 근족의 부담을 덜어주고 땅 투기를 막는 일석이조의 규정입니다.

 

어쨌든 엘리멜렉이 이미 판 것을 물리는 것이든 나오미가 당장 생활비를 감당하려고 지금 가지고 있는 땅을 팔려고 했든 나오미와 룻이 매우 궁핍해진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설명 드린 대로 전체 의미의 흐름상 이미 다른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보아스가 이 문제를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았고 성경도 보완해서 설명하지 않은 것은 당시의 베들레헴 사람들은 나오미의 형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업을 무르기 싫었던 이유

 

이 고엘은 보아스로부터 친척 엘리멜렉의 기업을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아주 솔깃했습니다. 아마도 희년까지 남은 햇수로 계산해보니 땅 값이 얼마 되지 않으니까 잘 경작하면 투자한 액수보다 더 많은 이득을 보겠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마침 크게 풍년이 들었던 차라 더 구미가 당겼을 것입니다. 나중에 희년에 돌려주어도 그 동안에 충분히 남는 장사를 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다 보아스가 룻과 계대 결혼해야 한다니까 포기해버렸습니다. 단순히 모압의 이방 여자라서 싫은 것이 아니고 또는 자기에게 이미 아내가 있었기에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돈을 주고 산 땅을 반드시 룻의 아들에게 물려주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재산을 남의 집을 세우는데 투자해야 하고 원치 않는 결혼을 해서 그 자식들까지 책임져야 합니다. 구태여 남을 위해 아까운 돈을 투자할 필요가 없으며 현재 가진 기업으로 만족하겠다는 뜻입니다.

 

사사 시대인지라 희년제도가 얼마나 온전하게 시행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만약 제대로 시행되고 있었다면 이 고엘은 희년까지라도 경제적 이득만 보겠다고 계산한 것입니다. 만약 유야무야되었다면 희년에 돌려줄 필요가 없이 자기 기업을 대대로 크게 늘리겠다는 욕심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경제적 이득을 기대하고 기업을 무르려고 승낙했으나 곧바로 경제적 손해가 생길 것이 빤하므로 번복한 것입니다. 그는 한마디로 돈만 주인으로 모시고 이 땅에서의 형통과 안락만을 구하는 자였습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적 유익에 따라서만 행동했습니다. 경제적 이해타산을 따져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매사를 분별 판단 수행하는 자였습니다.

 

보아스는 율법의 희년과 고엘과 계대결혼 제도를 정확히 알고 있고 엄격히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말한 반면에 그는 세 가지 제도를 다 위반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임에도 하나님을 외면 부인하고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행했던 전형적인 사사시대의 사람입니다.

 

이 세 제도는 땅의 소유권이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속한다는 진리에 근거한 것입니다. 창조 당시에 인간에게 주신 첫째 소명대로 이스라엘은 청기기로서 하나님 대신에 아름답고도 풍성하게 가꿀 책임만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각 지파별로 인구 숫자에 따라 공평하게 배분했던 것입니다.

 

희년제도는 그래서 어느 누구도 나면서부터 금 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게 하고 또 당신의 백성들로 빈부 격차가 크지 않고 평균적으로 다 잘 살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매 50년마다 원 주인이 다시 차지할 수 있으니 기업을 잘못 관리해 가난해진 가문도 2대 만에 다시 출발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고엘은 형제끼리 가난한 친척을 외면하지 말고 반드시 돌봐주라는 뜻입니다. 계대결혼은 그 고엘 제도의 부수방안으로 재산과 자식이 없이 남편이 죽은 과부로 인해 기업의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고 과부의 여생도 보존해주는 것입니다.

 

이 고엘은 기업을 제일 먼저 매수할 수 있는 고엘 제도상의 특혜를 받는데도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의무를 외면해버렸습니다. 계대결혼 때문에 희년 제도로 인해 싼 값에 인수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다 어긋났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규정된 모든 권리와 의무를 포기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권리는 차지하려 했으나 의무는 책임지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반드시 주목해야할 사항은 그 세 제도를 처음부터 몽땅 위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율법을 완전히 모르는 이방족속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제도들을 자기 편의에 따라 지키기로 했다가 다시 지키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을 자기 멋대로 갖고 논 셈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아무개라고만 칭하고 있습니다.(1절) 당시에 보아스가 그를 그렇게 불렀을 리는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름이 갖는 의미는 아주 중요하지 않습니까? 성경의 참 저자인 성령 하나님은 아예 그를 세상에 없는 자 취급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가룟 유다더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한 사람이라고 한탄한 것과 같습니다.(마26:24)

 

거룩한 번제를 악용한 사울

 

그런데 본문의 이 비겁한 고엘의 이야기가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성경에 또 다른 비슷한 케이스가 나오지 않습니까?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레 후에 길갈로 올 테니까 자기가 도착하면 여호와께 함께 제사를 드리자고 명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7일 째에 사무엘이 도착하지 않고 백성이 흩어지자 스스로 제물을 바치며 번제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번제를 마치자마자 즉 약속한 기일 대로 사무엘이 도착했습니다.(삼상13:8-10)

 

사무엘이 사울에게 왜 멋대로 혼자서 제사를 지냈느냐고 문책하자 그는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삼상13:11,12)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이 번제를 드리자고 했을 때는 반드시 하나님께 계시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명령이나 권면이 최소한 위로의 말씀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무엘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7일을 기다리라고 한 것은 7이 완전한 숫자이듯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이 스스로 회개하며 하나님만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경건의 시간을 온전히 가지라는 뜻이었습니다.

 

사무엘도 그동안 따로 이스라엘의 영적부흥과 전쟁승리를 위해 회개와 기도의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확히 해가 지기 전 7일이 다 차는 시간에 도착했습니다. 만약 사무엘이 그날 도착하지 않았다면 사울 혼자 번제를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사무엘은 물론 하나님도 문제 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마지막 한두 시간을 못 기다렸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그는 번제를 지내기만 하면 하나님이 이 전투의 승리를 보장해주리라고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럼 사십 인의 도적들이 보물을 숨겨 놓은 동굴 문이 알리바바가 “열려라 참깨”라는 주문만 외워도 열리는 것과 같은 셈입니다. 알리바바는 보물의 주인도 아니며 동굴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 주문이 모든 일을 다 행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울의 생각대로 하자면 번제라는 형식이 전쟁을 이길 능력을 주며 사울과 하나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나아가 사울은 전쟁에 참여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받을 능력과 위로를 중간에 차단해버렸습니다.

 

사울의 변명을 보면 계속해서 ‘내’라는 주어만 사용하면서 하나에서 열까지 자기 안위만 문제 삼았습니다. 백성들이 지쳐서 슬슬 돌아가자 왕으로서 위신과 인기를 잃을까 걱정했습니다. 제사를 안 드렸다간 전쟁에 패하고 자칫 자기 목숨도 잃는 것은 아닌지 염려했습니다. 어서 빨리 제사를 드림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려는 뜻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면서도 그분의 신성한 제도를 자기 편리에 따라 이용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정한 제도가 그분의 뜻대로 지켜지지 않으면 그분의 능력은 전혀 발휘되지 않으며 오히려 처참한 실패만 기다립니다. 하나님도 이 때 이미 사울의 왕위를 다윗에게 옮겨버렸습니다. 사울로선 어떻게든 백성들에게 잘 보여서 자기 왕위를 지키려고 스스로 번제를 지냈으나 거꾸로 그 일로 왕위를 빼앗겼습니다. 지금 고엘이 자기 이해타산만으로 하나님의 율법의 형식만 편리하게 이용하려다 오히려 하나님의 관점에선 이름 없는 아무개로 인생을 마친 것과 같습니다.

 

이해타산이 없어진 신자

 

지금 단순히 이 고엘과 사울의 잘못을 탓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솔직히 우리의 신앙 양상이 그들과 아주 비슷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다 배워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어떤 것은 따르고 어떤 것은 따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따르고 있는 진리도 자기 생각과 고집에 따라 수시로 편리하게 해석 적용하려 듭니다.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을 자신의 이해타산에만 맞추어서 판단 결정 시행하는 것은 불신자들의 생활방식입니다. 그들이 믿을 것이라곤 자신의 지식, 경험, 능력, 자원뿐이므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겐 주변의 부자나 권력자들의 줄을 잘 타는 것도 실력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주인으로 행동합니다. 그 영원한 결말도 당연히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자가 이 고엘과 사울처럼 종교적 관습과 의식을 자신의 이해타산에만 맞춰선 설령 경건한 모습으로 지켜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행했으니 그분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것입니다. 종교행위를 했다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한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면 아무 능력도 은혜도 받지 못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믿음이란 사울과 정반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사무엘 선지자를 온전히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비록 현실 상황이 어려워져도 끝까지 하나님만을 소망해야 합니다. 현실 상황보다 더 크시고 그 배후에서 그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확신한다면 아무리 당장에 고달파도 그분의 구원과 영광을 소망하며 끝까지 견딜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해 범사에 자신의 이해타산에 좌우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자신의 유익과 형통은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 놓았으니까 그분이 형통케 하든 궁핍케 하던 그분의 소관사항이 됩니다. 궁핍케 되어도 반드시 그분만의 뜻이 있고 또 현실적 궁핍과는 비교도 안 되는 영적인 축복을 풍요롭게 부어 주십니다. 신자는 그래서 모든 일을 분별 선택 판단 결정 시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첫 순위로 놓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 자입니다.

 

나오미의 기업을 물리고 룻과 결혼하는 일은 율법의 희년, 고엘, 계대결혼 세 제도의 규정은 물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입니다. 보아스도 기업 무르기를 거절한 아무개와 현실적으로는 똑같은 손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절대로 손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율법에 구현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온전히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성경적으로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오미와 룻에게 보여준 인애가 예수님이 바로 죄 많은 우리에게 보여준 것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로선 룻에게 구태여 처음부터 근족이라고 밝히지 않아도 되었고, 단순히 율법에 규정된 정도로 도와주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고엘의 권리를 포기한 사람처럼 자기도 포기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나오미와 룻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실제로 자기 밭에 이삭을 주우러 올 정도로 어려운 것을 알고는 자기가 행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도와준 것입니다. 율법의 규정을 넘어서 도와주고 있습니다. 절대로 율법 규정을 자기 편리에 따라 이용해먹지 않았습니다. 룻으로선 굶어죽지만 않으면 좋겠다고 여겼는데 보아스로부터 상상도 못했던 과분한 사랑을 자기 공로 하나 없이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준 모습입니다.

 

룻기의 세 주인공 나오미 룻 보아스 모두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섬기는 이타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단순히 도덕적 의무감이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분의 율법을 순종하니까 자연히 이웃 사랑의 모습을 띠게 된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 자체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 실현하는 방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범사에 첫 순위에 두는 자는 그 다음 차례에는 당연히 이웃이 놓이게 됩니다.

 

아무개와 동일한 신자들

 

본문 기사를 우리는 정말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흔히들 지금은 내 코가 석자인지라 현실 형편이 좋아지면 열심히 교회봉사도 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선교에도 헌신하겠다고 합니다. 물론 오늘날의 이 각박한 현실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고 하나님도 이해해줄 것입니다. 실제로 자식들을 출가시킨 후에 선교사로 떠나거나 어려운 이들을 섬기는 신자들이 있는데 하나님이 아주 기뻐하십니다.

 

그럼에도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주변에 자기보다 더 힘든 사람들의 고통을 자칫 외면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너무 피폐해진 사람을 십자가 복음으로 살릴 수 있는데도 제대로 전하지 못해 패망케 만드는 경우가 알게 모르게 있을 것입니다. 그 전에 자기부터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순종이란, 아니 믿음이란 지금 현재 자신이 어떤 위치와 상황에 있든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높이는 것입니다. 시공간은 물론이고 사건과 여건에 따라 뒤로 미루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순종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엄격히 말해서 믿음에 큰 하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지금은 현실이 어려우니 어쩔 수 없이 세속과 타협하며 적당히 살다가 나중에 형편이 나아지면 거룩하게 살겠다는 신자들도 꽤 많다는 것입니다. 그럼 신앙의 첫째 목적이 주님을 따라가는 거룩한 삶이 아니라 현실 문제 해결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돈을 주인으로 삼는 것이므로 아무리 교회에 성실히 출석해도 신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돈 둘 을 동시에 주인으로 삼는 것도 아닙니다. 돈이 주인이고 하나님은 그 주인을 보필하는 종에 불과합니다.

 

물론 작금의 현실이 너무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되어져 가는 상황들이 나를 침몰시키려 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는데 계속 침묵 외면하는 것 같고 더 심한 고난이 겹칩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금식기도 작정기도 새벽제단 쌓기 등등 모두에 열렬히 참석해보아도 별로 진척이 없습니다. 그런 종교적 형식이 권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의 선하신 처분만을 진심으로 겸손하게 소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그분의 뜻이라면 자기 생명까지 내려놓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까? 그러나 그의 믿음의 결국은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백세에 자기 몸에서 낳은 외아들 이삭까지 하나님을 위해서 포기하는 자리였습니다. 그것도 스스로 자기 손으로 죽여야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들을 모리아 산에 제물로 바치러 갈 때에 그의 심정은 지금 우리가 겪는 현실적 고난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쓰라리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하나님만 바랐더니 이미 그분께서 이삭과 자신을 대속할 어린 양 제물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보다 더 안타까운 심정으로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달린 골고다 언덕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던 모리아 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꾸어 살려주었습니다. 그 후로도 십자가와 똑같은 인애로 신자의 삶을 평생토록 붙들어주십니다.

 

그런데 주님 뜻대로 따르는 삶이 조금 힘들다고, 아직은 목숨이 걸린 일도 아닌데 주님은 당신 목숨까지 주셨는데도, 어찌 자꾸만 뒤로 미룰 수 있다는 말입니까? 교회가 가르치는 종교의식만 신령하게 잘 따른다고 믿음이 좋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해도 실제로 주님 말씀대로 살고 있어야 하고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의 냄새를 피어야 합니다. 지금 보아스가 룻에게 예수님과 같은 역할을 맡아주듯이 말입니다.

 

이 세대가 종말처럼 되어가는 유일한 이유는 인간 사회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실현되지 않아서입니다. 초대교회의 소수의 신자들이 순교하기까지 주님께 순종하고 거룩하게 살아갈 때에 타락의 도성 로마 제국이 조금씩 무너져 내렸습니다. 현 사태의 궁극적이고 유일한 해결책도 신자가 그들처럼 작은 예수가 되는 길뿐입니다. 저를 비롯해 우리 모두 정말로 솔직히 자신의 삶을 되돌아봅시다. 보아스와 같은 모습인지 아니면 지금 이름도 없는 아무개의 모습인지 말입니다. 신자에겐 이 두 부류 밖에 없습니다.

 

(10/3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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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3:6-13)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3:6-13)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기 강해 (9)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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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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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3:1-5)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가부장적인 하나님 [1]

(룻3:1-5)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가부장적인 하나님. 룻기 강해 (8)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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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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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2:17-23) 하나님께 기적 같은 은혜를 받는 비결 [4]

(룻2:17-23) 하나님께 기적 같은 은혜를 받는 비결 룻기 강해 (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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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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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2:8-16) 어떤 신자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가? [1]

(룻2:8-16) 어떤 신자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가? 룻기 강해 (6)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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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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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2:1-7) 평생토록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 [2]

(룻2:1-7) 평생토록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 룻기 강해 (5)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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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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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1:19-22) 나오미도 예수를 믿어 구원 얻었다.

(룻1:19-22) 나오미도 예수를 믿어 구원 얻었다. 룻기 강해 (4)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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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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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1:15-18)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인생의 최종목표

(룻1:15-18)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인생의 최종목표 룻기 강해 (3)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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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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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1:6-14)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가장 확실한 증거

(룻1:6-14)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가장 확실한 증거 룻기 강해 (2)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에서 나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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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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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1:1-5) 최고의 절망에서 최고의 영광으로

(룻1:1-5) 최고의 절망에서 최고의 영광으로 룻기 강해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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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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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66-71) 오병이어의 이만 배 축복이 이천 배로 축소되었다. [1]

(요6:66-71) 오병이어의 이만 배 축복이 이천 배로 축소되었다. 오병이어 기적시리즈 (15-완)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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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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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66-71) 너희 모두가 마귀니라. [1]

(요6:66-71) 너희 모두가 마귀니라. 오병이어 기적시리즈 (14)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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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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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60-65) 예정론이 오해 받는 진짜 이유는?

(요6:60-65) 예정론이 오해 받는 진짜 이유는? 오병이어 기적 시리즈 (13)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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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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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51-59) 완전한 의인으로 구원받았다. [1]

(요6:51-59) 완전한 의인으로 구원받았다. 오병이어 기적 시리즈 (12)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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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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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41-50)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간단한 방안

(요6:41-50)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간단한 방안 오병이어 기적 시리즈 (1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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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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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34-40)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예수님이 제정하셨다.

(요6:34-40)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예수님이 제정하셨다. 오병이어 기적 (10)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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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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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30-33)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할 수 없다.

(요6:30-33) 하나님은 인간을 저주할 수 없다. 오병이어 기적 (9)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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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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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28,29) 구원을 얻는 믿음이 있는가?

(요6:28,29) 구원을 얻는 믿음이 있는가? 오병이어 기적 (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6:28,29) 예수님이 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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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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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22-27) 물질이 썩는 진짜 이유 [2]

(요6;22-27) 물질이 썩는 진짜 이유? 오병이어의 기적 (7)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그러나 디베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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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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