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12:7-10) 고난을 기뻐해야 공의가 실현된다.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15/완)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7-10)

 

너무 괴로운 환난. 

 

인간 세상에는 항상 불법과 불의가 가득 차서 의인이 악인에게 억울한 고통을 받으며 그들을 핍박한 악인은 거꾸로 형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악인에게 때에 맞춰서 마땅한 형벌을 가하지 않기에 당신의 공의가 굽어진 듯한 문제를 14번에 걸쳐 살펴봤습니다. 그 결론은 억울했던 의인에겐 천국 구원이, 포악했던 악인에겐 지옥 심판이 기다리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절대 굽지 않고 공평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고 말했습니다. 신자가 이 땅에서 아무리 억울하게 핍박받아도 영광스러운 부활이 보장되어 있기에 전혀 불쌍하지 않고, 오히려 영원한 형벌을 받을 악인을 더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이런 진리를 잘 알고 있으나 막상 북한의 김씨 왕조나 극렬 테러분자들이 죄 없고 연약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뉴스를 접하면 자기도 모르게 극렬한 분노와 증오가 치밀어 오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계명도 피부에 제대로 닿지 않습니다. 내 코부터 석 자라서 매일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같은 층의 이웃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주제를 한 번 더 살펴보려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천국 가기까지 이 땅에서 겪게 되는 환난이 너무 힘들고 아프다는 것입니다. 매일 기도하고 말씀을 읽는데도 세상의 불법은 둘째 치고 자신의 궁핍한 상황을 참아내는 일조차 힘에 많이 부대낍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자기 삶과 인생에는 여전히 불완전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와는 정반대로 환난 중에 크게 기뻐함으로써 오히려 더 강해졌다고 고백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도라도 우리와 성정이 똑같고 죄의 본성을 지녀 연약한 인간이므로, 그가 말한 정확한 뜻을 알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우리의 이 마지막 숙제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환난

 

먼저 주목할 사항은 바울이 모든 고난에 항상 기뻐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죄송하지만, 바보와 정신이상자 둘뿐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10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는 일을 하다가, 최소한 신자답게 거룩하게 살다가 겪는 고난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의롭게 사느라 경제적으로 가난해졌으며 자신을 낮추었기에 약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문화와 종교와 충돌되는 가르침인지라 사람들로부터 능욕과 핍박을 받아 아주 힘들었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일상이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괴로움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서 천국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증거이므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겪는 고난들, 그것도 하나님 앞에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 중에 솔직히 과연 이런 괴로움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엄밀하게 따지면 중병을 얻은 까닭은 평소의 생활 습관이 무질서했기 때문이며, 궁핍해진 이유도 자존심을 세우려거나 게을러서 열심히 일하지 않은 탓이 큽니다. 자기 위신과 고집만 세우려다 주위 사람으로부터 타당한 질책을 받고선 억울하게 핍박받았다고 눈물 흘립니다. 말하자면 대부분이 본인의 잘못으로 어질러놓은 삶의 쓰레기들인데 하나님더러 뒤따라오면서 청소해 달라는 꼴입니다. 

 

세상 악인들도 무조건 미워할 것이 아니라 과연 자기가 그런 위치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지 진지하게 점검해 봐야 합니다. 큰 권력과 재물을 자기 손에 쥐게 되면 자기가 가난한 자를 이해타산 가리지 않는 온전한 사랑으로 섬길 수 있으리라고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간혹 사회의 구조적인 잘못과 모순으로 인해 순진한 의인이 아무 이유 없이 고난을 겪는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엄격히 말해 인생사에서 본인에게 책임이 제로이고 100% 외부 탓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예컨대 미국에 이민 온 교포들이 삶이 너무 고달파서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허락하느냐고 원망하며 기도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게 되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겪는 고난이라 미리 각오했어야 했고 또 스스로 이겨내야 합니다. 고아나 결손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경우는 아주 많습니다. 물론 전쟁이나 테러로 정말로 억울하게 죽는 경우가 있지만 궁극적인 구원과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가 완성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오지에서 선교하시는 분들이 그 열악하고 궁핍한 상황과 온갖 모멸과 박해를 받는 자기 처지에 대해 절대로 억울하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달프긴 해도 단순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니까 기뻐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기는 환난으로 여전히 고달프긴 해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이 더 잘 진전되었기에 기뻐한 것입니다. 최소한도 목적했던 결과를 거두거나 자신이라도 주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응답받지 못한 바울

 

그런 확신을 갖게 된 연유를 앞에서 어떻게 설명합니까? 놀랍게도 바울이 자기 육체에 갖고 있는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으나 그 응답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난에서 구해달라는 기도가 응답 되지 않았는데도 기뻐할 수 있었고, 주님의 병을 고치는 능력이 발휘되지 않았는데도 그 능력이 더 크게 역사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가시를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했기에 신학자들은 마치 사탄에게 놀아나는 것 같은 증상을 보이는 간질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귀신 들려 마치 간질처럼 가끔 입에 거품을 물고 온몸을 경련하는 증상을 보이는 소년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주님은 기도해야만 이런 류가 나간다고 가르쳤습니다. (막9:17:14-29) 

 

오늘날 신자가 중병을 고쳐 달라고 새벽기도마다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에 비하면 바울이 겨우 세 번 기도하고 포기했다고 여겨선 안 됩니다. 성경에서 세 번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한도를 의미합니다. 바울로선 평소에 주님의 일을 위해서 기도하면 세 번까지 안 해도 다 응답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에도 사실은 세 번째 기도에 응답받았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9절)고 성령의 미세한 음성을 통해 주님이 그 병을 고쳐주지 않은 뜻을 계시받았습니다. 

 

흔히들 자기가 기도한 그대로 현실 변화가 따라야만 응답이라고 여깁니다. 그것은 비록 기도라는 의로운 형식을 취했어도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는 너무나 잘못된 신앙입니다. 그전에 불완전하고 죄의 본성이 남아 있는 신자로선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매번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합당하게 기도하지 못합니다. 

 

지금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해보려는 목적으로 병을 고쳐 달라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오히려 그 병이 너에게 더 큰 은혜이고 그 병을 통해 더 큰 능력으로 당신께서 당신의 일을 이루겠다고 응답해 준 것입니다. 바울도 그래서 병을 그대로 둔 것이 자기더러 자만해지지 않게 하려는 뜻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의 각성

 

말하자면 지금껏 바울은 하나님께 교만했었다는 사실을 그 기도에 응답받지 못함으로써 비로소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의 교만했던 생각은 쉽게 추측할 수 있는데 중병을 지니고 있으면 하나님의 일을 잘할 수 없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오히려 훼방이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은 이적을 실현하며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라면 자기 질병은 쉽게 고칠 것이라고 기대할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이 사용한 손수건만 환자의 환부에 갖다 대어도 치유가 일어났는데(행19:12), 막상 자기는 병으로 골골하고 있으면 신뢰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의 그런 생각은 분명히 합리적이고 선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꾸로 그런 생각이 교만하고 오히려 당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데에 방해가 되므로 그로 계속해서 고통을 겪게 할 것이라고 대답해 준 것입니다.

 

바꿔 말해 그렇게 아픈 가운데도 복음을 순전하게 전하면 당신께서 택하여 구원할 자에게는 성령이 역사하여 반드시 변화시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사실은 바울도 그런 진리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즉, 바울 자신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3-5)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앞선 서신에서 고백했습니다.

 

추측하건대 바울은 자기를 통해 이적들이 일어나고, 말솜씨가 없는데도 복음만 전하면 구원받는 자가 늘어나 곳곳에 교회들이 세워지니까 어느샌가 그 일을 자기 능력으로 행한 줄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또 입신하여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많았다고 본문에서 실토했으니까 영적인 우월감도 아주 컸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병을 오래 지녔을 것이지만 사역 초기에는 증상이 심하지 않다가 점점 교만해지니까 하나님이 역사해서 고통이 커졌을 것입니다. 그로선 이 고통만 없다면 더 많은 교회를 세우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해진 것입니다. 

 

인간 바울은 건강을 비롯해 자신의 지성, 도덕성, 영성이 복음 전파에 큰 역할을 담당한다고 여겼으나, 주님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라고 정확하게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전에 그가 자기 입으로 고백한 그대로 계속해서 성령의 역사로만 당신의 일을 당신께서 행하실 것이므로 그 병을 고쳐주지 않겠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병이 중해질수록 바울은 자꾸 더 낮아질 수밖에 없고, 대신 그에게 내주하신 성령의 권능은 더 충만해지니까 복음이 더 잘 전파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그런 뜻을 정확히 깨닫고서 자기가 고통을 더 겪을수록 주님의 일은 더 활발해지니까 그래서 기뻐한 것입니다. 

 

신자더러 고난 중에 기뻐하라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단순히 이 땅의 고생을 갚아 줄 천국만 바라거나, 끈질기게 기도하면 고난에서 구출해 주리라 믿고 인내만 하는 차원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신자라면 외부 여건이 어떠하든, 자신의 문제가 아무리 크든 주님이 자기 삶과 인생에 함께해 주시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똑같은 고백을 한 욥

 

성경 인물 중에 최고로 억울한 환난을 겪었던 욥도 아무리 기도해도 악성 종기가 나아지지 않자 결국에는 차라리 내 목숨을 앗아가 이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게 해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가장 절실한 바로 그런 때에 하나님은 가장 멀리 계셨던 것입니다. 전혀 변화가 없어서 큰 고통 중에 친구들과 결론 없는 신학 논쟁만 벌이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돌연히 나타나 자연에 관한 백여 개 질문을 던졌습니다. 욥은 하나도 대답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바짝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출현도, 욥의 태도 변화도 너무 급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욥이 마지막으로 고백한 의미가 바울의 본문 고백과 사실상 같습니다. 신구약에서 가장 억울한 고난을 많이 겪은 두 사람이 똑같이 중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성경 기록상 욥은 고침을 받았으나 고난에 대한 정확한 뜻은 가르쳐 주지 않았고, 바울은 병은 그대로 두고 그 이유만 정확히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욥의 마지막 고백을 하나님의 질문들과 대조해 보면 욥도 자기 고난의 이유를 바울과 같은 맥락으로 깨달았다는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욥은 아이들 잔치 때에 혹시 아이들이 죄를 지었을까 염려하며 아이들을 대신하여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보통 사람은 미치거나 자살할 만한 고난들을 단번에 겪고도 입술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인과응보의 세계관과 권선징악의 하나님에 따라서 기복주의가 옳다고 끝까지 주장해도 그런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고난도 있을 수 있다고 항변했습니다. 대신에 그는 자기가 행한 일들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고난을 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우겼습니다. 

 

그가 나쁜 짓을 행한 적은 물론 없습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내용에는 하자가 없었으나 그분을 자신의 개념과 이해 안에만 묶어두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마저 자기가 기대하거나 옳다고 믿는 대로 행해야 한다고 고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교리적으로만 믿고 종교 행위로만 따랐던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 뵌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초자연적인 통로를 통해 직접 질문을 던지면서 사실상 당신의 실체를 그에게 드러내 준 것입니다. 욥으로선 하나님과의 개인적으로 대면한 것은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전혀 답을 하지 못하면서 욥이 가장 크게 깨달은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3,4) 

 

비유의 규모가 많이 약하지만 엿 장사가 가위를 일 분에 몇 번씩 두드릴지는 본인이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엄청난 규모의 자연이 아주 세밀한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근거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에 달렸습니다. 무엇보다 인생사의 기쁨과 슬픔을 인간의 기대 소망 믿음 기도 선행 심지어 불신 악행 등과도 전혀 상관 없이 당신의 뜻대로 주신다는 그 사실부터 욥은 다시 시인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선교는 성령이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고도 잠시 잊었다 다시 깨달았듯이, 욥도 그 진리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들이 죽었을 때 생명을 주시는 이도, 앗아가는 이도 여호와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자기가 스스로 교리로 묶어 놓은 그 하나님만 믿었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고선 그 종교적 진리가 완전히 자기 삶에 실현되었다고 실토한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세상 어떤 존재에도 영향받지 않는 자존하시는 절대자라고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심한 독종이 번진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자기 온몸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라고 덧붙였습니다. 귀로 듣는 것은 하나님을 종교적으로만 믿는 것이고, 눈으로 보는 것은 인격적으로 일대일로 대면한 것입니다. 처음으로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대면하여 교제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로 바로 그런 자리에 세우려고 그 많은 고통을 허락했다고 절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그에게 과도한 고난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지루할 정도로 길게 이어진 논쟁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욥의 자기 의와 자기 주관이, 쉽게 말해 자기 고집이 그만큼 견고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의도 욥 못지않아서 하늘보다 높다고 자부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대일 인격적으로 만나자 곧바로 완전히 항복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최고의 의인 두 사람에게 세상 최고의 교만에서 당신 안에서의 최고의 겸손으로 낮추는 그런 똑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인생의 극적 전환

 

욥으로선 하나님이 자기가 원하거나 혹은 자기에게 편한 대로가 아니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는 자기 인생사를 이끌고 가야 한다고 고집했습니다. 그가 믿은 내용에 틀린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잘못 없는데 엄청난 고난을 겪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실수 내지는 잘못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던진 백 가지 질문은 세상의 진짜 주인이 당신이라는 그 간단한 진리조차 네가 완전히 잊고 있다고 다그친 것입니다. 인간보다 훨씬 못한 동식물을 당신이 어떻게 다스리는지도 모르면서, 복잡한 인생사에 간섭하는 심오한 뜻을 일일이 알려고 하는 것부터, 나아가 감을 놓아라, 사과를 놓아야 한다고 당신께 주장하려 했던 것이 큰 교만이라는 뜻입니다.

 

욥은 그 고난을 통해 인생의 극적인 전환이 머리가 아니라 몸 전체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기가 주도하던 데서 그분의 주도로 완전히 바꾸고서 범사에 그분 앞에 바짝 엎드리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교제를 처음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 사이에서 믿음 좋은 의인이었으나 이제 비로소 여전히 연약해도 하나님의 친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랫동안 침묵하신 뜻도 욥이 나 같은 의인을 왜 벌주느냐고 따졌으나 세상에 의인은 물론 진정으로 당신을 두려워하는 자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욥도 의인이 아닌데 자꾸 의인이라고 하니까 너무 어이가 없어서 대답하지 않은 셈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아무 말씀 없이 달리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어 마땅한 천하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야 하는데, 말로 설명해서 겸허히 인정하기는커녕 무슨 뜻인지 알아먹을 자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욥이 전혀 답변하지 못할 줄을 알고도 마지막에 백 가지 질문을 던진 더 중요한 뜻이 따로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욥과 개인적으로 대면함으로써, 즉 당신의 실체를 인간 욥에게 보여주었으므로 사실상 당신의 전부를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욥더러 나를 제발 교리에 묶어두려 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너와 내가 아주 친하게 지내자는 것입니다. 내가 네 손을 잡고 앞서서 갈 테니까 내 뒤만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때로 그 손을 놓친 것 같고 앞이 깜깜해도 너 앞에 내가 분명히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태어나기 전부터 네 인생에 일어날 모든 일을 가장 합당하고 완벽한 일정과 방식대로 이끌었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선포해 준 것입니다. 결국 너로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려고, 더 정확하게는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게 해주려고 어쩔 수 없이 그런 무리한 고난도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욥에게 그런 엄청난 고난을 주었으나, 신약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모든 고통을 당신께서 다 감당해 주심으로써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온전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고난으로 열리는 영안(靈眼)

 

이 세대에서 제일 억울한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은 북한 주민일 것입니다. 자기 의사와 전혀 관계없이 태어나서 보니 자유와 인권이 말살된 세계 최고 독재국가에서 단지 굶어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일이 인생사 전부입니다. 의사 표시, 거주 이동, 직업 선택, 타지 여행의 자유가 아예 없고 평생토록 정부가 정해주는 지역에서 정해주는 노동만 해야 합니다. 

 

그런데 1954년에 휴전한 뒤로 70년을 완전히 폐쇄된 세상에 살았기에 다른 나라들도 당연히 그렇게 사는가보다 여긴다고 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을 평생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어쩌다 자유세계를 알게 되고 동경하여 천신만고 끝에 탈북해서 남한에 정착한 사람들이 꽤 많아졌습니다. 그들은 남한 사람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집안에서 따뜻한 물로 언제든 샤워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천국에 사는 것 같다고 한결같이 증언합니다. 며칠 전에 어떤 유튜브에서 한 분이 그런 고난을 겪지 않았다면 진정한 행복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므로 북한에 태어나 죽도록 고생했던 일이 오히려 정말 감사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 그런 귀한 감사도 고생이 끝났기에 누리는 기쁨이라 바울의 고백과는 차원이 조금 다릅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해야 하고, 성경도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13:24)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하느라 겪는 환난 중에 기뻐하라고 권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럴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제 이야기를 한 번 나눠보겠습니다. 삼십 대 초반에 세상 물정 모르고 교만하게 사업을 한다고 설치다가 쫄딱 망해서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렇게 싫어하던 교회에 처음으로 나와서 로마서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은혜를 입고서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원의 기쁨도 컸지만, 그 외에 생전 처음으로 저라는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연약하고 비참한 존재인지 정확히 깨달았습니다. 현실 형편이 나아진 것 하나 없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한국에서 현실 상황을 제대로 타개할 수 없어서 사십에 접어들 때 미국 이민을 왔는데 하나님은 다른 모든 길을 막고서 목회자의 길을 가도록 예비해 놓았습니다. 이제 내 인생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지 깨달았습니다. 그러다 얼마 되지 않아서 구강암에 걸려 위중한 단계에 이르렀는데 열두 시간의 수술과 교인들의 기도로 완치되어서 지금껏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중병으로 인생길에 겪는 고난은 물론 죽음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닫게 되었고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 사는 삶이 얼마나 귀중한지 절감했습니다. 

 

암에서 나았으니까, 그보다 더 중한 고난이 없을 줄 알았으나 아주 가까운 사람이 더 중한 병으로 오래 고생하는 것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며 끝까지 간호해 주어야 했습니다. 이제 주변 사람의 고난을 더 깊이 공감하고 그에 동참해서 주님의 사랑을 베푸는 일의 의미와 그로 인한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이제 70이 넘어가니까 육신이 예전 같지 않고 삼 주 전에는 무릎이 아파서 처음으로 매일 산책하는 일을 2주간 정지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죽음의 의미와 천국 소망이 피부로 더 와닿고 예수님을 직접 얼굴로 대면할 일을 기쁨으로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겪은 고난이 바울과 욥, 아니 지금도 전쟁과 기아로 죽어가는 지구촌의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전혀 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이 저를 더 크고 완전한 기쁨과 안식을 주려고 그 모든 고난을 계획하고 겪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각 시기와 환경에 따라서 당시의 제 영적인 상태에 맞추어서 반드시 당신에 대해서 알게 해주어야 사항을 보여준 것입니다. 고난을 겪음으로써 저는 주님을 울부짖으며 더 깊이 찾았고 주님은 그런 저를 개인적으로 대면해서 당신의 뜻을 하나씩 하나씩 더 많이 계시해 주셨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저의 모든 고난에는 한가지 일관된 맥이 있었는데 당신께서 나를 개인적으로 너무 사랑하시어서 천국의 영광스러운 부활로 한 걸음씩 가장 온전한 때와 방식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제가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주님이 나를 더 잘 알고 더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온전히 찾아서 누릴 수 있는 최적의 길이 환난이었던 것입니다. 

 

무너질 북한 정권

 

성경은 의외로 냉정하고 객관적인 책입니다. 인간이 갖는 어떤 편견, 감정, 이해관계가 하나도 개입되지 않은 절대적인 진리에 관한 책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 세상은 인간의 죄악으로 항상 고통 중에 있게 된다고 선언합니다.(창3:17-19) 인간 생존에 필요한 모두를 공급하시고 또 모든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의 기원이신 하나님을 멀리함으로써 영육 간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생이 단 하나 예외 없이 고난으로 가득 찼다가 죽음으로 끝납니다. 우리 생각에 너무 안타깝고 아쉽긴 해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입니다. 대신에 성경은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에 관한 책입니다. 신자더러 예수님이 걸어갔던 길로 걸어가야만 인생의 고난을 오히려 세상이 줄 수 없는 감사와 기쁨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절실할 때 가장 멀리 있는 것 같은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당신을 찾고 또 찾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 외에는 세상 어떤 의로운 것도 전혀 소망스럽지 않다고 부르짖을 때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평온한 가운데는 전혀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인생과 세상에 대한 진리가 하나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 진리 가운데 하나님의 숨겨진 은혜와 권능이 더 오묘하고 신비하고 감사해서 저절로 무릎이 꿇어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지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짐으로써 누구나 있는 모습 그대로, 어떤 엄청난 고난 중에라도 주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일대일 개인적 교제가 가능해졌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 십자가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는 환난 중에, 아니 환난을 통해서만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단순히 굳센 믿음으로 고난을 견뎌내어서 고난이 끝났기에 기뻐지는 차원과 완전히 다릅니다. 자신부터 점점 거룩해지고 그래서 미혹된 다른 이의 영혼이 너무 불쌍해서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 그가 참 생명으로 거듭나고 함께 주님을 찬양할 수 있으므로 너무 기뻐지는 것입니다. 

 

북한에도 하나님이 남겨둔 당신의 백성이 있고 십자가 복음이 온전히 들어가는 때와 방식으로 반드시 공산정권을 무너뜨려 주실 것입니다. 이 세대의 인간 사회의 공의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권능으로 완벽하게 실현하고 있습니다. 욥은 그런 사실을 깨닫고서 자신의 이유 없었던 고난에 대한 숙제를 해결했고, 바울도 그 수많은 고난 중에도 오히려 기뻐하며 신자들더러 자기 고난에 참여하면서 항상 기뻐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굽어져 보이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성경적 해답입니다. 신자가 환난 중에도 진정으로 기뻐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더 크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비록 죄로 타락했어도 그런 이 세상을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3/10/2024) 

 


모루두개

2024.03.10 22:48:55
*.230.44.2

환난 중에 소망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프리지아

2024.03.14 22:39:21
*.226.94.41

이전에 제가 고통중에 있을때 하나님을 원망했었던 것이 얼마나 무지했었는지 한탄스러울 정도입니다. 환난중에 있을 때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제가 되기를 원하옵고, 참 인생은 고통없이 평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앎에서 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신묘하신 은혜에 놀라와 눈물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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