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펠메탈과 기독마술?

조회 수 1409 추천 수 27 2011.05.20 01: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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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펠메탈과 기독마술?


[질문]


최근에 Stryper라는 밴드를 알게 되었는데 가스펠메탈밴드라고 합니다. 헤비메탈 음악의 대부분이 악마적이고 반기독교적인 가사를 담고 있는 것에 반해 이 그룹 같은 경우 하나님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냥 하나님을 한두 번 언급하고 지나가는 정도인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가사가 생각보다 직설적이더군요. In God We Trust 같은 곡에서는 직접적으로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니 그를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형식 자체는 여느 메탈 밴드들과 다를 바 없이 거친 창법과 시끄러운 연주 기법을 사용합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기독마술, 가스펠 매직으로 불리는 것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찌 됐건 속임수를 이용한 마술을 복음 전파에 이용한다는 것이 께름칙했는데 실제로 많은 현장에서 전도 사역으로 활용되는 것을 보니 또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은, 흔히 교회에서 멀리하는 형식인 메탈이나 마술 등의 방법에 복음적인 내용을 담아도 되냐, 그리고 이걸 듣거나 보아도 되냐는 것입니다. 사실 메탈이라는 음악은 그 거친 사운드 때문에 듣는 사람들에게 불쾌함 혹은 짜릿함 등의 강한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또 가사보다는 노래의 멜로디와 화려한 연주에만 신경 쓰기 쉽습니다. 당연히 예배 때 이런 음악을 찬양으로 사용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배 때 드리는 찬양은 노래 가사를 깊이 묵상하며, 인도자와 회중이 함께, 전심으로 불러야 하는데 메탈 같은 노래는 그러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본인이 이런 분야에서 음악 활동을 한다면, 혹은 좋아한다면 세상적인 가사를 담는 대신 거친 음악이라도 하나님을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아 부르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마술도 반드시 복음을 전하는 취지하에서만 사용된다면 전도에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답변]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9:21,22)
  
율법을 알고 따르는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보니 유대 문화와 상충이 되는 일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그들에게 결코 율법대로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방 문화나 상황에 맞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질문하신 주제는 바로 이런 복음의 상황화 또는 토착화(contextualization)에 관한 것입니다. 근래에 들어 전도, 특별히 다른 언어권을 향한 선교 시에 가장 자주 논의되는 주제입니다. 특정 부류의 사람이나 문화에 걸맞은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동일한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살펴본 대로 성경은 분명 그럴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과연 상황화를 어느 정도까지 허용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의 헤비메탈(이후 ‘메탈’)이나 가스펠매직(이후 ‘매직’)도 복음전파에 활용해도 되는지 참으로 판단하기 애매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합리적으로 따져보면 의외로 그 답이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도출될 수 있습니다.  

된장과 뚝배기

지금 요체는 좋은 내용을 나쁜 형식에 담아도 되는지, 또는 목적이 좋으면 조금 나쁜 혹은 판단하기 애매한 방법을 택해도 되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성경적으로 죄악시 되는 것이라면 문제 될 것 하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려운 사람을 돕는 돈을 마련하려고 강도질한다면 두말 할 것 없이 틀린 것입니다. 반면에 사악한 것인지 확실히 판단이 안 되는 메탈이나 매직은 복음전파에 활용해도 구태여 나쁠 것 없지 않느냐고 여겨집니다.  

우리는 이런 판단의 일차적 근거를 어디에 둡니까? 메탈과 매직의 선악간(善惡間), 최소한 성경적으로 수용되는지 여부입니다. 마술을 성경이 분명 금하고 있지만 주로 우상 숭배에 연관될 때입니다.(사8:19, 19:3, 행19:13-20) 그러나 간단하고도 유쾌한 마술로 복음을 전하니까 판단하기 애매해져 버립니다. 또 메탈은 아예 언급도 없습니다.

이왕이면, 아니 너무나 당연히 좋은 내용은 좋은 형식에 담아야 합니다. 비유컨대 된장은 뚝배기에 담아야 더 깊이 음미할 수 있습니다. 마침 뚝배기는 없고 유리컵뿐이라면 그것에라도 담아 먹어야 합니다. 먹지 않느니 그렇게라도 먹는 것이 백배 좋은 일입니다. 이번에는 된장을 끓였는데 뚝배기는 없지만 밥공기와 유리컵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럼 밥공기에 담지 유리컵에 담아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비유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뚝배기, 밥공기, 유리컵 중에 어느 것이 된장을 담는데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릇 자체의 모양, 크기, 재질 등으로 등수를 따지지 않고 현재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나 선교에서 단순히 혹은 무조건 상황화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진짜로 상황에 맞추어 정확하게 상황화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지금 처한 상황에 따르면; 1)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이 단 하나의 형식뿐이라면 분명한 죄악이 아닌 이상 그 형식을 취해야 합니다. 2) 상황화는 꼭 필요한데 여러 선택 방안이 있으면 그 중에서도 가장 성경적인 방안을 택해야 합니다. 3) 만약 상황화 하지 않고도 복음을 전할 수단이 있다면 구태여 상황화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청소년 전도 방식

그럼 본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선 매직은 아무리 단순 유흥으로 즐긴다 해도 본질이 사람을 속이는 것이므로 비성경적입니다. 신자가 마술 쇼를 보면 안 된다거나, 간단한 마술을 친구들 사이에 재미로 시도해보는 것마저 죄라는 뜻이 아닙니다. 매직으로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삼을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거짓으로 진리를 담아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메탈은 가사 내용이 사악하거나 연주자들이 윤리적 영적으로 잘못되어서 나쁜 것만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그 음정 자체가 비성경적입니다. 메탈의 가장 큰 특징이 헤비한 것 즉, 시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마칠 때까지 샤우팅을 질러대긴 하지만, 음정이 완전히 불규칙적이라 더 시끄럽게 여겨집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자연은 질서정연하게 만들어졌기에 아름답게 보입니다. 진선미에는 원칙적으로 무질서나 불규칙이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클래식 음악이 사람을 평온케 하는 까닭이 바로 질서와 규칙이 불러오는 안정감 때문입니다. 반면에 메탈이 불안정과  흥분, 때로는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근본 이유는 바로 이 불규칙성 때문입니다. 거기다 음란하고 사악한 가사와 고함 등이 그런 감정을 배가시키는 것입니다. 일부러 기괴한 분장을 하고 과장된 무대 매너를 보이는 것도 청중들을 자극하려는 의도입니다.  

음악의 삼대 요소인 음정, 박자, 화음 모두 정확하게 규칙적입니다. 물론 불협화음이 가끔은 들어가지만 어떤 주제를 특별히 강조하거나 음악 전체를 더 돋보이게 하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인생에 가끔은 환난이 있어야 하나님 은혜가 더 귀하게 여겨지듯이 말입니다. 음악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자 그분의 창작품입니다. 삼대 요소를 깨트려버리는 것을 가장 큰 특징, 아니 그것을 본질로 삼은 메탈은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어긋나기에 비성경적입니다.
.  
메탈이든 매직이든 주로 청소년 상대의 전도에 응용됩니다. 그런데 과연 청소년을 전도할  방식이 그것 말고는 전혀 없는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현대적이고도 진보적인 취향과 문화에 맞추되 얼마든지 선하고 성경적인 방식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 쪽에서도 꼭 그 방식 말고는 복음을 온전하고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

“하지만 본인이 이런 분야에서 음악 활동을 한다면, 혹은 좋아한다면 세상적인 가사를 담는 대신 거친 음악이라도 하나님을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아 부르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메탈과 매직을 하는 당사자 즉, 전도자의 입장을 따져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할 수 있는 방식이 과연 그것뿐인지, 또 꼭 그 방법 아니고는 전도가 안 되는지, 두 질문에 대한 그들의 답은 분명 “no" 아니겠습니까?

물론 자기가 가진 달란트나 은사로 전도하는 것이 스스로 더 열심을 낼 수 있고 또 어느 정도 효과적이긴 합니다. 그러나 메탈이나 매직 하는 분에게 이런 성경적 원리부터 가르치는 것이 더 시급합니다. 그래서 다른 올바른 전도방식으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비유컨대 아무리 스님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불자들을 상대로 전도한다고 해서 승복 입고 절에다 불러서 전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도의 효율성

질문자님이 “마술도 반드시 복음을 전하는 취지하에서만 사용된다면 전도에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했듯이, 복음의 상황화는 결국 전도의 효율화를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라고 효율화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효율화만 목표하지 않았으며 그가 지켰던 전도 원칙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무엇보다 복음이 가려지지 않는 데에 모든 포커스를 집중했습니다.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8:13)  우상은, 정확히 말해 우상이 대변하는 신들은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기에 우상에 바쳐진 고기라도 신자는 얼마든지 먹을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런 진리를 모르는 불신자나 믿음이 연약한 자가 그런 모습을 보고 시험에 들 가능성이 있다면 바울은 “영원히”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복음이 곡해, 수정, 타협, 굴절, 왜곡, 가려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아무리 도덕적 영적으로 하자가 없거나 심지어 옳은 방식이라도 취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취지로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고 말한 것입니다. 본문이 전체 문맥에서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다른 사도처럼 아내를 대동하고 선교 헌금을 받아가며 선교여행을 할 수 있고 그러는 것이 틀리기는커녕 성경이 말하는 바이지만, 바울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도 여행 시에 지갑이나 먹을 것을 준비하지 말라고 했고, 또 하나님이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책임져 주심을 확신해야 하는 사도가 혹시라도 돈을 밝히고 돈에 의존하는 사도라는 오해를 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아내까지 동반하여 편안하게 유람 여행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어선 신자들로 시험들게 할 수 있고 이미 전해진 복음의 은혜를 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장막을 만들어 팔아 선교비용을 충당하며 값 없이 전도했습니다.(고전9:18, 행18:3)  

바울은 복음을 복음답게 전하려고 이렇게까지 신경을 썼습니다. 아니 성경이 우리더러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메탈이나 매직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의 진리를 사람들 앞에 가릴 뿐 아니라, 전도자 본인이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반복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기는커녕 스스로 자신을 더럽히는 셈입니다.

전도의 절실성

주목할 사항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는 이 구절(고전9:27)이 바로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더 얻으려 한다”는 상황화를 옹호하는 구절(고전9:21,22)들의 결론이었다는 것입니다.  상황화를 통해 전도의 효율성도 추구해야 하지만 복음이 가려지게 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또 전해진 복음과 전도자의 행동이 상치하더라는 인식을 주어선 더더욱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전도의 효율화나 상황화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복음을 정말 복음답게 순수하게 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

예컨대,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하는 복을 받는 것처럼 선전하여 교회로 인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바 진리가 아닌데도 대외적으로 그렇게 전한 것은 거짓말 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말하자면 메탈이든 매직이든 일단 교회로 유도만하는 수단으로도, 이것도 일종의 효율성제고 방안임,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작 더 중요한 사항은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라는 말씀이 전도의 효율성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그렇게 보이고 또 그런 해석이 완전히 틀린 것은 물론 아닙니다. 복음을 상황화 해야 한다는 자체로 효율적으로 전도해야 한다는 뜻이 이미 내포된 것입니다.  

그보다 그렇게 하는 근본 이유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전도의 효율성보다는 그 절실성과 시급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아무쪼록 단 몇 사람이 되어도 좋으니 최선을 다해 구원으로 초대하겠다는 것입니다. 가능한 방법을 다 동원해서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로 표현해서 죄송하지만, "even only a few"(절실성)와 “as many as possible"(효율성)의 차이입니다.

전도자는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이어야 합니다. 집 나간 탕자가 이제나 저제나 돌아올까 매일 문 밖에 서서 종일 먼 곳을 바라보는 아비의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평생을 두고 단 한 명의 죄인이라도 하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을 반드시 올리도록 만드는 것이 최고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교인들의 숫자를 늘리고 예배당을 크게 짓고 교회 프로그램을 다양화 시키려드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효율적인 전도는?

바울이 지켰던 가장 중요한 전도원칙은 따로 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지혜의 권하는 말보다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말은 전혀 하지 않고 행동으로만 신자의 본을 보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분명히 내 말과 내 전도함이라고 전제했습니다. 따라서 말로서 전도를 하기는 하되 자신의 지혜에 의존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전했고 또 그 전한대로 실제 삶에서 실천해보였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적 지혜로 전도에 효율을 높일 수단들을 강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어떻게 했습니까? 성령의 나타나심이라고 해서 방언 기도로 전도하는 등, 신령한 방법을 동원한 것도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십자가 복음을 순전하게 전했을 뿐입니다. 성령의 근본 역할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도록 해서 예수를 구주로 시인케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4-16)

십자가 복음은 사람을 영원한 생명과 죽음 둘로만 나누는 절대적 진리이므로, 그대로 순전하게만 전해지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의 효율성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신자와 그가 전하는 복음이 사람들에게 사망과 생명의 냄새 둘로만 확연하게 인식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십자가 앞에 항복할 자와 끝까지 사단에 미혹되어 완악하게 거부하는 자로만 나뉘지지 그 중간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말씀에 이어서 앞에서 인용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전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역사상 전도가 가장 폭발적으로 일어난 것은 알다시피 초대교회 시절이었습니다. 그것도 신자들이 로마핍박을 받아 순교함으로써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도를 열심히 해서 핍박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로마 황제를 주라 시인하지 않는다고 순교 당한 것입니다.  

당시 상황에 복음의 상황화를 적용시켜 봅시다. 일단은 황제를 입술로 주라 시인하면 됩니다. 신자가 죽고 나면 전도할 자가 없어지니까 어떡하든 살아남아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최적의 방안일 것입니다. 진심은 그것이 아닌데다 말로서 예수님을 주가 아니라고 부인한 것도 아니니까 최선의 해결책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주인이 둘일 수는 없으니 황제가 주가 되면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의 주님 되심이 부인되는 것입니다. 결국 초대 교인들은 전도에서 상황화로 효율을 높이기보다는 복음의 순수성 보전을 더 우선에 두었습니다. 세상 사람이 보기에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하잘 것 없는 이유였지만,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선” 목숨보다 더 중한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 당했는데도 복음은 걷잡을 수 없이 더 번져나갔습니다. 전도할 수 있는 신자가 많이 사라졌고, 또 도무지 대놓고 전도할 상황이 안 되었고, 실제로  활발하게 전도하지 않았는데도 그랬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만 전도된 것입니다. 순교를 보는 사람들로 심령에 찔림을 주어 그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열리게 만든 것입니다.  

상황화의 오남용

오래 전에 미국 윌로우크릭 교회에서 전도의 효율성을 높이려고 구도자 예배를 최초로 시도했고 또 기대대로 교회는 크게 부흥했습니다. 설교 중에 죄, 회개, 지옥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찬양이나 예배 의식에 종교적 색채를 제거했습니다. 불신자가 기독교에 접근이 용이하도록 한 것입니다. 세상의 문화에 복음을 상황화 한 것입니다.  

그러나 수년 전에 그들 스스로 그런 구도자 예배가 실패했다고 실토했고 그 원인을 자체 분석한 백서까지 출판했습니다. 전도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상황화에만 급급했지 복음을 순전하게 전하는 데는 미흡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부흥했어도 십자가 복음은 부흥하지 않은 것입니다. 세계에서 인간의 자유가 가장 잘 보장되고 도덕적 영적으로 상당히 관용적인 미국에서 상황화가 실패했다면 다른 곳은 더 그러할 것입니다.

요체는 이것입니다. 상황화는 하되 복음이 가려져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전도자부터 복음의 진리 그대로 온전히 따라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사는 모습이 주위에 확실히 보여야 합니다. 초대교회신자들이 작은 그리스도라 불릴 만큼 성결하게 살았기에 그들의 순교에 불신자들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죄 짓는 맹신자들이 순교했다면 그야말로 신나는 쇼 구경하듯 하고 치웠을 것입니다.  

회교도의 경우와 대조해 봅시다. 그들은 코란이 규정한 바대로 정말 목숨을 걸면서 전도합니다.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게 전하고 실제로 실천까지 합니다. 그들에게 코란의 상황화는 아예 씨도 먹히지 않습니다. 정말 절대적 교리를 절대적으로 믿고 있으니 현재 이슬람은 가장 급속도로 교세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관계없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테러는 아무리 종교적 이유로 했다 해도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또 코란대로 실천한다고 해서 여성들을 억압하고 아직도 눈에는 눈 식으로 동해보상법을 문자적으로 실현함으로써 도덕적 흠결을 보입니다.

기독교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이고도 영원한 진리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복음으로 생명과 죽음이 나눠지기에 전도함에도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물론 그 전에 전도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부터 거룩해져야 합니다. 어떤 종교보다 도덕적으로도 당연히 월등 우수합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정말 순전하게 전해져야 합니다. 복음 자체에 이미 그리스도의 권세가 넘치도록 함께 하기에 군더더기를 더 보탤 필요가 없습니다. 상황화는 정말로 상황이 그것 외에는 도무지 수단이 없을 때에 한해서 예외적으로 시행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라면 죽었으면 죽었지 결코 상황화를 하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작금 상황화가 너무 남용, 오용이 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바울처럼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도하면 얼마나 큰 능력이 나타나는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전도자가 아니라 성령이 전도한다면 단지 한명만 전도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고 정해 놓은 방식대로만 해야함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흥미롭게도 자유주의 진영에선 한국의 무당춤도 전도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똑 같이 기독교를 상황화, 토착화를 한다는 구실로 말입니다. 성경을 전혀 성경대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와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짓입니다. 메탈이나 매직을 전도에 응용하는 것도 엄밀히 따져 이와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바래시인의 상황화

예수님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세리와 죄인과 창녀들과 포도주를 마셔가며 식사 교제를 했습니다. 안식일에도 여행을 하고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언뜻 보면 율법을 어기고 상황에 맞춰서 전도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세 오경에 기록된 율법을 어긴 적은 없습니다. 정말 율법을 일점일획 땅에 떨어지지 않게 그대로 행했습니다. 예수님이 어긴 것은 단지 바리새인들이 만들어 놓은 장로의 유전이었습니다. 원래 성경에는 없이 인간이 고안해 추가한 규정들입니다.

그런데 바리새 율법 즉 장로의 유전도 아주 선한 의도에서 고안된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더 정확히 지키기 위해 모든 발생 가능한 상황을 미리 예견해서 구체적인 규정을 만든 것입니다. 예컨대 율법에는 안식일에 일하지 말고 쉬라고만 했기에 어디까지가 노동인지 그 범위를 세밀하게 정한 것입니다. 요즘으로 비유하자면 예배 중에 박수쳐도 되는지, 전기기타를 사용해 빠른 템포의 음악을 연주해도 되는지 성경에 규정이 없으니 당회에서 결정하여  금지 혹은 허용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도 바리새인도 각기 자신들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상황화를 시도한 셈입니다. 그러나 그 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효율화에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율법의 규정과 뜻을 온전히 지키면서 즉, 복음의 순수성은 유지하면서 아무쪼록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게 하려는 상황화였습니다. 이런 차이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정작 더 큰 문제는 예수님의 상황화가 전도에 크게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어도 돌아와서 감사하다는 말을 한 자는 한 명뿐이었습니다. 세리, 죄인, 창녀 등 소외된 자들과 진정으로 섬기며 교제했음에도 골고다 언덕까지 따라간 자는 극히 소수였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마저 뿔뿔이 도망쳤지 않습니까?

반면에 오순절의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는 그 무식하고 비겁했던 베드로의 단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이 즉석에서 회심했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오직 복음만 순전하게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말입니다.

다른 말로 골고다 십자가 자체가 유대나 로마의 제도 관습 문화와는 일절 타협 조종하지 않은 즉, 전혀 상황화 하지 않은 가장 대표적 표본이지 않습니까?

상황화의 적용

오해는 마십시오. 상황화가 틀렸으니 전혀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때와 경우에 따라 필요합니다. 그러나 역사상 있었던 모든 부흥은, 아니 한 죄인의 회심도 실제로 신실하고 의롭게 살고 있는 신자에 의해 순전한 십자가 복음이 성경대로 정확히 전해지고 무엇보다 성령이 역사할 때만 가능했습니다. 상황화는 바로 이런 목적으로 또 그렇게 되는데 도움이 되는 한도 내에서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개별적 현실 상황에선 그런 판단이 여전히 아주 힘듭니다. 그러나 너무 예민해지고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자의 속에는 성령이 내주하시고 또 영적 원리를 정확히 밝혀 놓은 성경이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성경의 원리대로 판단하면 됩니다. 물론 그일 조차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래서 성령이 내주하신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것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 심령에 그대로 전해집니다. 성령이 바로 하나님이기에 성령이 흡족하지 않으면 신자도 자연스레 흡족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 염려, 두려움, 기분 나쁨, 분노 같은 느낌이 들면 일단은 비성경적일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경고의 의미가 아닌 이상 악한 세력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창조는 질서 있는 진선미인데 그것과 어긋나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인간들로선 자기도 모르게 그런 감정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주하는 신자는 당연히 더더욱 민감해집니다.  

쉽게 말해 질문자님이 “속임수를 이용한 마술을 복음 전파에 이용한다는 것이 께름칙했는데” 또, “메탈이라는 음악은 그 거친 사운드 때문에 듣는 사람들에게 불쾌함 혹은 짜릿함 등의 강한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 찬양은 노래 가사를 깊이 묵상하며 인도자와 회중이 함께 전심으로 불러야 하는데 메탈 같은 노래는 그러기가 쉽지 않으니까요”라고 말씀하신 것 자체가 이미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런 영적 교감에 민감하지 못해 잘못된 상황화를 했다 해도 너무 염려할 것 없습니다. 바울처럼 사단에 묶여 있는 한 영혼을 진심으로 불쌍히 여겼다면 설령 비성경적인 방식으로 전도했다 해도 하나님은 합력해서 선으로 바꿔 주십니다. 또 나중에 그 상황화의 잘못까지 구체적으로 깨닫게 해주십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전도자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몇 가지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진리에 대한 절대적 확신과, 복음의 순수성을 성경대로 정확하게 전하고자 하는 자세와, 자신을 쳐서 복종하더라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내겠다는 헌신과, 평소에도 말씀대로 살고 있는 신실함과, 주위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인정받고 있음과, 마지막으로 오직 성령님의 나타나심만 소원하는 겸손함입니다. 또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올바른 상황화를 할 수 있고, 또는 구태여 상황화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신자는 십자가만 정확히 전하기만 햐면 되고  죄인의 영혼을 건지는 구원은 주님이 도맡아 하기 때문입니다.

5/19/2011

More than Enough

2011.05.20 03:58:12
*.255.190.49

감사합니다. 제가 전도에 관해서 잘 알지 못하던 부분을 고린도전서 본문과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더 잘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예전에 같이 거리에서 찬양하던 친구가 복음 선포를 직접적으로 하지 말자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좀더 효과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맞지 않겠냐'라고 했을 때 이건 아니다 싶으면서도 뭐라고 반박해야 할지 몰랐었는데... 복음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로만 전파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네요. 복음의 효율성, 상황화가 아니라 그 순수성에 초점을 맞추고, 복음 전함에 있어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는 자세를 더 배워야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운영자

2011.05.20 13:04:22
*.108.161.206

마침 위 댓글을 보니까
제 글에 대해서 조금 오해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보충합니다.

More than Enough 님의 친구 분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좀 더 효과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맞지 않겠냐?”라는 말씀에도
상당히 일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전도에서 복음의 순수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해서
(임종 직전의 불신자 환자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무에게나 무턱대고 곧바로 복음부터 전할 수는 없습니다.

피전도자가 마음 문을 열 때까지
최소한 복음에 대한 대화를 계속하려는 의사를 보일 때까지는
효과적으로- 그분의 상황에 맞추어- 접근하는 것은 옳습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또 구원의 진리와 무관한 성경의 지엽적인 내용에 대해선
해석의 유연성을 발휘해도 됩니다.
상대의 의견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기독교적인 문화도 강요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의 상황화도 이런 수준에 멈춘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구원에 관한 십자가 복음을 전할 때만은
반드시 그 진리가 절대로 굽어짐 없이 순전하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때도 피전도자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진리의 핵심은 분명 그대로 살아있되
그분 상황에 맞는 예화인용과 적용은 할 수 있습니다.

제 글에서 문제 삼은 것은 전도 자체를 세속문화에 접목시키는 상황화이며
이처럼 전도를 위한 예비 접촉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전도의 핵심 유력 수단으로
비성경적인 헤비메탈이나 매직을 활용하거나
순전히 전도의 효율성만 높이려는 상황화는 지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샬롬!

More than Enough

2011.05.20 15:48:02
*.206.195.203

아^^;; 저도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다 보니 조금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소지가 있었네요.
제가 저 말을 들었던 당시 상황은, 제가 거리찬양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축제 때 학교 캠퍼스 안 길가에 공연 동아리들을 위한 야외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저와 그 친구와 다른 몇몇 사람들은 찬양 동아리원으로서 30분짜리 무대 공연을 신청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공연을 준비하던 도중 그 친구가 우리가 공연 중에 복음을 전부 전한다면 사람들이 듣다가 거부감을 가지고 자리에서 나가 버릴 것이라고 하면서 찬양만 하고 사이사이 간단한 멘트만 전하자는 요지의 말을 했었습니다. 저 말도 그 때 나온 것입니다.
저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좀 더 효과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맞지 않겠냐?”는 그 친구의 말 자체에는 동의하는 입장이었고 지금도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야외 공연의 특성상 우리가 초대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전도하고자 하는 사람과 지속적인 접촉이 힘들고, 시간도 30분밖에 없었기 때문에 복음을 최소한 4영리 수준으로라도 간략하게라도 선포하고 싶었습니다. 저와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선포를 통해 성령님이 역사하신다면 그것을 들은 믿지 않는 학생들 가운데 찔림과 또한 관심이 생길 것이라고 여겨서 그런 계획을 짰습니다. 또한 우리 동아리가 기독교 동아리라는 것은 공연에서 다 보여지는 만큼 복음에 관한 멘트를 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구요.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하기에 매우 좋은 기회라고 여겼는데 친구가 그런 식으로 말해서 이건 아니다 싶었던 것입니다. (혹시 이러한 생각도 여전히 오해라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제 설명 부족으로 목사님께서 또 긴 보충 댓글을 남기시느라 번거로우셨을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 성의를 다해서 쓰신 답변과 세심한 보충 설명까지 정말 감사드립니다. 평안한 하루 되세요:)

김유상

2011.05.20 19:05:27
*.234.37.2

좋은 질문 덕에 귀한 가르침 얻었습니다. 목사님의 답변을 읽을 때마다 성령님께 사로잡힌 자를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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