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8)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2,23)
한국 신자의 최고 약점
하나님의 임마누엘함이 신자를 모든 위험에서 지켜 보호하며 또 그 소원대로 이뤄주는 단순한 차원이 아니다. 신자의 일생에 걸친 삶의 만족의 기준이 오직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나아가 신앙의 근거가 그분이 수호천사처럼 신자를 인도하고 보호해 주기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만이 인간이 이 땅에서 살고 죽어야 할 확실한 이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이자 출발이 되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사실은 신자들이 가장 실패하는 부분도 되니 참으로 아이러니다. 아무리 힘든 환난 가운데 있고 세상 사람으로부터 상처와 핍박을 받아 억울해도 신자를 지키고 인도하여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이 그 곁을 떠나지 않는다면 염려하고 불안할 이유가 없어야 하지 않는가? 또 절대선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 함께 한다면 아무리 달콤한 죄악의 유혹이 닥쳐도 넘어갈 수 없지 않는가?
예수님은 핍박하는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기”(마10:28) 때문이라고 했다. 대신에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 해야 하는데 바로 그분이 신자와 함께 하고 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 관원들에게 끌려가 예수의 이름으로는 증거하지 말라고 재차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행5:41) 날마다 어디에 있든지 오히려 더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거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면 어떤 환난과 핍박에서도 오히려 기뻐하고 승리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모여서 말씀 보고 기도하는 데는 세계에서 최고다. 어떤 면에선 죽기 살기로 모인다. 한번이라도 빠지면 아주 큰 죄나 지은 것 같은 분위기다. 주일 낮과 저녁 예배, 수요 예배, 금요 찬양, 매일 새벽기도, 주중 구역예배, 또 교회에서 하는 각종 성경공부 프로그램, 등 거의 매일 교회에서 살아야 한다. 그 만큼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많이 듣고 배우고 접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 교인들의 실제 삶은 불신자와 거의 다름 없다. 오히려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 중에 안수 집사, 장로, 목사들도 수두룩하다. 임마누엘을 가장 많이 듣는 신자가 가장 자주 실패하고 있다. 참 모순이다. 천성적으로 한국 사람들의 품성이 나쁜가? 아니면 교회에서 잘못 가르치고 있는가?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그렇게도 자주 잊고 있다면 특별히 IQ마저 나쁜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침 삼키는 순간까지 놓치지 않으며 눈동자같이 지켜서 머리카락까지 세신바 되었다. 우리의 이름을 당신의 손바닥에 새겨 놓으셨다. 신자 또한 그 사실을 당연히 잘 알고 있고 믿는 바다. 설교 때마다 정말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고 또 듣는다. 그런데도 또 잊는 것은 머리가 나쁘거나 믿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당연한 사실이라서 그런가 싶다. 이제는 모든 신자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려 하지 말고(실제 잘 믿고 있지 않는가?) 오히려 왜 자꾸 잊어버리는가 그 원인을 따져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눈에 보이는 우상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쉐마(신6:4,5)를 써서 이마에 붙이고 다닐 수는 없다. 하나님이 분명히 있긴 있는데 있다는 것이 크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신자가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잘 잊어먹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관한 인식이 가장 떨어질 때가 언제인가? 아무래도 기도 응답이 장기간 안 될 때다. 새벽기도에 40일간 작정하고 매일 울부짖으며 기도해도 도대체 응답이 없으면 “하나님이 혹시 안 계신가? 그러나 그분이 안 계실 리는 없고 나의 모든 억울한 사정과 어려운 형편을 모르실 리도 없는데… 나에게서 떠났는가? 나만 모른 척 하시는가? 그럼 계속 기도해도 헛일이 아닐까?”라는 의심에 사로 잡힌다.
그럼 대체 어떻게 된 사정이겠는가? 안 계실 리 없다면 계신 것은 분명하다. 또 참 신자라면 그 곁을 떠나거나 외면할 리도 없다. 그렇다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단지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을 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당분간만 말이다.
모든 신앙 상의 실패는 하나님이 신자에게 임재하고 있는 것과 침묵하고 있는 것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침묵의 하나님도 임마누엘의 하나님인 것만은 분명하다. 반드시 기도 응답을 하든지 뭔가 은혜를 베풀어 주어야만 임마누엘이 아니다. 한국 교인들이 가장 많이 배워 잘 알면서도 자주 실패하는 이유는 성격이 제일 급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 인내하지 못한다. 작정 기도를 40일간 했으면 반드시 40일째 혹은 41일째에 응답이 있어야만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된다.
모세의 불만과 하나님의 변명
항상 함께 하는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장 잘 지적하고 있는 성경의 예가 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 하던 모세에게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으로 임재하셔서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 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구하러 가라고 명했다. 모세는 이 핑계 저 핑계를 5번이나 대며 그 명령에 따르기를 주저했다.
그가 처음으로 댄 핑계는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였다. 그러데 하나님은 모세가 누구라고 대답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대답했다. “정녕”은 정말로, 확실히,(really)라는 말이다. 시쳇말로 하자면 때려 죽여도 너에게 임마누엘 하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모세는 계속해서 “그들이 내게 묻기를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3:13)고 따졌고, 심지어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4:1)라고 말할 것이다라고 지레 짐작했다. 나아가 자기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4:10)고 또 다른 핑계를 대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4:11)고 대답했는데도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나는 가기 싫다는 뜻)(4:13)라고까지 뻗대었다. 급기야 하나님이 노를 발하시고 아론을 대변인 겸 비서로 함께 보내겠다고 하면서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은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4:15)고 재차 다짐했다.
이 기사를 접하는 우리는 모세가 너무 심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나님에게 너무나 불경스러울 뿐 아니라 소심하고 비겁해 보이기 까지 한다. 만약 우리가 그처럼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는데 그분이 그 자리에서 죽으라고 하면 “지금 당장 죽겠습니다” 복창하고 진짜 죽으려는 시늉이라도 할 텐데, 어찌 모세는 5번이나 핑계를 댈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모세가 우리보다 인격이 미숙하거나 믿음이 떨어져서가 결코 아니다. 성경을 그렇게 표면적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선 안 된다.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오고 간 대화를 자세히 살펴 보면 모세가 하나님에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고 그에 대해 하나님도 일관되게 대답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임마누엘”의 문제다. 모세로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보다 그 부분에 가장 자신이 없었고 그것을 알아챈 하나님은 계속해서 너와 함께 하겠다고, 나중에는 심지어 네 입과 아론의 입에도 함께 하겠다고 대답하신 것이다. 모세가 댄 다섯 번의 핑계는 한 마디로 바꾸면 “하나님은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에 있다가 지금에야 나타나선 앞으로는 함께 해 주겠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였다.
모세의 사연을 들어보자. “나는 바로의 궁전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처음에 나는 내 자신이 애굽의 왕자인줄 알았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종살이 하는 동족들이 너무나 안타까운데다 한 죄없는 사람이 학대 당하는 것을 보고 참다 못해 애굽의 관원을 때려 죽였습니다. 왜 그 때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만약 그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나를 따르게 해서 반란을 일으켰다면 벌써 그들을 구원할 수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나는 그 당시로는 얼마든지 그런 계획을 짤 수 있었고 또 그럴 능력도 갖추었습니다. 내 직속의 군대만 동원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습니다. 정 급하면 혼자서 바로를 암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나타나서 나를 보내려고 합니까? 지금 현재의 내 꼴을 보십시오.(내가 누구관대?) 그 일이 잘못되어 이 광야로 도망쳐 와서 지난 40년간 아이들이나 하는 양치기 신세로 보냈습니다. 이젠 따르는 군대 하나 없고, 칼과 창 같은 무기나 그것을 마련할 돈도 없지 않습니까? 주위에서 도와 줄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이 양 새끼들 끌고 가서 그들을 구원하라고 하십니까? 지난 80년간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다가 이제야 나타나선 나와 함께 해 주겠다고 하시는데 도대체 날더러 그것을 믿으라고 하는 말씀입니까? 아니 하나님이 나라면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모세는 80년간을 오직 한 가지 제목만을 두고 기도했지 않겠는가? “하나님 애굽에 있는 동족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그 일에 제가 기꺼이 쓰임 받겠사오니 저를 애굽으로 다시 보내어 주시옵소서.” 그런데 합계 80년, 애굽에서 사고 치고 도망쳐 온 이후로만도 40년간 그 기도에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응답이 있을 기미조차 없었다. 정말 이방 신을 안 믿은 것만해도 모세의 신앙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모세의 불만 내지 의심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나아가 “내가 너와 함께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침묵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내 때가 아니 되었던 것 뿐이지만 이제는 때가 되었다. 내가 너를 떠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모세의 임마누엘 하나님
모세 자신이나 우리가 볼 때는 하나님은 그를 80년간이나 완전히 떠나 있다 다시 나타난 것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문자적인 성경의 기록도 사실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에게 출애굽 구원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며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씀이 무엇이었는가?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4:19) 무슨 뜻인가? 살인자요 도망자였던 모세는 애굽으로 돌아가는 즉시 체포되는 신세였다. 그러나 이제는 너를 문제 삼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해 기소 중지자 신세였지만 공소 시효가 만기 되어 법적으로 하등 거리낄 것이 없으니 네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세로선 애굽에 있는 자기 동족의 구원이 급해 빨리 돌아가길 소원했지만 하나님의 때는 따로 있었다. 모세가 동족이 자기를 믿지 못하고 여호와가 보낸 사자가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핑계를 대었을 때, 하나님의 대답은 모세의 다 낡은 양치는 지팡이를 가리키며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4:2)고 되물었다. 또 하나님이 그것을 땅에 던지라고 해서 모세가 그대로 했더니 지팡이가 뱀으로 바뀌었다.
모세가 가는 곳마다 그런 기적으로 도와주시겠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온갖 분노와 상처와 실망에 휩싸여 괴로워 할 때에 하나님은 그 지팡이와 함께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자와 늑대가 양 떼와 그를 해치려 할 때에 그를 한번도 떠나지 않고 지켜준 자가 바로 당신이었고, 앞으로 세계 최강국 애굽의 바로와 상대할 때도 동일하게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는 약속의 징표로 보여 주신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스타워즈 영화처럼 황금 손잡이가 달렸고 레이저 광선총이 발사되는 그런 근사한 새 지팡이를 들고 나타나 모세에게 주었다면 분명히 갑자기 나타난 하나님이다. 지난 80년간 하나님은 모세와 별도로 다른 곳에 계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손 때가 묻어 닳을 대로 닳은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했다. 모세 너는 비록 내가 없어졌다고 의심하여 나를 두고두고 원망하였을지 몰라도 나는 너의 눈물을 보았고 너의 한숨을 들었다는 뜻이다. 그것도 양치기가 자나깨나 항상 바로 곁에 두는 그 지팡이와 함께 말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세의 산성이요 반석으로 하나님은 항상 임마누엘 하셨던 것이다.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4:20)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손오공의 여의봉(如意奉) 같은 것이 아니다. 양치기의 지팡이가, 모세가 임마누엘 하지 않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단순히 스스로 호신용으로만 사용했던 그 지팡이가, 이제는 단 한번도 임마누엘 하지 않은 적이 없었음을 확신하는 하나님의 지팡이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모세로선 지난 전평생을 갈등하며 씨름 했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 지팡이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도구가 되건 안 되건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기도가 장기간 응답되지 않는다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에 대해 의심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 임재해 계신 하나님이 침묵은 하시지만 결코 떠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특별히 길게 침묵하셨지만 모세 개인적으로는 그를 기억하던 애굽 사람이 다 죽어 없어질 때까지, 또 이스라엘 전민족적으로는 가나안 땅의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할 때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시느라 침묵하신 것 뿐이었다.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해서 당신의 사역까지 그만 두신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같은 양치기였던 다윗의 고백이 애굽을 향해 출발하는 모세에게도 틀림 없이 그대로 응했던 것이다.
기도를 바꾸어라
한국 신자들이 급하긴 급하다. 그래서 좋은 점도 많다. 우선 급한 일이 생기면 일단 하나님께 바로 맡기고 본다. 구체적으로 아뢰고 울부짖으며 간구한다. 특별 새벽기도회는 교회마다 문전 성시를 이룬다. 그런데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을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가? 미주알고주알 자기에게 필요한 것들의 목록을 전부다 읊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하나님께 온갖 청구서 뭉치를 갖다 들이미는 것 같다. 물론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까지는 절대 탓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런 구체적 간구 가운데 있는 속마음이 문제다. “내게 필요한 것 전부 다 말했으니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세요”다. 심지어 “알아서 안 해주면 십일조는커녕 집사 직분도 내려 놓고 교회까지 안 나올지 몰라요”라고 협박한다. 그러다 40일 작정 새벽 기도가 끝이 나도 아무 진전이 없으면 급한 성질 그대로 당장에 하나님이 없는 것 아닌가라고 의심부터 한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다.”(사59:1) “나는 여호와라 내가 말하리니 내가 하는 말이 다시는 더디지 아니하고 응하리라 패역한 족속아 내가 너희 생전에 말하고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12:25)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이 짧아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이 늦는 것이 아니다. 모세처럼 언젠가는 반드시 생전에 그 약속의 말이 응한다. 그러나 신자의 잘못이 그분과 신자 사이를 멀어지게 하고 더디 응답되게 하는 원인이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게 함이니”(사59:2)
신자의 윤리적 죄가 일차적인 장애가 아니다. 임마누엘에 대한 확신은 없이 단지 그저 내 필요한 것 아뢰기만 하면 응답해 주리라 착각하는 그 불신앙이 문제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한 신자를 하나님이 벌 주시지 않고 단지 침묵 하신 것만으로도 신자에겐 다행일 뿐이다.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은 기도 응답의 때와 방법까지도 하나님의 전적 주권 아래 두겠다는 뜻이다. 침묵하는 하나님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 침묵이란 때가 되지 않아 말하지 않는 것 뿐이기에 때가 되면 반드시 말을 한다는 뜻이다. 아예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벙어리이고 전혀 말을 않는 것은 그 관계가 완전히 끊긴 상태다. 전자는 우상이고 후자는 신자가 죄악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거나 성경의 하나님을 완전히 잘못 알아 이교도의 신처럼 찾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신자의 기도에 침묵하는 이유는 오직 두 가지 뿐이다. 기도의 내용이 당신의 뜻에 도저히 맞지 않거나,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과 때보다 당신이 보시기에 훨씬 더 유익하고 완전한 상황을 만드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자의 신앙의 목표 특별히 기도에 대한 관점도 그에 따라 당연히 바꾸어야 한다. 우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먼저 찾아야 한다. 또 그 일을 하기를 신자가 소원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다면 현재 기도하는 제목들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내는 작업이 기도다.
둘째는 당연히 기다리는 것이다. 내가 소원하는 것이 분명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작정한 기간 40일 동안 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그 40일은 기도하는 기간으로 잡은 것이지 응답의 기간, 기다리는 기간으로 잡은 것이 아니지 않는가? 모세처럼 살아 생전에는 응답이 되며 심지어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의 예에서 보듯이 죽은 후에도 응답되는 기도가 있다. 응답을 기다린다는 것은 응답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지 자기가 정해 놓은 기간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최후 통첩을 한 것이나 다름 없고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아니하신다.
나아가 신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다짐하거나 그분을 찾으러 나설 필요가 전혀 없다. 모세의 지팡이는 한시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그분은 신자의 침 삼키는 순간도 놓치지 않으시고 눈동자 같이 지키시지만 우리 눈에는 항상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습 가운데 임마누엘 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성질 급한 신자에겐 그분은 활동하기 보다는 오히려 침묵하는 모습으로 임재하는 때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신자는 반드시 침묵하는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그 침묵의 원인은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다. 그렇다고 함께 하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니니 임마누엘에 대해선 더 이상 의심, 불만, 불평을 가져선 안 된다. 그럴수록 오히려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골만 넓어질 뿐이다. 침묵하는 하나님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기도의 내용이 달라지며 신앙의 전체적인 폭도 넓어진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기다릴 수 있게 된다. 그것도 소망 가운데서 말이다. 하나님이 생전에 반드시 응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감 가운데 인내할 수 있으며 어떻게 응답하실지 설레임마저 생긴다.
모세가 하나님에게 무려 다섯 번이나 자기에게 주신 소명에 대해 핑계를 대며 주저하고 따진 것은 잘못도 불경한 것도 아니다. 신앙상의 갈등과 의심은 하나님과 씨름 하여 문제를 해결 받고 확신을 가져야 한다. 야곱처럼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하고 기드온처럼 표징을 구해도 된다. 작정 40일 기도가 하나님께 밀린 외상 값 받아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임재와 침묵의 하나님을 분명히 구분해 내는 씨름을 하는 기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이해 하는 작업이 기도다. 그리고 그분의 침묵을 확신하면 오히려 더 감사가 넘치고 풍성한 은혜 가운데 들어가게 된다. 기도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기다릴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당신은 지금 모세의 지팡이를 갖고 있는가? 혹시 갖고 있더라도 단지 양치기의 지팡이에 불과한가? 임마누엘 하나님의 지팡이인가?
(나무 십자가 교회에서 1/27/2002 주일 설교, 정리 3/21/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