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인생의 근본에 관심조차 없는 자를 전도하려면?
[질문]
이번에도 답답한 문제를 여쭤보려고 합니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할 때마다 동일한 답변을 듣게 되는데요. 죄의 문제, 인생의 문제, 죽음의 문제 등으로 대화를 하다보면 그들은 한 결 같이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적도 없고 살아있는 동안 즐겁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얘기들을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요? 제 생각에는 사람은 왜 태어나고 또 죽을 수밖에 없는지의 문제를 누구나 고민할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런 문제에 대해 아예 생각조차 안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원죄의 실상
문제로 삼은 사람들의 자세가 하도 갑갑하기에 질문도 갑갑해졌고 자연히 제 답변도 갑갑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말씀드릴 것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저부터도, 사실은 모태신앙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믿기 전에는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그것도 그분만의 절대적 주권에 따른 예정에 의한 일방적인 선물일 뿐입니다. 또 그런 놀라운 선물을 받은 자들은 평생을 그 은혜만으로도 그분께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돌려야 할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한 관심조차 없는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를 모르는 모든 자연인은 원죄 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죄나 그가 받은 벌이 유전으로 후손에게 다 전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을 미혹케 하여 그 영혼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춰지지 못하게 사단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고후4:4)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기는커녕 아예 찾지도 않게 된 것입니다. 결국 불신자는 이 땅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알기에 먹고 마시는 것에서의 풍요와 안락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이기에 영원과 절대자에 대한 감각은 어렴풋이 남아 있고 또 그분의 선한 형상을 닮아 의롭게 살려는 소원도 양심의 형태로 희미하게나마 작동합니다. 그러나 그 영적 시야가 여전히 눈앞의 사물에 가려져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전혀 없습니다. 영적 실재에 대해선 나면서부터 완전 봉사이기에 하나님을 더듬어서도 찾으려 하지 않고, 아예 그럴 수도 없습니다.
간혹 자신이 왜 태어났으며 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 몇 번씩 생각하고 따져도 보겠지만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근본적 문제인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도 허사라는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는 스스로는 절대 미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물질에서 우연히 진화되어 이 땅에 존재케 되었다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간혹 귀신이나 초자연적 기적을 체험한 이야기를 들어도 사람이 지어낸 설화거나 우연의 일치로만 치부합니다. 혹시라도 신령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쳐도 창조주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서 우주만물을 당신의 계획대로 다스린다고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조물주가 만물을 창조한 후에 저절로 굴러갈 수 있는 법칙을 부여한 후에 손을 놓고 있다고 간주합니다. 현재의 이 땅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는지라 필연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자기 노력으로 최대한 쟁취하여 누리겠다는 인생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분들에게는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권면은 정말로 바위에 계란치기요, 소귀에 경 읽기로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자 하나님의 존재성, 인간의 창조 기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 인간의 타락, 사후 세계와 심판의 실재 등은 이해도 안 되며 아예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으니까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전혀 씨가 안 먹힙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고대인에게 컴퓨터나 휴대전화 등은 실제 사진을 보여주어도 믿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어보고 싶어도 전혀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신자와 아예 차원이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우리가 바로 그랬던 자입니다.
모세와 바울의 기도
그럼 이들을 전도하려면 하나님이 살아계심부터 알게 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이 있고 오히려 그곳이 우주의 주된 실체임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예 그런 쪽은 문을 닫고 있으니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귀신을 보여주거나,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켜 보여줄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럼 전도가 전혀 불가능한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성인이 되어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는 직접적이고도 결정적인 계기가 거의 대부분 현실에서 겪는 고난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 경우도 그러합니다.) 일상적으로 누구나 겪는 희로애락이 아니라 정말 자기 힘으로는 옴짝달싹도 못할 정도의 군급하고도 절대적인 자기만의 인생 위기를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껏 자기가 믿고 따르던 무신론적 진화론에 바탕을 둔 유물론적 신념체계에 뭔가 하자가 있거나 무너져 내린다고 깨달아져야 합니다.
신자들이 불신자를 향해 “하나님에게 더 혼이 나봐야 정신을 차리지”라든지,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라도 제발 하나님을 믿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흔히 하는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아주 세게 인식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자기가 아닌 제 삼의 힘이 자기 인생을 주관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나마 눈을 돌리게 됩니다. 말하자면 사람은 말로 해선 알아먹지 않고 두들겨 맞아야만 깨닫는 존재라는 것이 원죄의 또 다른 뜻입니다.
물론 그런 말들은 상대의 영혼이 너무 불쌍하다 보니까, 뒤집으면 내가 현재 예수를 믿음으로써 누리는 영적 축복이 너무나 귀함을 절감했다는 뜻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큰 어려움을 겪더라도 예수 믿었으면 좋겠다는 열망의 표현입니다. 그렇다고 진짜 교통사고나 암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예수 믿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세나 바울 같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먼저 금송아지 사건으로 심판을 받게 된 이스라엘 백성의 중보를 위해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32:32) 또 동족 이스라엘이 복음 앞에 완강히 버티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진 바울의 기도를 보십시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둘 다 자기는 지옥에 떨어져도 좋으니 제발 동족을 구원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위대한 선지자요 사도인지라 상대로 크게 실패케 하더라도 구원해 달라는 우리의 기도 수준과는 역시 다릅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기도로서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거부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모세나 바울을 절대 지옥으로 떨어트리지 않을 것이며 또 그럴 이유도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동족을 향한 진정어린 눈물을 기쁘게 받으실 뿐입니다.
사단이 붙들고 있는 거대한 암벽 같은 불신자의 심령을 신자의 전도 노력만으로는 절대 쉽게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들 같은 기도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정말 상대의 심령을 이들처럼 애끓듯이 사랑해야 합니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는 안타까움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간절한 기도 없이 복음을 말로만 전하는 것은 아무리 논리정연하고 심오한 내용이라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성령의 중생시키는 권능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복음의 원리를 논리적으로 아주 정교하게 기록한 바울조차 이렇게 실토했지 않습니까?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환난이 말한다.
그런데 모든 신자들이 전도할 때에 기도합니다. 물론 성령이 역사하여 전도가 잘 이뤄지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습니다. 그럼 모세와 바울 같은 기도를 해야 합니까? 신자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까지 각오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과 같은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똑 같은 심령의 상태를 지니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들 같이 소명의식에 철저히 붙들려 미혹된 영혼에 대한 애끓음이 자기 심령에 가득 채워지지 않는 데도 기도 방식만 따라하면 가식이 될 뿐입니다. 또 솔직히 우리는 전도의 열정은 있어도 일상사에 바빠 그런 심정까지는 되지 못합니다. 심지어 상대에게서 기대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밉기까지 한데 감히 어떻게 그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지금 초점은 불신자에게 지금도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실히 보여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같은 연약한 믿음과 열정의 소지자가 그럴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도가 있습니다. 신자가 먼저 환난을 당해 그 환난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도하여 병이 낫고 망하던 사업이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주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그래봐야 불신자들은 현대 의술에 의지하면서 스스로 열심히 절제하고 노력하여 죽을병을 이겨내었거나, 전문가의 세밀하고 훌륭한 조언을 얻어 굳건한 의지로 사업에 재기했다고 간주합니다. 그게 아니면 우연의 일치쯤으로 여깁니다. 심지어 무당에게 빌어도 그런 일은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환난이 닥쳤는데도 소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는 모습을 주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사정이 너무 딱하고 고달플 것이 틀림없는데도 불안 초조 염려하는 내색은 없이 오히려 평강과 자유와 안식이 넘치는 것입니다. 광신자 같은 비상식적이고도 맹목적인 열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건전하게 사는데도 그러는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정말로 온전히 의지하는 모습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꼭 위급한 환난이 닥치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경제적 제반사정이 별 볼 일 없는데도 아주 보람차고 기쁘고 의롭게 사는 모습을 평소에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갖춘 자가 오히려 고민거리가 생기면 찾아가서 의논하고 싶어지도록 의연하게 사는 것입니다. 현실여건이 뛰어난 불신자에게 그에 도무지 비교가 안 되는 신자가 찾아가서 위로와 권면을 전해주어도 아무 거부감 없이 달게 받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신자를 보는 불신자의 속내에 이런 생각이 절로 들게 해야 합니다. “대체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저렇게도 평강과 자유와 안식이 넘친다면 저 믿음이야말로 진짜 온전한 것 아닌가? 아무 이름과 빛도 없는데도 정말 빛과 소금처럼 살다니 어떤 인생관을 가졌는가? 저분이 믿는 예수라면 나도 제대로 알아보고 믿고 싶다.”
다시 말하지만 성인이 되어 신자가 되는 대부분이 환난 중일 때입니다. 그러나 완전 불신자가 주위에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환난을 이겨내는 당당한 모습을 보지 않고 또 그런 분이 인도하지 않고 제 발로 교회로 나오기는 참 힘듭니다. 그렇다고 기도하여 병 나았다는 간증만 들으면 설령 교회 나와도 믿음을 오직 그런 쪽으로만 집중하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1:4-6)
신자는 환난 중에도 안식을 잃지 않는 대신에 환난 중에 있는 남들을 위로해주어야만 합니다. 고난을 받는 또 다른 이유가 “너희의 구원을 위함”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자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아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환난을 잘 극복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환난 중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확실하게 붙들어서 성도를 아름답게 보호 인도하는 하나님이 실재(實在)함을 불신자로 깨닫게 하라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두 가지 죄악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불신자 중에는 환난을 스스로의 절제나 노력으로 초월하는 자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청빈낙도 내지는 무소유의 삶을 사는 자도 있습니다. 환난을 겪을 여지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또 꼭 환난 중에 있는 자만 전도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질문자님이 궁금해 하신 대로 인생의 근본문제조차 관심을 갖지 않는 자에게 환난을 극복하는 모습만으로는 전도에 부족합니다. 환난을 인생에서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로 간주하고 그저 그런 양하고 사는 불신자 또한 많기 때문입니다. 환난 자체를 그리 심각하게, 혹은 아예 문제시 하지 않는다면 환난을 통한 전도도 무망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인생의 근본문제, 특별히 죽음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겉으로는 전혀 안 그런 척 해도 속으로는 다들 고민합니다. 아무리 무신론자나 진화론자라도 조금만 객관적으로 판단하면 절대자는 있는 것 같고 또 진화의 명백한 증거 또한 턱없이 부족하다는 정도는 감지합니다. 스스로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해답이 나오지 않고, 양쪽의 주장을 들어보면 그런대로 다 일리가 있는 것 같고, 눈에 딱 부러지게 드러나는 하나님이니 진화의 증거가 없으니 단지 그냥 모르는 체, 관심 없는 체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게 하고 당신의 생기를 직접 불어 넣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모든 피조물 중에 종족보존과 번식을 목적으로 본능에만 의존하는 삶을 살지 않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진선미를 삶에 접목시키며 눈에 안 보이는 거룩한 가치를 창출하여 실현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살아서부터 죽음에 대해 미리 고민하며 영원을 상고하고 절대자에 대해 인식할 수, 신앙의 형태를 갖추는 것과는 상관없이, 있습니다.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위급한 일이 닥치면 자기도 모르게 신을 찾아 간구합니다.
물질에서 우연히 진화되어 여전히 물질로만 생을 마칠 존재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억지로 부인하고, 사단이 미혹한 것이지만, 살려니 항상 허망하며 갈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돈과 명예와 권세를 아무리 다 갖추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세상의 것은 오히려 채우면 채울수록 더 모자람을 느낄 뿐입니다.
그럼에도 각자 나름대로 그 부족감과 갈급함과 허망함을 세상의 것으로 채우려는 온갖 시도를 하고 있고 또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로선 시공간으로 제한 받는 이 세상의 보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도덕 철학 종교 같은 형이상학적인 방식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인간의 마음에서 이뤄지는 세상의 것입니다. 자기가 선호하는 방식에 따라 쾌락, 지성, 예술, 철학, 종교 등에 빠져보지만 확실한 해답을 얻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렇다고 솔직히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염세주의자, 불가지론자, 무신론자라는 그럴싸한 명칭 아래 자리매김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자포자기하며 살든지 범죄를 저지르든지 마약에 빠지기도 하는데 이 또한 사실은 여전히 충만하지 않은 자신의 내면을 어떤 방식으로든 채우려는 몸부림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사람 중에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자신만의 고유한 정의를 이미 내린 사실상의 종교인 내지는 믿음의 사람이 아닌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단지 그 믿음의 내용만 천차만별일 뿐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2:13)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그것도 당신의 교제 대상으로 삼아 만물 중에 유일하게 생령(生靈)으로 만들어주셨는데도 그분을 외면, 부인, 저주해선 절대로 참 인간답게 살 수 없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며, 세상에 악이 득세하는지 등에 관한 해답을 아무리 해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결코 그 내면을 진정한 충만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분을 알아 나가며 언제 어디에 있든 그분께 진정한 경배와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것 말고는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길은 없습니다.
신자는 이제 하나님 안에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 가운데서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여 참 안식을 얻은 자입니다. 반면에 불신자들 모두는, 아무리 극악무도한 흉악범이라도, 아직도 그것을 찾아가는 구도자인 셈입니다. 다른 말로 불신자들도 그 솔직한 속내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 확실하다면 그분을 만나서 믿고 싶은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들을 겉으로 볼 때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씩 계속해서 치면 낙수 물이 바위에 구멍을 내듯이 반드시 그 심령에 균열이 가게 마련입니다. 질문자님처럼 실망하고 의아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슬림을 본받아라.
최근에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인은 줄고 무슬림은 오히려 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강단에선 복을 준다고만 외치고, 교회 안에선 분쟁이 끊이지 않아서입니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자가 줄고 있는 현상에 대한 설명일 뿐입니다. 반면에 아직도 여성을 학대하며, 종교 간의 차별을 하며, 비합리적인 규정들이 잔존해 있으며, 일부이긴 해도 수시로 테러를 자행하는 데도, 무슬림으로 개종하는 자가 늘어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은 되지 않습니다.
무슬림이 늘어나는 이유는 그들에게선 절대자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육안으로도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른 아이 여자 할 것 없이 코란대로 정확하게 따르며 살 뿐 아니라 알라 신을 위해 기꺼이 목숨마저 던집니다. 비록 흔쾌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일부 있어도 그런 믿음을 보인다면 뭔가 절대적인 것이 그 종교에 있거나 그 신자가 찾았을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가 마치 염병이 퍼져나가듯이 단시일에 최초의 세계적 종교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십자가 복음이 인간을 구원할 유일한 절대적 진리로써 죄인들의 심령에 분명히 각인되도록 성령이 역사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역에서의 역사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신자들이 온갖 핍박을 받고도 천국의 소망을 견고히 붙들고서 평강을 잃지 않았고 도리어 불신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며 섬겼기 때문입니다. 또 산 채로 불에 타거나 맹수의 밥이 되어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며 찬양하는 모습을 불신자들이 보고선 너무나 큰 정신적 쇼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선 절대자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지녔다는 사실이 확실히 보였던 것입니다.
인간이 구도의 길을 간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특별히 목숨마저 걸 수 있는 절대적 진리를 찾는 것입니다. 또 찾으면 당연히 그렇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초대 교회 신자나 지금의 무슬림은, 그 찾은 진리의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분명 진리를 찾은 자로 보인 것입니다.
절대적 진리란 절대자 하나님에게서만 나옵니다. 아니 그분이 바로 절대적 진리입니다. 말하자면 신자는 그 절대자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분명히 만났고 지금도 동행하고 있으며 미래의 영원한 소망도 오직 그분에 의해 완전히 보장되어 있음을 불신자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현실적 환난과 고통 앞에서만 당당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와 쾌락과 사단과 죽음 앞에서 절대적으로 더 담대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불신자들로 신자들이 어떤 일에도 평강과 안식을 잊지 않게 하는 믿음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게 만들어야 합니다. 나아가 절대적 진리에 자기 목숨마저 걸면서 정말로 의롭고 거룩하게 살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어 그 진리를 자기도 알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게 해야 합니다.
요컨대 신자는 불신자들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수도원에 들어가 예배, 찬양, 말씀, 기도에만 전무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불신자는 자기 자신만을 앞세우고 높이는 이기적, 물질적, 가시적, 철학적, 한시적 영역 안에 갇혀 산다면 신자는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존재와 삶과 인생이 이타적, 비물질적, 비가시적, 영적, 영원한 차원 안에 항상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불신자도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한 고민은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철학적인 접근을 하고 그칩니다. 여전히 연약하고 죄에 찌든 인간이라는 한계 안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고 능력만으로 하나님이 부여하신 문제들을 풀어보려니 도무지 해답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의 근본 문제는 오직 영적으로 접근해야만 해결될 수 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전도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바로 이 간단한 사실부터 그들로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신자가 신령하고 거룩한 모습만 보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 전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말로 풀어 전하는 것이 요체이지만 자신이 죄인이기에 구원을 얻고 싶은 소원은 있는데 어떤 길이 좋을지, 혹은 옳은지 모를 때에만 효력을 발휘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하기는커녕 인간의 근본 문제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 자에겐 아직 예수는 전혀 관심 밖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의 실재성(實在性)부터 증거해 보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신자가 하나님의 실체를 보여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신자 안에서 언제 어디서나 분명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길 밖에 없습니다. 또 그 길은 실제 삶에서 절대자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대로 살고 있는 모습이어야만 합니다. 환난과 죄악과 사단과 죽음을 담대하게 맞서 싸워 이기면서, 자기가 현실적으로는 어떤 형편에 있든 주위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중간 중간에라도 기회가 닿거나 상대의 심령에 조그만 틈새가 생기면 십자가 복음을 풀어서 전해야 합니다. 구원은 단순히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떠났던 죄에서 구원 받아 되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0/17/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