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의 비결이 따로 없다.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禍)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9:16)
교인들 중에는 믿음은 좋은데 전도는 잘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복음을 체계적으로 말로 표현하는 기술이 모자라든지, 남과 특별히 잘 모르는 분과는 쉽게 사귀지 못한다든지, 하는 일이 너무 바빠 도저히 그럴 짬이 없다든지, 심지어 구원은 예정이 되어 있기에 꼭 전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등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그런 장애를 없애는 전도 훈련을 시킵니다. 이를테면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기 좋게 간략한 원리로 외우게 한다든지, 부끄러움을 잘 타는 성격을 교정하도록 한다든지, 일터에서 업무 중에 만나는 사람에게도 전도하는 요령이나 전도를 꼭 해야 하는 이유 등을 가르치는데 어느 정도는 분명 효과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훈련은 전도를 반드시 기독교 교리를 남에게 전하여 기독교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신자의 의무라는 측면에서만 접근합니다. 문자 그대로 “도를 전하는 것”(傳道)으로 간주해 성경에서 말하는 전도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간과해 버립니다. 자연히 표면에 드러난 장애를 제거하고 필요한 기술적 요령을 습득시키는 것을 우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도란 신자의 의무라기보다는 신자가 된 증거입니다. 그렇다고 전도하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전도가 복음을 전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고 복음의 연장, 나아가 복음 바로 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복음은 그 본질상 자연히 전도가 되는 특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복음을 정말 제대로 알면 전도는 응당 따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피터라는 미국 목사가 한 대학교에서 구원에 관한 강연을 했더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어떤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그 청년은 신자들의 삶 속에서 자기가 본 것을 자기도 진심으로 갖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싶은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전도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자꾸 주저하게 된다고 실토했습니다.
그래서 피터 목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전도가 꼭 신자의 의무가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놓인 청년은 그 자리에서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숙사로 돌아가자마자 예수를 증거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게끔 성령이 역사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전도를 “부득불 할 일”로서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전도는 신자가 반드시 행해야 할 의무로서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 받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사도로서 세움을 받은 자기의 소명이 너무 신성하고 막중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지금 그 소명에 온전히 헌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원어적인 뜻도 의무를 강조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부득불 할 일이란 반드시 필요한 긴급한 일이기에 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것입니다. 또 화가 있을 것이라는 말도 벌 받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너무나 슬프고 안타깝다는 감탄사적 표현입니다. 너무나 소중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심령에 부담이 되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지경까지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 바울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 고백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어도 꼭 전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나 바울이 그렇게까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좋거나 열정적인 성격이라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그 이유를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7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 다시 하나님이 명하신 신자의 의무라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직접 받은 말씀이 실제로 있고 그 말씀의 성격상 전하지 않고는 못 견딘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기독교는 문자 그대로 염병처럼 번져 나갔습니다. 복음 자체에 전도의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는 아직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으로. 기독교 교리가 체계적으로 정리되기 전이었습니다. 그럼 그들은 대체 무엇을 어떻게 전했던 것입니까?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요일1:1-3)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에게 듣고 보고 만진 것을 전했다고 합니다. 단순히 그의 제자로서 함께 지냈을 때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그분이 바로 영원한 생명이기에 그분과 사귐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게 된 것을 증거했습니다. 십자가 구원을 자기에게 실제로 일어난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체험으로 주위 사람과 나눈 것입니다.
신자들이 간증은 그런대로 신이 나서 잘 하지만 막상 전도하라고 하면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간증은 자신이 직접 겪은 생생한 체험이라 따로 연습해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있었던 그대로를 이야기하면 그만입니다. 반면에 전도는 교리를 외워야 하고 또 여러 예상되는 반발에 답변할 신앙 실력이 도무지 안 된다고 여겨 주저하지 않습니까?
전도 훈련을 받기 이전에 전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부터 바꿔야 합니다. 전도란 기독교의 객관적 교리를 전하는 것이라기보다 예수를 만난 개인적 체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여 병이 나은 체험을 나누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를 개인적으로 만났다는 의미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자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 그분의 신령하고도 거룩한 자녀로 변화된 모습을 내보여야 합니다. 예수를 믿기 전과 후의 삶이 죽음과 생명으로 극명하게 대조되어져야 합니다. 비유컨대 물에 빠져 익사하기 직전 어디에선가 나타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을 사람들에게 자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아무리 기독교 진리를 잘 설명해 줄 수 있다한들 그 진리에 모든 것을 걸고 사는 모습이 본인에게 없다면 그 전해진 진리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신자가 전해야 할 복음은 예수님 당신이자 그분이 내 대신 지신 십자가입니다. 그분의 보혈이 바로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는 능력입니다. 복음 안에 구원의 능력이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능력을 실제로 맛 본 자라면 주위에 어떤 형태로든 복음을 소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자꾸 말로서 교리를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주저하게 됩니다. 예수를 개인적으로 알고 지금도 그분과 사귀는 것이 너무나 좋기에 단순히 그렇다고 남에게 표현하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그것도 못하면 그야말로 신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8/22/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