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로서 저의 소명은 무엇입니까?

조회 수 4004 추천 수 112 2008.05.10 01:3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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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로서 저의 소명은 무엇입니까?

[질문]
      

오늘도 목사님의 글을 보면서 오래 전부터 “내 소명은 과연 무얼까?”라고 생각하면서도 알지 못했던 것을 재점검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제가 소명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았거나 하나님께 여쭙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생명을 허락받고 있는 사람이 소명을 모른다는 것은 정말 답답하고 무의미하기에 힘든 삶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건강한 육신과 행복한 가정,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없이 감사하며 행복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 중에서도 살아있는 본질(저라는 사람의 소명)을 모른다면 껍데기 같은 인생뿐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늘 목사님이 말씀해주셨듯이 모든 것을 걸고 절박하게 하나님 앞에 여쭙지 못했기에 모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저를 모른다고는(제가 구원을 못 받았다거나)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제가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제게 허락하신 성령님의 가르치심 때문에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고 또 논리적으로 설명 드릴 수 없지만 제게 허락된 구원의 확신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소명을 못 깨닫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요? 나아가 제 삶의 모든 실수와 실패조차 하나님께서 제 삶 속에 이루시고자 하는 그 목적과 과정 속에 있었다면 저는 그런 일들을 통해서 어떤 것을 깨달아야 할까요?

[답변]

목사와 평신도의 소명이 다르지 않다.


“혹시라도 하나님이 택하여 부르셨고 예수의 은혜로만 믿게 된 것을 확신하면서도 그분의 내 인생을 향한 뜻은 모르겠다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화목케 하는 직분을 받았기에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덕을 선전해야만 합니다. 그 뜻을 내 삶에 접목 시키는 구체적인 방법은 모를 수 있고 심지어 이런 저런 이유로 전혀 실천도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 목표까지 모른다면 아직도 참 복음 안에 들어 있지 않다는 반증일 뿐입니다.” 질문자님께서 읽으셨던  제 다른 글의 소명에 관한 부분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서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고 마음먹은 신자로서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갈등해보지 않은 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신자에게 요구하는 소명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성경에서 말하는 소명을 모르고 있거나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소명에 뭔가 착오가 있다는 뜻입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고후: 15,17,18,20)

그래서 신자는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또 신자가 정말로 그 일을 자신의 일생의 소명으로 붙들고 헌신한다면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로 항상 이기게 하신다고 합니다.(고후3:14) 그리고 그리스도의 냄새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서 나지만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고후2:15,16)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신자는 불신자에게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죽음이 갈라지는 유일한 기준은 예수님의 십자가뿐이라는 말씀을 전해야 할 뿐 아니라 신자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도 이미 영생을 소유한 자다운 모습을 확실히 보여 주어야 합니다. 신자가 처하고 가진 세상의 것들이 어떻게 되어도, 말하자면 환난이 닥쳐도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오히려 더 키워 즐거워하며 신령하고도 거룩한 생명력이 넘치게 살아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고 그가 속한 공동체를 섞지 않게 만드는 소금이 되어야 하며, 나아가 그 이웃과 공동체도 풍성한 새 생명을 나눠 갖도록 자신은 한 알의 밀알로 썩어 없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가는 곳마다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신자가 받은 공통된 소명이자 인생의 목표입니다. 표현을 여러모로 달리 혹은 더 자세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소명은 절대 없습니다. 목사, 전도사, 선교사, 장로,  평신도라고 해서 소명이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그 소명을 자기 삶에서 실현해 내는 구체적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결국 많은 신자들이 자기가 받은 소명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고민하는 이유는 바로 이 소명을 실천해내는 방식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소명을 실천하는 방식은 오직 두 가지다.  

또 다른 문제는 많은 신자들이 소명을 실천하는 방식에 관해서도 몇 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종교적으로 신령해야 하고 특별히 수고하며 희생하는 모습을 띄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복음을 전하고 기도해 주며 구제와 선행으로 섬겨서 교회로 인도하는 일이 아니면 신자의 소명이 아니거나 그것을 실천하고 있지 않다고 오해합니다. 결국 목사나 선교사가 되어야만 소명을 가장 잘 실천하는 길인 양 착각합니다.

말하자면 소명을 실천하는 방식을 자신이 종사하는 일의 종류로만 이해합니다. 소명이 직업에 따라 결정되면 성스러운 직업과 세속적인 직업으로 이분하는 우에 빠지게 됩니다. 강도, 소매치기, 마피아, 마약판매, 매춘 등과 같이 확실하게 비성경적인 직업을 제외하고는 모든 직업이 하나님이 주신 성스러운 것으로 소명을 실천하는 방식입니다. 한 마디로 신자가 꼭 목사 선교사가 되지 않고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어도 이미 소명은 받았고 또 소명을 실천할 구체적 방식도 보유한 것입니다.
  
신자가 소명을 실천하는 방식은 전문 사역자가 되느냐 마느냐 두 가지로 이해해야 합니다. 전문사역자(Clergy)란 복음을 직접적으로 증거 하는 일 자체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는 자입니다. 그렇지 않은 자(Laymen, 흔히 말하는 평신도)는 자기가 가진 세속적 직업을 통해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 증거 하는 자입니다. 후자의 경우 직업의 종류가 바뀌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래야 합니다. 또 양자 모두 평생을 두고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함은 두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복음을 더 깊이 있고 상세하게 전하되 후자를 말씀으로 양육 성장 시키는 역할도 맡아야 합니다. 둘 다 동일하게 복음의 군사이긴 하되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전자는 장교라면 후자는 일반 병사입니다. 군대는 상급자의 명령을 복종해야 하는 엄격한 계급 체계가 있고 또 계급에 따라 권한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교회에선 전문사역자와 평신도 간에 계급과 권한의 차등은 일절 없되 맡은 역할만 다를 뿐입니다. 사역자는 단지 후방에서 평신도를 가이드 내지 가르치는 일을 주로 하는 반면에 복음을 전하는 최전선은 평신도가 주로 담당한다는 뜻에서 장교와 병사로 비유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평신도나 사역자가 꼭 복음을 직접 말로 전해야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땅 끝까지 가서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했다고 복음의 불모지를 찾아가 선교해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의미하는 땅 끝은 복수로 지칭된 여러 곳이었고 또 유대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를 거쳐 이방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웃에서부터 그리스도를 증거 하면 됩니다. 예컨대 평신도가 여름휴가를 취소하고 자비량으로 해외 선교를 가야만 소명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고 했습니다. 종교적으로 가장 경건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는 “화 있을진저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0고 지적했습니다. 종교적 행위만 소명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웃 앞에 신자다운 인격과 행동을, 특별히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여야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평신도가 세속의 직업을 통해 소명을 실천하는, 즉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방식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매 가게를 하면 친절, 신용, 품질, 정직에서 최고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손님을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구태여 신자라고 밝히지 않아도 착한 행실을 보고 손님이 먼저 당신은 다른 가게 주인들과 전혀 다른데 혹시 예수 믿는 신자가 아닌지 물어볼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삶을 통한 간접 증거 방식입니다.

또 상대에 따라 적당한 기회가 닿으면 복음을 직접 증거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직접 소개해도 될 만큼 영적으로 갈급해 있거나 마음이 어느 정도 열려 있는 손님에게는 때맞추어 아니면 일부러 그런 여건을 만들어서라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가장 영적으로 유익하고 적합한 교회와 전문사역자에게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대로 이 둘을 동일한 비중으로 중요하게 여기되 현실적으로 상대의 형편과 여건에 따라 적절히 또 성실히 실천해야 합니다. 어느 하나도 등한히 해선 안 됩니다.  선행만 하면 신자의 인격과 의는 칭찬 받을지 몰라도 상대가 예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습니다. 반면에 행동은 선하지 않고 제멋대로이면서 전도만 하면 종교적 광신자 취급밖에 받지 못합니다.

평신도가 소명을 실천하는 방식을 한 단어로 줄여 말하면 ‘선행’과 ‘전도’ 두 가지입니다. 그 둘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하느냐는 각자가 처해진 상황에 맞추면 됩니다. 신자더러 자기 재산을 팔아가면서까지 구제 사업에 진력하거나 또 회사 일은 뒷전으로 치더라도 전도하러 나서야 한다고는 성경 어디에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또 그렇게 한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장 기본적인 명령

그런데 사실은 평신도와 사역자를 불문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소명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주신 가장 기본적인 명령이기도 합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2:24) 바로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가정 안에서부터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방식입니다.

가정을 이루는 것은 성인이 되면 불신자도 다 하는 일인데 어떻게 신자의 소명이 되느냐고 반발할 수 없습니다. 신자는 신자다운 가정을 이뤄나가야 합니다. 단순히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는 가정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가정으로 가꿔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굳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고 말한 특별한 까닭이 있습니다.

사실은 가정을 이루라는 명령 이전에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최초로 주신 명령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인간은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그분의 뜻대로 거룩하게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그분의 뜻을 알 수 있도록 당신과 교통할 수 있는 영혼을 부여 받았습니다. 또 선악과를 제외한 동산 나무 모든 실과를 먹어도 된다는, 즉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부여 받았습니다. 따라서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 당신의 권위에는 도전하지 말고 당신의 대리인이자 피조물로서 당신을 온전히 경배하고 진정으로 기뻐하며 이 땅을 다스리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최초의 이 두 명령을 연결해서 생각하면 이 땅에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임하게 하는 소명을 실현하는 제일 기본적인 방식이 바로 가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그 원죄 하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의 영혼이 타락하여  하나님과 교통하는 방도가 끊겼습니다.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 이 땅에서의 형통과 안락만을 목표로 사는 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죄인들끼리 결혼한 가정에선 하나님의 최초 명령대로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릴 방도 자체가 원천적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불신자 가정에선 필연적으로 부부사이나 부모 자녀 간에도 서로의 자존심을 세우기 바쁘며 오직 세상에서의 출세와 풍요만을 목표로 합니다. 개중에는 서로 화목 하게 지내는 가정도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실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남에게 큰 피해 안 주고 죄를 안 짓는 정도로 세상의 윤리 기준에는 합당할지 몰라도 온전한 십자가 사랑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아니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신자의 가정은 달라야 합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이 땅을 창조하여 운행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한 사람 빠짐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반드시 통과해 철저하게 타락했던 옛사람은 깨어지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창조 당시에 그분이 계획했던 참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되어 그분이 바라던 이상적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끄러울 것 하나 없도록 예수님의 참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인간 부모가 아닌 예수님만이 그 가정과 가족 개개인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실현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그 회복되어진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주위에 조금씩 흘러들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왜곡된 인간관계와 피조세계를 다시 올바른 상태로 되돌려야 합니다. 신자는 그분의 대리자가 되어 자기가 소속한 모든 집단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공동체로 바뀌도록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합니다.

요컨대 신자가 반드시 결혼하여 하나님의 가정을 이루어서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독신으로 살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드문 예외일 뿐입니다. 깊은 오지에서 생명을 걸고 선교해야 한다든지, 평생에 걸쳐 오직 성경을 연구하는 은사를 주었다든지, 신체적인 결함이 있다든지, 도저히 피치 못할 경우를 빼고는 누구나 결혼해야 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인간은 반드시 더불어 살도록, 바꿔 말해 서로 사랑하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동시에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방도가 바로 가정입니다. 또 가정을 이루어봐야 인간이 하나님 뜻 안에서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지 그에 비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풍성한지 더 세밀하게 깨달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부터 참 사랑을 실천하는 법을 훈련 받아 가정 밖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할 때에 그 사랑으로 섬겨 더 잘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아니 영원토록 모든 신자 가정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천대까지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어야”(엡2:7)만 합니다. 아들딸을 온전한 믿음의 세대로 세워서 그들의 자녀 또한 동일하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도록 해야 합니다.    

은사를 소명과 혼동하지 말라.

거듭 강조하지만 신자는 자신의 소명에 대해 너무 거창하고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꼭 아프리카에 선교하러 가지 않아도 됩니다. 자신의 직업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한 마디로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그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세속적 직업을 가지는 것이 바로 소명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단 가정과 직업 자체가 목적이 되어선 안 되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수단과 통로로 삼는다면 말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열심히 돈을 번다고 해서 소명과 관계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은 오직 자신을 위해 벌고 자신을 위해 씁니다. 그러나 신자는 남을 위해서 돈을 벌고 남에게 써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구제나 선행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목적으로 그래야 합니다.

불신자의 자선은 상대의 현실적 형편이 불쌍해서 도와주는 것으로 그칩니다. 반면에 신자의 구제는 그들의 영혼이 가난한 것이 안타까워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통로로 재물을 사용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오히려 물질로 도와주지 말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세상에선 재벌 회장이 노숙자에게 도움 받을 일이 전혀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선 말단 직원이 사장을 위해 기도하고 영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소명을 가장 오해하고 있는 직업 계층이 하나 있습니다. 가정주부에게 당신의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신자든 불신자든 십중팔구는 그냥 무직(無職)이라고 대답합니다. 불신자는 몰라도 신자가 그러면 그 자체로 소명에 대해 잘못 오해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가정에서 하는 허드레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며 교회에서 기도모임, 성경공부, 구역예배, 노방전도, 해외선교 등에 참여해야만 소명을 실천하고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신자가 자기 직업이 주부(Housekeeping)라고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다는 뜻은 지금 자기가 주로 하고 있는 일을 통해 소명을 실천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자 주부는 엄마와 아내의 역할을 잘 감당해 가정이란 울타리를 아름답게 지키는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아내로서 주께 대하듯 남편에게 순종하며 자녀를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된장찌개 하나를 끓여도 주님의 사랑과 섬김이 넘쳐야 합니다. 그래서 음식을 준비할 때나, 식구들이 그것을 먹을 때나, 먹으면서 담소할 때나 주님의 은혜로운 인도가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매사를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마쳐야 합니다.

남편이 밖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자기에게 잘못을 범해도 바가지 대신에 더더욱 말씀과 기도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기독교 진리에 입각하여 자녀들의 품성과 인격을 개발시켜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성경적으로 바로 설 수 있게끔 말씀과 실제 사는 모습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현실적 형편과는 상관없이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신자 주부는 가족들의 건강과 일상생활 뿐 아니라 그 정신과 영성까지 집안 내부에서부터 조화와 균형을 맞추어 주는 일이 바로 하나님께 받은 소명임을 확신하여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직업은, 아니 소명은 주부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한 사람의 성도로서도 당연히 어려운 이웃을 도우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말씀으로 권면해야 합니다. 자기 소유와 시간을 나눠서 진정한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물론 기회가 되면 직접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거룩한 다스림을 받는 자기 가정의 모습부터 그들 앞에 확실히 내보여야 합니다. 부부사이, 부모자식 간의 관계가 너무나 은혜가 넘쳐 남들이 저절로 부러워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의 가정은 단순히 화목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에 입각해서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야 합니다. 간단한 예로 아이들을 일류대학을 나와 출세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도록 키워야 합니다. 하늘의 보배를 이 땅에 심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야 합니다. 주부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이런 기본적인 소명을 제쳐두고 다른 곳이나 일에서 소명과 실현방식을 찾아 나서선 안 됩니다.  

미국에 홀로 되어 은퇴한 할머니 신자가 한 분 있었습니다. 그동안 해오던 규칙적인 신앙생활은 여전히 성실하게 행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 고작 교회 생활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담임 목사에게 문의했습니다. 목사는 할머니가 가장 자신 있게 남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되물었습니다. “그야 맛있는 숩(soup)을 끓이는 것이지.”라고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그럼 내일부터 숩을 끓여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시지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일 것입니다.”라고 권했습니다. 그 할머니는 그 후 매일 즐거운 마음으로 숩을 끓여 병들고 힘든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고 또 그것이 계기가 되어 불신자를 만나면 직접 전도도 했습니다.

이 할머니의 소명도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미 자식들은 다 독립하고 홀로 되어서 은퇴했기에 주부로서의 생업은 없어졌습니다. 대신에 숩을 끓이는 일이 주업이 되었습니다. 그 주업을 통해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면서 복음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소명을 실현하는 방식이었을 뿐입니다. 할머니가 정작 몰랐던 것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이 아니라 자신이 그 소명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방식이었습니다.

질문자님을 비롯해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할머니와 동일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해야 가장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또 제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 소명을 실천하는 방식이지 소명 자체가 아닙니다.

소명을 실천하는 방식은 오직 생업입니다. 또 그 생업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와 재능과 그동안 자기가 쌓아온 지식과 경험들이 가장 잘 조화되어 최선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종류면 됩니다. 쉽게 말해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으면서 그 일을 할 때 즐거운 일이면 됩니다. 나아가 설령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직업을 찾지 못했다 할지라도 진정으로 자기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덕을 선전하겠다고 헌신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어떤 일이든 감당할 능력을 주시며 그 가운데서 보람과 기쁨도 함께 거둘 수 있게 해주십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신자의 소명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본인부터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평생을 두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분의 영광만 소원해야 하고, 변화된 품성과 삶으로 주위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고, 특별히 성인이 되면 결혼하여 가정을 이뤄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는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를 이끌고, 주위 불신자들에게 직접적으로는 말씀으로 복음의 진리를 전하고 그와 동시에 간접적으로는 착한 행실로 그리스도의 덕을 선전해야 하며, 자기가 속한 공동체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임하도록 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나 오직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실패와 소명

마지막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많은 실패에 과연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특별히 신자의 일생에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뜻이 있으며 신자가 실패를 겪는 것마저도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라면 신자는 그 실패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궁금해 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실패와 하나님의 소명과 상관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 드리겠습니다.  

신자의 실패와 환난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뜻은 물론 그 믿음을 연단시켜 정금 같이 변화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미 확고하게 서있는데도 실패가 자꾸 거듭되니까 그 외의 다른 뜻이 또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하나님이 싫어하는 길은 아닌지 자연히 의심이 들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현재를 사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시간 밖에 계셔서 시간의 제약을 전혀 받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살아서 죽을 때까지 한 눈에 다 보고 계십니다. 범사가 그분의 절대적 주권 아래 이뤄집니다. 그래서 각 개인 신자에 대한 그분의 계획과 뜻은 분명히 따로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과 뜻이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스스로 판단, 선택, 실천하는 일에 미리부터 영향을 끼치거나 어떤 제한을 두지는 않습니다. 신자는 여전히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신자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사전에 알지 못하고 자의로 결정하여 일을 했어도 여전히 그분의 절대적 계획과 뜻 안에서 행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임의로 행동해도 그분의 절대적 주권과 모순되거나 상치되지 않습니다. 요컨대 신자가 혹시 자기가 하는 일이 그분의 계획과 뜻에 어긋나면 어떻게 되나 미리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신자 앞에 일부러 실패와 환난을 미리부터 계획해 놓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판단 착오와 죄성과 탐욕에 사로 잡혀 실패와 환난을 자초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신자는 실패를 통해 하나님의 뜻도 물어야 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먼저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불신자처럼 자신의 현실적인 실력도 점검해야 할뿐 아니라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성찰해야 합니다. 탐욕과 쾌락과 죄악을 쫓느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대신에 사단의 방해를 불러들이게 된 빈틈이 없었는지 철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정한 당신의 자녀라면 그런 실패조차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이끄시는 거룩한 통치와 섭리 아래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주십니다. 당신의 뜻과 계획이 이뤄지며 신자에게도 합력해 선으로 작용하도록 만드십니다.  요컨대 신자는 임의로 행하더라도 그 모든 일이 당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는 요소로 작용시켜 줍니다.

신자의 실패마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는데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말이 흔히 추측하듯이 그 과정을 거쳐야만 다른 더 큰 일을 그것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 신자의 실패가, 그것도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실패하도록 미리부터 적극적으로 계획되어 있기에 필수적 과정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신자의 운명은 미리 정해져 있어서 자기 계획과 뜻대로 해선 절대로 안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이 신자로서의 소명을 잘 이루게끔 인도하는데 그런 과정들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근본적인 뜻입니다. 신자의 실패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천국 시민으로 준비되는 과정으로서 필수적이라는 뜻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실패가 자꾸 겹치기에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겠다고 갈등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앞에서 죽 설명한 대로 소명과 소명을 이루는 방식의 차이를 확실히 해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자기 은사와 재능과 지식과 경험들이 조화되어서 신나게 잘 할 수 있는 일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꼭 도덕적으로 거룩하고 종교적으로 거창한 일을 해야만 소명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실패한 경험을 두고 혹시라도 하나님은 내가 다른 종류의 일과 직업을 택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닌지 자꾸 염려해선 안 됩니다. 그보다는 소명에 대해 갖고 있는 잘못된 이해들을 당장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경험과 실력을 세밀하게 점검하여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또 새로이 하고 싶은 일에 필요한 부분은 최선을 다해 습득해야 합니다. 그전에 더 시급한 것은 하나님에게 받은 은사와 재능이 무엇인지부터 정확하게 발견하고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입어서 더욱 개발시켜야 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핑계를 앞세우지만 내면으로는 기실 자신의 성공부터 소원해선 실패를 거듭할 뿐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소명이 무엇인지 알아 실행하기 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부터 올바르게 정립하면 됩니다. 그 분이 주시는 축복보다는 그분을 온전히 자기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덕을 선전하고 빛을 비추는데 모든 것을, 정말 생명까지 내어드리며 겸비하게 기도하면 반드시 성령님께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과 인생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현실적으로는 현재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과, 하고 있는 일과, 만나는 사람들에게, 가족이든 친구이든 이웃이든 직장동료든 심지어 우연히 만난 사람이든, 예수님의 사랑으로 섬기면 됩니다. 또 불신자들에게 때를 얻든 못 얻든, 경우에 맞지 않게 무조건 무례하게라도 하라는 뜻은 아님, 영생과 죽음을 가르는 십자가 진리를 말씀으로 풀어서 전하면 됩니다.

특별히 직업과 하는 일의 종류에 연연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크리스천의 소명과 그것을 효과적으로 실현하는 방식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의 은사, 재능, 적성, 실력, 선호도에 맞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해도 됩니다. 설령 여러 현실적 제약 때문에 도저히 그런 일을 할 수 없거나 심지어 아직 발견 못했다면 그와 완전히 동떨어진 일을 해도 됩니다. 무슨 일을 하던 오직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나라는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 주위에 드러내겠다는 진정한 헌신만 있으면 바로 그것이 소명을 확고하게 붙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소명을 실행하는 방식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5/9/2008        

모루두개

2024.02.12 00: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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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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