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가 과연 유전되는지요?

조회 수 12897 추천 수 88 2009.01.28 19:03:34
원죄가 과연 유전되는지요?

[질문]


아담이 지은 원죄가 어떻게 모든 후손에게 자동으로 유전이 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각 자는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쉬운 말로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되는 것 아닙니까?

[답변]

원죄를 바로 이해하려면?


광복직후부터 최근에 반공법이 개정될 때까지 한국에선 아버지가 빨갱이면 그 자녀들의 사회적 활동도 크게 제한을 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 오래 된 이야기도 아닙니다. 고대 왕정시대에 반역죄를 범하면 일가친척 모두를 멸한 것 같은 미개한 제도였지만 그만큼 공산주의사상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심각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불신자와 신자를 불문하고 기독교의 원죄교리를 접하면 아마도 이런 연좌제(連坐制)부터 제일 먼저 연상될 것입니다. 최초인간이 범한 죄가 어떻게, 하나님이 공언한대로(출34:7) 삼사 대까지는 몰라도, 오늘날의 아니 앞으로 태어날 모든 인간에게 영원히 적용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도덕적 혹은 영적 성질을 지닌 죄가 유전이라는 생물학적 방식을 통해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은 도무지 어불성설(語不成說)인 것 같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아이가 스스로의 자각으로 죄를 깨닫기도 전에 하나님이 죄인이라고 옭아매어 놓고는 심판을 한다면 필연적으로 그분의 공의는 형편없이 굽는 것 같이 여겨집니다. 어른은 몰라도 최소한 스스로의 지각과 판단이 완전히 형성되기 전의 아이들만이라도 사고로 일찍 죽더라도 심판에서 모면해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가 생기는 가장 근본적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죄에 대한 일반적 이해가 성경이 이야기 하고 있는 바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죄를 원죄와 죄와 범죄로 세분해서 구분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고 모든 것을 통칭해서 죄라고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영적 문제인 죄가 생물학적 방식인 유전으로 계승될 수 없다는 생각도 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기독교의 교리도 반드시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고 드러난 진리에 비추어 해석을 해야 함에도 부분적, 문자적 해석에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원죄 교리는 기독교의 대속구원의 진리가 형성되는 시발점이자 그 구원관 전부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인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구속 계획에 입각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원죄가 발생한 당시부터 따지지 말고, 그러면 필연적으로 유전 방식으로 관심이 쏠림, 성경 전부를 인간이 처한 현재 상황에서부터 역으로 추적할 필요도 있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어떤 신앙상의 의문이나 오해는 반드시 성경말씀으로, 그 중에서도 특별히 예수님이 어떻게 행하고 가르쳤는지를 기준으로 삼아 판단해야 합니다. 흔히들 예수님이 원죄를 구체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다고 여기는데 오해입니다. 따라서 원죄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선 예수님의 언급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도무지 답을 알 수 없는 당혹스런 과제는 간혹 그 반대를 따져보면 의외로 쉽게 해결되거나 망외(望外)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사랑의 반대를 흔히들 저주라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부나 연인이 저주하면서까지 헤어진다는 것은 아직도 사랑 내지는 미련이 남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람의 존재가 자기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즉, 어떤 관심조차 끌지 못하게 되었기에 헤어집니다.

따라서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며, 또 그 역의 역도 성립하기에 사랑의 본질은 관심을 쏟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원죄의 경우도 흔히 오해하는 부분에 대해서 그 반대의 경우를 상정해 따져 볼 수도 있어야 올바르게, 최소한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죄의 본질, 하나님의 인류 구속 계획, 예수님의 원죄에 관한 가르침, 역으로 따져본 원죄 등의 순서로 이 문제를 접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죄와 범죄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7-30)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간음죄에 대해서 가르친 것으로 죄의 본질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의미심장한 내용입니다. 우선 행동으로 간음한 것만 간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명문으로 된 율법 내지 사회법 즉 실정법(實定法-the positive law)을 어긴 죄일 뿐입니다. 남에게 잘못된 행동을 범하지 않고 감옥에만 안 가면 의롭다고 생각하는 불신자들의 죄에 대한 개념과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것까지 간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형제에게 바보라고 욕하는 자도 살인죄를 범한 것으로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까지 말했습니다.(마5:21,22) 무슨 뜻입니까? 남에게 아무런 현실적 피해를 주지 않고도 말이나 마음으로 얼마든지 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같이 죄의 범위를 가장 심오하고도 정확하게 확장시켜 가르치셨던 분은 예수님이 처음입니다. 그럼에도 도덕적, 종교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있는 자라면 어느 정도 비슷하게는 충분히 생각해낼, 최소한 이해할 수는 있는 개념입니다. 이는 인간 양심에 심겨져 있어서 인간들끼리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도덕률(道德律-the moral law)을 어긴 것에 해당됩니다. 실정법에 도덕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실정법의 규정에 없더라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윤리나 각자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다는 뜻입니다.

흔히들 마음으로 짓는 죄를 남에게 피해를 전혀 끼치지 않고 악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니까 죄가 아니라고 단순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짓는 것도 외부에 안 드러난다는 것뿐이지 사실은 본인의 사고활동 즉, 자신의 지정의를 동원하여 행한 행위입니다. 자발적, 의도적, 능동적 판단과 선택과 행함 없이 마음으로 음욕을 품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죄는 가장 먼저 죄(sin)와 범죄(crime-우리말로 더 적당한 표현이 없어 범죄로 표현함)로 나눠집니다. 그런데 그 분류 방식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간단한 분류와 성경에서 말하는 더 포괄적인 분류, 두 가지가 가능합니다.

우선 실정법을 어긴 행동은 범죄(crime)이며 그 행위의 주체는 범인(criminal)인 반면에, 도덕률을 어긴 행동은 죄(sin)이며 또 그 사람은 죄인(sinner)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상 양심이 있는 자라면 감옥 갈 범죄는 짓지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도덕적, 종교적 죄를 짓고 있음을 시인하고 또 그래서 스스로 죄인이라고 실토한다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성경에서 죄라는 단어가 규정하는 정의는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히브리어 ‘하타’는 “올바른 목표를 벗어나다”는 것이며, 신약에서 헬라어 ‘하말티아’도 “과녁을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올바른 표준에서 벗어난 것, 목표를 잘못 정한 것, 그래서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는 것, 반드시 해야 할 행동을 하지 않는 것, 해선 안 될 행동을 하는 것, 등등이 전부 죄입니다. 따라서 실정법을 위반한 민사 혹은 형사적인 죄, 도덕률을 위반한 윤리적 죄, 종교 계명을 위반한 종교적 죄 모두가 이 두 용어가 의미하는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의 근본 특성

그런데 죄의 진정한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죄와 범죄를 구분하여 상관관계를 따져 보는 것이 좋습니다. 쉽게 말해 평소 어떤 행위가 죄라고 확신하는 자는 여간해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술이나 감정에 취해 우발적으로 간음하거나, 교통법규 같이 세부 내용을 몰라 위반하는 경우 말고는 말입니다.

결국 도덕률을 어기는 자가 실정법도 같이 어기지, 도덕률은 잘 지키면서 실정법만 어기는 법은 한두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범죄는 죄에서부터 유발된다는 것입니다. 범죄 하나만 따로 떼 내어서 죄의 본질에 대해 논할 수는 없습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도덕적 죄도 반드시 원죄와 연결해서 따져 봐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原罪 the Original Sin)의 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위에서 말한 죄와 범죄 어디에 속하는지, 혹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 것입니까? 아담이 하나님이 정하신 금령을 위반했기에 과녁을 벗어났다는 성경적 의미의 죄인 것은 분명한데 왜 구태여 원죄라고 명명하는 것입니까? 인류 최초로 지은 죄라서 그렇습니까?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아담 때는 법과 윤리는 없이 오직 하나님과의 언약만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동산의 다른 실과는 다 먹어도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는 금령을 분명히 제정했지만, 인간사회를 관장하는 현대적 의미의 실정법과 도덕률은 없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아담이 하나님의 금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는 행위는 위에서 설명한 범죄나 죄의 성격과는 달리한다는 의미입니다.    

원죄의 출발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쉽게 말해 진짜 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선악과를 따 먹은 행동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죄가 겉으로 드러난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럼 그런 행동을 하기 이전에 하나님께 불순종하려고 마음먹은 것입니까? 그러나 그것도 사고의 활동 즉, 몸을 쓰지 않았다 뿐이지 내면의 지정의를 움직인 행위입니다.

진짜 죄의 본질, 말하자면 하나님께 불순종 혹은 배반하기로 작정하게 만든 더 근본원인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두기로 싫어한 것입니다. 그분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왕이었던 그분을 폐위시키고 자기 소견(所見)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제 멋대로 살고자하는데 하나님마저 절대 방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악과란 물질계에 묶여 있는 인간으로선 영이신 하나님이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함께 하고 있으며 실제로 동산의 주인은 그분임을 절대로 잊지 말라는 가시적 형상입니다. 그래서 동산 중앙에 언제 어디서든 보이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당신의 권위의 상징이자, 아니 그분 당신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은 불순종의 행위를 넘어 그분 당신을 먹어치운 것과 같았습니다.  

위에서 말한 범죄와 죄의 관계를 선악과 사건에 대입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 자체는 실정법을 어긴 범죄(crime)입니다. 범죄 이전에 불순종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따 먹어야 봐야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 죄(sin)입니다. 죄 이전에 자기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지우개로 지워버린 것이 원죄(the Original Sin)입니다.

따라서 원죄란 아담 개인이 범한 역사적 최초의 죄를 지적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죄의 본질을, 나아가 죄가 진행되어져 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용어가 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모든 도덕적 죄든, 실정법을 위반하는 죄든 간에 그 출발은 하나님을 배제한데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뿌리가 하나님 대신에 사단을 따른 것이라는 뜻입니다. 역으로 죄를 없애거나 씻으려면 인간이 스스로 노력해선 결코 가능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제 다시 예수님의 간음에 대한 가르침으로 돌아가 봅시다. 음욕을 품는다는 것은 잘 생긴 이성에 대해 순간적으로 호감을 품는 정도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성인남녀 중에 단 한명도 구원 받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대신에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성적 관계를 가져보려고 환상을 품고서 궁리하고 계책을 모색하는 것을 말합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솔직히 말해 마음으로 짓는 간음죄에서조차 자유로울 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만약 그런 생각이 들거든 아예 눈을 뽑아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모두가 지옥에 떨어지든지, 세상은 장님들만의 천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자적 의미대로 명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부 중에는 실제로 그렇게 행한 사람도 있었지만, 죄를 그만큼 철저하고도 심각하게 취급하라는 뜻입니다.

정확하게는 죄를 천국과 지옥에 들어가는 문제 즉, 구원과 심판에 연관해서 이해하라는 뜻입니다.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 죄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마음으로 간음하거나 말로 살인하지 않는 자가 단 한 명도 없듯이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는 아무도 미치지 못해 모두가 죽어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은 간음과 살인에 관한 기존의 도덕적 계명을 원죄라는 영적 진리의 수준으로 끌어 올려 가르친 셈입니다.   

아담의 아들들인 가인과 아벨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창4:3-7)

아직까지는 가인이 실정법과 도덕률 어느 것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죄의 소원은 네게 있다고 견책했지만 당장 그 순간에, 최소한 제사를 드릴 때에, 아벨을 살해하려고 결심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아가 가인도 하나님에게 복을 받고자 하는 열심과 소원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사를 드렸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틀림없이 아담으로부터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법을, 아담은 또 하나님이 가죽 옷을 지어 입히어 준 사건에서 직접 그분으로부터, 배웠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가인의 안색이 변한 사실만 두고 견책한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지 않았기에 당신께서 제물을 열납하지 않았는데 도리어 왜 네가 화를 내느냐고 꾸중한 것입니다. 죄를 행했기에 제물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선을 행하면 낯을 들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따지지 않았을 것이 아니라 아예 따질 일 자체가 없었고 하나님도 제물을 열납해 주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가인은 제물을 바칠 때에 이미 죄를 행했고 죄의 소원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정법과 도덕률을 어기지 않고 하나님에게 경배까지 했는데도 죄를 행했다니 무슨 뜻입니까? 가인은 하나님을 알긴 알 되 우습게 알았던 것입니다. 자기를 하나님보다 더 위에 두었던 것입니다. 아벨은 첫 소산으로 하나님께 바쳤지만 가인은 그저 형식적 의무적으로 아무 것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드림으로써 첫 소산을 바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첫 소산이란 그 전부를 대표하는 성격을 지닙니다. 모든 수확 전부가 오직 하나님께로 왔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제물만이 아니라 아벨을 함께 그것도 먼저 열납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의 마음에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헌신할 마음은 전혀 없었고 수확물도 전부 자기 노력으로 얻은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하나님이 벌줄까 두려워 생색 내지 겉치레로 바쳤던 것뿐입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은 죄라고, 심지어 죄를 행했다고 말했습니다. 또 죄의 소원이라고 합니다. 그럼 선이자 선을 행하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을 항상 자기의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서 자연스레 그분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언제든 죄가 문에 엎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가인의 마음(영혼)의 상태, 즉 하나님을 우습게 알고 제 멋대로 하려는 것이 원죄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담의 원죄가 가인에게만 나타나고 아벨에게는 이전되지 않았다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은 가인과 아벨 둘 다 아담으로부터 이미 신앙 교육,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전도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산 체험을 간증하며 하나님께 전심과 진심으로 항복하라고 권면 교육했습니다. 그 전도를 받아들인 아벨은 첫 소산과 자신의 전부를 드렸지만, 길 가나 돌밭에 뿌려진 씨앗 같은 마음을 끝까지 고집한 가인은 아버지의 명령인지라 어쩔 수 없이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렸던 것뿐입니다.

원죄는 인간존재의 실상

한 마디로 원죄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상태로 태어나기에 스스로는 구원을 얻을 만한 믿음을 결코 가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 그런 마음 상태로부터 다른 모든 죄와 범죄들이 파생된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실제로 가인의 경우가 그랬지 않습니까? 아니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습니까? 어린 아이들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과자나 장난감을 서로 가지려고, 그것도 친형제끼리 치고받고 싸웁니다. 갓난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자기 뜻대로 고집만 피웁니다. 죄가 무엇인지 지각하고 분별하기 이전에 벌써 죄는 항상 짓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몸에 밴 행태입니다. 그 마음이 이미 원죄로 인해 부패된 상태에 빠져서 하나님에 관한 인식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원죄란 아담이 범한 개별적 죄를 넘어서 아담 이후 태어나는 모든 인간의 실상(實狀)을 죄와 연관해 설명하는 신학적 용어입니다. 혹시라도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상태가 결과적으로 그러하니까 그 현상을 잘 설명할 목적만으로 차후에 별도의 신학사상을 고안해낸 것이 아닙니다. 최초 인간은 분명히 하나님을 기꺼이 고의로 적극적으로 거역했으며 또 그 후손 모두의 영적 실체도 그 선조가 원죄를 범했을 때와 똑 같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너무나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죄란 인간존재의 실상을 한 마디로 대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인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이 심히 보기 좋게 창조하였는데 그분을 배역한 이후로 이 땅을 자기 것인 양 착각하고 오직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존재”라고 정의(定意)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종교나 사상들이 우연히 진화된 물질적 존재, 선하게 태어나서 환경에 따라 악해지는 존재, 악하게 태어났지만 교육으로 선하게 바뀔 수 있는 존재, 선하고 능력이 많아 스스로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는 존재 등등으로 정의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원죄를 단순히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으로 보면 죄의 본질이 행위의 죄가 됩니다. 또 원죄가 인간의 자기중심성이나 교만성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정의하면 자칫 도덕적 성품으로 제한됩니다. 나아가 단순히 죄성(sinful nature) 즉, 실정법이나 도덕률이나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자 하는 천성, 죄를 짓게 하는 성질, 죄가 많은 성질로 되어서 죄를 짓게 되는 가능성으로만 국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원죄로 인해 결과 된 상태이자 실제로 인간에게 적용되어 나타나는 모습일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개념이 과녁을 벗어난 것, 특별히 목표를 잘못 정했기에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당연히 원죄에도 해당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분의 권위에 순종하며 살아야 참된 인간의 복락을 누리며 인간끼리 진실 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데 그 위치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원죄입니다.

범죄 하여 두려움과 수치심에 빠져 숨어버린 아담에게 하나님이 “네가 어디 있느냐?”(창3:9)고 찾으신 것이 행선지를 몰라 숨바꼭질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리는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해서 숨은 곳이 결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회개의 촉구였습니다. 또 아담과 이브가 일단 하나님을 멀리하자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서로에게 잘못을 덮어씌우는 도덕적 죄가 따랐지 않습니까?  

자꾸만 유전, 전가, 대표성의 원리 같은 신학적 용어에 괘념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죄가 성경의 명시적 표현이 아니듯이 이런 용어들 또한 성경에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한 마디로 잘 표현했듯이 원죄도 모든 자연인의 영혼의 실체를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신학적 용어인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유전, 전가, 대표성의 원리도 “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상태로 태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신학적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설명한 용어인 것입니다.

먼저 원죄의 ‘유전’은 암에 잘 걸리는 체질을 유전 받듯이 죄가 자식에게 승계된다는 생물학적 개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원죄로 물든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인간 실존의 영속성”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전가’는 인간이 속죄 받기 위해 스스로 피 흘려 죽을 수는 없으므로 희생양에게 안수하여 죄를 옮겨 가게 하여 죽이는 것 같이, 아담의 죄를 하나님이 그 후손에게 옮기셨다는 설명입니다. 대표성의 원리란 대사(大使)는 비록 한 개인이지만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효력을 가지듯 아담은 인간의 대표이기에 그가 지은 원죄도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효력을 미친다는 설명입니다.    

아담이 원죄를 범한 후에 실제로 진행된 결말은 어떠합니까? 잘 아시는 대로 죄를 범한 세 당사자와 피조세계까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최초 인간들은 궁극적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가죽 옷을 손수 지어 입히셨습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사항은 생명나무를 천국으로 옮기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선 타락한 채로 영생을 하면 구원할 방도가 영영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타락 이전에는 이 땅에서부터 누릴 수 있었던 영생을 이제는 천국에 가야만 비로소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비록 인간에게 죄가 들어가서 타락한 상태가 이어진다 해도 다른 구원의 방도를 예비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인해 사단의 머리를 부수는 것입니다.(창3:15) 아담과 이브가 실제로 구원 받은 방도였던 가죽옷이 상징하는 것처럼 하나님 스스로 제물이 되어 피를 흘리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타락할 것까지 아시고도 인간에게 자유의지와 사단의 유혹을 허락했던 이유는 태초부터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
  
다른 말로 원죄와 그에 대한 유전, 전가, 대표성의 이론 모두가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계획을 오직 성경의 기록에 의거하여 인간 이성이 도출해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신학적으로 최대한 잘 설명하려는 시도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했던 마음이 우리로선 정확히 알 수 없는 하나님만의 방식으로 후손들 모두가 타고 났다는 것입니다. 그 전해진 방식을 성경은 생명나무를 하늘로 옮기고 인간을 낙원에서 쫓겨낸 것으로 진술하지만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의 신비입니다. 타락한 인간 본성이 모든 세대, 인종, 지역, 문화, 관습, 종교에 관계없이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인간이 이해하기 좋은 방식으로 함축한 용어가 유전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원죄가 후손에게 이어진 최초의 예는 위에서 살펴 본대로 가인이었고 그 이후 구약의 수많은 죄인들의 기록 또한 그 사실을 보증합니다. 원죄가 왜 죄도 없는 아들에게 유전되느냐는 부분에 집착하다 보면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경시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또 하나님의 예수님을 통한 영원한 구속 계획을 이해한 바탕 위에서 역으로 원죄를 보지 않으면 유전이라는 방식에만 집착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빈대를 잡으려다 초가를 태우듯이 원죄의 유전만 추적하다가는 성경 전체를 불사르게 되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원죄에 대한 입장

그럼 과연 예수님은 원죄에 대해선 어떤 입장을 견지하고 또 가르쳤습니까? 우선 위에서 언급한 대로 간음죄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원죄교리를 간접적으로 내포시겼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분명하게 언급한 내용이 있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는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15:17-20)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은 채 밥을 먹자 장로의 법을 무시했다고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손을 씻지 않는 것보다 인간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인간을 더럽힌다고 했습니다. 이 대답은 단순히 위생이나 율법 준수에 관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를 사용했기에 바리새인만 야단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행동으로 보았으며 그런 사고활동을 주관하는 인간 존재의 더 깊은 내면이 있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영혼 내지 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로 그것이 궁극적으로 진정한 인간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선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23)고 더 명확하게 말씀하셨듯이 사람은 그 존재가 악해서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장로의 법(실정법이자 도덕법도 포함함)을 어겼다고 더러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서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을 나누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할 것을 약속하며 그 의미를 강론했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8,9) 오래 전에 밤중에 찾아온 유대 공회원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제 성령이 오셔서 죄에 대해 사람을 책망할 것인데 그 죄의 본질을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진술이지 않습니까? 기독교의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실정법이나 도덕률을 위반한 것과는 하등 관계없습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선 종교의 자유는 오히려 가장 큰 덕목으로 꼽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와 함께 모이지 않는 자는 당신을 반대하는 자라고까지 말했습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주시겠다는 은혜를 의도적, 적극적으로 거부했기에 심판받을 죄라는 뜻입니다.

반드시 진리의 영인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구원을 얻게 된다면 성령이 하는 역할은 당연히 예수님이 누구인지, 또 그분의 십자가 구원 사역의 의미를 깨우치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바울사도도 신령한 것 즉, 성령의 가장 근본적 역할에 대해 예수님과 동일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령으로 거듭났고 성령에 의해 깨우침을 얻었던 바울 자신의 체험에 따라 진술한 복음의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과 신자의 관계를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을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야만 성화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비유입니다만,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이 선행이나 귀한 업적을 쌓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인간이 하는 어떤 행위도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의가, 특별히 구원을 얻는 근거가 전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이 진정으로 있어야 할 위치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품 안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이는 인간이 결코 인간답게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그분의 십자가의 의를 통해 누구나 갖고 있는 원죄를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심지어 원수까지 되었던 마음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범죄나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원죄를 없애서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렘31:29,30)고 말했습니다. 분명히 각자의 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고 한탄했습니다. 인간은 죄인이라 죄를 짓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29:11)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일차적인 의미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리라 예언한 것이지만 성경은 항상 이중, 삼중의 미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게 된 것도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듯이, 모든 인간의 마음이 심히 부패하여 스스로는 구원을 도저히 얻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재앙 대신에 구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리어 죽고 부활하는 방안이 아니고는 구원이 불가능하며 그 외의 방안으로는 오직 재앙뿐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한탄한 바로 이 내용이 원죄라는 뜻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2:13) 이는 또 바울 사도가 로마서 1-3장 걸쳐 말한 예수를 모르는 자연인의 상태를 말한 것과 동일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성경은 원죄가, 어떤 방식이 되었든 간에, 모든 세대 모든 인간에게 전해진다는 것은 명시적 표현이 없을지라도 신구약에 일관되게, 특별히 예수님이 인정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역설적 원죄론

이제 마지막으로 만약 원죄가 모든 이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역설적으로 한 번 따져 봅시다. 모든 인간이, 특별히 아이들은 더더욱, 죄 없이 태어난 후에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되는 것이 옳다면 성경의 내용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한 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는 아무 필요가 없게 됩니다.

죄인이 아닌 상태로 태어났지만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다면 필연적으로 전개되어질 결과는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죄를 지어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을 얻어야 하든지, 아니면 그 중에는 죄를 짓지 않아 구원이 필요 없는 의인도 생겨야 합니다. 만약 두 번째 경우가 가능하다면 예수님이 구태여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을 이유라고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생각해볼 여지조차 없이 아예 불가능한 일이지 않습니까? 결국 전자의 경우밖에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구원을 얻어야만 할 실제적인 죄인인 셈입니다.

그럼 다시 과연 그 죄를 스스로 없앨 수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씻어주어야만 가능한지라는 두 가지 과제에 봉착됩니다. 여기서도 전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완전히 부인되는 반면에 오직 후자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필요와 가치가 발생합니다. 어떤 경우를 상정하든지 간에 원죄가 유전되기에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진리가 부인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도  자동으로 부인됩니다. 오직 원죄가 유전되어야만 십자가가 유효해집니다.

물론 원죄를 이런 식의 논리 게임으로 설명해선 충분치 않습니다. 대신에 바울처럼 신자 본인이 자기가 구원받은 체험에 비추어 진지하게 회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자신이 죄인으로 태어났는지 여부를 말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이 종교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는 상식적 의미가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자기 멋대로 살려는 심성과 고집을 두고서 하는 말입니다. 과연 자기가 하고 있는 혹은 소원하는 일을 방해하는 자는 가인처럼 형제를 비롯해 누구라도 미워했는지 아니했는지, 나아가 아담처럼 하나님마저 싫어했는지 아니했는지를 정말 솔직하게 따져 보라는 뜻입니다.

또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다는 명제가 맞으려면 당연히 구원도 그에 상응하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죄를 지은 것만 깨끗케 하면 죄인의 상태에서 다시 죄인이 아니었던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범죄든 죄든 스스로 회개하면 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두기를 싫어했던 원죄마저도 스스로 뉘우치고 믿기로 결단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가장 이성적으로 납득이 쉽게 되는 구원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와 다르게, 정확히는 하나 더 나아간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아주 확고하게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했습니다. 니고데모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누구에게나 칭송을 받을 정도의 의인이라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것과는 사실상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사람들의 평판과는 달리 영혼의 내면에 도무지 평강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아무리 스스로 회개를 해도, 심지어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고 믿고 있음에도 자기가 죄인임은 분명하고, 어떤 방식을 동원해도 구원 받았다는 아니 받을 수 있다는 확신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스스로 회개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거듭나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성령의 도움으로 말입니다. 죄인이 먼저 의인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모든 면에서 니고데모보다 더 의로웠을 것입니다. 절대 자신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 믿는 자를 하나님의 구원을 방해하는 나사렛 이단이라고 확신하여 기를 쓰고 핍박했던 이유는 그만큼 자기가 의롭다는데 자신감이 넘쳤던 것입니다. 그로선 아무 선행도 하지 않은 살인자마저 예수만 믿으면 하나님이 구원을 은혜로 준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엉터리였던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는 체험을 하자 사람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지 않습니까?

그는 성령의 간섭으로 하나님이 죄인 중의 괴수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던 자기를 그 상태 그대로 두신 채 의인으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옛사람을 십자가에 완전히 못 박고 십자가 복음 안에서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니고데모와 바울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믿는 데는 열심이었습니다. 실정법을 어긴 적은 아예 없으며 혹시라도 도덕률을 어겼을 때는 틀림없이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간음하고 말로도 살인할 수 있다는 영역까지는 죄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설령 그런 죄를 스스로 깨우쳤다 해도 더더욱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회개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단순한 의미의 원죄 즉,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으로만 따져도 그들에겐 죄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둘 다 예수님에 대해선 전혀 몰랐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자에게 단순히 하나님을 다시 알게 하는 것으로 그칠 리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사람들이 간혹 하나님을 알고 믿기는 믿되 잘못 믿고 있는 점을 완전히 수정하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와 그 죽음이 미치는 결과를 몰랐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그럼 당연히 의인 내지는 백지상태로 태어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여 그분을 배역한 원죄 하에 태어남으로서 죄의 노예가 되었기에 그분의 의에는 어느 누구도 미칠 수 없고 또 스스로는 도저히 의로워질 수 없다는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만들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원죄란 그래서 단순히 하나님의 권위를 거부하고 그분의 존재를 자기에게서 지워버린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인간이 사단의 종으로 묶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옮기고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난 것도 바로 그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한시적으로 인간 특별히 그 영혼을 주관할 공중 권세를 사단에게 위임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은혜가 예비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이 세상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 바로 이것이 원죄의 궁극적 실상입니다. 사단은 인간더러 세상에서 형통하고 안락하게 지내게 해주고 심지어 스스로 도덕적 종교적 선행을 많이 쌓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만은 믿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바로 그런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이 원죄 하에 태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인류의 전 역사를 살펴보고 또 작금의 모든 상황을 보아도 실제로 분명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자마자 귀신들이 가장 먼저 메시아임을 알아봤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여 ...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막1;24) 또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눅8:31)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시기까지 했으니 이제는 자기들의 수괴인 사단에게 한시적으로 맡겨졌던 공중권세를 빼앗고 완전한 심판을 이루실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멸하지는 않고 단지 귀신 들린 자에게서 나오라고만 명령했습니다. 당신의 재림 때까지 여전히 세상을, 특별히 믿지 않는 자들의 영혼을 사단의 권세 아래 두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컨대 원죄란 인간이 사단의 노예가 되어서 스스로는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지적한 이방인처럼 하나님을 믿긴 하되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 주관하는 권능자로만 대하는 것입니다. 조금 의로운 자라 해야 자신이 범죄한 것이나 윤리적으로 잘못한 일을 스스로 회개하고 고백할 대상으로만 간주합니다. 자신의 존재 전체가 철두철미하게 부패된 죄인이라고는 절대 인식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광채가 그 영혼에 비취지 못한 상태입니다.     

니고데모는 몰라도 바울의 경우는 당대 최고의 의인이라 스스로 자부했던 자입니다. 그런 자가 어떻게 자기는 죽어야 마땅하고 또 예수를 몰랐다면 당연히 영원한 죽음의 길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스스로의 이성으로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격정적인 바울에 비해 아주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던 니고데모마저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잘 모르면 단순히 비기독교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 믿었으니 지옥 간다는 단순한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속에서 나오는 것이 계속해서 죄악뿐인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먹고 마시며 입는 것을 좋은 것으로 서로 많이 손쉽게 빨리 차지하려는 경쟁 속에 있기에 죄악만 확대 생산될 뿐입니다.

간혹 도덕적으로 의로운 자가 인간 사회에선 분명히 의롭게 보이는 선행이나 업적을 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먹고 남는 것으로 적선했거나 일부러 의식하지는 않았어도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온전히 모르는 인간끼리는 절대로 선해질 수 없습니다. 그분에게 붙어 있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합당하는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했지 않습니까?

구원의 유일한 길

반면에 인간이 죄인인지라 죄를 짓는다면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야만 구원이 유효해집니다. 그 외의 방법은 도무지 없습니다. 또 죄인을 의인으로 그 존재 전체를 바꾸는 것은 오직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 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의인으로 바꾼다고 해서 도덕적 성자로 바꾸어 구원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그리스도의 광채를 가로막고 있던 사단의 권세를 끊고서 성령이 임재 내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구체적으로 명료하게 의식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초자연적 간섭이 일어난다는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신 신자에게 성령이 임재하여 내주한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고안해낸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인간은 거듭난 후에 자신이 그렇게 변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거듭남의 의미는 바로 자신의 존재 전부가 자기가 바라보아도 너무나 추하고 더러워서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악뿐이라고 겸비하고도 진정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이가 부모 그것도 까마득한 옛날의 아담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지은 죄로만 심판을 받는다는 성경의 진술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죄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성경에서 심판을 받는 유일한 죄는 예수를 믿지 않는 죄입니다. 진리의 영인 성령이 오시면 각 개인이 그분을 믿지 아니한 죄로 심판을 받습니다.  

예수를 자신이 깨달아 믿었다고 말하는 신자나 또 그럴 수 있다고 가르치는 교단이 많습니다. 그러나, 제 다른 글에서 누차 밝힌 바 있듯이, 성령의 간섭과 인간의 지정의적 인식이 상호 모순 충돌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먼저입니다. 성령의 간섭이 먼저라면 그 간섭이 없이는 인간은 절대 믿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예정과 선택을 거친 전적인 은혜일뿐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에는 마치 인간이 단순히 죄를 회개하고 스스로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 같은 표현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아셔야 할 것은 성경은 신학적 논문이나 주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에는 인간으로선 인식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절대적 초자연적 간섭이 먼저 있고 그에 인간이 믿음으로 반응하는 두 절차가 있는데 그중 인간 쪽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어서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알기 쉽게 설명한 것입니다. 마치 유전, 전가, 대표성 등의 교리가 원죄의 한 부분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했듯이 말입니다.

간혹 인간이 스스로를 바라 볼 때에 의롭다고 여겨지는 부분도 있고 또 하나님을 스스로 깨달아 믿을 수 있다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입었기에 그분의 의를 이루려는 도덕성과 그분께 돌아가려는 영성이 아주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기에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왔을 때의 니고데모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의 바울이 아닌 사울이 바로 그 대표적 예입니다. 그들 둘 다 성령의 간섭 없이는 예수를 믿지 못했지 즉, 구원과는 거리가 멀었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가 작금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자신의 옛사람이 철저하게 죽어 없어지는 절차가 실종되었습니다. 단순히 예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준다고, 다른 말로 자신의 지정의 결단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양 가르칩니다. 행위 구원에 대비해 믿음의 구원이라는 점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여러 번 지적했듯이 스스로 믿으려 결단하는 것 자체도 사고활동 즉, 일종의 행위입니다. 그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대신하는 인간 쪽의 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알기 쉽게 말해 나는 깨달아서 믿었는데 너는 깨닫지 못해 못 믿고 있다는 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벌써 인간끼리 도덕성과 영성에서 우월의 차이가 생깁니다. 우월한 자가 구원 받으면 인간 쪽에 구원 받는 자격과 조건이 형성되어 버립니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바와는 다릅니다. 나아가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을 인정하는 부분이 전혀 없어져 버립니다.   

거듭남이란 예수를 믿기 이전의 자기라는 존재 전부가 단순히 하나님을 멀리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에서 열까지 썩어빠져서 진정한 의라고는 단 하나도 산출하지 못했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소망이라고는 없었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음을 실토하는 것입니다. 비록 도덕적, 종교적 의를 행했다 해도 여전히 자기를 하나님보다 높게 둔 위치에서 행한 것임을 온전히 깨닫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 이후에도 여전히 죄의 본성(sinful nature)이 많이 남아 있지만, 아담이 저질렀고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에게 전승되어 있던 원죄의 굴레가 성령님의 역사로 완전히 벗기어져서 이제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에서 벗어나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 확신은 정말로 자신의 실체가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하여 완전히 죽고 또 그분의 부활에 연합하여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지 않고는 절대 생기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도 그런 혹은 비슷한 확신이 있다면 그조차도 자신의 의지적 사고 행위에 바탕을 둔 종교적 믿음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아직 자신에게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한 죄인이 성령의 간섭으로 자기의 전부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유효해집니다. 다시 말하지만 원죄가 단순히 그 구원을 유효케 하는 신학적 논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 속에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의 비참함을 아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케 해주시려는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입니다.

원죄를 유전이라는 죄의 전승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서 아담의 때에서부터 상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전체 구속계획을 자신의 실제적 중생 체험에 비추어서 분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나는 계속해서 죄인의 자리에 머물러서(원죄가 굴레가 아직 벗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내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종교적, 도덕적, 법률적 죄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께 범죄하는 영적 죄악뿐이었음을 뼈저리게 실감해야 합니다. 또 그런 자라야 원죄가 당연히 자기에게 유전된 것으로, 비록 그 표현이 언뜻 마음에 안 들지만 충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내 스스로 죄를 회개하여 구원 받았다고 여긴다면 원죄는 여전히 아담과 이브의 전용물로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1/28/2009

운영자

2009.01.28 22:18:39
*.108.164.34

어떤 분이 이멜로 개인적으로 아주 길게 문의해 오신 내용으로 현재도 상담중에 있습니다만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는 핵심 부분을 따로 정리하여 함께 나누기 위해 올립니다. ^^

사라의 웃음

2013.02.02 23:43:37
*.109.85.156

처음 원죄의 의미를 배울 때, 슬며시 억울했었습니다. 아담 때문에 내가 왜 죄인의 자리에 서야하는지, 정말 아버지가 빨갱이면 나도 빨갱이 취급하는 그런 억울함 같은 것이 늘 있었습니다. 역시 사람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지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까닭과 하나님을 거부하며 내가 왕이 되고 싶어하는 뿌리깊은 죄악을 도무지 인정할 수가 없었던 까닭인 듯 싶습니다.

그 원죄는 오로지 성령의 간섭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귀한 선물로만 죄사함을 받을 수 있음을, 그 선물을 주시려 우리 예수님께서 어떠한 고통을 우리 대신 짊어지시고 돌아가셨는지를 철두철미 깨닫는 거듭남의 신비를 뭇 사람들은 어쩌면 신비주의로 취급하기 쉬운 일임도, 사도바울과 니고데모의 열심있는 하나님 섬김의 도와 같은 자신의 신앙의 열심이 구원받음의 이유인 양 생각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저 관념으로만 그저 입술과 맘으로만 믿으면 되는 양 생각하며 성경의 지식을 높디 높게 쌓아가는 것이 심오한 신앙인이 되는 양 또 생각할 수도 있음이 안타까이 다가옵니다. 정말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 십자가 사랑을 날로 날로 더더욱 풍성히 배우며 삶 속에서 체험되어지길 기도합니다. 귀한 말씀들을 늘 먹을 수 있도록 이처럼 세세히 가르고 섬세히 설명해 주시니 너무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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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시편 109편에도 복음이 있는가? [2] 운영자 2009-04-17 4271
156 선교사 사례는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 [1] 운영자 2009-04-14 1761
155 교회에서 신자의 복장은 어때야 하나요? [2] 운영자 2009-04-09 2713
154 교회의 구조적 갈등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나요? [2] 운영자 2009-04-01 1830
153 복음 안에서도 자꾸 죄를 짓는데요? [2] 운영자 2009-03-31 3238
152 십일조 논의에 마지막으로 덧붙여 [10] 운영자 2009-03-30 2235
151 십일조 논의에 덧붙여서(完) [1] 운영자 2009-03-27 1623
150 십일조 논의에 덧붙여서(2) 운영자 2009-03-27 1613
149 십일조 논의에 덧붙여서(1) 운영자 2009-03-27 1815
148 천주교인을 전도하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요? [2] 운영자 2009-03-25 6997
147 이삭을 바칠 때 아브라함이 부활을 믿었는가? [1] 운영자 2009-03-19 3149
146 유대인들은 잘 믿어서 복을 받았는가? [3] 운영자 2009-03-18 1982
145 양심이 신앙생활에 어떻게 영향을 끼쳐야 하는가? [5] 운영자 2009-02-23 4463
144 천국에서 더 큰 상급을 얻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5] 운영자 2009-02-21 3675
143 성경의 오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하나요? [2] 운영자 2009-02-20 2850
142 북한의 배고파 죽는 아이도 지옥가나요? [6] 운영자 2009-02-03 4094
» 원죄가 과연 유전되는지요? [2] 운영자 2009-01-28 12897
140 히브리서의 믿음이 마음의 확신인가요? (성경의문 3) [2] 운영자 2009-01-25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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