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마다 받는 마귀의 시험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4:5,6)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 받은 세 가지 시험에 관해선 너무나 많은 설교와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익히 배워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쉽게 지나쳐버리는 아주 중요한 영적 가르침이 있습니다.
지금 마귀는 구약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더러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종용하는 셈입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는 시편91:11,12절의 말씀입니다.
그럼 이 시험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정말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지 보려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마귀도 그 정도 모를 리도 없습니다. 이 시험은 예수님더러 구약성경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따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어떤 일이 있어도 보호해준다고 약속했으니 마음 놓고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예수님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7절) 아무리 하나님이 약속하셨어도 문자적 의미만 붙들고 꼭 그렇게 이뤄달라고 떼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고 순수하게 믿어야 한다고 반발할 계제가 아닙니다.
실은 마귀가 하나님 말씀을 인용하되 나름대로 음흉한 몇 가지 계략을 동원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해석에 핵심이 되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빠트렸습니다.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고 했는데 "네 모든 길에"를 생략한 것입니다. 문자적 의미가 길에서 걸어갈 때를 의미하므로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상황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네 모든 길에서 지킨다고 하니까 의역하여서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경우도 포함된다고 섣불리 적용해선 안 됩니다. 걸어가는 길에 가로막는 돌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생기는 여러 장해를 말합니다. 세상의 시험, 유혹, 죄악, 환난 등입니다. 반면에 “모든 길에서”를 빼버리면 그 높은 성전에서 점프해도 천사가 날라 와서 공중에서 붙들어 주어서 사뿐하게 땅에 내리게 되니까 발이 다치지 않게 된다는 의미가 되어버립니다.
성경을 정밀하게 읽으시는 분은 우리말 개역성경에서 시편 92:12에선 "붙들어"가 마태복음에선 "받들어"라고 번역되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성경해석학 상의 여러 과제를 낳기에 신학자들의 연구에 맡길 문제입니다. 여기선 히브리어나 헬라어 둘 다 사실상 같은 뜻으로 마귀가 "모든 길에서"를 고의로 빠트렸기에 궁극적 의미도 달라졌다고만 이해하면 됩니다.
마귀가 인용한 구절은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13절)로 이어집니다. 삼손 같은 능력을 받지 않은 이상 인간이 뱀은 몰라도 사자를 발로 밞을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의도가 이미 내포된 것입니다. 모든 길에서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한다는 말씀도 그대로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이, 신자라고 한 번도(모든 길에) 돌부리에 부딪혀 넘어지지 않는다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성경의 하나님 약속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저자의 의도와 당시 정황과 앞뒤 문맥을 상호 비교하여서 잘 판단하여야 합니다. 모든 길에서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해준다는 약속도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데까지 확대 적용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이처럼 신자가 성경 말씀을 자의적(恣意的)으로 무한대로 확대 적용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약속을 무한대로 적용하지 말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은 없지만 당신께서 능히 하지 않을 일도 얼마든지 있다는 뜻과 상통합니다. 예컨대 북한의 공산독재 정권을 남북한의 신자들이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데도 금방 멸망시키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하나님의 때와 방식으로 벌하실 것은 확실해도 어쨌든 아직은 능히 하지 않는 일에 속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능히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가장 대표적인 일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103:10,11)
우리의 죄악을 일일이 벌주어야 하고 또 얼마든지 주실 수 있지만 아직도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문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그러하다고 했으므로 일차적으로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믿은 후에도 여전히 수많은 죄를 짓고 있음에도 당신의 크신 인자하심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할 형벌을 덮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는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輕)하니라.”(욥11:5,6) 욥의 친구 소발이 욥의 고난에 대해 변론한 내용입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선 소발의 사상이 틀렸지만 부분적으로 하는 말씀 자체에는 영적 진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큰 인자로 관용하시다가 그 인내의 양이 차면 벌을 주시지만 지은 죄의 질과 양에 비해 훨씬 가볍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는 사안에 대해 일일이 정확하게 평가, 판단, 조치를 취하지 않는데 반해,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그저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서 그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터뜨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성경의 약속을 볼 때에 마귀처럼 가장 핵심 되는 부분은 빠트리고 자기 마음에 드는 표현만 골라서 읽고 곡해하고선 말입니다. 새벽기도에 가장 자주 생기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바로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해놓고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도 왜 아직 능치 못하고 있습니까?”가 아닙니까?
만약에 그런 불만이 논리성, 합리성, 타당성을 갖추려면 반드시 우리는 하나님께 먼저 이런 요구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해 주시고,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아 주십시오.” 또 그에 따른 하나님의 후속조치도 기꺼이 받아야 합니다. 그런 후에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했으니 반드시 이일도 해주셔야 합니다.”라고 큰소리치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설마 이 말씀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이는 없겠지요? 만약 그분이 우리 행한 대로 갚으시면 저를 필두로 이 땅에 살아남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서 말입니다. 신자에겐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자비 하나만으로도 너무 벅차 감당할 수 없으며, 또 어떤 환난 가운데도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자 능력인 것입니다.
10/16/2011 .
자신의 죄악의 크기며 무게는 보지 않고
그저 하나님께 보채고 떼 부리는 어린자아를 봅니다.
거기다가 자주 하나님의 영광까지 가로채려하는 모습도
저에게서 발견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