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충만하게 살 수 있는 법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을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6-19)
바울사도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언뜻 은혜롭고 좋은 말은 다 동원된 것 같습니다. 뭔가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풍성하게 넘치게 해달라고 간구한 것 같기는 한데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분명한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마치 대표 기도할 때에 본인도 정확한 뜻은 모른 채 기독교적 미사여구만 잔뜩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그 주제나 내용 전개가 잘 이해되지 않을 때는 결론부분부터 먼저 보는 것이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가 그것입니다. 그런 후에 천천히 읽어보면 그 앞까지는 충만하게 될 수 있는 수단과 과정 등을 설명한 것으로 쉽게 이해됩니다.
이런 전제를 갖고 다시 본문을 잘 분석해보면 충만해질 수 있는 비결 몇 가지를 도출해낼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속사람을 강건케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서 그 사랑을 더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충만이 우리에게 충만해진다고 합니다.
이제 역으로 따져봅시다. 현재의 삶이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져서 풍성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잘못입니까? 기도와 말씀 보는 것에 게으르거나, 교회 봉사와 헌금을 등한히 했기 때문입니까? 본문에 따르면 그 이전에 성령이 우리 속사람을 강건케 해주는지, 또 우리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있는지부터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눈앞의 문제들만 열심히 기도했지 바울처럼 성령으로 속사람이 강건해지게 해달라고 간구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모신 것은 분명 맞지만, 그분의 사랑의 풍성함을 온전히 깨달으려고 노력한 적도 별로 없습니다. 당연히 우리 삶이 충만해질 리 없습니다. 성경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한에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현실 문제를 기도하여 풍성하게 해결 받아도 성경이 말하는 참 충만과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비록 현재의 우리 삶이 충만치 않더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 신자가 정작 구해야할 것을 알았으니 기도 내용을 바울처럼 바꾸면 됩니다. 그런데 또 다시 문제는 거의 모든 신자들이 앞에서 말한 대로 자기가 기도하는 내용조차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령님더러 우리 속사람을 강건케 해달라고 기도해야지, 성령님 당신이 더 충만해지도록 기도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제 삼위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이미 그분 자체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더 충만해질 필요나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성령이 신자에게 내주한다는 말은 이미 완전한 충만함으로 하나님 그분이 우리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그분의 충만함을 완전히 충만하게 인식, 감지, 이해는 못합니다. 평생을 두고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 길이, 높이, 깊이를 그 마지막 한계까지, 실은 이런 표현 자체도 틀렸지만 인간이 이해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결코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능력, 신비, 지혜, 사랑, 긍휼, 인내, 자비, 섭리, 권세 등등 그분이 갖고 계신 것과 실제로 신자에게 행사하고 있는 모습, 둘 다에서 도무지 그 전부를 알 수 없습니다.
이 또한 비록 그렇다 해도 전혀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자가 그분에게 전적으로 헌신한다면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체험할 수는 있습니다. 물을 길러온 사마리아 여인이 야곱의 우물을 다 퍼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물을 한 바가지만 퍼도 물로서의 기능과 효력은 완전하게 나타는 것과 같습니다. 거기다 야곱의 우물은 가물 때도 있고 물맛이 떨어질 때도 있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영원토록 마르지 않는 참 생명의 물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따로 더 줄 것이 없습니다. 당신 자신을 우리 안에 이미 주셨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것은 우리의 내어드림과 비워드림입니다. 우리 속에 우리 자신이 남아 있는 만큼 그분의 충만함은 줄어드는 법입니다. 우리의 전적 드림만이 그분의 충만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계속 강조하지만 성령은 그 자체로 이미 충만한 영입니다. 성령이 내주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충만이 신자 속에 가득 차있는, 최소한 가득 찰 수 있는 상태로 이미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Being filled with all the fullness of God.)
불신자는 무슨 일을 해도 충만해지지 않습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재물과 권세와 명예를 차지해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들 속에는 충만한 하나님의 영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사단의 영이 있습니다. 사단의 영은 충만과 정반대되는 빈곤의 영(the sprit of poverty.)입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어떤 일을 해도, 심지어 현실적으로 의로운 업적을 쌓아도 부족하게 여겨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참 만족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허망함과 갈급함이 그들 인생을 지탱하는 두 기둥일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의 불신자 시절에 철두철미 겪었듯이 말입니다.
거기다 이 사단의 영은 신자에게도 동일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사단의 유혹과 시험이 신비한 초자연적 현상으로, 온전한 실패로, 완전히 더럽고 추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 신자가 금방 눈치 챌 수 있기에 다른 모든 수단이 고갈되어서 겁을 주어야만 하는 최후의 단계가 아니고는 직접적인 실체를 여간해선 드러내지 않습니다.
대신에 모든 이단이 그러하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게끔 만듭니다. 신자 개인에게는 성령이 내주하신 모습이 즉, 성령 그분이 어딘가 모르게 연약하다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현재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안에 주님의 권능이 많이 결핍하다고 의심하게 합니다. 쉽게 말해 신자더러 성령께서 자기 속사람을 강건케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성령더러 힘을 더 내라고 간구하게 합니다. 내 겉 사람이 지금 많이 연약해져 있으니 성령의 능력도 아주 약해졌다고 착각하게 만들면서 말입니다.
신자가 충만해지는 첫째 걸음은 충만하신 하나님이 충만한 채로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는 것입니다. 내 후패한 겉 사람으로 인해 그분의 충만함에 어딘가 결핍하다고 여겨지면 바로 사단의 꾐에 넘어간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속사람의 힘이 빠질 때는 충만하신 성령의 충만함으로 다시 충만케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물론 그전에 자신의 비움이 완전한지 점검하면서 말입니다. 요컨대 성령더러 충만해지라고 요구하지 말고 내 안의 모든 불필요한 찌꺼기를 불로 태워달라고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1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