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죄를 안 짓는 법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신앙생활 수십 년 하신 분들의 한결같은 불만은 “왜 나는 아직도 이 모양인가?”일 것입니다. 현실적 지위와 소유가 볼품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기도를 뜨겁게 오래 했는데도 환난이 그치지 않으니 믿음이 너무 약한 것 아닌가라는 불평도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 두 불평은 그리스도 복음 안에선 아예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압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서 예수를 구주로 모심이 현실의 안녕과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로 그 성품을 그리스도처럼 거룩하게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토록 하여서, 그분의 왕국을 이 땅에 확장시키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 온전히 들어온 신자들의 오랜 숙제는 그래서 아직도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하다는 것과 그것을 해결할 마땅한 방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정말로 의롭고 거룩해지려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열심히 묵상 연구했으며, 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교회의 봉사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크게 나아진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리 죄의 본성이 죽을 때까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해도 스스로 자기를 볼 때 부끄럽지는 않아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으니 큰일입니다. 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본문은 그 원인과 해결책을 아주 간략하고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의로워지려는 노력은 가상합니다. 하나님도 아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두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 오류가 아니라 맥을 잘못 짚고 있습니다. 가고 있는 방향이 틀려서 목적지에 결코 다다르지 못하는 것과 방불합니다.
우선 악한 짓을 하지 않으려는 데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는 경우입니다. 당장 예수님처럼 거룩해지기 힘드니까 우선 나쁜 짓만이라도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잘못을 범해 페널티 무는 것부터 막겠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마이너스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죄의 가공할 힘에 넘어가기 일쑤였습니다. 가끔은 성공했어도 일시적이었고, 썩어지는 옛 습성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오류는 신자의 일생이 공중권세 잡은 흑암의 세력과의 싸움이기에 하나님의 뜻과 사탄의 훼방 둘 중에 하나를 자기가 택하려 했던 것입니다. 신자는 그래야 합니다. 그 진술 자체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신자의 영적 분별력이 그렇게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탄도 항상 교묘하게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선하고 의로워 보일 때도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위하는 일을 하는 중에도 사탄에게 당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으로 신자들을 핍박했고, 예수님마저 기도 중에 사탄에게 시험을 당했지 않습니까?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설명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대적하며 거슬리는 것까지는 너무나 당연하며 또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그 상호 충돌로 인해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논리적으로는 상호 충돌하는 것끼리 상대가 하는 것을 막는 법입니다. 말하자면 육체의 소욕이 강하면 성령의 소욕이 하려는 것을 못하게 하고, 성령의 소욕이 강하면 육체의 소욕이 하려는 것을 못하게 한다고 말해야 하지 않습니까?
신자가 하려 원하는 것을 못하게 한다는 것은 신자에게 육체의 소욕도 있고, 또 성령의 소욕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 스스로 나쁜 짓을 하고 싶은데 자기가 자신을 막으려니 힘만 들고 실패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그 악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자기 속에 둘 다 있는데. 둘 중 하나만 택하려면 다른 자기를 스스로 속이거나 죽여야만 하기에 이 또한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해결책은 아주 간단합니다. 악을 행하지 않으려는 노력, 또는 선과 악 중에 하나를 택하여 행하려는 노력 둘 다 소중하지만 그래선 지금껏 경험한 대로 성공보다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선만 행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만 맺으려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죄와 사탄과 사망의 세력 쪽으로는 아예 관심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또 계속해서 선을 행하는 길 외에는 악을 이기는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악을 행하고 있으면, 아니 그쪽으로 생각만 돌아가도 결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직접 선을 행하고 있으면 악은 절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상태는 선을 행하고 생각하든지, 악을 행하고 생각하든지 둘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둘이 섞여 있거나, 조종 타협 수정 될 사안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그런 상태는 악에 졌거나 지고 있는 중이라는 뜻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공통적인 패턴이 하나 나타납니다. “너희가 이렇게 가르침을 받았으나, 나는 이렇게 하라고 명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이렇게’는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며, 뒤의 ‘이렇게’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악을 멀리하려고만 해선 악을 온전히 이겨내지 못하므로 반드시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간음치 말라는 것을 들었으나 예쁜 여자를 보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고 합니다. 선한 생각이 없으면 그 생각은 가만히 중립상태로 있지 않고 당장 악한 상태로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비유이긴 하지만 차라리 눈을 빼라고 합니다. 또 너희가 눈은 눈으로 갚으라고 배웠으나 즉, 과도한 복수를 하지 말고 공평하게 배상을 주고받는 것이 절대 나쁜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멈추지 말라고 합니다. 오리를 가자거든 십리를 가고, 속옷을 가져가면 겉옷까지 주라고 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배웠지만,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주라고 합니다. 원수는 미워해도 되고 이웃을 사랑하면 세상에선 의로운 자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을 준 당시 유대 지도자들처럼 저절로 사랑할 수 있는 이웃만 사랑하고 원수는 계속 미워하고 있으면 오히려 악에 진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미움의 감정이 남아 있는 이상 사랑을, 심지어 원수가 아닌 이에게도 온전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스스로 죄의 본성을, 예컨대 원수를 미워하는 감정을 도무지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성령의 간섭과 인도를 받아 원수를 사랑하고 기도해주라는 것입니다. 항상 선을 생각하고, 혹은 무조건 선만 생각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되 혼자서가 아니라 날마다 순간마다 성령의 도움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계명대로 준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신자를 맹목적인 광신자로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위선적 형식적 종교인으로 세우려는 것도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지 않으면 당장에 슬픔, 분노, 염려가 닥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도무지 항상 기뻐할 수 없으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또 그러면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했다고 안심하고 범사에 감사하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범사에 의심, 불평, 불신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세 계명에 이어서 어떤 말씀이 나옵니까? “성령을 소멸치 말고,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라.”(살후5:19-22) 성화되기 위해 순간순간마다 성령의 도움과 인도를 반드시 받으라는 것입니다.
주지해야 할 사항은 이 계명들을 하나만 준행하려 해선 안 됩니다. 모두가 연결된 것입니다. 악의 모든 모양을 버린다는 것이, 신자가 외적 형식에조차 추하거나 세속적인 모습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단순히 해석해선 안 됩니다. 그렇게 한다고 선해지지 않습니다. 악은 무조건 다 버리고 선은 무조건 다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 거룩함에 있어서 예수님과 똑 같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항상 선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고 있지 않으면 곧 바로 악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넘어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후의 신자의 상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불신자는 그렇다는 사실을 모를 뿐이고 신자는 그 영적 진리를 깨달은 것만이 다릅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6:15,16)
요컨대 신자로서 악만 저지르지 않아도 반쯤은 성공한 것이라고 여기든지, 악과 선 중에 내가 분별하여 현명하게 행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아니 그러는 순간 이미 악으로 넘어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18/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