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이 역사서에 불과한가요?
[질문]
한 유대인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구약 성경은 역사서, 문학으로서 여겨야 한다고... 2번이나 강조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 그렇게 얘기하신 건지 잘 이해가 안가요. 선민 의식 때문일까요?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라는?
[답변]
유대인의 성경분류
아시다시피 유대인들은 신약성경과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 민족을 선택하여 모든 열방 위에 높여주시는 구약의 하나님만 믿으며 장차 그렇게 해줄 메시아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곳곳에 메시아가 이방 민족들도 함께 구원하며 특별히 이사야서에 수난 받는 종으로 명확히 묘사되어 있는데도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유대인 할머니의 구약성경을 역사서나 문학으로 여겨야 한다는 말은 본인의 진짜 의도를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나름대로 추측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끼워 맞추기 식이 아니라 그들의 선민주의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개연성 있게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그 말에는 성경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이 드러나 있습니다. 우선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세 종류로 분류해서 부르는데 그 중 하나가 선지서인데 또 그것을 역사서와 예언서의 둘로 세분합니다.
먼저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 다섯 권을 율법(Law)이라고 칭하는데 토라(Torah)나 (모세)오경(Pentateuch)이라고도 부릅니다. 둘째는 선지서(先知書)인데 전선지서와 후선지서로 나눕니다. 현재의 성경편집 구조상 전선지서는 여후수아서에서 에스더서까지로(12권) 이스라엘 역사를 다루고 있어 역사서(History)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모세오경도 역사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것을 합친 17권을 통합해서 따로 역사서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후선지서는 이사야서에서 말라기까지의 17권으로 하나님의 경고와 예언을 주로 기록하고 있기에 예언서(Prophet)라고도 부릅니다. 이는 또 그 내용보다는 길이에 따라 이사야에서 다니엘까지(5권)를 대선지서, 호세아에서 말라기까지를(12권) 소선지서라고 부릅니다.
마지막 셋째는 성문서(Writings)라고 해서 욥기에서 아가까지 5권을 의미합니다. 주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신앙체험과 하나님이 주시는 인생에 대한 지혜 등을 적어 놓은 책이라, 시가서 혹은 지혜서로도 불립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을 역사서라고 부를 때는 그 기록한 내용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또 구약성경을 문학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이 기록했기에 문학적 형식을 표방한다는 뜻입니다. 글로서 어떤 사안이나 자신의 생각을 남들에게 전달하면 어떤 형태로든 문학이 됩니다. 저자가 문학 공부를 했든 안했든, 또 문학적 기법을 의도적으로 동원했든 안했든, 비록 그 수준에선 차이가 나더라도 그러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뜻을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한 성경은 당연히 독특한 문학의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강조, 상징, 예표, 반복, 은유, 직유 등의 기법을 동원하되 산문과 운문의 두 형식으로 크게 나뉠 수 있습니다. 또 역사, 전기, 예언, 묵시, 시가, 계명, 율법, 찬양 등으로도 분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을 문학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그 기록한 양식에 초점을 맞춘 말입니다.
그런데 무슨 말이든 문자적 의미를 일단 살펴본 후에는 화자(話者)의 의도를 따져야 합니다. 그분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는 가정 하에 어떤 의도로 그렇게 말했을지 헤아려보면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통상적인 유대인처럼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만 즉, 구약의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히 부인하는 경우입니다. 그럼 위에서 설명한 대로 구약성경을 유대교의 분류법대로 그 내용과 형식에 따라 구분해서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의도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과의 관련을 부인하려는 의도도 분명 있습니다. 왜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에만 해당되는 구약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느냐는 것입니다. 구약의 메시아에 대한 그 수많은 예언들이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으로 성취되었음을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고 타종교인 혹은 완전무신론자일 경우는 구약성경도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인간의 문학에 불과하니까 성경은 하나님 말씀으로 전혀 믿을 수 없다고 무시한 것입니다. 그 이면에는 성경을 갖고 자신을 전도하려 시도하지 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역사?
많은 불신자들이 이처럼 구약성경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인간의 문학적 저작에 불과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어떤 종교의 경전이 인간의 저작이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몇몇 종교에서 주장하듯이 경전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을 번역했다는 것이 오히려 신빙성이 덜합니다. 어떤 종교의 경전이든 반드시 인간의 저작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무엇보다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든 인간으로 이 땅을 당신 대신에 다스리게 하며 또 그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분명히 밝혀 보여 주시는 분입니다. 인간에게 그 실재와 실체가 완전히 가려져서 오리무중에 있는, 예컨대 바울이 아테네에 선교하러 갔을 때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행17;23)라는 제단이 있었듯이, 분이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이셨고, 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했습니다.(롬1:19,20) 그러나 이런 계시로는 조물주가 있다는 정도로만 인식되었을 뿐이지 하나님과 인간이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데는 부족했습니다.
그 이유는 물론 원죄 하에 태어난 인간의 영혼이 전적으로 타락해 있었기에 그분을 올바로 알고 경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모든 인간이 한결같은 죄인으로 그 선행과 공적에 따라 죽은 후에 구원과 심판으로 나눌 수도 없었습니다. 필연적으로 죄와 사단의 멍에에 묶여 있는 인간을 구원하러 하나님이 이 땅에 직접 내려 오셔야만 했습니다.
결국 기독교에 대해서 문제 삼을 부분은 하나님이 인간과 교통하기를 원하시는지, 또 죄에 빠진 인간을 구하러 그분이 내려 오셔야만 했는지 여부입니다. 이 두 가지를 부인하면 성경도 자연히 부인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기만 하고 완전히 방치해 두었다가 죽은 후에 독단적으로 심판 내지 구원한다고 여기면 예수님의 성육신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역사요 몇몇 종교적 선각자가 기록한 문학에 불과해집니다.
반면에 도저히 이 땅의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자신의 허물과 죄악과 영적 피폐함을 해결할 수 없다고 철저히 깨닫는 자는, 최소한 인정하는 자는 인간에게 당신의 뜻을 밝히시고 이 땅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다면 반드시 어느 민족이든 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신 당신의 뜻도 인간에게 분명히 밝혀 알게 해야만 합니다.
알기 쉽게 말해서 만약 예수님이 이천 년 전에 한국 땅에 한국인의 모습으로 왔다면 구약성경은 응당 한국 역사를 문학적 양식에 의해 기록되어졌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단 그 내용은 지금의 구약성경처럼 모든 열방을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아가 온다는 수많은 예언과 함께 왜 꼭 오셔야만 하는지 그 이유와 과정과 목적을 함께 분명히 밝히면서 말입니다.
요컨대 구약성경이 역사적 문학에 불과하다는 비방은 불신자로선 타당해 보일지 몰라도 기독교 경전에 대한 정당한 판단이 전혀 되지 못합니다. 기독교의 창조와 구원의 교리 자체를 인정하느냐 못하느냐를 먼저 문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신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철저한 자각이 없으면 성경은 결코 제대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감화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진 후라야 비로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집니다. 성경을 알고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을 얻고, 물론 성경공부 중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도 있음, 성경이 알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6/17/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