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35:22-28) 신자가 세워야 할 신년 계획

조회 수 36 추천 수 0 2020.01.22 16:35:58

(민35:22-28) 신자가 세워야 할 신년 계획 

구약성경강해 (55) / 민수기강해(45) / 2020년 신년주일설교

 

“악의가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을 때에 이는 악의도 없고 해하려 한 것도 아닌즉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복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 피를 보복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거기 거주할 것이니라 그러나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 피하였던 도피성 지경 밖에 나가면 피를 보복하는 자가 도피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지라도 피 흘린 죄가 없나니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머물러야 할 것임이라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 소유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 (민 35:22-28)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지만...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합니다. 새해 아침에는 그런 마음이 더 절실해지고 정말로 올해는 신자답게 성경 말씀에 따라 살아야지라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 말씀을 적용하려다 보면 크게 세 가지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첫째 문제는 눈앞에 닥친 문제를 성경의 어떤 말씀과 연결시켜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알게 되는 유일한 통로가 주일 예배의 설교, 그것도 단편적으로 듣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공부 모임에 적극 참여하여서 신구약성경 66권을 관통해서 배우고 스스로 매일 성경을 통독하며 깊이 묵상하는 습관부터 들여야 합니다.

 

둘째 문제는 현대 사회가 너무 복잡해 성경기록에 없는 일들이 갈수록 더 많아져서 적용할 수 있는 말씀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구체적인 정답을 제시하자면 성경은 한권의 책이 아니라 거대한 도서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배우되 문자적 표피적으로 배우지 말고 반드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당신의 사역과 말씀 안에서 분별해내어야 합니다. 또 그럼으로써 그분께서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근본적인 뜻과 원리를 숙지해야만 합니다.

 

셋째 문제는 어떤 말씀은 오늘날 상황에 전혀 해당되지 않는데다 불합리하기까지 해서 구태여 살펴볼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이 몰라도 되는 규정을 계시할 리는 없습니다. 인간의 성정은 시대와 장소와 상관없이 항상 똑 같습니다. 고대에 적용되는 하나님의 뜻과 원리는 당연히 지금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비도덕적으로 보이는 규정까지 제정했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면밀히 검토 판단해야만 합니다.

 

결국 이 세 문제 다 성경을 정확히 배워야만 해결됩니다. 하나님 뜻을 모르고는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오늘 본문의 도피성 제도도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우발적 사고로 사람을 죽인 억울한 가해자를 보호해주는 아주 선한 제도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의미를 잘 모르겠고, 오늘날 이에 해당되는 사례도 없는 것 같고, 무엇보다 요즘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측면들이 몇 가지 있는 것 같습니다.

 

피의 복수를 허용하시는 하나님

 

우선 전혀 악의 없이 순전히 우발적 사고로 남을 죽였는데도 피해자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 가해자가 도피성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복수의 살인을 해도 된다고 합니다. 남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어쨌든 엄청난 잘못이긴 해도 그런 사적인 복수는 특정인을 표적으로 삼아 의도적으로 죽이기에 또 다른 엄청난 죄임에도 하나님이 허락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는 가장 가까운 친척이 살인자에게 피의 복수를 해도 된다는 고엘 제도가 이미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에는 더더욱 가족이나 친척의 원수를 갚는 것은 윤리적으로 최고의 선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마침 이번 주에 미국이 이란 혁명군 사령관을 드론으로 정밀 타격하여 살해하자 이란 전 국민이 피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이란을 정죄하지 않고 심정적으로 편을 드는 자들도 많을 것입니다.

 

고대에는 도구가 원시적 초보적이라 안전장치가 완비되지 않아 우발적 사고가 오늘날보다 훨씬 많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우발적 사고라도 가까운 가족 형제 친척이라면 극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라 바로 복수할 것입니다. 그 이전에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윤리의식이 많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도둑 강도는 물론 살인이 예사로 자행되었을 것입니다. 인구가 적고 성읍이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어서 한적한 곳에 숨어서 범행을 저지르기 쉬었을 것입니다. 교통이나 통신이 발달되지 않아서 마음만 먹으면 죄를 감추는 것도 용이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살인죄와 그에 따른 피의 복수가 보편화 되어 있어서 순전히 실수로 사람을 죽였어도 어차피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던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발적으로 죽인 자마저 고엘 제도로 인해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것을 막아주려는 의로운 목적으로 도피성 제도가 제정된 것입니다. 실제로 민수기 35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이 우발적인 살인의 경우에 친척이 가해자를 죽여도 된다고 직접적으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도피성으로 피하게 해서 억울하게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강조할 뿐입니다.

 

문제는 과학적 수사기법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라 자칫 사람들로 우발적 사고를 가장한 살인을 시도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낭떠러지에서 의도적으로 밀어서 추락하게 하고는 실수라고 강변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럼 복수가 복수를 낳는 악순환을 초래 내지 조장할 수 있습니다.

 

또 우발적 살인자가 운 좋게 도피성까지 피신해서 재판을 통해 무죄로 밝혀져도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에서만 살아야 합니다. 대제사장이 장수하고 가해자가 그보다 먼저 죽게 되면 사실상 무기징역 형인 셈입니다. 그러나 형벌의 기간을 길게 하고 가해자도 회개와 자숙을 더 많이 하여야 한다는 뜻은 없습니다. 마침 대제사장이 일찍 죽으면 곧바로 자유의 몸이 되어서 어디라도 가서 살 수 있고 그에게 피의 복수는 엄격히 금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의 수명에 따라 죄의 형벌이 비례한다는 것과 대제사장도 인간인데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평생을 지배한다는 것은 너무 불합리해 보입니다. 도피성 안에서만 거주의 제한이 가해져 자기 뜻대로 직업도 갖지 못하고 심지어 여행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예기치 않은 부작용과 불합리한 점들이 있음을 모를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입장에선 그런 피의 보수자는 물론이고 고의적 살인자라도 그 현장에서 곧바로 벌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흔히들 하나님이 세상에 흉악한 범죄자를 묵인하고 온갖 죄악이 들끓는 것을 방치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런 공의를 실현하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필요도 없다고 반발합니다. 예컨대 교회에 새벽 기도하러 가는 권사님이 교통사고를 그것도 음주운전자의 차에 치여 죽는데도 하나님은 왜 방치하느냐고 신자들마저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려면 하나님이 음주운전자의 차나 할머니를 순간적으로 공중에 붕 날게 하는 기적을 베풀거나, 아니면 운전자에게 벼락을 내려 즉사시켜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일일이 현장에서 벌을 주면 모든 이가 하나님이 두려워서 억지로 믿게 될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범죄는 아예 없어지겠지만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노예 내지 꼭두각시가 되어서 살다가 끝이 납니다. 이는 하나님이 바라는 바가 결코 아닙니다. 아니 인간들은 이번에도 거꾸로 인간을 당신의 종이나 기계로 만들어 마음대로 조종하는 그런 하나님은 믿고 따를 필요가 없다고 난리칠 것입니다.

 

도피성 제도의 두 가지 특성

 

도피성 제도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모든 율법 조항들과는 다른 두 가지 특이한 점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둘 다 대제사장의 직분과 연결되어 있기에 그 직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는 도피성 제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첫째 도피성 제도는 오직 우발적 살인죄에만 적용됩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차례 속죄양의 피를 지성소 안 언약궤 위에 뿌려서 이스라엘 전 백성이 그해에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의 용서를 구하게 했습니다.(레위기 16장) 양의 피로 대속하는 이유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기”(히8:22) 때문입니다. 모든 죄가 하나님께 범한 죽어 마땅한 죄이기에 피로만 값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대속죄일 양의 제사로도 용서 받지 못하는 죄가 하나 있는데 바로 살인입니다. 고의적 살인은 가까운 친척에게서 피의 보수를 당하거나 그런 친척이 없다면 백성들로부터 반드시 처형당해야 합니다.(16-21절) 그러나 고의가 전혀 없는 우발적인 실수에 직접 형벌을 가할 수는 없기에 이 경우만 유일하게 도피성 제도로 보호해준 것입니다.

 

둘째로 무죄로 판명되었음에도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거주의 자유를 도피성 안으로 제한시켰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대속죄일을 제정한 뜻과 동일합니다. 대속죄일의 제사를 하나님이 열납할 수 없다고 여겼을 때는 대제사장을 지성소에서 죽도록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모든 백성의 죄 값을 책임지고 대신 죽임을 당해야만 합니다.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잘못에 대한 피해 보상이나 죄에 대한 형벌은 동등해야만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우발적 살인이라도 다른 이의 생명을 빼앗았기에 그 죄 값도 죽은 자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 즉, 인간의 생명으로만 그 죄 값을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발적 실수를 저지른 죄가 없는 자의 생명으로 갚을 수는 없으므로 모든 백성의 죄 값을 감당해야 하는 대제사장의 죽음과 연결시킨 것입니다.

 

성경이 모든 죄가 하나님께 범한 것으로 죽어 마땅하므로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고 선언하는 뜻이 무엇입니까? 어느 인간도 죄에서 자유로울 자가 없는 죄인이기에 반드시 죽음으로만 죄 값을 갚을 수 있다고 하나님의 종교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내린 것입니까? 아니면 기독교가 도덕적으로 최고 고급한 종교이므로 죄의 범위를 가장 광범위하게 잡고 그 처리도 가장 엄격하게 최고 강도의 형벌을 가한다는 뜻입니까? 둘 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할 때에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신 후에 심히 기뻐했고 당신을 대신해 이 땅을 아름답고도 거룩하게 다스릴 청지기 직분을 부여했습니다. 그전에 이뤄진 모든 창조는 인간이 그 직분에 맘껏 충성할 수 있도록 풍성하고도 안락한 모든 생활 여건을 마련해준 것입니다.

 

한마디로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 인간이었는데 그 목적이 달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이제부터 인간과 신령과 진정으로 교제 동행하며 당신의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줄 것을 생각하며 크게 기뻐하신 것입니다. 인간을 이 땅에 존재케 한 목적도 하나님을 평생토록 기뻐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잘못은 다 범해도 괜찮지만 제발 당신의 사랑의 품만 떠나지 말라고 선악과 금령을 주셨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억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탄의 거짓에 속은 최초의 인간은 스스로 자기 힘으로 자유로워지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는 본인들은 전혀 의도 기대 예상치 않았는데도 수치심과 공포심과 죄책감에 사로 잡혀서 인간끼리는 비난 정죄했고 하나님으로부터 그저 멀리 도망가고 숨는 일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을 당신과 함께 할 때만 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존재로 지어졌기에 그분을 떠나면 그 기쁨은 필연적으로 사라지게 마련이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범죄 한 아담과 이브에게 따로 사형 언도를 하고 그 형벌을 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대적하니까 육신의 죽음보다도 더 괴로운 영적인 죽음이 임한 것입니다. 실제로 아담과 이브는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짐승을 죽여서 그들의 죄 값을 대신 갚게 하고 가죽옷을 손수 지어 입히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본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재앙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대속죄일에 죄를 용서할 수 없으면 대제사장을 지성소 안에서 죽어야 하나 성경에 그랬다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희생양의 피를 받을 때부터 다 용서하기로 이미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도피성 제도에도 하나님의 그런 본심이 그대로 반영된 것입니다.

 

부족한 인간 대제사장

 

문제는 대속죄일의 제사는 일 년에 한 번의 효력밖에 발휘하지 못합니다. 한시적 부분적인 속죄입니다. 거기다 짐승의 피이므로 완전한 속죄의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애꿎은 짐승들만 대신 죽었습니다. 도피성 제도에서 우발적 살인의 잘못도 대제사장의 목숨으로 갚게 했지만 그도 죄에 찌든 동일한 죄인이므로 완전한 대속이 될 수 없었습니다. 율법은 아무리 잘 준행해도 죄는 반드시 피로 갚고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으로만 그칩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최초인간 부부를 용서해주면서 언젠가 여자의 후손이 와서 너희를 속여 나를 거역케 한 사탄의 머리를 부수어서 죄 중에 태어날 그들의 후손들을 구원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창3:15) 전혀 죄가 없으시면서 완전한 인간의 생명을 지닌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 대신에 실제로 죽어야 비로소 완전한 대속이 이뤄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상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사악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찾지도 않고 그 이성도 왜곡되어서 오직 자기 생각과 감정에 사로잡혀서 청개구리처럼 행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에 순종하는데 인간만이 유일하게 그분을 거역하는, 세상 식으로 말하자면 천륜을 어기는 죄를 서슴없이 저지르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죄송하지만 하나님마저 자기 아래에 깔아뭉개고 그 위에 인간이 서있기에 그 마음이 가장 부패한 것입니다. 또 그런 부패한 마음에서 모든 완악한 죄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자기를 억울하게 피해당하는 입장에만 세워두고 판단합니다. 자기가 가해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당연히 그렇고 하나님도 피해자 입장에는 절대로 두지 않습니다. 내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끌만 집어내는 잣대를 사람들 사이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마저 갖다 댑니다.

 

신구약 성경의 하나님에 관련되는 모든 기록을 보면 당신께서 인간의 수준에 맞추어서 낮아지는 모습뿐입니다. 지금도 분노의 복수를 하는 자를 용납해줄 만큼 낮아지셨습니다. 새벽 기도 가는 권사님을 음주 운전으로 치어서 죽이는 자도 살려주십니다. 만물 가운데 너무나 부패한 인간의 심령은 그 어떤 것으로도, 특별히 율법 조문으로는 고칠 수 없음을 당신께서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보내실 때까지 인간들의 온갖 사악함을 참고 참으시면서 당신을 낮추셨는데도 사람들은 오히려 인간 세상의 모순을 방치하니 못 믿겠다고 원망 거역 대적하고 있습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니까 자신의 완악함이 그분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선언하는 성경이 절대적인 진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도피성 제도의 숨은 뜻

 

고엘 제도를 그대로 허용한 채 도피성 제도로 보완하신 하나님의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가족이나 친척의 피의 보수를 옳다고 인정해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발하여서 아무 잘못 없이 실수한 자를 그 현장에선 죽일 수도 있음을 이해해 준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일시적 감정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너무나 연약하고 가난한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런 살인 또한 고의적이 것이 아니라 우발적 사고의 범주로 취급해준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거룩한 뜻 안에선 그런 자를 사형시키면 그 또한 억울한 죽음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땅은 알다시피 좁습니다. 곳곳에 균등하게 여섯 군데 도피성을 두었습니다. 억울한 가해자가 죽기 살기로 뛰어가면 하루 안에는 도피성에 하루 안에는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결국 고엘 제도에 따라 친척들의 복수를 허용해준 것은 도피성까지 도망가는 몇 시간 길어야 하루뿐입니다. 그렇게 일단 눈앞에서 원수가 사라지면 친척들도 감정을 다시 추스릴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또 도피성으로 피하여 재판을 통해 모든 경위가 밝혀지면 피해자 친척들의 복수심은 많이 줄거나 없어질 수 있습니다.

 

도피성 제도를 제정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으로 따지면 비록 고엘 제도로 허용된 살인이라 해도 당신이 창조하신 귀중한 인간 생명을 인간이 앗아간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특정한 자를 지정해서 고의로 죽인 것이니까 우발적 살인보다 더 중한 죄인입니다. 결국 도피성제도는 고엘로 살인하게 될 친척의 죄를 단 하루 만에 하나님이 막아주는 셈입니다. 피의 복수가 되풀이되는 사악한 인간 죄악의 고리를 하나님이 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사고였어도 가해자의 마음은 다른 이의 생명을 소멸시켰기에 너무나 괴로울 것입니다. 그도 진정한 회개의 기간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대제사장이나 그 성중의 레위인들이 상담과 치유와 회복과 기도의 시간으로 함께 해주어야 합니다. 대제사장의 생명으로 그 죄 값을 갚는다는 율법적 의미를 넘어서 제사장들이 자기가 맡은 양 떼를 사랑으로 보호 인도해야 한다는 의미가 더 큽니다. 제사장더러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그 억울한 죄인의 생명까지 살려내라는 것입니다.

 

우발적 사고로 인한 살인은 실수한 자만 억울한 것이 아닙니다. 피해자부터 전혀 예상치도 못하는 가운데 멀쩡히 있다가 순식간에 죽었습니다. 그만큼 억울한 죽음도 없습니다. 억울한 사고를 낸 자도 만약 고엘 제도로 죽으면 그만큼 억울한 죽음도 없습니다. 사형을 당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나아가 정당한 복수를 하는 친척들도 하나님의 법으로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입니다.

 

인간 세상에선 세 당사자가 모두 만족할 만큼 지혜롭게 해결할 방도는 전혀 없습니다. 이번 이란군 사령관을 미국이 살해한 사건이 그 적나라한 증거입니다. 모든 죄가 상대적이며 그 판단의 최고 우선 기준은 애국심입니다. 반드시 가해자와 피해자로, 혹은 선과 악으로 나눠서 한 쪽이 벌을 받아야 합니다.

 

가장 억울한 예수님의 죽음

 

대속죄일로는 부족한 인간의 대속 구원을 완전한 제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의 영단번의 제사로 완성시켰습니다. 그 안에 숨겨진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로 억울한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무 죄가 없으실 뿐 아니라 오직 인간들을 위해서 선하고 의로운 일만 행했습니다. 나아가 모든 억울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세상에서 정죄 격리되어서 사람들이 상종도 않던 자들을 먼저 찾아가서 사랑으로 품어주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정당한 복수로 죽은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의롭다고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던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선언하는 바람에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것이 첫째 이유였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고 구원의 은혜로 초대하려는 목적으로 참된 복음을 가르쳤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죄에 찌들어 부패한 마음으로 스스로 격분하여서 만왕의 왕으로 모셔도 부족할 주님을 하나님에게 가장 저주 받는 형벌인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인간이 만든 율법의 시행 세칙을 구실로 해서 거룩한 율법 자체를 주신 하나님을 도리어 정죄 심판 했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자나 실수로 죽인 자가 당할 억울함이든 세상의 모든 억울함도 당신의 최고로 억울한 죽음으로 다 씻어서 깨끗하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주님은 마지막까지 인류의 참된 대제사장의 자격으로 자기를 죽음에 내몬 원수들마저 자기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 모르니 용서해달라고 성부 하나님께 중보 기도했습니다. 세상에서 살인이 가장 중한 죄이지만 그마저도 인간들이 사탄에 미혹되어서 조종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자행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한 죄 그것도 원수 대적들의 죄까지 중보했으니까 온 인류의 죄를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중보를 한 것이며 더 중요하게는 당신의 죽음으로써 그 죄 값을 다 갚았습니다.

 

도피성 제도는 우발적 살인을 취급하는 법을 가르치는 형벌 규정이 아닙니다. 우발적 사고에 관련된 세 명의 억울하고도, 더 정확하게는 일시적 감정에 휘둘려서 꼼짝 못하는 너무나 연약하고 가난한 인간들을 죽음에서 건져내주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으로만 억울하게 죽은 자의 피로 더렵혀진 땅을 깨끗케 하고, 억울하게 살인자가 된 가해의 죄도 용서 받게 했고, 나아가 또 다른 살인을 방지할 수 있었던 사랑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새해를 어떻게 계획할 것인가?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데 성경이 어려워서 모르겠다고 불평해선 안 됩니다. 우선 성경을 그만큼 읽지 않는다는 반증입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정말로 마음을 열고 성령이 조명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천천히 묵상하며 읽으면 읽히어집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도 깨달아집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고 있다는 증거는 둘 뿐입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의 추함을 절감하고 둘째는 그것을 깨끗케 해줄 것은 예수님의 사랑뿐임을 절감하는지 여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뿐입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저작된 성경인지라 그 말씀이 살아 운동력이 있어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찌러 쪼개어서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합니다. 세상만물도 우리를 상관하는 하나님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내십니다.(히4:12,13)

 

예수님 그분이 내 모든 죄 값을 당신의 생명과 일대일로 맞바꾸며 친히 감당하셨습니다. 진정으로 십자가에 죽었어야 할 자는 바로 내 자신이었음을 절감하고 그 썩어 없어질 옛 생명을 주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아 죽였다면 주님의 대속의 은혜와 권능이 임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과 함께 영원토록 그분과 기쁨과 감사와 자유와 평강 가운데 동행할 수 있는 참 생명을 부여 받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내주합니다. 정말로 주님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갖고 함께 해주십니다.

 

살인죄는 하나님이 만드신 후에 심히 기뻐했던 인간의 생명을 소멸시키는 최고로 중한 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무산시켰고 당신께서 기뻐할 대상을 없앴기에 따지고 보면 하나님 당신을 죽인 것과 같습니다. 죽음으로도 도무지 갚지 못할 죄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구약의 모세와 다윗, 신약의 바울처럼 살인자도 당신의 귀한 충성된 종으로 세웠습니다. 그 이유도 하나님 당신께서 십자가에 직접 살인을 당함으로써 살인 죄인까지 용서하고 사랑으로 품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세상 죄악과 흑암의 세력은 물론 모든 고난과 허물과 수치와 억울함에서도 온전한 도피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인간의 영원하고도 완전하며 유일한 도피성입니다. 다른 곳에선 인간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해도 참 평안이 결코 없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벽한 평안과 자유를 주시려고 타락할 줄 다 아시고도 선악과 금령을 제정한 것입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이 예수님 밖 세상 권력과 재물에서 스스로 안전을 찾으려 해선 무조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과 돈이 주인이 아니고 사람들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다면 새해에도 어떤 일이든 계획할 수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 욕심이 개입되어 있다 해도 본문처럼 고의적인 거역이 아니라면 주님이 마련하신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우리가 미처 몰랐던 잘못된 욕심을 깨우쳐서 고쳐주시고 또 그 일도 합력하여서 당신의 뜻 안에서 선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만이 참 기쁨이자 참 생명으로 이미 소유하고 누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힘들고 억울하고 때로 죄에 쓰러져도 그분만이 소망이며 다시 세워주십니다. 그분 안에서 신자의 실패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이 그렇게 볼 뿐입니다. 우리 스스로 실망하고 주저앉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럼 주님이 도피성이 아니요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 잘못 없이 실수한 죄인도 도피성 안에서만, 대제사장과 평생을 함께 할 동안만 자기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올해의 내 계획이, 또 그 계획대로 행하는 것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맞는지 아닌지 따질 필요도 사실상 없다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그것을 알 수 있는 자도 사실상 없습니다. 혹시라도 그렇지 못하게 될까 염려하거나 벌 받을까 두려워할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정말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완전하신 참 기쁨 안에 이미 들어와 있기에 평생토록 믿음으로 더 이상 요구할 것도 없고 불안 염려해 할 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신자답게 하나님 뜻을 좇아 살 수 있는지는 복음서의 예수님을 깊이 연구하며 북상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미 다 알고 있지만 죄의 본성과 세상 유혹에 지고 사탄의 시험에 흔들려 주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똑같은 열심과 크기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증거가 골고다 십자가입니다. 신자가 올해 세울 계획과 결심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도피성으로 삼는 것 하나로만 충분합니다.

 

1/5/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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