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주의자가 신을 옹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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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인간에 대한 새롭고 권위 있는 이미지가 탄생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로우며 지배적이고, 주체적이자 자율적이며, 위엄 있고 결코 무너지지 않으며, 책임감 있고 냉철하며, 관조적이어서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공평무사한 존재다.
디치킨스(*)가 이성이라 부르며 찬양하는 것은 바로 이 역사적으로 특수하고 도덕적으로 기구한 이미지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이는 인류가 드디어 성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임마누엘 칸트의 자유주의에서 장려하게 표현된 이 성숙함은 모종의 유아적 불안감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디치킨스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행위에서의 주체성과 사물에 대한 지배력, 그리고 자율성 등은 바람직한 미덕이지만, 위협적이리만큼 이질적으로 느껴지게 된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주권은 고독과 불가분한 것임이 드러난다.
계몽정신으로 무장한 인간은 확신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이 우주에 홀로 서 있으며 그의 진가를 증명해줄 것도 자기 자신뿐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그는 세계를 지배한다면서도 거기에 개재된 자의성과 불확실성을 진저리 칠 정도로 의식하게 되며, 이런 상황은 근대가 진행됨에 따라 더욱 심각해진다.
(그런데) 자신이 한 손으로 방금 세상에 끼워 넣은 가치를 다른 손으로 끄집어내어 이것 보라며 제시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 주체가 딛고 선 토대가 자기 자신 뿐이라는 점은 또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러나 초월성은 그냥 사라져주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디치킨스는 바로 이런 사실에 대해 불평하고 있는 것이지만, 문제는 그보다 더 복잡하다. 과학과 물질적 복지, 민주정치, 경제적 효용을 넘어선 영역에 대한 인간의 욕구에 종교가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는 듯해 보일수록 문학과 예술, 문화, 인문학, 정신분석학, 그리고 최근에는 생태학 등이 그 빈자리를 차지하려 나섰다. 근대에 들어 예술이 사실상 또 하나의 상품에 불과해졌음에도 그토록 커다란 비중을 지니게 된 이유는 영적인 가치가 거의 퇴색한 세상에서 예술이 초월성의 대용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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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는 Terry Eagleton의 “신을 옹호하다. -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강주헌 옮김, 모멘트 2009 번역출판)의 112,113 page의 일부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문단은 제가 읽기 좋게 임의로 나눴고 (그런데)도 제가 삽입한 것입니다. (*)디치킨스(Ditchkins)는 현재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무신론자의 두 대표 주자, 리차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이름을 저자가 합성해서 만든 조어(造語)로, 직접적으로는 그 두 사람을 간접적으로는 이성주의적 무신론자들을 통칭합니다.
저자는 가톨릭 신자이면서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입니다. 본서는 2008년 4월 예일 대학에서 “과학과 종교”라는 주제로 특강한 것을 책으로 편집한 것입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요체는 공산주의자도 하느님을 믿을 수 있으며 무신론적 과학 철학의 허구성을 얼마든지 이성적으로 반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과 인문학을 섭렵한 저자는 이성만 중시하는 계몽주의에 바탕을 둔 무신론에 대해 위의 글처럼 예리한 반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 칼 마르크스의 주장이 외부에서 보듯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간간이 밝히고 있습니다. 조금 어렵긴 하지만 한번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인 것 같습니다.
가톨릭 신학자들이 대개 그렇지만 저자 또한 현재의 모순에 대한 증상과 문제점들은 비교적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 제시된 해결책에선 인본주의적 방식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태생적(?) 한계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또 인본주의적 해결책이란 엄밀히 말해 저자가 그토록 경멸하는 이성만능주의의 또 다른 형태임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들(저자 포함)이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인지, 진짜 모르는 것인지 알 길 없지만 바로 이런 점이 개신교의 개혁신앙과의 차이점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반대로 신본주의를 지향하는 복음주의 계열에선 신의 은혜만 너무 앞세우다 작금의 상황을 합리적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분석해야 하는 일조차 게을리 하는 우를 자주 범하지만 말입니다.
오해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가톨릭을 옹호하거나 이분의 의견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개신교 외부의, 그것도 공산주의자 기독교신자(자칭)의, 관점에서 인류가 당면한 상황의 문제점들과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분석한 내용이 아주 흥미롭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부터 개혁해 나가는 일에 일부 참작 반영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주위의 무신론자 지성인들에 대한 유신론의 변증 자료로도 어느 정도 활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래는 상기에 인용한 글 조금 뒤에(116 page) 나오는 저자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진술입니다. 진화론에 바탕을 둔 무신론의 결정적, 아니 치명적 하자를 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현재 가장 각광 받고 있는 도킨스 같은 자의 이론이 한 세기 후에 무용지물이 된다면, 또 그 때에 나타날 제이의 도킨스도 또다시 나오는 제삼, 제사의 도킨스에 의해 연속적으로 뒤집어진다면, 진화론적 무신론이 설 자리라곤 영원토록 “허무” 뿐이지 않습니까?
이는 모든 세대의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들의 영원히 풀 길 없는 딜레마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아를 찾아서 자아를 충족시키겠다”는 거창한 명분을 내걸고 오늘도 열심히 캄캄한 미궁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또 그러다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한 채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한 글자로 줄이면 ‘무(無)’라고 한탄하면서 죽어갈 것입니다. 디치킨스를 필두로 그들이 얼마나 불쌍하고 안타까운지요? 반면에 우리가 십자가 복음 안에 이미 들어온 이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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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에 대한 도킨스의 관점도 마찬가지로 지극히 낙천적이다. 그는 의식적으로 현대성을 추구하는 인물임에도 구식 헤겔주의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음이 드러난다. 간혹 '퇴보‘가 있긴 하지만 도덕적 성장이 꾸준히 지속되는 ’시대정신(Zeitgeist)' (그 자신의 표현이다)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도킨스는 텔레비전 스포츠 해설가처럼 흥분하면서 “물결 전체가 계속 움직이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도덕적 자기만족을 풍기면서 덧붙이기를, 21세기의 사람 대부분이 “중세나 아브라함의 시대는 물론이고 훨씬 더 가까운 1920년대의 사람들보다 크게 앞서 있다”라고 한다.
이런 식의 역사 읽기에 따르면 도킨스 자신도 한 세기쯤 뒤의 사람들에게는 선사시대의 혈거인처럼 비칠 것이다.
12/27/2010
그 동안 제가 제대로 된 책을 안 읽었든지, 읽었어도 게을렀든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회원님들과 방문자님들에게 저희 홈피에
이런 보석(?) 같은 사이트도 있음을 상기해 드리고 싶은 숨은 뜻도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