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제일 잘 사랑할 수 있는 길
(조급증도 큰 죄다. 시리즈 10, 完)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맺어질 수 없는 사랑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하고 챨톤 헤스톤이 주연한 걸작 영화 벤허에 아주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벤허가 자기 집을 들락거리면서 항상 대문 오른쪽 기둥을 손으로 만지는 모습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장면이지만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어떤 면에선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쉐마라고 불리는 본문의 말씀을 적어서 문설주 상단에 넣어 놓은 곳을 만진 것이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신6:6-9)
쉐마를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는 본문에 이어진 계명대로 따랐던 것이다. 하루에 몇 번씩이나 암송했고 자녀들에게 철저히 가르쳤다. 예수님이 오실 당시에 유대인들만큼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한 민족은 없었다. 아니 참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유일한 민족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는 못했다.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사랑에 실패했다.
사랑이란 쌍방이 서로 사랑해야 하고 또 당연히 상대의 마음에 합해야 한다. 그럼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을 향한 유대인만의 짝사랑이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도 신실하고도 무한하신 긍휼로 그들을 사랑하셨다. 각기 서로 핀트가 어긋나는, 대상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의미가 다른, 사랑을 했다. 아름다운 열매로 맺어질 수 없었음은 필연적 결과였다.
벤허 영화에서 보듯 유대인들은 성실하게 본문을 문자적으로도 엄격히 준행했다. 말하자면 사랑의 행동에는 성공했다. 그럼 사랑하는 마음에 실패한 것인가? 본문대로 하자면 쉐마를 자기들 마음 판에 새기는 데에 실패했는가? 만약 하나님을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런 행동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정말로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했었다. 그런데도 실패했다.
실패의 원인은 이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했어야 하는데,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려” 했기 때문이다. 마음에 하나님 “그분을” 온전히 새겼어야 하는데, 그분을 더 열심히 “사랑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최선, 최고의 사랑 행위를 하려고만 노력한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이 자기들 마음 가운데 온전히 자리 잡고 있다면 자연히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단순히 자기들 열심과 의지를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려 한다고 해서 온전한 사랑을 이룰 수는 없다.
오늘날의 신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분명히 있다. 또 정말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싶다. 그래서 여러 사랑하는 방안을 동원한다. 혹시 그 방식에 자신의 정욕과 죄악이 스며들까봐 각별히 조심도 한다. 그런데도 막상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혹은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지 물어보면 그리 자신이 없다. 아직 그분을 사랑하는데 모자람이 많다고 여긴다. 그럼 참 사랑이 아니지 않는가?
유대인들이 사랑하는 방식에 초점을 둔 데는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바빌론 포로로 잡혀간 원인을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지키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했다. 포로 귀환 후에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려 노력했다. 율법의 자구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쏟아 지켰다. 명시적 언급이 없는 사안들은 장로들이 토라에 비추어서 판단한 의미와 절차에 따랐다.
히브리 본문은 우리말 번역과 달리 “이스라엘” 대신 “들어라”가 먼저 나오는데, 그 히브리 단어가 쉐마라서 통칭 쉐마라고 부른다. 그 의미가 단순히 어떤 소리가 들리는(hear) 것이 아니다. 계명대로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비유하자면 유치원선생이 아이들에게 “Listen! Be Quiet!"이라고 말할 때에, 듣는다(listen)는 단어의 뜻은 실제로 장난을 그만두고 아무 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벤허 영화처럼 문설주에 쉐마를 붙여놓고 출입할 때마다 만졌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계명을 순종하면서 그분을 사랑했다. 회심하기 전의 바울의 모습이 그 증거다. 그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힐렐 학파의 바리새인으로써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고 자부했다. 철저히 계명대로 살아가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뜻이다. 또 율법을 무시하는 것 같은 기독교인들을 열심히 핍박했다.
하나님을 멀리 했던 죄를 회개하고 열심히 그분을 사랑하려는 유대인들의 시도는 엄격한 계명 준수와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소한 문자적 불이행도 허용될 수 없었다. 차츰 초기의 선한 의도와는 달리 계명의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중시하기보다는 계명을 실천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결국은 형식적 종교로 변질되어버렸다.
어쨌든 유대인들은 과거 잘못을 뉘우치고 율법을 순종하려 노력은 했었다. 반면에 오늘날 의 신자에겐 순종하려는 성의 아니 인식조차 없다. 대부분 내가 그분을 사랑하면 그분도 나를 사랑해줄 것이라는 타산적 사랑에 그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계약 내지 흥정일 뿐이다. 그런대로 믿음이 좋은(?) 일부 신자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열심만으로, 다른 말로 사랑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그분을 사랑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결과는 그들과 똑같이 메마르고 열매 없는 껍데기 종교생활로 흐를 뿐이다.
사랑의 본질
사랑이란 인위적 노력으로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랑이란 언제나 소리 소문 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불가항력적으로 우리의 가슴을 점령하는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마냥 좋아지게 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이유가 붙으면 엄격히 따져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 때문에 사랑하게 되었기에 만약 그 이유가 되는 배경 혹은 근거가 사라지면 사랑도 함께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상냥하고 애교가 많아 사랑하여 결혼까지 했는데 생활에 찌들려 상냥한 애교가 실종되면 사랑도 식어지지 않는가?
물론 신자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런 남녀 간의 사랑에 비길 수는 없다. 그나마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에 가장 견줄 만할 것이다. 자녀는 혈연관계의 본성상 언제 어디서나 마땅히 부모를 사랑하게 되어 있다. 때로 부모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그 사랑이 식기도 하고 미울 때도 있을지라도,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방식을 열심히 모색해 실천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요컨대 사랑이란 사랑하는 방식에 따라 사랑의 질과 양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것이다.
사랑에는 또 다른 특성이 있다. 사람들로 눈을 멀게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게 되면 구태여 사랑의 본질이나 특성을 따지지 않는다. 정말로 사랑에 빠지면 그 상대를 정말로 더 열심히 사랑하려는 마음뿐이다. 사랑하는 상대에게 자꾸 베풀기 원하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 누군가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분명 진실이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 자체는 한결 같을지라도 명절이나 기념일에 선물을 사드리면서 자기 마음을 표현하고 싶듯이 말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정말로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은 아주 선한 일이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문제는 사랑하려는 노력 자체가 아니라 사랑하는 방식, 그것도 종교적 행위에 헌신적인 여부로 그 사랑을 가름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최선을 다해 봉사 헌신한다. 기도와 말씀에 열심이며 헌금이나 전도를 힘에 넘치도록 한다. 그러나 환난이 닥치면 당장 어떤 마음이 드는가?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이렇게까지 열심을 다해 헌신 봉사했는데 왜 어렵게 만드십니까?”라는 의심과 불평이 터져 나오지 않는가? 그럼 과연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아무리 금실 좋은 부부라도 성에 차지 않으면 간혹 싸울 수 있듯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다윗이 시편에서 보듯이 하나님에게 불만을 터뜨리는 것은 연약한 인간으로선 자연스런 반응일 수 있다. 그러나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면 결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거기다 역으로 힘든 일을 겪지 않으려는 동기로 봉사와 헌신에 열심을 보였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선물 공세로 부부간의 사랑을 유지하려 드는 것은 할리우드 배우들이나 하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사랑이지 않는가?
하나님을 오래 참아주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앞선 글에서 살펴본 대로 성경은 사랑의 정의를 한마디로 “끝까지 참아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에게도 똑 같이 행하면 된다. 하나님을 끝까지 참아주는 것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당연히 끝까지 그분을 참아줄 수 있다. 신자가 하나님께 참아준다는 것이 무례하고 어불성설 같은가? 아니다. 상기 구절에 사랑하는 대상으로 하나님을 대입해보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분에 대해 오래 참고, 그분께 항상 온유하며, 그분과 다른 어느 것과도 비교하여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그분에 대한 사랑은 나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그분 앞에 나를 내세우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그분께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그분께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그분께 성내지 아니하며, 그분 앞에서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세상의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그분의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그분이 어떻게 나를 인도하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분에 대해서 참아준다는 표현이 조금 이해되는가? 기도하고 말씀 보는 목적도 결국에는 그분을 끝까지 참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역으로 따져 보라.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당신의 사랑을 그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베푸셨지 않는가?
“예수님의 사랑은 당신과 원수 된 우리에 대해 오래 참고, 흉악한 죄인에게조차 온유하며, 세상 어느 것에 대해서도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그분의 사랑은 당신을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어느 누구에게나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누구에게도 성내지 아니하며, 어떤 악한 것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인간이 범한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일방적 짝사랑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짝사랑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가슴에 품었던 짝사랑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련한 모습 그대로다. 인간끼리 서로의 잘못과 욕심으로 갈등하지 않기에 아무 상처도 생기지 않는다. 평생 가슴에 일방적으로 품고만 있으니까 때가 묻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짝사랑을 하시는데 우리 중에 그분의 짝사랑에 걸 맞는 사랑을 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사랑의 성경적 정의에 따라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정말 진지하게 따져보자. 그리고 현재 내가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 행태와 비교해 보라.
우리 앞에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억울한 일들이 쌓여도 그분에 대해 오래 참을 수 있는가?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시는 그분을 끝까지 기다리는가? 아무 의심, 불평, 불신을 갖지 않고 말이다. 초기에 생기는 자연스런 부정적인 반응을 믿음으로 극복하고선 그분의 선한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가? 등등
그분에 대해 항상 온유한 모습으로 대할 수 있는가? 그분의 말씀을 읽고 그분께 기도하면 마음에 평강을 얻을 수 있는가? 주님의 십자가만 생각하면 천국에서 내려오는 따뜻함으로 자신의 가슴에 채울 수 있는가? 세상의 재물과 권력과 명예로는 도무지 얻을 수 없는 자유와 안식을 그분에게서 찾을 수 있는가? 그분만 생각하면 세상의 염려 근심 걱정 분노 초조함이 사라지고 온유해질 수 있는가? 등등
세상에서 출세한 자, 권력을 지닌 자, 재물이 많은 자에 대해 정말로 투기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왜 나에게는 그런 형통을 안 주는지 하나님께 불평을 품지는 않는가? 나의 안전과 행복을 하나님보다는 다른 데서 찾지는 않는지?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상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질투는 선한 것이다. 하나님 그분보다 다른 이의 현실적 형통에 질투가 생기는 것은 우상숭배다. 나보다 현실적 형편은 훨씬 못한데도 하나님과의 거룩한 영적 교제는 나보다 훨씬 풍성하고 아름다운 성도를 부러워한 적이 있는가? 등등
혹시 교회에서 봉사 많이 한 것을 하나님께 나와 자랑하지는 않는지? 헌금한 액수로 교회 안에서 알게 모르게 생색을 내지는 않는지? 대표기도를 은혜롭게 잘하고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전부 수료한 것이 어깨의 계급장이 되어 있지는 않는가? 훈련과 헌신에서 남보다 앞서도 아무 표도 내지 않고 다른 이들을 진정과 겸손으로 대하는지? 아니면 자기가 행할 바는 다했다고 자부하고 이젠 하나님이 보상할 차례라고 믿고 그분께 자꾸만 더 요구하지는 않는지? 그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빚진 자로 자신을 온전히 낮추며 살고 있는지? 등등
자기 삶의 모든 활력과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옮을 확신하는지? 혹시라도 자기 능력으로 현재의 위치에 이르렀다고 착각하거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스스로 잘 처리해내리라 자신하지는 않는지? 자신의 지성과 영성이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여기지는 않는지? 범사를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 맡기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앞서기보다는 자신을 과신하기에 기도하지 않고 처리하는 일은 없는지?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며 낮추고 비워서 그분께 내워드리지 않는 교만이 남아 있지는 않는지? 여전히 자기중심적 사고와 인생관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등등
교회 내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직접적인 말과 행동으로 무례히 행치는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먹든 마시든 과연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가? 세상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거나, 그들의 죄악에 부화뇌동함으로써 그분의 이름에 누가 되는 행동을 하지는 않는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또 어떤 어려운 형편에 처해져도 예수 믿는 자답게 거룩하게 행함으로써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는가? 어떤 핍박과 멸시가 닥쳐도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주위에 드러내고 있는가? 등등
하나님 앞에서 혹시라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신은 어떻게 되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지? 자신의 삶과 인생에 대한 그분의 뜻을 정확히 인식하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 일을 성취하려 하는지? 그보다는 자신의 정욕을 채우려고 원하는 것마다 떼쓰며 기도하지는 않는지? 기도하는 제목들이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는 것은 아닌지?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제목들이 과연 있는지? 비록 그분의 뜻을 몰라 무엇이든 기도하더라도 정말로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소원하는지? 최소한 그분의 응답이 나의 기대와 달라도 가장 나의 유익을 위한 길임을 확신하는지? 등등
자신에게 어떤 위급한 환난이 닥쳐도 하나님께 성내지 아니할 자신이 있는가? 분에 넘치도록 성실하고 열성적으로 교회를 섬겼다는 이유만으로 그에 비례해서 축복을 받지 못해도 그럴 수 있는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방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욥과 같이 졸지에 모든 것들을 다 잃어도 그분께 끝까지 불평하지 않을 수 있는가? 등등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로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할 수 있는가? 세상의 악에 쉽게 굴복하지는 않는가? 세속적 방식과 교묘히 타협하려 한 적은 없는가? 잠간 눈을 감으면 매사가 형통할 것 같아서 일부러 국외자인척 한 적은 없는가? 하얀 거짓말을 하여서 사태를 자기가 바라는 대로 이끌지는 않는가? 하나님께 거짓을 한 적은 없는가? 헌신하거나 바치기로 결단하고서 준행하지 않은 적은 없는가? 등등
세상에 만연한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는가? 정말로 저주하며 싫어하는가? 죄와 사탄과 사망에 대해 정의로운 분노를 터트리는가? 날로 완악하고 썩어져가는 이 땅을 보고 진정으로 애통해하며 그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가?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는 것 같은 일을 두고 깊이 갈등해 본 적은 있는가? 반면에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가 살아 있음을 발견하고는 너무나 기뻐해본 적은 있는가? 자신의 삶 가운데 그분의 진리가 드러나는 것을 체험하는가?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면서 그분의 진리를 지키고 키우는 기쁨을 누리는가? 진리를 알기에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지? 최소한 진리가 무엇인지는 제대로 아는지? 등등
사랑의 특성 별로 대충 생각나는 대로 그분을 사랑하는 법을 적어 보았다. 더 구체적으로 깊이 따져 들어가면 이보다 훨씬 많은 사항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기껏 출석하는 교회의 성장을 위한 각종 종교 활동에 열심인 정도로 그분을 힘껏 사랑했다고 여기는 우리 생각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 알 수 있는가?
물론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준행할 수 있는 성도는 아무도 없다. 그중 일부라도 성실히 행하면 아주 경건한 자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것이다. 그리고 상기 모든 것을 양보하더라도 마지막으로 남은 특성이라도 제대로 부응하면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달리 하나님과 열매 맺는 사랑을 할 수 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오래 참는 것이다.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진정으로 소원하기에, 최소한 그분의 인도는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며 나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될 줄 확신하므로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분에 대해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바로 앞선 글대로 그분에게 강청함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중매결혼과 연애결혼
중매결혼과 연애결혼 중에 어느 쪽이 이혼율이 높겠는가? 언뜻 중매결혼일 것 같지만 그 반대다. 그 이유는 결혼의 목적과 과정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연애결혼은 서로 사랑하다가 그 사랑이 절정에 달했을 때에 항상 같이 있고 싶어서 결혼한다. 반면에 중매결혼은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몇 번의 만남만 가지고 아직 사랑이 영글기 전이라도 가정을 갖고 싶어서 결혼한다.
결혼의 목적이 사랑을 지키고 싶은 것과 가정을 꾸리고 싶은 것이 다르다. 전자는 사랑이 조금이라도 식어지면 가정 자체도 문제 된다. 거기다 사랑의 절정에서 결혼했기에 오히려 줄어들 일만 남았다. 서로의 결점과 허물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곧바로 사랑도 식어진다. 후자는 가정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기에 사랑의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또 사랑과 그리 관계없이 결혼했기에 살을 맞대고 살아가다 보면 오히려 정이 들고 사랑은 깊어진다. 예외적인 경우도 다수 있겠지만 일반적 원리로 봐서 그렇다.
신자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이와 유사하다.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니까 뜨겁게 연애하듯이 사랑하려 한다.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도 연애결혼으로 간주한다. 처음 예수 믿을 때에 사랑의 절정을 맛본다. 곧바로 하나님과 결혼은 했는데 상호 결점과 허물이 조금씩 드러나면 사랑도 그에 비례해 줄어든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잘못했다 싶으면 의심, 불만, 불신이 싹트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는 데에만 모든 관심을 쏟는다. 사랑하는 방식과 행동에 신앙의 초점을 모은 탓이다.
하나님과는 중매하듯이 결혼해야 한다. 처음 그분을 만나 사랑의 절정을 맛보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첫 만남 이후의 신앙생활이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가정을 지키는 것 즉, 어떤 일이 있어도 그분과 온전한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목표여야 한다. 때로는 환난이 닥치고 이해 못할 일이 벌어져도 하나님의 목표 또한 나와의 관계를 이어가는 것임을 즉, 나를 향한 사랑에 전혀 변함이 없음을 확신하기에 그분을 향한 나의 사랑에도 변함이 없어야 한다. 자연히 그분께 받는 은혜의 양과 질로서 그 관계가 흔들리지 않게 된다.
다른 말로 이 두 결혼은 사랑하는 대상 자체가 다르다. 연애결혼은 “사랑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고, 중매결혼은 “가정”을 사랑하는 것이다. 전자는 자연히 사랑의 방식에 관심을 쏟게 되기에 상대에게 받는 사랑의 강도가 약해지면 내 쪽에서의 사랑도 식어진다. 후자는 두 사람이 힘을 합쳐서 가정을 아름답게 꾸려가면서 사랑이 자라간다. 가정이 건전하게 유지되는 한 그 사랑도 줄지 않고 오히려 더 자랄 가능성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받는 은혜”를 사랑하는 신앙과, “하나님 그분”을 사랑하는 신앙으로 나눌 수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쉐마도 분명 그분이 바로 신앙의 대상이요, 근거요, 목표라고 말하지 않는가?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는 것은 사랑의 방법이다. 너무나 간단하고 명백한 원리다.
그런데도 정작 신자들은 사랑하는 방법에 너무 열중하다보니까(?) 하나님도 자기에게 똑 같은 방식으로 사랑해주길 기대한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해주는 방식만 사랑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분의 방식에 의심과 불만이 생기면 그분 자체에 대한 사랑도 식어진다. 결혼식 주례사의 영원한 진리대로 그분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사랑이 변치 말아야 하는데도, 눈과 비가 조금만 뿌려도 그분의 사랑만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분을 사랑하는 방식마저 바꿔버리거나 취소해버린다.
다시 벤허 영화로 돌아가면 주인공 벤허가 재물과 권세와 명예를 유지하면서 안일하게 생활할 때는 대문을 출입하며 쉐마를 만지는 모습이 형식적, 의무적, 습관적이었다.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이므로 문자적으로 성실히 지키기는 하지만 진정한 경외나 감사가 묻어나오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종교적 일상사였을 뿐이다.
그러다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우연의 사건으로 큰 불행을 맞게 된다. 여동생과 아내가 투옥되고 본인도 로마의 노예선으로 끌려가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그 마음이 이전의 번성하던 때와 많이 달라졌다. 여러 환난을 겪는 중에는 쉐마를 거의 주먹으로 치듯이 만진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평이 잔뜩 묻어져 있었다. 내가 악행을 한 적도 없고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고 열심히 여호와를 믿었는데 왜 이런 환난을 주느냐는 뜻이었다.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하나님도 나를 그렇게 사랑해주어야 하지 않느냐, 최소한 불행은 막아주셔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목표가 다른 신앙
신자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상이 하나님 그분이면 그 신앙도 영원하고 절대적이고도 거룩하게 된다. 하나님 그분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는 신앙이 된다. 반면에 그분께 받는 사랑이 목표면 그 신앙은 일시적이고 상대적이며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 자체는 너무나 놀랍고도 엄청난 권세와 신비가 숨겨져 있지만 어리석은 인간이 판단하기에는 그렇게 밖에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그전에 요구할 때부터 일시적 현실적 사랑만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에서도 영원토록 그 질과 양에서 아무 변화가 없어야 참 사랑이다. 문제는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어리석은데다 아직도 죄의 본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그분만을 목표로 하는 신앙인이라도 환난이 닥치면 순간적으로 힘이 빠지고 때로는 죄악과 정욕이 작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결코 변함없는 신앙의 모습은 있다. 그분과의 관계만은 외부의 어떤 것으로도 절대 방해 받지 않고 스스로도 온전하게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분을 사랑하는 방식을 뜨겁게 유지하려 노력하기보다는 그분과의 진정한 교제만은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시는 그분의 은혜와 어떤 일이 있어도 드러내고야마는 그분의 영광을 소망하기에 끝까지 기다리며 그분에 대해서 참는 것이다.
성경의 믿음의 위인들을 보라. 그들의 신앙 여정은 조급증을 없애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싸움으로 일관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는 조급증을 보였지만, 외아들 이삭을 바칠 정도로 기다릴 줄 알게 되었지 않는가? 모세는 조급해서 애굽 관원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에서 그를 40년의 인고의 훈련을 시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웠지 않는가? 가장 가까워야 할 장인과 아들들과의 갈등으로 평생을 참은 다윗과 종살이와 감옥에서 끝까지 인내한 요셉은 틀림없이 강청함의 기도의 달인이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비방과 멸시를 120년간 참아낸 노아는 두말할 것도 없다.
신약의 사도들은 어떠했는가? 인내의 기록이 없어 보이는가? 아니다. 예수님과 삼 년을 동고동락한 것만 해도 대단하다. 예수님의 권능이라면 금방이라도 로마를 뒤엎을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스승은 전혀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 명을 제외하고는 비록 높은 자리 차지할 싸움을 했어도 끝까지 주님과 함께 했다. 오순절 성령을 받고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핍박 받는 것을 오히려 기쁨과 자랑으로 여겼다. 비참하게 순교하는 자리에까지 이르도록 그들은 참고 또 참았다. 고난의 시간의 길고 짧음이 문제가 아니다. 기어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길 원하는지가 신자의 오래 참음의 결정적 변수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끝까지 참아주는 일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끝까지 참아낼 수 있는 근거는 그 최종 결과를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목표라는 것은 그분이 신자에게 마련해 놓은 궁극적 열매가 목표라는 말과 같다. 그 열매로 가는 길이 어렵더라도 참을 수 있다. 올림픽 금메달이 목표인 자는 지옥 같은 훈련을 감내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6-18) 바울은 영원한 천국의 보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니까 이 땅의 일시적 환난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고 했다. 이 땅의 형통 즉, 하나님께 받는 일시적 현실의 축복이 신앙의 목표가 아니었다. 오직 천국의 영광 즉, 하나님 당신이 목표였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바치는 정도까지 하나님을 참아낼 수 있었던 까닭도 성경이 어떻게 설명하는가?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5,16) 모세 또한 본향이 따로 있음을 알기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
천국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온전히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 앞에 자기 옛사람은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하여서 새 생명을 받았고 또 부활 생명으로 덧입혀질 것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할 줄을 아노니.”(고후4:14)
그 모든 앎과 믿은 후에 그 앎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도 예수 믿을 때에 자신에게 내주케 된 성령의 깨우침과 인도에 따른 것이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5:4-7)
일 세기 말에 로마황제숭배에 반대하는 크리스천을 향한 박해가 본격화되었다. 신앙을 지키는 것이 목숨을 걸어야 할 단계까지 되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둘 중에 반드시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신자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한 것이라.”(벧전1:3,4)
한마디로 신자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을 목표로 하게 살게 된 것이다. 이 땅에서 주님을 따라 살게 되면 온갖 핍박과 고난은 필수적이다. 이 땅의 어려움을 피하려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늘의 신령한 복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한 인생이 신자다. 더럽고 추한 죄악과 싸우며 사단에 미혹된 영혼을 한 명이라도 빛 가운데로 이끄는 것이 신자의 삶이어야 한다. 하늘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미리 실현하고 맛보아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천국으로 입성하는 데에 신앙의 모든 초점이 모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쉐마
초대교회 신자들은 정말로 목숨을 걸고 믿어야 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참고 견디어냈다.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허락하는지 의심, 불평, 불신이라고는 없었다. 그들은 하늘의 산 소망을 견고히 붙들고 있었다. 그 소망이 모든 삶의 능력이요 원천이었을 뿐 아니라 인생의 진정하고도 유일한 기쁨이었다.
지금은 일부 선교지를 빼고는 예수 믿는다는 것만으로 고난과 핍박은 없다. 그런데도 자기 목숨을 걸고 그분을 사랑하기는커녕 세상에서 형통과 안일을 주지 않는다고 하나님에게조차 전혀 참아주지 못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여전히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한다고 여긴다. 교회 활동에 아주 성실했고 새벽제단에 나와 뜨겁게 기도했다는 한 가지 이유로 말이다.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참지 못하고 곧바로 심판을 주셔야 말이 되는 것 아닌가? 그분은 오히려 그런 우리를 지금도 끝까지 참으신다. 우리는 그분을 하루도 참아주지 못해 새벽마다 생떼를 쓰는데도 말이다. 그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그야말로 순수한 사랑, 짝사랑이다. 우리도 짝사랑을 하긴 한다. 세상을 향해서만 그렇다. 그런 후에 하나님 사랑은 기도하며 떼쓰기에 적당할 정도의 생색만 낸다. 조금 나은 편이라 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만 짝사랑한다.
종교적 순종이나 행위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의외로 쉬울 수 있다. 교회에서 어지간한 직분을 맡은 자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또 그러면 교회 안에서의 긍정적 평판과 칭찬이 따르니까 더 신나서 그런다. 그러나 정말로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하는지는 별개다. 하나님을 사랑 없이 섬길 수는 있어도 하나님 그분을 섬김 없이는 사랑할 수 없다. 특별한 종교적 행위가 수반되지 않고도 언제 어디서나 그분을 마음에 기리면 평강이 솟아나야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다.
벤허가 대문의 쉐마를 만지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다시 바뀐다. 살펴본 대로 쉐마를 두들기듯이 만진 때는 하나님을 단지 현실의 복을 주는 분으로만 여겼기 때문이었다. 큰 환난을 안긴 원수에게 복수할 힘과 여건을 달라고 기도했었다. 또 그런 일념으로 사형장이나 다름없는 노예선에서 살아날 수 있었고 기어이 그 유명한 마차경주 장면에서 보듯이 친구이자 원수였던 로마 천부장에게 승리했다.
그러나 그 친구가 죽으면서 너와 나의 경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사실은 네가 졌다고 말한다. 죽은 줄 알았던 벤허의 여동생과 엄마가 문둥병에 걸려 살아 있다는 것이다. 벤허는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문둥병은 자기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치명적 병이었다. 통쾌하게 복수는 했는데 그 원수가 한 때는 절친이었는데다 엄마와 여동생을 구원할 길이 없어 오히려 씁쓸한 뒷맛만 남게 되었다.
도무지 소망이 없어 보였던 그에게 한줄기 빛을 던진 이는 바로 예수였다. 엄마와 여동생의 문둥병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순간에 나음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지옥의 노예선을 견딘 것이 자기의 의지력이 아니라 노예선으로 끌려가는 도중에 우물가에서 예수에게 생수를 얻어 마신 까닭인 줄 깨달았다.
말하자면 아무 죄 없는 자신에게 닥치는 억울하고도 너무나 큰 고통을 하나님이 막아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시도 떠나지 않고 자기와 동행하며 사랑하고 계셨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더러 형식적 의무적으로 당신을 찾지 말도록, 또 복을 주면 사랑하고 고난을 당하면 원망하는 식으로 당신을 대하지 말게 하기 위해서 그런 시련을 주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벤허는 고난 가운데서 주의 율례를 배워 비로소 아무런 이해타산이나 자신의 죄가 개입되지 않고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게 된 것이다. 예수 안에서 쉐마의 의미를 온전히 깨달은 것이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이후로는 대문의 쉐마도 정성스레 만지는데 하나님에 대한 가슴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감사와 경배가 내포된 모습이다.
예수 안에선 죽은 자도 살아난다. 도무지 가망이 없을 정도로 완전히 엎질러진 인생도 회복이 가능하다. 모든 인생이 하나님을 온전하고도 순수하게 사랑할 때만이 참 생명을 얻을 수 있는데,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권능이 죄인의 영혼을 감싸 안아야만 그렇게 된다. 구원 이후로는 세상에서의 형통 혹은 고난이 그 참 생명을 절대 가감, 방해, 포기케 하지 못한다. 만에 하나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산 채로 맹수에 물려 순교하게 되더라도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죽는 것이다. 죽는 자도 하나님을 순전히 사랑하고, 하나님은 당연히 그들을 더 크게 사랑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열매가 가장 아름답고도 영광스럽게 결실을 맺는 것이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바울, 또 영화이긴 해도 벤허, 모두가 세상의 온갖 고난을 다 이겨내고서 온전한 쉐마의 자리에 이르렀다.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며 끝까지 견딤으로써 하나님의 친구요, 그분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다. 범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어떤 환난도 끝까지 참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참아주는 셈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기뻐하는 그 영광스런 자리에 이르게 되는 과정도 결국은 참아내는 과정이지 않는가?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 받는 순간 곧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만큼 거룩하고 순수해지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인생 중에 그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연약하고, 무지하고, 불완전한데다 온갖 자기중심적인 정욕과 죄까지 남아 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참으려면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참아지지 않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동원해 너무 선뜻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하려 덤비지 말라. 사랑은 사랑을 많이 받아본 자가 할 수 있다는 말도 진실이다. 끈질기게 기도하여서 응답 받았다고 너무 그분의 사랑을 자신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의 표식에 불과한 것이다. 다이아 반지, 핸드백, 이벤트를 받아야만 남편의 사랑을 확인하겠다는 투정이다. 어찌 그런 결혼이 정상이며 오래 가겠는가? 그분에게만은 그분의 사랑하는 마음을 온전히 알아야 그분의 사랑을 제대로 받은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새 언약은 마음에 심어질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도덕적 의로움이나 종교적 열성에 비례하지 않고 태초부터 영원까지 그 앞에 엎드리는 자를 당신께서 짝사랑한다는 선언이지 않는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고난을 통해서만 제대로 알아갈 수 있기에, 하나님은 지금도 신자에게 시련을 허락하시어 당신에 대해 참고 또 참고 끝까지 참도록 만드신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신자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뜻이다.
솔직히 우리 자신들을 보라. 과연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순수성이 얼마나 있는가? 참아내는 것이라도 제대로 할 수 없지 않는가? 그분을 끝까지 참아줄 수 있다는 것 이상으로 이 땅에서 우리가 그분을 온전히 사랑할 길도 없지 않는가? 재차 강조하지만 단순한 의지력, 인내력으로 버티라는 뜻이 아니다. 그분이 나에게 마련해 놓은 천국의 영광을 보길 진정으로 소원하면서 참아야 한다. 최소한 이 땅에서라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기도의 결과를 보기 위해서라도 참아야 한다. 당신은 지금 진실로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있는가?
6/1/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