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인물의 구원
사마리아로 통행(通行)하여야 하겠는지라.
구약 성경에 비해서 신약 성경이 다루는 시기가 아주 짧기 때문에 등장인물들도 훨씬 적습니다. 베드로와 바울 두 사람이 교회를 설립하는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거의 담당했으며 실제로 사도행전의 두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이 두 사람의 구원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간단히 살펴보기로 합시다.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 받은 베드로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4:18-20/막 1:16-20)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서 제자로 받아들이는 장면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자기를 제자로 받아들여 달라는 요청을 먼저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먼저 제자로 택해서 따라 오라고 명하면서 앞으로 그의 인생을 바꾸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 대한 미래 계획을 이미 갖고 있었으므로 베드로가 그 계획에 합당한 자였거나 합당하게 변화 성장시키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제자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모든 과정의 주도권을 주님이 선도적 능동적 일방적으로 행사하셨습니다. 그는 주님의 초대에 응했을 뿐입니다.
베드로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다고 말합니다. 그가 주님의 따라오라는 말씀을 듣고 이 분이 누구인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그 초대를 받아들일까 말까 시간을 두고 고민 분석 판단 결정 시행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곧바로 주님을 따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럼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당신의 말씀에 감히 거역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카리스마가 넘침을 베드로가 느꼈거나, 그가 구체적으로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기꺼이 순간적으로 그 초대에 응할 수 있을 만큼 기쁨이 그의 가슴에 넘치게끔 성령이 역사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둘 다 해당될 것입니다. 요컨대 베드로는 주님의 택함에 따라 구원받은 것입니다.
알다시피 그가 세 번이나 스승을 부인했으나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그를 찾아와서 나를 사랑하는지 똑같이 세 번을 질문했습니다. 당신을 부인한 죄에 대해 한 번도 꾸짖기는커녕 언급조차 않았습니다. 대신에 처음 그를 불렀을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신 그대로 “내 양떼를 치고 먹이라”고 세 번 당부했습니다. 그가 맡아야 할 소명을 상기시키며 여전히 당신께서 사랑하는 제자임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제자를 부를 때에 곧바로 소명부터 주셨습니다. 부활 후에도 그를 만나 소명자로 세우는 일부터 주님께서 선도적으로 주관하셨습니다. 그를 제자로 택한 것만 아니라 그의 일생도 당신의 미리 마련된 계획에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예정으로 구원받았음이 더더욱 확실합니다.
베드로가 새벽 닭 울기 전에 세 번을 부인할 것이라고 주님이 예언하자 그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5)라고 장담했습니다. 그의 속내를 풀이하자면 “주님은 어찌 삼년이나 지켜보시고도 아직도 저를 이렇게까지 모를 수 있습니까? 제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목숨 걸고 주님을 지켜드릴 테니 안심하십시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호언장담은 한갓 여종의 추궁 한마디에 완전히 재가 되어 공중에 흩어져버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세 번이나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은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네가 나더러 자신의 사랑을 잘 몰라준다고 다그치면서 네가 너 자신을 아주 잘 아니까 절대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는데 과여 그러했느냐? 지금 이 단계에서 네 자신의 내면을 다시 솔직하게 잘 살펴보니 어떠하냐?” 자기를 주님 대신에 자신의 중심에 놓고 죄의 노에가 되어 있었던 너는 너 자신도 완전히 주장하지 못하며 그런 너를 네가 제대로 알지도 못했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바꿔 말하면 주님이 베드로를 그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또 그렇게 너무나 잘 알고 계시니까 그를 구원으로 택하여 제자로 삼아주었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당시의 다른 유대인들처럼 베드로도 메시아를 대망했기에 곧바로 주님을 따를 수 있었고, 또 주님과 삼년 간 동고동락하여 배움으로써 스스로 숙고한 후에 주님을 믿기로 결단하여 구원 받았다고 판단해선 안 됩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주님이 많은 이적을 베풀자 메시아인 줄 알고 따랐지만 자기들 기대와 요구를 저버리자 중도에 다 돌아갔습니다.
베드로도 자기 생명이 위태해지자 곧바로 주님을 부인했는데 이때까지는 그도 다른 유대인들과 하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로마 제국을 물리쳐 주는 메시아로 기대했으나 그 기대가 무산되었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주님을 따르기로 스스로 결단한 자들은 반드시 자신만의 어떤 목표와 기대가 있어서 따르며 그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쉽게 주님을 부인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
또 베드로가 비록 주님을 부인했지만 스스로 다시 회개하여 따랐기에 구원 받았다고 여겨서도 안 됩니다. 그럼 앞으로 그런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또 다시 부인할 것입니다. 영원한 참 생명을 얻는 구원이 그렇게 인간의 결단과 반역과 회개와 재결단에 따라서 좌우되거나 반복될 수 있는 값싼 것이 절대 아닙니다. 살펴본 대로 주님은 그를 처음부터 택하여 구원 준 후에 한 번도 그를 버리기는커녕 떠난 적도 없었습니다.
베드로 본인의 고백을 보십시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1:2) 초대교회의 교인들을 “택하심을 입어 구원 얻은 자”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체험어린 고백일 뿐 아니라 다른 성도들도 자신과 동일하게 예정으로 구원 받았다는 간증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 예정 구원의 진리가 초대교회에선 한 번도 부인된 적이 없기 때문에, 아니 아예 시비 거리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편지 서두의 인사말에서부터 이런 선언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이 된 이유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 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행9:1-9)
사도 바울이 예정 교리를 가장 잘 설파한 까닭은 상기에서 보듯이 너무나 충격적이고도 은혜로운 본인의 구원 체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꼭 집어서 직접 먼저 찾아와 지난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구원 은혜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고 설명합니다. 우선 바울만 구원 대상으로 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일행이 아무 것도 인지할 수 없었다면 바울이 지어낸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울리는 예수님의 소리는 듣고 빛이 바울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보았습니다. 그 일행이 바울의 회심 사건의 증인이 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나 모습을 일행은 보지 못하고 바울만 볼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생전에 주님을 직접 혹은 가까이서 대면한 경험이 없었습니다. 부활하여 승천하시어 천국보좌에 계셨던 주님이라 아주 신령한 모습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로선 정말로 누구인지 몰라보고 그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했으니 전자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생전에 주님을 직접 혹은 가까이서 대면한 경험이 없었습니다. 부활하여 승천하시어 천국보좌에 계셨던 주님이라 아주 신령한 모습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로선 정말로 누구인지 몰라보고 그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알다시피 그는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처형을 주도했습니다.(행7:58, 8:1) 지금도 예수 믿는 신자들을 핍박하다 못해 대제사장의 허가증을 받아 쥐고 다메섹에까지 가서 체포해올 작정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열렬한 신봉자로 율법에 하자가 없던 정통파 랍비였습니다. 그로선 유일신 창조주 여호와 외에 인간 예수가 성자 하나님으로 유대인들로부터 예배 받는다는 사실을 절대 용납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이단 중의 이단으로 반드시 척결할 대상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그는 예수를 믿어보려고 단 한 번도 고민 묵상 아니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의 적극적인 반대자가 한 순간에 열렬한 전파자가 된 까닭은 성령의 간섭으로 그를 거듭나게 만드신 하나님의 역사라는 설명 외에는 불가능합니다. 이 초자연적인 만남으로 바울에게 예수님은 부활하신 구세주 하나님이라는 점이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요 진리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은혜 외에는 구원의 방도가 없으며 그것도 그분의 일방적 주도적 택함에 의한 것임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유일신 사상을 철저히 신봉했고 율법 구원만이 진리라고 믿었던 그가 가장 먼저 삼위일체를 주장하고 십자가 은혜 외에 구원이 없다고 가장 열렬히 선포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서신서 같은 교리서들은 사도들이 자신들의 신앙 체험을 성령이 주시는 영감에 따라서 구약성경이 말하는 바와 비교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체험이 먼저이지 교리가 먼저가 아닙니다. 지금 신학자들 간에 예정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 자체가 사실상 어리석고도 우스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수가성의 한 많은 여인도 택함 받았다.
구약 인물의 구원을 살필 때에도 따져봤지만 하나님의 큰일을 맡을 사도들이니까 미리 택하여서 구원을 베풀었다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일반 신자들의 구원도 반드시 예정에 의해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입증해주는 사건이 신약성경에도 있습니다. 바로 수가성의 한 불쌍한 여인과 예수님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4:3-10)
본문에도 그런 설명이 있지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는 교제는커녕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별칭이었는데 북왕국이 앗시리아에 망한 이후로 그들과 통혼한 사이에 난 혼혈족을 지칭합니다. 민족의 반역자요, 율법에 금지된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족속과 결혼했다고 유대인들이 멸시 천대한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에서 갈릴리 지방으로 여행할 때는 며칠 더 걸리더라도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우회해서 갔습니다.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곳으로 지나가겠다고 작정하셨다는 뜻입니다. 사마리아 지역에도 천국 복음을 선포하고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첫 대상으로 한 불쌍한 여인을 택했던 것입니다. 단순히 우물가에 쉬고 있는 중에 우연히 그 여인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우선 제 육시인 한낮에 물을 길러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한 많은 여인은 사람의 눈을 피해 혼자서 그 시간에만 물을 길러 왔고 주님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없는 것이 동행하던 제자들 모두를 먹을 것을 사러 동네로 보내어서 여인과 단 둘이서 대화할 기회를 조성했습니다.
나아가 여인의 과거와 현재를 미리 꿰뚫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 여인에게 주님이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당시는 남자가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고,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더더욱 그랬고, 유대인 랍비가 그러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인이 주님의 그런 점이 너무 이상해서 물었더니 주님이 곧바로 어떤 대답을 하셨습니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주님은 질문에 전혀 적합하지 않는 대답을 했습니다. 일상적 경우라면 “나는 사마리아인과 여자를 차별하지 않으니 그런 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답해야 합니다.
주님은 너무나 엉뚱하게도 방금 당신께서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해놓고는 이젠 거꾸로 “네가 내게 물을 구하면 내가 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주님이 갈증이 나서 물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구태여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할 것 없이 스스로 우물에서 떠서 마시면 됩니다. 따라서 주님은 여인더러 이제 나와 육신의 갈증을 해소하는 물이 아니라 영혼의 갈급함을 채워주는 구원의 생수에 관해 함께 대화를 나눠보자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또 그런 의도를 갖고 먼저 물을 달라고 말을 건넨 것입니다.
그 여인의 입장에선 전혀 계획, 의도, 기대, 상상도 않았던 의외의 사람을 전혀 의외의 장소와 시간에서 만나 전혀 의외의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그녀는 주님의 주도에 따라서 자신의 깊은 속내를 나누었고, 사실은 주님이 이미 다 꿰뚫어서 알고 계셨지만, 마지막에는 메시아가 오면 나 같은 죄 많은 여자도 구원해줄 것을 알고 있고 기다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고 선언했습니다. 처음에 내가 누구인줄 알면 그가 네게 생수를 줄 것이라고 하신 약속이 지금 그대로 이뤄졌고 그녀는 이때 구원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유대인 랍비라면 상종도 않을 사마리아의 한 불쌍한 여인을 그녀 혼자 있는 시간과 장소에 정확히 찾아가서 먼저 구원으로 초대하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또 성령의 역사가 임해서 그녀더러 당신이 메시아임을 믿게끔 인도하고 당신을 전적으로 의탁하게 하여 구원을 베풀었습니다. 이 사건 이상 예정에 의한 구원을, 다른 말로 인간의 협력이 완전히 배제된 구원을 입증하는 생생한 예는 없습니다.
8/21/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