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보다 더 종교적인 신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창3:22,23)
죄를 지적하는 장부
한 가톨릭 기숙학교에서 매주 금요일에 고해성사를 공개적으로 행했다. 한주 간 지은 모든 죄를 종이에 적어 내도록 한 후에 각자의 리스트를 들고 회개의 고백을 하게 한 것이다. 어느 날 그 모임에 지각한 아이가 급하게 종이 하나를 집어 들고 읽어나가다가 아무래도 자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무심결에 내뱉은 말인즉 “어! 이건 내 것이 아닌데. 남의 것을 고백하니까 더 재미있는데.”였다.
참으로 많은 것을 시사(示唆)해주는 일화다. 우선 어린아이 적부터 매주 회개해야할 만큼 죄가 인간에게 태생적, 일상적, 습관적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숙식을 같이하며 엄격히 통제된 환경에서 도덕과 종교 교육을 철저히 받는데도 그러하다. 온갖 선한 규정으로 훈련시키고 또 환경을 깨끗하게 조성한다고 해서 결코 죄가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부적 영향으로는 죄를 일시적으로 누르는 효력밖에 발휘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타고난 죄인이라 죄를 짓는 것이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죄 자체가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재미는 아주 유별나다. 그 재미가 아주 유별나니까 죄에 중독될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래서 그 중독을 깨트리는 것은 여간해선 가능하지 않다. 우선 참회의 고백을 해야 하는 그 심각하고도 진지한 순간에도 다른 아이가 고백한 죄를 대신 읽으면서 재미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자기가 지각한 것은 물론 자기 죄도 고백해야만 한다는 일은 까마득히 잊었다. 그보다 남이 지은 죄를 대신 읽으니까 마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같은 스릴마저 느꼈던 것이다.
또 대신 읽고 있는 그 여러 죄 자체가 아주 신나게 여겨졌을 것이다. 예컨대 여학생들을 골탕 먹인 죄를 적어놓았다면 얼마나 흥미로우며 심지어 그 일에 동참 못한 것이 아쉽지 않겠는가? 죄란 과녁에서 벗어난 일탈적 행위이므로 항상 기대와 흥분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어린이들이 작당해 과수원에서 과일을 훔쳐 먹거나, 기숙학교에서 선생님들을 속이고 골탕 먹이는 일은 마치 영웅이 된 기분마저 들 정도로 흥분되고 신나는 일이지 않는가?
나아가 친구가 지은 죄를 조목조목 읽어나가면서 자신이 재판관이 되어 그를 정죄하는 기분마저 들었을 것이다. 자기는 무죄하고 그 아이는 큰 죄인인양 느껴졌을 것이다. 심지어 자기가 적어낸 것과 동일한 죄를 친구가 지었는데도 자기와는 전혀 무관하고 그 아이만 잘못했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인간이란 자기 눈의 들보는 전혀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은 너무나 잘 끄집어내는 존재다. 그것도 어려서부터 그러니 태생적 죄인일 수밖에 없다.
남의 죄를 잘 지적해낸다는 것은 죄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몰라서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지만 죄에서 깨끗케 되는 일에 교육과 훈련이 별무 효과라는 것이다. 거기다 언제든 남을 정죄할 수 있는 리스트는 누구나 갖고 있다는 의미다. 특별히 가까운 사람의 약점과 허물에 관한 목록은 더 늘어난다. 항상 자신의 영향권 안에 묶어 두고 통제하려고 그 허물을 이용하려는 의도다.
신자에게 더 많은 정죄 리스트
남의 죄를 지적하는 이 장부는 성도들끼리도 갖고 있다. 거기다 죄의 종류도 훨씬 더 많다. 예수를 믿어 성령이 내주함으로써 죄에 대해 아주 민감해졌고 또 성경 공부를 통해 죄를 세밀히 따질 수 있게 되었다는 좋은 뜻만이 아니다. 죄를 죄답게 두렵게 여기고 그에서 멀어지면 정말로 감사할 일이다. 그보다는 불신자의 정죄리스트는 도덕적인 것 하나인데 반해 신자들의 그것은 종교적 리스트까지 더 보태졌다는 뜻이다.
신자는 술 담배를 절대 하면 안 돼, 집사라면 최소한 예배 10분 전에는 본당에 들어와서 기도하고 있어야 해, 큰 집이나 고급 차를 소유하면 온전한 신자가 아니야, 성가대 여자 지휘자의 옷차림이 너무 야해, 새벽 기도에 나오지 않으면 신앙에 문제가 있어, 방언 받지 못하면 열등한 신자야, 아니 목사가 골프를 치다니, 목사는 성도보다 잘 살면 안 돼, 등등 교회 안의 일로만 따져도 죄목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어떤 미국교회의 성경공부 모임에 스타킹도 신지 않고 참석한 젊은 여인에게 화가 난 나이든 여자들이 목사에게 여자성도는 공적 집회에는 반드시 스타킹 신고 나오도록 이야기하라고 말했다. 목사는 젊잖게 “성모 마리아는 스타킹을 신지 않았습니다. 제일 먼저 스타킹을 신기 시작한 사람은 이태리의 창녀들입니다”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나이든 여자의 정죄리스트에는 스타킹을 신지 않으면 요조숙녀가 아니라고 굵은 주홍 글씨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한 이민 교회의 목사가 중고 벤즈를 몰고 다녔는데 성도들이 목사가 고급 차를 타고 다닌다고 뒤에서 비방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차가 없던 목사에게 한 성도가 자기가 타던 차를 공짜로 준 것이다. 성도들의 눈초리가 따가워 어쩔 수 없이 거금을 대출 받아서 일제 신형차를 구입하자 비로소 그 수근거림이 잦아들었다고 한다. .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그런 종교적인 재판관들이 꼬투리 잡으려고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한다, 안식일에 병을 치료한다, 금식 기도를 하지 않는다, 세리나 죄인들과 식사 교제를 한다, 먹고 마시기를 탐한다, 정식 라이센스도 받지 않고 성전에서 가르친다, 이방인의 집에 들락거린다. 등등 수도 없이 많았다. 주님의 삼 년간의 지상 사역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설치해놓은 정죄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은 일이 거의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하나님 본체이시나 당신을 낮추어 인간으로 오신 주님보다도 그들은 더 경건하고 의로우려 했다. 한 없이 종교적이었다. 좋은 예가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그들의 임무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신), 사람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면서(인), 공의에 입각한 올바른 판결을 하는(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등한히 하고 오로지 채소와 양념에까지 십일조를 적용해 바침으로써 자신들의 의만 한껏 내세웠던 것이다. 의와 인과 신이야말로 정작 실천해야 할 율법의 더 중요한 내용인데도, 그런 내용은 하나 없이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적용함으로써 빈껍데기 종교로 전락시킨 것이다. 그들은 아주 종교적이었지만 실은 전혀 종교적이지, 정확히 말해 영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그것으로 남을 정죄하는 근거로 삼았다. 이젠 형식적 종교의 틀을 넘어, 아니 바로 그것을 이용해 죄악을 자행한 것이다.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그분 말씀으로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할 지도자들이 도무지 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백성들에게 지키지도 못할 짐과 수고만 잔뜩 짊어지게 만들었다. 하나님을 까다롭기 짝이 없으며 조금만 잘못하면 벌만 주는 두려운 폭군으로 변모시켜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 주님께 저주를 받을만하다.
물론 그들이 율법을 온전히 지켜보려고 구체적 규정을 정해 엄격히 적용했던 첫 의도와 시도는 선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것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하나님께 멀어졌다고 철저히 회개한데서 출발했었다. 그러나 차츰 남을 정죄하여 얽매는 일에 신바람이 나기 시작했다. 서두에 예든 것같이 다른 아이의 회개 리스트를 읽는 재미에 빠진 것이다. 남을 정죄한다는 것은 자신의 의는 더 높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낳으므로 그 재미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엎드려 회개하며 바로 서기를 원했는데, 차츰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기를 자랑하며 고개를 빳빳이 쳐들게 되어버렸다.
바리새인이 자기들은 물론 백성들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의를 실현하려 했던 시도는 자신들에게서부터 완전 실패로 끝나버렸다. 내면이 완전히 타락한 인간에게 단순한 외부적 자극으로 선한 영향을 제대로 끼칠 수 없다. 율법의 세부규정을 마련한 것 자체부터 교육과 훈련과 경험의 산물이었다. 또 그 규정을 적용 실천하는 것도 교육과 훈련의 방식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였다. 인간은 철두철미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경전화(經典化) 되어버린 정죄 리스트
종교나 믿음의 소지와는 무관하게 모든 인간이 남에게 적용하는 자기 나름의 정죄 리스트는 다 갖고 있다. 그 목록을 다 모으면 하나 같이 일치되는 것이 없다. 어떤 이에게는 죄가 되는 것이 다른 이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경우가 아주 많다. 각자가 자기 생각대로 정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교육 훈련 받고 또 경험한 것에 따라 스스로 결정한 죄목들이다. 심지어 자신의 기질, 정서, 순간적 감정에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리스트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바리새인들이 만든 장로의 유전 같이 공식화만 안 되어 있을 뿐이지 개인마다 갖고 있는 이 정죄 리스트는 실제로는 각자에게는 불변의 경전이 되어버린다. 그 리스트에 누구라도 걸리기만 하면 빠져나가거나 용서 받을 재간이 그 상대에겐 도무지 없다. 말하자면 그 리스트 자체가 그것을 만든 본인에게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
문제는 남을 정죄하는 그 리스트가 올바르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그 장부는 선과 악으로 나누는 자신만의 기준이다. 거룩한 신자와 전혀 신자답지 못한 자, 심하면 구원 받을 자와 그러지 못할 자로 나눈다. 반면에 그렇게 정죄하는 자신은 아주 고상한 성자가 된다.
그래서 신자가 갖고 있는 정죄 리스트는 일종의 우상이 될 수 있다. 스스로는 그것을 실현하는 일에, 남들에게는 그것으로 꾸짖어서 고치는 일에 매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이나 성경이 말하는 바와는 별개다. 그것과 전혀 불일치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외형적 결과는 물론 근본적 맥락이 성경이 말하는 바와 궤를 같이하니까 더더욱 불변의 경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또 그 리스트에는 자신에겐 해당되지 않거나, 스스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만 포함시키니까 자신은 자꾸만 더 의로워질 수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다른 이와 비교해서 스스로를 높이는 아주 좋은 수단이 된다.
하나님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선악을 아는 일에 당신과 같이 된다고 하신 본문 말씀의 뜻이 바로 이것이다.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처럼 정확하게 그럴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또 그렇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염려할 리는 없다.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선악을 정하고 구별하여서 정죄하고 심판할 수 있는데도 인간이 감히 그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담은 모든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려고 하나님을 자신의 마음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선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에덴동산의 주인 자리를 자기가 꿰차려 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오르려는 뜻이다. 사탄의 꾐에 넘어가 모든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오직 자기 위주로,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게끔 하는 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 것이다.
하나님마저 자신이 형통되도록 도와주면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차 없이 하나님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오직 인간을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을 인간에게 다 위임하시고서 인간더러 당신의 품 안에만 있다면 항상 보호하고 사랑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분을 말이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다. 과연 인간의 이런 배반이 가당치나 한 일인가? 또 그 죄의 삯은 마땅히 죽음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런데도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그런 상태로 생명나무 과실까지 먹으면 영영 구원할 길이 없기에 그 나무에게 접근 차단을 시키고 낙원에서 내보냈다. 한마디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놓으신 것이다. 인간을 내 몰라라하고 방치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낙원에서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모든 죄를 묻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실제로도 낙원에서 내보낼 때에 가죽 옷을 당신께서 손수 지어 입히셨다. 바로 그 때에 인간에게 갖고 있는 당신의 죄의 목록을 다 찢어 없애버렸다는 뜻이다.
그리고 때가 차매 그런 사실을 천하 만민에게 드러내 보이셨다. 바로 골고다 언덕에서였다. 예수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른 말로 인간들에게 정죄는커녕 전혀 죄를 묻지 않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지난 모든 죄를 잊으셨음을 천하에 다시금 확실하게 공표하신 것이다. 아담 이후의 인류가, 그것도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이스라엘마저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음에도” 아무 문제 삼지 않으셨다. 당신 백성이 이방 족속의 우상 신들까지 음란하게 함께 섬겼음에도 당신의 마음이 그들로부터 떠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8-14)
영적성장의 첫 출발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을 이미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옮기셨다고 한다. 그 죄과를 기억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체질이 진토임을 기억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에겐 정죄의 리스트 대신에 구원할 자들의 이름만 적힌 리스트를 갖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남을 정죄하는 리스트를 갖고 있다. 그것도 그분께 나의 모든 죄가, 과거는 물론 현재 짓고 있고 앞을 지을 죄까지 모두 용서 받은 자들이 말이다. 그것도 아주 굵고 확실하게 인쇄해서 어느 누구도 감히 수정 요구를 못하고 접근조차 못하는 경전으로 붙들고서 말이다.
그 정죄 리스트의 가장 큰 특징은 실은 죄의 종류가 많거나, 시시한 것까지 정죄한다거나, 변경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남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아무 힘을 못 쓴다는 것이다. 가장 흔히 하는 말로 남이 하면 불륜이요, 자기가 하면 로맨스다. 심지어 교회 안에선 무엇이든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그분이 싫어한다는 말만 더 붙이면 아주 쉽게 정죄된다. 교회나 담임목사에게 조금이라도 거역하거나 불성실한 면이 보이면 자기들이 아닌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죄인으로 곧바로 매도해버린다.
남의 죄를 지적해내는 일에 천재가 아닌 인간은 아무도 없다. 또 그 죄를 자기에게 엄격하게 적용하는 바보 같은(?) 인간도 아무도 없다. 신자마저 그렇다. 아니 신자는 더더욱 하나님보다 더 종교적이 되면서도, 수시로 짐승보다 더 비도덕적으로 변해버린다.
작금 신자들의 화두는 영성 훈련이다. 어떻게 하면 신자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룩하고도 온전하게 바로 잡느냐는 것이다. 또 그렇게 바로잡은 관계를 얼마나 오래 변함없이 이어가느냐는 것이 모든 신자들의 과제가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말씀을 본다. 지난 죄를 회개하며 성령의 씻음을 구한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가장 필요한 근본 조건이다. 무엇보다 남들을 향한 정죄의 리스트를 하나 남김없이 완전히 찢어 없애버려야만 한다. 자기를 갈고 닦으려는 데에만 열중하다 보면 여전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높이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자기는 어느 정도 선하고 의로워졌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일정 수준에 이른 것 같기에, 그 다음에는 남들이 그러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도 쉽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누구를 가장 야단치셨는가? 바로 바리새인들이다. 가장 큰 잘못을 저지른 까닭이다. 그들은 당시로선 도덕적으로 가장 의로웠고 종교적으로 가장 경건했음에도 그랬다. 사람들 사이에선 가장 칭찬과 존경을 받았던 자들이었다.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을 대할 때에 정죄의 리스트를 갖고서, 그것도 자기들이 만든 잣대만으로 판단하고 정죄했다는 이유다. 예수님이 가장 야단 치셨다는 것은 당신과의 관계에 가장 큰 훼방이 된다는 뜻이다. 정죄의 리스트를 갖고 있는 자는 스스로는 아무리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도덕적으로 의로워져도 여전히 예수님의 미움 아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낙원에서 내보낼 때부터 이미 모든 정죄의 리스트를 찢어 없애시고, 대신에 인간의 체질이 진토라는 것만 기억하기로 하셨던 분이다. 하나님과 관계를 가장 잘 가지려면 그분의 마음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분을 품성을 닮아가야 한다. 남들에 대한 정죄의 리스트를 없애지 않는 한에는 그분과의 관계에 장애만 될 뿐이다. 우리가 아무리 깨끗해져도 우리 깨끗해진 그것이 우리의 자랑만 되어선 아무 짝에 쓸모없는 죄일 뿐이다. 다른 모든 도덕과 종교에선 몰라도 기독교에서만은 그렇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에 뭐라고 하셨는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해달라고 간구하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심지어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막6:14,15)고도 하셨다. 하나님이 이미 찢어 없앤 정죄 리스트를 다시 꺼내 드시겠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를 믿고도 다른 이를 용서 못하고 정죄하는 바로 그 일이 당신께서 가장 싫어하신다는 것이다. 당신의 온전한 은혜와 권능을 맛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영성이 전혀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혹 자신을 아주 열심히 갈고 닦는 신자들이 많다. 죄에 아주 민감하여 세밀하게 회개한다. 그러나 간과해선 안 되는 영적 진리는 그만큼 자기 죄에 민감해지면 남의 죄에도 그만큼 민감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자신을 회개한 이후가 더 중요하다. 자기가 이만큼 깨끗해졌으니 남도 이만큼 반드시 깨끗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무조건 틀린 것이다. 내가 이만큼이나 깨끗하지 못했음에도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만 깨끗케 되었으니까, 다른 이에게 필요한 것도 동일하게 예수님뿐이라고 확신하고 그렇게 적용해야만 한다.
요컨대 나를 비롯한 모든 이가 하나님 보시기에 진토라는 것부터 깨달아야 한다. 다른 이도 나도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 없이는 단 한 순간도 바로 설 수 없음부터 철저히 인식해야 한다. 다른 이를 있는 그대로 두고서 볼 줄 알아야 한다. 허물, 약점, 잘못, 죄악 모두가 그 사람과 하나님과 일대일 관계에서만 해결될 문제임을 깨달아야 한다. 또 그런 것들이 그가 예수님의 은혜를 받는데 아무 장애가 안 되고, 때로는 더 풍성하게 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해주어야 한다.
바로 그 사람을 위해 예수님이 돌아가셨고 지금도 그 사람을 오직 예수님만이 다스리시고 있다는 것이다 . 내가 아무리 마음을 써가며 열성으로 섬기고 심지어 기도해주고 있다고 해서 나의 의로운 영향력이 그를 바꿀 수 없음부터 겸손히 인식해야 한다. 그에게나 나에게나 절대로 없으면 안 될 것은 십자가에 드러난 예수님의 무한하고도 신실한 긍휼과 자비뿐임을 알고 또 실제로 체험하며 사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특별히 이전 같으면 당장 판단, 정죄, 심판했을 그들의 잘못부터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맡겨 드려야 한다.
요컨대 기독교의 올바른 영성은 절대로 하나님보다 더 영적, 종교적, 도덕적이 되려고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 또 아주 조금이라도 내가 남보다 나아보이기 시작하면 바로 그 때가 영적 타락이 시작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곧 바로 나 의로움의 리스트이자 다른 이의 잘못을 적은 리스트를 찢고 또 찢어 없애야만 비로소 예수님과 온전한 교통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7/30/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