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5:27-34 야곱 같은 신자가 너무 아쉽다.

조회 수 369 추천 수 0 2020.05.27 16:13:11

(창25:27-34) 야곱 같은 신자가 너무 아쉽다.

야곱 바로 알기(1)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창25:27-34)

 

거래의 세 가지 부당한 요소

 

설교나 성경공부로 너무나 익숙한 야곱에 대해서 앞으로 몇 주에 걸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새삼 그를 알아보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지금껏 야곱에 대해서 부족하다 못해 틀리게 평가되어진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 그와 같은 신자들이 정말로 아쉬운데도 오히려 본받지 말아야 할 신자의 대표처럼 되어있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야곱하면 대체로 영악한 사기꾼 기질을 지닌 자로 끈질긴 생활력을 발휘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선조가 되었다고 여깁니다. 그를 닮아야 한다고 해서 세상살이가 너무 복잡해지고 각박하니까 그의 기발한 처세술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아버지와 형을 속인 것은 분명히 잘못한 것입니다. 가족에게는 물론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한 것으로 나중에 그에 상응하는 벌도 받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성품만 해도 단점보다 장점이 많았을 뿐 아니라 그가 가졌던 믿음은 더 대단했습니다. 단순히 열두 아들을 낳은 육신적 선조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이듯이 이스라엘로 가장 이스라엘다워야 할 모습들을 자기 삶에서 실현한 아브라함 못지않은 믿음의 선조였습니다. 야곱이 평생토록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서 어떻게 유지했는지를 정확히 알아서 우리 신앙에 적용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형 에서에게서 조금 치사한 방식으로 장자권을 양도받는 사건입니다. 야곱의 인생을 파란만장하게 만든 시발점이자 후대의 신자들이 그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게 되는 계기였습니다. 장자권이란 장남이 부모를 모시고 집안의 대를 이어가는 책임을 맡되 두 배의 유산을 받는 권리를 말합니다.(신21:15-17) 영적으로는 가족들의 믿음을 양육시키는 제사장이자 집안을 대표하여 하나님 언약의 축복을 받는 자입니다. .

 

본문에서 제일 먼저 주목할 사항은 야곱이 에서를 속이지 않았고. 정당한 거래를 통해 장자권을 매수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 가지 큰 잘못을 범했습니다. 첫째, 장자권은 아버지가 죽기 직전에 유언으로 확정짓는 것이지 자식들끼리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돈으로 사고팔 성격은 더더욱 아닙니다. 에서와 야곱 둘 다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한 잘못을 범했는데 그런 차원에선 사실상 장남의 책임이 더 큽니다.

 

둘째로 차남이 감히 넘봐선 안 되는데도 주도적으로 먼저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배가 고파 힘들어 하는 형에게 동생이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육신적 본능에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형의 약점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평소에 장자권에 대한 욕심이 있었을 뿐 아니라 어떻게 얻어낼지 주도면밀하게 궁리도 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가르쳤습니다.(마5:28) 힘이 넘치는 젊은 남성에게 자연스레 스쳐지나가는 성욕을 정죄한 것이 아닙니다. 한 여자를 두고 율법에서 금지된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보려는 욕심을 오래 동안 품고 있는 잘못을 지적한 것입니다. 행동으로 결행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는 간음을 계속 범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들들은, 특별히 차남은 장남이 누리는 특권이 문득문득 부러울 수 있습니다. 차남이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고 장남이라고 특별히 잘나서 된 것이 아니라 출생순서 즉, 행운에 따른 것뿐입니다.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부러워하는 것은 죄가 아니나 계획을 짜서 행동으로 결행했기에 큰 죄입니다.

 

셋째로 장자권의 경제적 가치는 아주 상당합니. 두 배의 유산에 가문의 대소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눈에 보이지 않는 특권까지 포합됩니다. 아무리 형이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한다 해도 팥죽 한 그릇으로 살 수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정당한 시장가격을 지불하지 않은 정도를 넘어 그저 뺏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것도 궁핍한 상황에 빠진 형의 약점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에서의 잘못이 더 크다.

 

누차 강조하지만 성경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기에 정미하고 완전한 기록입니다. 독자는 본문의 현장에 있었다고 가정하고 앞뒤의 과정을 잘 묵상하며 행간의 의미까지 추적해봐야 합니다. 기록된 문장 안에 한정된 문자적 의미만 파악하고 치워선 안 됩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란 등장 인물들이 우리와 성정이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경건하고 신령했거나, 반대로 특별히 사악하고 죄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록된 사건이나 당시 상황도 모든 세대의 인간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상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에서의 입장이 되어서 따져보면 본문 사건에 조금 이상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에서였다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나아가 성격이 급하고 충동적이라 해도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겠습니까? 절대 그럴 리 없지 않습니까?

 

보통사람이라면 평생 만져보지 못할 만큼의 재산을 이미 갖고 있는 재벌가 자식들이 서로 장자권을 차지하겠다고 법정까지 가서 죽기 살기로 싸웁니다. 돈 앞에서는 형제는 물론 부모 자식의 인연까지 눈도 깜작 않고 끊고선 원수가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에서가 장자권의 가치를 모를 바보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사냥꾼이 되려면 아주 지혜로워야 할 뿐 아니라 육감적인 센스도 예민해야 합니다. 에서가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32절)이라고 했습니다. 한국말에 배가 고파 죽겠다는 식의 과장법이지 정말로 아사 직전의 상태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야곱도 불쌍해서 바로 먹을 것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성이 멀쩡하고 굶어 죽을 판도 아닌데 에서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당시 장자권의 핵심은 땅을 유산으로 물러받는 것입니다. 에서가 물러받을 땅이 이삭에겐 아직 없었고 아무리 따져봐도 앞으로도 생길 가망성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집안의 제사장이 되는 영적 축복도 식구가 부모와 아들 둘 다 합쳐 넷뿐인데다 아직 율법을 받기 전이라 제대로 실감할 수 없었습니다. 장자권은 정말로 명분에 불과하지 실리라곤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에서로선 기질이 활달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평생을 노력해도 내 소유가 되지 않을 땅이니 온 들을 돌아다니며 사냥에 취미를 붙였는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께 불려나와서 당신께서 지시하는 땅 가나안 으로 이주했지만 자기 소유의 땅은 죽을 때 시신을 눕힌 막벨라 굴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런 사정은 아비 이삭과 자기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서 이방인으로 이곳 저곳으로 장막을 옮기며 살았아야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우상을 숭배하는 가나안 족속으로 귀화하자니 여호와 신앙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어지는 26장에 이삭이 기근을 피해서 그랄 땅으로 가서 아비 아브라함처럼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인 사건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들은 어디에 가도 환영 받을 수 없고 그저 눈치보며 살아야 할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우습게 여길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입증하는 내용입니다.

 

흔히들 속인 사람도 나쁘지만 속은 사람의 잘못도 있다고 말합니다. 본문의 사건은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중시하고 성인의 판단이 최종권한을 갖는다고 여기는 현대 법정에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에서의 과실도 야곱 못지않게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에서가 팥죽으로 허기를 채운 뒤에 단순히 “일어나 갔으니"(34절)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원어로는 his way라고 자기가 가야할 길을 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장자권을 넘김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에서 벗어났고 자기 멋대로 자기가 주인이 되는 인생을 살기로 했다는 뜻 입니다. 에서 본인도 장자권 포기가 어떤 의미인줄 몰랐을 리 없었으면서도 맹세까지 해가며 그랬습니다. 본문이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고(34절) 결론내린 까닭입니다.

 

야곱이 더 어리석지 않은가?

 

그럼 반대로 야곱은 왜 아무 실리도 없고 말뿐의 약속인데도 그렇게 집착했을까요? 자기 당대에 에서보다 두배가 되는 땅을 아비 이삭으로부터 물려 받을 전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후대에 형을 비겁한 수단으로 속였다는 비난받을 짓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선 장자권보다 자기 인생에 오명을 남기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닙니까? 현실적으로 따지자면 에서가 더 영악하고 야곱이 도리어 어리석은 것 아닙니까?

 

그에 대한 해답은 본문 15,16 절에 있습니다. 야곱은 조용한 사람으로 장막에 거하니 어미 리브가가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사색하며 조용히 집안에서 거하길 좋아한 사람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온순하게 엄마 말 잘듣고 공부 잘하는 엄친아였던 것 같습니다. 반면에 아버지 이삭은 활동적이고 밖으로 나다니는 에서가 장남으로 집안 일을 맡기기에 합당하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부모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모든 가정에 정도만 다르지 자식에 대한 편애나 선호도의 문제는 항상 발생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자연히 생기는 감정은 잘못이 아니지만 그로 인해서 자식을 대하는 평소의 심정과 태도가 달라지면 죄가 됩니다. 자식에게 상처를 입혀서 그 인생을 굽게 하고 나중에 반드시 가족간에 분란을 일으킵니다.

 

사라가 친 자식 이삭을 사랑하고 첩의 자식 이스마엘을 학대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큰 이삭이 지금 동일한 잘못을 반복합니다. 성경인물의 성정이 우리와 똑같다고 말씀드린 근거입니다. 잘 알다시피 이삭과 리브가의 자식에 대한 편애는 가족사에 큰 불행을 낳고 쌍둥이임에도 각자의 인생이 완전히 상반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엄마 리브가가 야곱을 편애할 수밖에 없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앞에 기록된 야곱과 에서의 출생에 엮인 일 때문입니다.(22-26절) 태중에서 두 아이가 싸웠고 동생 야곱이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손으로 잡은 채 태어났습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야곱이 에서의 발목을 잡고 나왔으니 가뜩이나 쌍둥이인데다 사실상 한 몸으로 나온 셈입니다. 굳이 형 동생으로 나눌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야곱이 몇년 터울의 동생이었다면 감히 장자권을 넘겨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에서도 야곱의 말을 농담으로 여기고 웃어넘겼을 것입니다. 쌍둥이에다 거의 동시에 나왔으니 안 그래도 아무 실리가 없는 장자의 명분은 누가 가져도 좋다고 에서가 가볍게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결론은?

 

거기다 리브가는 임신 중에 하나님의 계시까지 받았습니다. 복중에서부터 두 민족이 나뉘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23절) 두 민족이 된다는 것은 형제들이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등을 지고 각자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겨야 한다면 장자권이 뒤집어진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은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로 계승된다는 뜻입니다.

 

북중에서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을 감지해온 리브가로선 야곱이 이삭의 발뒤꿈치를 잡고 출생하자 하나님이 주신 계시에 대한 믿음이 더 확고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는 태아가 양수로 뒤덥혀서 온몸이 미끄러운데다 출산의 극심한 진통 중에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한 기적이지 않습니까?

.

그녀가 그 이야기를 아들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성인이 될 때까지는 비밀에 붙였을 것입니다. 어쨌든 어미 된 입장에서 쌍둥이 아들을 어떻게 하든 싸우지 않고 사이 좋게 자라도록 최선을 다하며 그 성장과정을 아주 주의깊게 지켜봤을 것입니다.

 

그녀는 여호와가 그 가문에 주신 약속도 시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들어 익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 아들들은 이방 땅에서 복의 근원이 되고 그 후손들이 창성해져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가 그런 축복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장남인데다 불행해질 장래가 불쌍해서 부부 둘 다 에서에게 더 애정을 쏟으며 잘 키우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자랄수록 하나님의 예고대로 에서보다는 야곱이 그 약속에 맞게 자라는 것같아서 리브가의 사랑과 관심이 자연스레 야곱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설령 이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이처럼 그 기질이 정반대로 나뉘기는 힘듭니다. 태아 야곱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놓지 않았 듯이 하나님이 이미 작정한 일을 인간 부모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바뀔 수는 없음을 리브가는 갈수록 체험했을 것입니다.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예언대로 되어가고 있기에 야곱에게만 장자권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귀띔해주었을 것입니다.

 

이제 야곱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생각해보십시오. 비유컨대. 몽고에서 한 가정이 한국으로 이주해 와서 한국 땅 전부를 자기들 신이 자기 후손에게 줄 것이라고 약속했고 그렇게 되리라고 온전히 믿고 있는 셈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인데도 말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의 일생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겠다는 집념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본문의 비이성적인 사건에서 보듯이 그가 행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려는 것, 현실적으로 실현이 안 되면 그 안에 남아 있기라도 하려는 것뿐이었습니다. 앞으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가나안 땅을 후손에게 기업으로 물려주는 것이 그의 필생의 목표이자 이방 땅에서 온갖 눈치를 보면서도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이었습니다.

 

노아는 100년 뒤의 홍수를, 아브라함은 25년 뒤의 아들을 바라보았으나 어쨌든 자기들 당대에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야곱은 최하 사백년 후에 달성될 약속을 바라보았고, 아니 그 실현을 위해 자기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 확실한 예로 야곱은 인생말년에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이주했어도 끝까지 가나안 땅에 시신이라도 묻히기를 소원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야곱이 시신의 모습으로라도 가나안에 돌아온 것은 후손더러 여호와의 언약을 절대 잊지 말고 반드시 실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요셉을 비롯한 열두 아들들이 가나안 땅으로 넘어와 조부 아브라함의 막벨라 굴에 아버지를 함께 묻어주는 것으로 창세기 50장의 기록은 끝이 납니다. 창세기의 내용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세상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최초의 것들을 조성하여 제자리에 위치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론이 야곱이 죽어서라도 그 땅에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주제가 하나님이 지정하신 땅에 끝까지 거하는 자 즉, 하나님 당신의 품안을 벗어나지 않는 자만이 그분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바람이자 인간을 창조하신 뜻입니다.

 

야곱에게 본 받을 믿음

 

지금 단순히 야곱이 에서보다 믿음이 좋았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야곱은 이성적으로 차분히 집안 내력과 하나님의 약속과 어머니의 출생 간증을 비교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습니다. 범사를 멀리 종합적으로 분석 판단하는 신자였습니다. 환경이 어떻게 바뀌던 어떤 사건이 일어나던 자기가 세워놓은 원칙이 변하지 않는 자였습니다. 본문의 장자권 거래는 그가 오랜 기간 믿음으로 기도한 후에 내린 결단일 것입니다.

 

반면에 에서는 성경 기록이 증명하듯이 아주 감정적이고 충동적으로 행동한 자입니다. 거의 생각을 하지 않고 행동이 앞서며 각 개별 상황에 따라 움직였던 자입니다. 개별 사건과 개별 여건에 따라 자기 판단이 오락가락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오래 동안 붙들고 있지 못합니다. 쉽게 말해 위급한 일이 생겨야 겨우 하나님을 찾는 자입니다.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언약을 단순히 이스라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는 것이라고 여기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은 열방 중에 장자 족속으로 택함 받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니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2,3) 한마디로 줄이면 아브라함이 먼저 복 받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로 인해 복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뭇별처럼 창성해져서 출애굽한 후에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그 약속을 재확인해줍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19:5,6) 아브라함 개인 이제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되었고 그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 중에 하나님의 장자권을 받은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그 일을 실현하는 무대장치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나안을 진멸하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다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당장에 하나님의 차남인 민족은 누가 됩니까? 바로 가나안 족속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혹독한 연단과 형벌을 내렸으나 가나안 족속들은 진심으로 회개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만 믿으면 됩니다. 그럼 이방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여태껏 세상에 없었던 복을 받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나안 정복에 숨겨진, 아니 첫째가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장자 대신에 막내가 되어 있는 신자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신자도 세상사람 앞에서 주님이 주신 장자권을 이미 소지한 자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을 거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실현된 신자의 장자권은 모든 신자에게 계승됩니다. 신자들 중에 목사와 선교사나 믿음이 좋은 장로 집사만 장자가 아닙니다.

 

예수 믿어 신자가 되어선 교회와 성도들을 충성하며 섬기겠다는 결단과 실천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야곱처럼 하나님의 장자권 최고로 귀한 선물인줄 절감하기에 끝까지 집착하면서 생명을 걸더라도 유지해야 합니다. 무론 현실적 장자권이 아니라 영적인 장자권을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멸시 핍박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 땅에 실현시켜야 합니다.

 

신자만 일방적으로 수고와 희생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살면서 너무나 풍성한 은혜와 권능을 누리고 있다면 바울처럼 전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됩니다. 예수님과 교제 동행 순종하는 너무나 큰 은혜를 어떻게 놀부처럼 독차지만 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다 성령님이 내주하고 있기에 절대로 그냥 버려두지도 않습니다. 순전하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신자가 행하는 일마다, 관계를 맺는 사람마다 그 십자가 은혜가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나게 인도해주십니다.

 

장남이 잘못하면 그 집안은 망합니다.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은 분명히 택한 백성이라는 인식을 가졌습니다. 너무 강해서 오히려 문제였습니다. 장자로서 현실적 실리만 행세하려 들었습니다. 에서가 실리가 없으니 포기했듯이 거꾸로 장자권을 가졌으니 현실적 실리만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자기 민족만 세상에서 최고로 높여주고 메시아가 유대 성전에 임하여 로마를 물리쳐 달라는 요구만 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다윗 왕국의 정치적 영광을 재현해줄 자기 민족만의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가장 작은 소자에게 즉, 장남으로서 나머지 다른 형제들에게 어떻게 행했는지를 보고 심판할 것이라고 비유로 가르쳤는데도 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는 신자가 거룩하게 살지 못하면 이 땅은 멸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겐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신자가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해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언제라도 이 땅을 완전히 멸할 수 있고 그 반대로 지금이라도 코로나가 없는 완전히 청정한 지구로 되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창조 이래로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위기는 물론 곤란한 일은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커 보이는 고난과 재앙도 그분에겐 전혀 골치 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이 땅의 불행과 재난은 전부 죄로 타락한 인간이 자초한 비극입니다. 이 땅을 깨끗하게 할 책임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특별히 장자인 신자는 더더욱 앞장서서 모든 것을 희생하며 그분의 뜻에 맞게 아름답게 관리해야 합니다. 신자는 불신세상 앞에 온전한 진리를 밝히는 빛이요, 그 전에 세상을 썩지 않게 만들어야 할 소금입니다. 그러다 땅에 떨어져 자기는 죽고 다른 이들의 생명을 수십 배 수백 배 살려내야 합니다.

 

신자가 그 일을 행하지 않으면 인간사회는 지금과 똑같이, 아니 갈수록 더 피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작금 코로나 사태로 불신자들마저 말세가 임한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들에겐 근본적으로 아무 수단이 없으며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신자들이 앞장서서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작금 코로나 같은 엄청난 사태를 겪고도 교회 예배만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끼리 언제 어떻게 다시 모이느냐에만 관심이 집중합니다. 에서처럼 감성적으로 개별 사건과 개별 여건에 개별적인 믿음만으로 대하니까 그 생각과 행동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신앙으로 승리한 인생은 눈을 닦고도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처럼 자기만 형통 출세케 해달라고 빌고 또 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책임지고 실현해야 할 장남이 되어있어야 할 신자들이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해달라고 떼만 쓰는 막내아들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남의 집의 자식이 되는 것을 더 좋게 여기고 계속해서 세상을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아니 노골적으로 세상에서 형통 출세하겠다고 덤빕니다. 기도하는 내용이 전부 그런 것들입니다. 성경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로 묵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고 사기꾼 취급하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 대신 죽으신 구원의 은혜와 권능이 현실적 실리를 조금 늘려주는 정도로 시시하고 볍지 않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장남 족속이 이미 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평생 동안 언약백성의 장남으로 사는 일에 죄송하지만 시체가 되어서도 충성했습니다. 신자들 모두 목숨 바쳐 순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다른 이가 볼 때에 하나님의 품안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받아야 합니다. 야곱처럼 이성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을 해도, 자신에게 아무 현실적 유익이 없는 일을 해도 예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인 줄 알게 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받은 장자권을 자기 삶에서 실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장자권이 여러분 삶과 인생의 최고 가치요 기쁨이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최소한 하나님의 막내는 물론 남의 집 자식이 결코 아니며 그렇게 살 수는 없다는 확고한 자각이라도 있습니까? 말하자면 자기 아버지 이름에 먹칠할 수는 없다는 자부심 하나만 있어도 지금처럼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도리어 비난을 받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의 신자로 계속 살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정말로 한번 곰곰이 따져보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고 또 그 후에도 다른 모든 좋은 것들로 채워주시는 이유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너무 간단합니다. 에서처럼 세상의 엄친아가 되지 말고 야곱처럼 하나님의 엄친아가 되라는 것 하나입니다.

 

5/3/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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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창28:17-22) 십일조 드리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다 (?) master 2020-07-25 118
170 (창28:17-22) “알고 드리는 예배”가 무엇인지 아는가? master 2020-07-25 82
169 (창28:17-22) 두려운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는가? master 2020-07-25 118
168 (창28:10-16) 영적전투에 절대 패배하지 않는 비결 master 2020-07-25 77
167 (창27:46-28:4) 거류하는 땅이 유업이 되어있는가? master 2020-07-25 135
166 창6:1-4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에 관한 변론 master 2020-05-27 1208
165 창27:34-40 아들 에서를 저주하는 아비 이삭. master 2020-05-27 397
164 창27:18-29 이삭은 야곱인줄 알고 있었다(?) master 2020-05-27 197
163 창27:1-10 야곱이 아니라 리브가가 이삭을 속였다. master 2020-05-27 670
» 창25:27-34 야곱 같은 신자가 너무 아쉽다. master 2020-05-27 369
161 창세기1:1의 하늘이 왜 복수인가요? master 2018-11-23 641
160 창4:13-15 에덴동산에 다른 사람들은 없었나요? master 2018-01-12 911
159 창19:8 롯의 행위가 의로운가요? [1] master 2017-07-19 1037
158 창6:3 노아홍수 후 인간수명이 120년으로 줄었는지요? master 2017-07-19 1177
157 창18:21 다 아시는 하나님이 왜 알아보겠다고 하나요? master 2017-07-08 179
156 창세기 3장의 뱀에 대한 추가 질문 master 2017-03-03 4512
155 창세기에 나오는 뱀에 대해서. master 2017-03-03 707
154 창세기의 몇몇 의문점들 master 2015-12-19 2628
153 창11:1 바벨탑 이전에 언어가 나뉘었나요? master 2015-09-28 1140
152 창39:3 요셉의 형통의 절정 운영자 2013-11-12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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