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8:10-16) 영적전투에 절대 패배하지 않는 비결

야곱 바로 알기 (6)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28:10-15)

 

충분히 예상했던 도피길

 

야곱이 자기를 더 사랑하는 아비 이삭을 속여서 장자권의 축복을 가로챈 것을 알게 된 에서는 격분하여 동생을 죽이려 들었습니다. 본문은 야곱이 도망가며 길에서 노숙하던 중에 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내용입니다.

 

지금 야곱은 정말로 가진 것 하나 없이 혈혈단신으로 아무 기약 없이 도망치고 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창27:44,45)고 다짐했으나 이번은 평소와 달리 에서의 분노가 언제 풀릴지 모릅니다.

 

아버지 이삭은 또 외삼촌 라반의 딸들 중에서 결혼하라고 당부했는데 과연 늙은 자기를 신랑으로 받아줄지 현재로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자기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고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는 야곱이 스스로 사서 하는 고생이라는 것입니다. 야곱과 리브가가 에서의 불같은 성격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성경은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 반면에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라 장막에 거한다”(창25:27)고 묘사했습니다. 솜씨가 좋은 사냥꾼 에서는 빠르고 힘센 야생 동물도 단번에 죽일 수 있습니다. 온순한 농사꾼 야곱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닙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빼앗긴 것만 해도 분통이 터지는데 그 결과 아버지로부터 “칼을 믿고 생활하며 아우를 섬기고 하나님 밖에서 자기 멋대로 살 것이라”(창27:40)는 저주 아닌 저주까지 받았습니다. 야곱이 갈아 먹고 싶을 정도로 미워질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야곱으로선 형과 맞서 싸워봐도 상대도 안 되고 형제끼리 그럴 수도 없습니다. 멀리 도망갈 수밖에 없음은 이 일을 모의할 때부터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결과였습니다.

 

거기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후손들이 가나안을 차지하는 것은 사백년이 훨씬 지난 후라고 예언해주었습니다. 그것도 이방의 노예가 되어서 한참 고생을 한 후라고 말입니다.(창15:13) 야곱은 자기 당대에 가나안을 기업으로 삼을 수 없다는 할아버지와 하나님 사이의 언약을 아비로부터 이미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아비를 속여서라도 장자권을 취득했습니다.

 

말하자면 앞으로 어떻게 될 줄 알고도 스스로 선택 시행한 일입니다. 여호와의 언약에 끝까지 남아 있으려면 여러 문제가 발생할 것에 대해 자기가 책임지고 감당하겠다고 이미 단단히 각오한 것입니다. 그럼 비록 모든 상황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워 기쁨은 넘치지 않아도 최소한 평온은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전혀 그렇지 못하고 도리어 영적인 절망에 빠진 것 같습니다.

 

야곱의 최대 관심사

 

지금 야곱이 도망가다가 피곤해서 아무 생각 없이 지쳐서 쓰러져 자는데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 뜬금없이 큰 복을 주시겠다고 위로하신 것이 아닙니다. 꿈이란 평소 오래 동안 갈등하던 문제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반영된 것입니다. 야곱이 꿈에서 본 내용은 바로 야곱의 고민이었고 특별히 도피를 떠난 이후 줄곧 품었던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천사들을 보고 싶다는 평소 생각이 연장되어 환상으로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천사들이 전해준 메시지의 내용을 보면 야곱이 영적으로 갈등했던 내용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평소 야곱의 최대의 관심사는 무엇이었습니까? 자기 집안을 여호와의 언약 위에 굳건히 세우는 것입니다. 도피한 후로는 아비를 속여서 취득한 장자권이지만,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그래야 하겠다고 계속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꿈속에서 천사들이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여호와의 언약에 야곱 너도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다시 확인해준 것입니다.(13,14절)

 

그리고 지금 야곱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어서 빨리 도피 생활을 끝내고 부모님 계신 곳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천사들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15절)고 응답해준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고민에 대한 응답을 받자 야곱이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16절) 그럼 도피 후에 오늘 밤 잠이 들기 전까지 또 누워 자면서도 계속해서 여호와가 자기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여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이제부터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장자권으로 제가 어떻게 행해야 할지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은 무엇입니까? 저는 언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까? 왜 아무리 기도해도 묵묵부답이십니까? 제가 이런 처지에 빠졌는데도 대체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주님이 함께 해주지 않으면 저 혼자선 도무지 이 도피 생활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제발 저와 함께 하신다는 작은 징표라도 보여주십시오.” 아무리 속으로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끝내 묵묵부답이었던 것입니다.

 

꿈은 하나님의 뜻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므로 직접적인 메시지 외에 보여지는 상징에도 어떤 특별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말로는 ‘오르락내리락’이라고 간단히 번역했지만 원어는 올라가고 내려온다는 두 문장입니다. 천사들이 사닥다리를 올라감을 먼저 말하고 내려옴을 뒤에 말하고 있습니다. 땅에 있던 천사들이 하늘의 부름을 받아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너무 괴로워서 절망에 빠지자 하나님이 그와 함께 있던 천사들을 불러올려서 당신의 뜻을 그에게 전해주라는 명을 주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그래서 하나님이 여기 즉, 지금 자기 곁에 함께 하고 있었음을 미처 몰랐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야곱의 영적인 절망

 

야곱은 여호와의 언약을 중심에 굳건히 붙들고 있던 믿음의 사람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나 연약하고 어리석은 피조물 인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갈멜 산에서 바알 우상을 숭배하는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혼자서 대결하여 통쾌한 승리를 거둔 직후에 죽음과 방불한 영적 절망에 빠졌습니다.(왕상18,19장) 왕비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서 결국 혼자서 광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야곱도 우여곡절 끝에 장자권이 에서에게 넘어가 집안이 우상숭배에 떨어지는 일은 막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언제 고향땅으로 되돌아올지 기약도 없이 도망치는데다 돌아온들 그 때에도 에서가 죽이려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아무 출구가 없이 사방이 꽉 막힌 상태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은 세상에 자기 혼자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자기를 도와줄 존재라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으로는 믿지만 그분은 전혀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지금 유일하게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도 사실은 할아버지가 받은 것으로 자기는 부모로부터 전해들었을 뿐입니다. 그 약속의 실현은 무려 사백 년 뒤에나 가서 이뤄질 것입니다. 야곱으로선 전혀 실체가 없는 약속을 붙들고 시쳇말로 맨 땅에 헤딩하는 꼴입니다.

 

조용하여 장막에 거하는 것을 좋아하는 데다 사냥꾼 형은 집을 비우기 일쑤라 부모를 모셔야 하므로 그 나이 되도록 타지로 여행도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지금껏 부모가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상징으로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 맡아주었습니다. 부모님이 함께 하지 않는데도 할아버지에게 주신 약속이 과연 나에게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덜컥 의심이 생겼을 수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각 지역마다 종족마다 다른 신들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평소에는 전혀 그런 생각을 못했지만 막상 브엘세바를 벗어나고 보니까 혹시라도 여호와가 권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걱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세상 속으로 혼자만 던져지게 된 것은 생전 처음입니다. 함께 예배드리고 서로 기도해줄 사람도 없습니다. 이젠 정말 흑암 속으로 혼자 걸어가야 합니다. 지금부턴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굳건히 믿으며 성경의 진리와 계명대로 살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악인들이 더 출세 형통하고 있고 자신은 계속 고달프기만 하며 나아질 기미조차 없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도 침묵으로 일관하다 못해 아예 나와 함께 하는 것 같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께 잘못을 범한 일도 거의 없는데 말입니다.

 

나아가 내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이웃을 섬기며 살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증거는 없어도 그분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임을 확신하기에 그분이 함께 하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어려움은 그럭저럭 견딜 만합니다.

 

그러나 가끔 아무 이유 없이 기쁨은커녕 평안이 완전히 실종될 때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동료 성도로부터 오히려 음해를 당하고 배우자를 포함해 가족들조차 아무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내 주변에 아무도 없고 정말로 혼자만 깜깜한 어둠에 홀로 버려진 것 같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팔짱을 끼고 돌아서서 귀를 막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냇물을 찾는 사슴

 

이런 우리의 심정을 시편 42:1-4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기자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는 비방을 받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기자가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여 함께 성일을 지켰던 동료 성도들입니다. 너무나 낙심되어서 여호와를 찾았으나 아무 응답이 없어서 언제 그분의 얼굴을 뵈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탄식합니다. 그런 절망이 얼마나 오래 되었으면 비록 시적인 수사법으로 과장했어도 눈물이 밤낮으로 먹는 음식이 되었다고 토로합니다. 눈물 말고는 먹을 것이 없고 오직 슬픔으로 지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절망에서 벗어나려고 제발 하나님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보여 달라고 간구했는데 기자는 그런 영적절망을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모습에 비유했습니다. 사슴은 아주 온순한 동물로 가족끼리 몰려다니며 풀을 뜯어 먹고 삽니다. 사슴은 눈만 봐도 너무 양순하다 못해 눈물을 머금은 것 같아 노천명 시인은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온순한 사슴은 크게 분노할 일도 없기에 맹수에게 쫓겨 도망 다닐 때만 빼고 평소에 숨을 헐떡이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헐떡이면 자기 몸의 수분이 소진되는데 80%가량 소진되면 쓰러져서 맹수에 잡아먹히게 됩니다. 그래서 맹수의 추격권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가장 먼저 물을 보충해야만 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 같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맹수에 쫓기면서 자칫 생명이 달아날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시냇물을 마시지 못하면 탈진 하거나 사망하게 되는 절대 절명의 순간입니다.

 

조용하게 장막에 거하며 부모님의 신앙 교육대로 살아온 야곱의 평소 모습이 사슴과 방불합니다. 로버트 모리스라는 미국 목사가 에서는 사냥꾼이라 동물이 도망간 흔적을 찾는데 전문가였기에 야곱은 목적지 밧단아람과 반대편으로 평소 여행 거리의 두 배를 종일 뛰다시피 급히 도망쳤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형의 살해 위협을 겨우 벗어나서 탈진해 쓰러진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겉으로 내색은 안 해도 그 영혼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절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영혼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했습니다. 죽기 직전의 사슴이 비로소 시냇물을 찾은 셈입니다. 시편 기자가 그런 절망의 끝에 하나님께 들은 응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10, 13절) 두 번 반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강조했습니다. 본문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16절)라는 야곱의 고백과 동일합니다. 세상 쾌락을 다 섭렵한 천하의 탕자 어거스틴도 사람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결코 평안을 누릴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사탄의 첫째 노림수

 

신자는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의 이루신 완전한 승리 가운데 들어와 있기에 사탄 쪽으로 완전히 다시 돌아가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도 세상 안에서 살아야하기에 평생토록 공중권세 잡은 사탄과 영적전투를 벌여야 합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신자를 잡아먹으려고 문 앞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열심을 냈어도 인간적 욕심과 본성이 개입되면 일시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지고 사탄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사탄이 신자를 넘어뜨리는 가장 자주 쓰면서도 가장 강력한 무기가 하나 있습니다. 가장 강력하니까 가장 자주 사용합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세상에 아무도 없이 네 혼자라는 마음을 자꾸 심어주는 것입니다. 주변에 네가 의지할 데라곤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마저 너를 외면하고 떠났다는 불안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미숙한 신자는 현실의 눈에 보이는 모습에 초점을 맞추게 해서 그 문제가 너무 크게 보이고 그것에 가려 하나님을 못 보게 만듭니다. 주님을 따르며 살아가는 성숙한 신자에겐 주변 사람들로부터 억울한 비방과 정죄 등을 당하게 해서 왕따로 만들어버립니다.

 

낙원에서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아무 부족한 것 없이 살고 있던 아담과 이브도 넘어트렸던 사탄의 최초이자 최고의 전술입니다. “네 혼자 서라, 무엇이든 스스로 할 수 있지 않느냐, 혼자 서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은 다 제거해라, 하나님이라도 네가 하고자 하는 일에 걸리적거리면 따르지 말라, 하나님은 네가 혼자 서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래서 자기 품을 절대 벗어나지 말라고 명령하고 그러지 않으면 죽음이라고 겁주는데 그것은 다 거짓말이다.” 그 꾐에 넘어간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만 없으면 정말 신나고 재미있을 것 같아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까닭 없고 스스로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공포심과 수치심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이미 하나님을 등지고 혼자서 설치는 불신자는 전혀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너무나 어리석게도 자기만 높이려는 욕심의 노예가 되어서 서로 시기 경쟁 다투며 죄를 쌓기 바쁘기 때문입니다. 이번 미국의 인종차별을 항의하는 시위대 중 일부가 경찰이 안 보이는 데선 곧바로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폭도로 변했지 않습니까?

 

사탄의 첫째 전략이 혼자뿐이라는 생각, 특별히 하나님도 너를 외면했다는 불안에 휩싸이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을 이겨내는 신자의 첫째 전략도 간단합니다. 그와 반대이면 됩니다. 죽음을 앞둔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그런 간절함과 세기로 하나님을 찾고 또 찾으면 됩니다. 눈물이 음식이 되어갈수록 속에 있는 모든 불안 염려 의심 불만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분노 미움까지 그분께 다 털어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자기 속에 것을 다 털어낸 후에 진심으로 당신의 도움을 구할 될 때까지 기다린 후에 당신의 얼굴을 보여줍니다. 반대로 그런 순전한 마음을 가진 신자라면 하나님의 순전한 얼굴을 언제든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또 찾으면 반드시 각자에게 합당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계신다는 확신을 심어줍니다. 하나님이 실존해 있고 내 입술의 말은 물론 마음의 묵상까지 정확히 세밀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야 할 수 없게 만들어줍니다. 그 응답의 방식 또한 본문처럼 하나님만의 방식임을 알게 해주니까 신자는 그분의 임재를 더더욱 확신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멀리 떨어져 있거나 등지고 계시다가 갑자기 그 기도에 응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계셨고 지금도 바로 곁에 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는 점을 의심치 않게 만들어줍니다.

 

야곱이 없는 동안에 에서는 사냥하러 돌아다니기 바쁘고 이방족속 세 며느리는 부모를 제대로 부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야곱으로선 어서 빨리 돌아가 부모를 잘 모셔야지라는 염려뿐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가장 듣고 싶었던 바대로 정확하게 응답해주신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 전에는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흑암 중에 혈혈단신으로 생존마저 위태롭게 되었다는 걱정에 함몰되어 있다 보니 그분이 한시도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큰 문제와 고난이 닥쳐도 영적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첫걸음은 하나님이 나를 떠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부터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27:10)라는 다윗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고백이 아주 쉬운 것 같아도 우리 모두 경험했듯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이 나에게 행한 역사가, 처하게 만든 환경이, 만나게 해준 사람과 사건이 나를 조금만 힘들게 만들면 곧바로 그분이 함께 하신다는 그 간단한 진리마저도 너무나 쉽게 잊는 것이 저를 비롯한 신자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무조건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갔다는 인식부터 해야 합니다.

 

믿음의 증거는 필요 없다.

 

야곱의 이 정처 없는 여정에는 영적전투의 결정적인 승리의 비결이 하나 더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 신자의 일생은 세상에서 형통과 안일은 거리가 멀고 문제와 고난이 겹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진지하게 따져보십시오. 고난이 겹치는 삶이 신자가 걸어가야만 하는 길이라면 그분의 능력이 드러나는 화끈한 증거가 따로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세상에서 왕따 되는 고난 자체가 주님과 함께 올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영적으로 어리석기만 하는 우리는 고난이 순식간에 기적적으로 끝이 나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줄 알고 겨우 안심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선 더더욱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일부러 심술궂게 구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정말로 자발적으로 기꺼이 따르는 신자만 찾으시고 또 그런 신자를 통해서 신자의 형통이 아니라 당신의 거룩한 일을 이루십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마지막 축복 기도를 통해 여호와께 받은 유업이 무엇이었습니까? 가나안에서 거류하는 유업이었습니다. 가나안을 차지하지 못하고 끝까지 나그네 같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그네 같이 살아가는데 무슨 뾰족한 증거가 더 필요합니까? 나그네 같이 살 수밖에 없는 그 삶 자체가 하나님의 유업이므로 나그네같이 살 일이 많을수록 그분이 함께 한다는 증거이지 않습니까?

 

제가 말장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므로 정말로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지 물으러 온 부자 청년관원에게, 알다시피 율법을 아주 모범적으로 잘 지킨 의인이었는데도,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했지 않습니까? 무소유의 거지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돈 중에 하나만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라는 뜻입니다.

 

당신을 따라다니는 제자들에게는 더 직접적이고 극단적인 요구를 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12:24,25) 한마디로 당신을 위해서 죽으라는 뜻입니다.

 

제자들더러 실제로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나그네 같이 살라고 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그렇게 사는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땅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 땅의 삶이 한 번뿐이고 아주 짧기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주인으로 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그분께 순종하여서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멀리한 자는 아무리 세상에서 최고의 사치와 풍요를 누려도 헛되고 헛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최고 차원의 인생을 키워나가면 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영광까지 기꺼이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천국 문에 붙은 명패

 

지금 야곱이 꿈에서 깨어나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했지만 현실적으로 달라진 것은 단 하나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점은 다시 확인했지만 영적인 통찰력이 갑자기 업그레이드 된 것도 아닙니다. 앞으로 닥칠 모든 고난을 인내하고 이겨낼 수 있는 딱 한 가지 근거 내지 소망만 생겼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그마저 언제가 될지 전혀 모릅니다. 어쨌든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것 하나만 확실해졌습니다.

 

야곱이야말로 정작 우리가 본 받야만 할 믿음의 표본이라고 말씀드린 까닭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백 년 뒤에나 실현될 여호와의 언약에 동참하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그의 현실적 장자권은 나그네같이 살아가는 것뿐이었고 실제로 그런 인생을 감수했습니다.

 

하나님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신자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아무리 신앙연륜이 오래 되어도 현실적 어려움에 빠지면 그마저 잊을 수 있는 너무나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때마다 시냇물을 찾는 사슴처럼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아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의 얼굴을 보고나면 이 땅을 나그네로 기꺼이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러다 다시 넘어지면 다시 그분을 찾아서 힘을 얻는 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데 지치지 않고 그러는 것이 믿음의 실체입니다. 단번에 화끈하게 해결 받아서 평생 평안이 지속되는 법은 없습니다.

 

신약시대 신자에겐 천사가 꿈에 나타나 가시적으로 위로하는 것보다 나그네로 살아갈 수 있는 더 확실한 근거 하나를 이미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고 부활하심으로 영생의 영광이 언제인지는 몰라도 확실하게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실제로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고비를 여러 번 이길 수 있었던 유일한 근거요 힘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1-14) 야곱도 지금 부모가 계신 바알세바를 떠나서 외삼촌 라반이 있는 밧단하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천국여정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 문에 붙은 명패는 하나뿐입니다. 이 땅을 하나님의 나그네가 되어서 살았던 자들의 출입문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의 명예의 전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도 야곱과 바울이 먼저 걸어갔던 그 길로 걸어오기를 바라며 바로 그 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6/7/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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