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왜 죄인과 교제를 했습니까?

조회 수 914 추천 수 4 2014.03.25 17:52:45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왜 죄인과 교제를 했습니까?


[질문]


하나님이 죄인과 교제를 하십니까?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과 같이 식사 교제를 하고 심지어 그들의 집에서 유숙합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우상숭배와 도덕적 죄를 범했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를 역겹다고 하시고 그들에게 심판과 징계를 선포하십니다.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출33:3)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1:15-17)

따라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필수조건은 그들 가운데 있는 우상을 제거하고 죄에서 돌이켜 선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전에는 그들의 기도조차 듣지 않으시고 제사도 받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비교해서 예수님이 죄인들과 교제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죄인들과 교제했다면 하나님이 불신자와 교제를 한 것이 되는데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이 하나님은 과연 어느 정도의 교제가 가능할까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이런 의아심이 들게 된 까닭은 예수님이 세리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머물겠다는 기록 때문입니다. 주님이 삭개오의 집에 머물 때에 회개가 바로 일어났지만 주님이 그의 집에 머무르겠다고 말할 때까지는 그가 아직 불신자 즉, 죄인의 상태였지 않습니까? 죄인들과 교제하고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짐작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과 교제를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아니면 그런 교제는 예수님이셨기 때문에 가능했는가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죄와 공존할 수 없음을 압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온 중보자였기에 죄인들과 먹고 마시며 교제할 실 수 있었나요?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대화하고 교제할 수 없으니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내 회개하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의 인간 대리자 즉 구약의 선지자 같은 역할을 예수님이 대신 하신 것입니까?

[답변]

일반 신자들이 미처 생각지 못하는 측면을 지적해주셨습니다. 질문자께선 체계적으로 조금 정리가 덜 되어 있다 뿐이지 정답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 제사장, 왕의 세 역할을 다 감당하러 오신 신-인간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시기에 죄인과의 교제를 넘어서 대속적 구원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지금도 그러하지만,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죄인이었습니다. 단 한 명의 예외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소지하고 나름대로 성실히 준행하는 유대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로마서1:18-3:18 참조) 그런 상황에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 자체가 그분이 인간과의 교제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그 교제가 가능토록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 질문의 답변을 바르게 정리하려면 하나님이 인간과 교제한다는 의미부터 정확히 아셔야 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의 회복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지으시고 심히 기뻐했습니다. 당신을 대리하여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리라는 소명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피조물과는 달리 당신과 교통이 가능한 하나님의 영을 따로 받았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인간과 교제하려고 인간을 지은 셈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그분과 인간과의 교제는 반드시 하나님을 찬송하는 교제여야 합니다. 그분께 순전하고도 온전한 감사와 경배와 찬양과 사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실제 삶에서 자기를 산 제사로 바치며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 참 교제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으로 죄가 들어옴으로써 어떤 인간도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가 불가능해졌습니다. 타락에 따른 부끄러움과 죄책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의 자리에서 아예 밀어내었기에 인간 스스로는 자기 죄를 씻지 못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 진정한 찬양을 올려드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죄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로 회복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7-12)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값없는 구원을 주시는 까닭은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당신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이 타락하여 참 찬송을 못하게 되자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교제의 단절 절교를 선언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먹으면 죄에 타락된 상태로 영생하게 되고 그러면 구원의 기회가 영영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구원을 해주려고 때가 될 때까지 잠시 타락에 대한 형벌을 받도록 조처한 것뿐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쪽에서 인간과의 참된 교제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피해 숨기 바빴고 심지어 하나님께 타락의 모든 책임을 돌렸습니다.(창3:8-13) 그런데도 하나님은 형벌을 내리기(창3:16-19) 이전에 “여자의 후손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창3:15)이라는 구원의 약속부터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낙원에서 아담과 이브를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땅으로 내보내면서도 그 구원의 첫 단계로 인간이 만든 무화과 잎 치마를 벗기고 짐승을 직접 잡아 가죽 옷을 입혀주었습니다.(창3:21)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

물론 하나님은 분명히 소멸하는 불로 죄와는 절대로 공존하지 못합니다. 어떤 죄인도 그분 앞에 바로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체, 실체를 대면하는 순간 소멸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죄로 더럽고 추해진 인간임에도 너무나 사랑하시어 하나님은 교제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생생한 예가 바로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뵈올 때에 그는 분명히 큰 죄인이었습니다. 비록 이방족속이 동족을 학대했기 때문이긴 해도 엄연한 살인자였고, 또 정식 재판을 받지 않고 도주한 탈주범이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지만 즉, 현대의 세속법으로 공소시효가 지난 셈이지만,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 앞에 도무지 설 수 없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먼저 찾아와 만나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그 죄인의 상태로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 내는 거룩한 소명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먼저 정결케 하는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출3:5) 호렙산 기슭은 척박한 땅입니다. 외양으로는 결코 아름답지 않지만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에 거룩한 곳이 됩니다. 또 죄인인 모세의 신발을 벗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으로 그를 덧입히는 절차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노예 살이 하는 당신의 택한 백성을 구출할 뿐 아니라 그들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설립케 할 참이었습니다. 그 공동체를 거룩하게 유지시킬 율법도 그를 통해 반포하실 것입니다. 그는 율법의 정결례를 백성들에게 교육하고 시행할 자였기에 그부터 하나님이 과거의 죄와 죄책에서 깨끗케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에서 속죄제를 최고로 강조했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죄 짓게 마련이지만, 진정한 회개를 하면 그 죄인과 교제를 끊지 않고 다시 화목한 관계를 이어가시겠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모세를 두고 하나님은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한다.”(민12:8)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뵙지는 못했습니다. 구름이나 연기가 빽빽하게 둘러싸인 가운데 음성으로만 들었습니다. 그의 얼굴에 반사된 하나님의 간접적인 영광도 백성들이 눈이 부시어 볼 수 없기에 수건으로 가릴 정도였습니다.(출34:29-35) 모세 본인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길 소원했지만 그를 반석 틈에 숨게 하고 당신의 영광을 얼굴이 아니라 등만 겨우 보여주었을 뿐입니다.(출33:18-23)  

하나님이 아무리 죄와 공존할 수 없지만 구약시대에도 참된 교제를 회복하려고 당신께서 주도적으로 인간을 만나주시고 십자가 구원의 과정을 이끄셨습니다. 죄에 찌든 인간이 하나님 본체를 직접 보면 소멸 당할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은 천사 혹은 떨기나무 같은 매개체를 통해서 인간을 만나시고 당신의 뜻을 계시해주셨던 것입니다.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는 하나님

죄인과 계속 관계를 이어가며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질문자께서 인용한 구절들에도 사실상 나타나있습니다. 먼저 출애굽기 33:2절과 3절 초반에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사자를 먼저 보내어 모든 가나안 족속을 쫓아낸 후에 반드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교제를 끊고 진멸할 작정이면 왜 그런 약속을 했겠습니까? 중도에서 진멸할까 함께 가지 않겠다는 것도 당신의 백성들의 타락상을 애통해하고 참된 회개로 이끌려는 간절한 심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죄인은 마땅히 죽여야 하는데도 혹시라도 죽일까봐 염려한다고 말했습니다. 역으로 따지면 오히려 하나님이 그만큼 죄인을 사랑한다는 뜻 아닙니까?  

이사야서에선 백성들의 손에 피가 가득해서 기도와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곧바로 이어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주홍, 진홍 모두 가장 붉은 색입니다. 어떤 최악의 죄도 하나님이 깨끗케 하얗게 해준다고 합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8-14)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그 죄책에 따라 처치하시면 이 땅에 살아남을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 죄과를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즉, 절대로 동과 서는 만날 수 없는 것 같이, 던지고 기억지도 않기에 구원은 물론 생존 자체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 까닭은 우리의 체질이 진토이며, 무엇보다 원죄의 타락 하에 태어났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 바로 그 최초의 타락 때에 이미 여자의 후손으로 구원해줄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약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대한 상징과 예표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모세가 본 떨기나무 불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3:2) 분명히 불과 함께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나무가 타지 않았습니다.

이는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접촉해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상징합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왔기 때문에 그분과 직접 교제해도 죽지 않고 오히려 죄에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과 교제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목적,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뜻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왜 우리 죄를 검다고 표현하지 않고 주홍과 진홍처럼 붉다고 말했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며 하나님께 죽음으로만, 다른 말로 주홍같이 붉은 피를 흘려야만 갚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붉은 죄가 어떻게 희게 됩니까? 오직 예수님이 당신의 피로 그 죄 값 을 갚았기 때문입니다. 사망으로만 갚을 수 있는 죄과를 당신의 죽음으로 가름한 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 아담에게 주신 여자 후손의 구원약속(창3:15)이 하나님의 때가 차매 예수님의 골고다 십자가 복음으로 달성된 것입니다.

성육신해야만 하는 이유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까닭은 여럿이지만 가장 중요한 몇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우선 말씀드린 대로 인간을 대속할 완전한 제물로 바쳐지기 위한 것입니다. 동물의 피로 드리는 속죄제는 매번 드려야 했고 예수님의 십자가 제물을 예표할 뿐이었습니다. 완전한 제물은 반드시 전혀 흠이 없으되 인간을 대신하여 인간의 죄 값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인간인 예수님 외에는 인간의 완전한 속죄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7:24-27)

거기다 예수님 오시기 전의 인간의 상태는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깨닫는 자도, 진심으로 찾는 자도 없었는데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롬3:10-18) 이방족속은 하나님을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택한 백성인데다 이미 율법을 소유했기에 자동으로 구원 받는다고 착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세상 쾌락과 흑암의 죄악이 주는 재미에 빠져 참 빛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으로선 비록 모두가 죄에 젖어있지만 인간들을 향한 당신의 온전한 뜻을 온전히 드러내어야 했습니다. 또 당신이 어떤 분인지 사람들로 분명히 보여 알게 해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어떤 인간도 하나님 본체를 보면 소멸될 수밖에 없기에 당신을 완전한 모습으로 보여주되 인간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죄인과 교제를 이어가길, 정확히 말해 인간과 참된 교제로 회복하기 원하는 당신의 뜻을 알게 해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빠진 인간들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심을 직접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서 가장 소외되고 비천한 자들인 과부, 고아, 창기, 세리, 죄인, 불치병자, 심지어 귀신들린 자들을 찾아가 당신의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교제를 나눈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

불신자와의 교제    

죄에서 구원은 하나님과의 찬된 교제로의 회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참된 교제는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자만이 성령 안에서 그분께 진정으로 감사, 경배, 찬양, 헌신할 때에  가능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삭개오가 회개하기 전에, 혹은 가나 혼인 잔치에서 구원을 개별적으로 베풀기 전에 먹고 마셨던 교제는 참된 교제(fellowship)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들을 구원키 위한 복음으로의 초대(invitation)와 주권적 간섭에 해당됩니다.

질문의 요지는 죄와 공존 못하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죄인과 먹고 마시는 교제를 행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숨은 의미는 흥청망청 놀면서 친교만 나누는 것 같으니까 예수님에게 부적합하다고 느낀 것입니다. 실제로 바리새인이 그런 점을 트집 잡았습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11;19) 그들은 예수님을 종교적 잣대, 그것도 자기들이 정한 규정으로만 판단하고 술주정뱅이이자 상종 못할 자들과 교제한다고 비난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옳다함을 얻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런 인간의 이성적 판단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 묻자 주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답했습니다. 율법을 문자적 종교적인 중요도를 비교하여 따지기 이전에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종교적 의식의 준행보다 몸으로 불쌍한 이웃을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회에서 소외된 불쌍한 자들과 교제하는 것이 바로 그런 사랑의 실천으로 율법을 더 온전히 지키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교제했던 “죄인”의 의미가 살인자나 간음한 자 같은 중죄인을 뜻하지 않습니다. 모세의 율법(구약의 모세오경)을 위반했다면 그 율법대로 처리하면 되었습니다. 예컨대 살인과 간음은 사형을 당하고 나머지 죄들은 속죄제를 드리면 어쨌든 죄에서 깨끗해지기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죄인이라고 트집 잡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럼 죄인은 누가 됩니까? 모세 율법을 어겼어도 미처 잊어버려서 혹은 가난해서 속죄제를 드리지 못한 자입니까? 아닙니다. 잊은 자는 나중에 속죄제를 드리면 됩니다. 또 가난한 자는 비둘기 제물로 혹은 곡식의 소제로 드리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이 모세율법은 문자적 형식적으로라도 엄격히 지켰기에 모세율법 상의 죄인은 사실상 거의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바리새인들이 정한 세부적 규정과 전통을 위반하면 죄인이라고 매도하여 상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컨대 이방인과 교제하지 말라, 식사 전에 손을 씻으라는 규정을 위반하면 유대인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마저 그런 규정을 들고서 계속 시비를 걸어왔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런 자들은 전혀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만든 제도, 관습, 규정, 특별히 형식적 종교의 멍에를 맨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중심은 보지 않고 외모만으로 판단하는 인간의 죄악이 만들어낸 희생자였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가진 것으로 서로 자기가 더 잘났다고 다투는 가운데, 아예 구조적 이유로 갖지 못한 자들이 억울하게 천대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8,29)고 말한 것입니다. 벗어야 할 멍에가 현실의 고난과 문제가 절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멍에를 벗겨주겠다는 약속만 하면 되지 당신의 멍에를 다시 지라고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 멍에는 일차적으로는 사탄이 지운 죄의 멍에도 해당되지만, 유대 장로들이 만든 종교적 멍에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 벗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뜻대로 율법 대신에 복음으로 죄인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르자.  

오늘날의 신자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까닭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본체로서 왔다면 그 분 앞에 일초라도 바로 서있을 자는 모든 세대 모든 인간 가운데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죄 중에 빠진 인간을, 그 중에서도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어 교제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3) 죄인을 구원하려면 죄인을 만나 천국복음을 전하고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음에도 인간과 교제하신 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롬5:8)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의 죄인과의 교제를 트집 잡은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긍휼은 원하지 않고 종교적 제사만 드리기에 바빴고, 무엇보다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교만이 앞섰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유숙하는 동안에 그의 참된 회개가 일어났듯이 죄인과의 교제는  구원으로 이끌려는 성령의 역사요 간섭입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요3:5)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롬8:7) 때문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래서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깨달아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로 회복케 해줄 진리의 영,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만난 모든 이들은 만남 당시까지 모두가 죄인이었습니다. 열두 제자들도 구원으로 예정되어 택함은 받았을지라도 아직 구원 받기 이전이었습니다. 성령의 거듭남은 오순절 이후에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과의 교제는 성령 안에서의 참된 교제가 아니라 구원으로의 초대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먹고 마시며 사이좋게 지내는 친교만 나누려 했을 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바울의 권면대로 우리도 그는 물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토색하는 자(삭개오 같은 경우)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이방인)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5:10) 율법에 흠이 없다고 자랑할 정도의 율법 전문가인 바울이 지금 장로들의 유 전을 전면 부정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흉악해도 심지어 음행하거나 이단에 빠진 죄인들과도 신자는 교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친교만 나눠선 안 됩니다.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실 수는 없습니다.(고전10:21)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고전9:22,23)이라는 바울의 고백에 동참해야 합니다. 오직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교제 즉, 복음으로의 초대는 정말로 때를 얻든 못 얻든 신실히 행해야 합니다.

복음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죄인과 교제한다고 트집 잡았던 것 같은 율법주의(legalism)나 도덕주의(moralism)가 결코 아닙니다. 그런 것과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를 아우르며 뛰어넘는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다함없는 사랑이며 동시에 죄에 대한 무시무시한 저주입니다. 예수님이 죄인과 교제한 것도 복음으로 초대하기 위해 하나님의 지혜를 행함으로 보인 것입니다.

2/18/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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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하나님은 예수님을 왜 버리셨는가? master 2017-04-28 735
98 너무나 고귀하고 하나뿐인 이름 예수 master 2017-03-25 411
97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 모세. master 2017-03-10 528
96 새해 결심을 성취하려면? master 2017-01-17 27
95 미처 몰랐던 성탄절의 의미 master 2017-01-17 1817
94 예수님을 왜 사도라고 지칭하는가요? master 2017-01-17 31
93 공생애 이전의 예수님의 삶은? master 2016-10-22 678
92 예수님이 세상에 온 목적은? [1] master 2016-05-04 603
91 주님의 고난에 참으로 동참하고 있는가? master 2016-04-26 233
90 은과 금이 없는 교회 master 2015-09-28 81
89 적극적 믿음을 강조하는 내용이 아니다. 운영자 2015-01-01 65
88 예수님은 이 땅에서도 무소부재 전지전능하셨는지요? 운영자 2014-07-07 604
»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왜 죄인과 교제를 했습니까? 운영자 2014-03-25 914
86 Disturbed or Overjoyed? 운영자 2013-02-14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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