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15-17) 죄가 다르니 구원도 다르다.
인간 타락 담화 (4)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5-17)
두 종류의 구원 방안
십자가의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는 것은 다른 모든 종교와 구원의 출발과 과정과 방향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종교끼리 가르치는 내용의 우열을 비교 판결해서 최고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구원을 주기로 기뻐하여 택한 사람에게 살아있을 때에 성령이 간섭하여서 거듭나는 체험을 통해 구원해주십니다. 반면에 다른 모든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여서 선행이든 치성이든 신에게 바쳐서 죽은 후에 합격 점수를 얻어야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구원과 심판은 인간의 죄를 묻는 하나님만의 절대적이고도 궁극적인 절차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말하는 죄의 본질부터 다른 종교와 전혀 다릅니다. 당연히 죄에서 용서받는 방법도 달라지기에 전혀 다른 구원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죄의 본질이 다르면 그 후 경과가 어떻게 되는지 비유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자식이 성적이 계속 떨어지자 부모가 문제의 본질을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 해결방법은 가정교사를 붙이거나, 사설학원에 보내거나, 스마트폰 보는 시간을 줄이거나, 성적이 오르면 자식이 원하는 것을 사주겠다고 약속하는 것 등이 될 수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게하려면 어떤 방법이 좋을지 비교 판단 결정해야 합니다. 그 중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어쨌든 성적은 조금씩 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자식이 학교공부를 할 생각이 전혀 없어서 성적이 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제 속마음은 연예인이 되고 싶은데도 집안 형편이나 부모가 자기에게 거는 기대 때문에 말도 꺼내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다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만약 부모와 자식 간에 사이가 좋지 않고 대화가 단절되어 있으면 부모는 자식의 문제가 무엇인지 끝까지 전혀 알지 못하고 계속해서 공부를 잘하게 하는 방법만 강구할 것입니다.
반면에 평소 사이가 좋으면 자식은 자기 본심을 털어놓고 부모도 이해해주면서 그 자질에 맞는 연예인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해줍니다. 이 두 경우는 문제의 본질을 전혀 다르게 판단했기에 그 해결책도 다르고 결과 또한 당연히 달라집니다. 자기 소원을 성취하여 만족한 삶을 살든지, 공부만 강요당해 평범한 직장인으로 인생을 마칠 것입니다.
비유가 인생의 만족과 불만족으로 나눠졌다고 해서 다시 우열을 나눈다고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강조하려는 내용은 문제의 본질이 다르면 해결책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첫째 경우는 자식의 문제를 겉으로 드러난 현상으로만 판단했고 둘째 경우는 그 현상을 일으킨 진짜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파고든 것입니다.
이처럼 다른 모든 종교는 죄의 결과적 현상만 따진 후에 인간이 스스로 배워서 고쳐나가는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하나님이 죄의 근원부터 고쳐주는 구원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이 친밀했던 둘째 경우처럼 하나님과 신자는 서로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고 그렇게 하도록 성경에 당신에 대해서 자세히 계시해주었습니다. 또 그것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님을 내주시켜서 조명해줍니다.
두 종류의 죄의 본질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죄의 본질을 말이나 행동으로 범하는 잘못이라고만 이해합니다. 불효 살인 간음 폭행 도둑 거짓증거 등의 죄들인데 기독교 십계명으로 따지면 인간관계에서 잘못한 죄들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인간이 신에게 용서 받으려면 당연히 그런 죄들을 짓지 않아야 합니다. 죄를 짓고 안 짓고는 인간에게 달렸기에 인간이 선행을 많이 하면 구원 얻는다는 행위 구원이 됩니다.
또 그런 죄들은 인간 외부의 여러 잘못된 여건들에 영향을 받아서 발생한다고 믿으니까 그 구체적인 해결책도 각기 달라집니다. 가장먼저 현실 삶을 편리하고 안락하게 해주는 돈을 탐하다가 서로 다투게 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물질에 대한 욕심을 최대한 줄이는 금욕주의를 실현하거나 아예 물질을 배제하고 무소유를 실천하라고 가르칩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사회 체계나 경제 질서가 재물을 소유한 자본가들의 이익만 우선시 하고 노동자 농민 같은 무산계급들을 착취하여서 온갖 문제가 발생한다고 분석합니다. 그래서 공평한 분배를 통해 사회공의를 바로 세우면 인간의 죄도 해결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이나 종교가 생깁니다. 나아가 남녀불평등이 문제의 초점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인간관계의 모든 영역에서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는 것이 해결책이 됩니다.
인간이 행동으로 범하는 잘못이 죄의 본질이라고 보는 종교로선 구원의 길은 그 발생요인들을 제거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따르면 부모가 여러 방법을 사용해 자식의 성적을 올리듯이 분명히 행동의 죄들을 줄이고 어느 정도 선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구원의 길에 윤리적 종교적 하자가 전혀 없다고 믿게 됩니다. 당연히 종교마다 구원의 길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그 진리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상대적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은 죄의 원인을 판단하는 데서부터 결정적인 오류가 개입되었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든다고 믿는 인간 외부의 모순 왜곡 파괴된 여건 자체부터 이미 인간의 죄가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처음부터 있었던 현상이거나 인간의 죄와는 아무 관계없는 양 여기고 눈에 보이는 죄의 이차적인 폐해만 해결하려고 합니다. 돈은 인간이 만든 것이며 돈에 대한 욕심도 인간이 갖게 된 것입니다. 사회적 신분 위치 권리나 남녀성별에 따라서 차별하는 것도 인간의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입학시험에 떨어졌는데 평소에 공부하지 않는 것은 전혀 문제 삼지 않고 근처 공사장 소음 때문에 시험을 망쳤다고 불평하는 셈입니다.
죄의 본질에 대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명료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15:17-20)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는 것을 보고 장로들의 유전을 범한다고 즉, 죄를 지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지적과 정죄부터 잘못되었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손을 씻지 않고 먹어도 결국 소화되어서 몸 밖으로 배출하므로 사람을 더럽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들은 모두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이므로 오히려 신체를 건강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전부 악한 생각이고 그 생각에서 여러 악한 죄들을 짓는다고 말했습니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제정한 인간관계에 관한 윤리적 규정이나 성전 제사에 관한 종교적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당연히 선한 일입니다. 손을 씻고 밥을 먹는 것은 분명 위생상 건강에 좋고 음식을 주신 하나님 앞에 정결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었다고 해서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신앙적으로 문제의 본질이 아닌 그런 지엽적인 행동 하나를 꼬투리 삼아서 다른 이를 차별 정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교에선 행동으로 지은 죄가 죄의 본질이라고 간주한 반면에 예수님은 사람이 본질적으로 죄인이므로 필연적인 결과로 행동의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니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지으시고 통치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이 이미 죄인이 되어 있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상처주고 파괴하는 것들은 분명 인간사회의 큰 폐해가 되지만 인간 자체가 죄로 차있기에 그런 죄들을 금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범죄자들을 벌주고 갱생시키는 교도소들이 아무리 많아도 인간 사회가 절대 맑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타락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죄의 본질을 당시까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인식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나면서부터 도무지 가망이 없는 죄의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가르침일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성경 외에는 어떤 종교도 가르치지 않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전도할 때에 당신은 죽어 마땅한 천하의 죄인이므로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으라고 하면 나는 절대로 그런 죄인이 아닐 뿐 아니라 기독교의 황당한 교리를 함부로 강요하지 말라고 모두 다 크게 반발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절대적 죄
불신자들도 잘 알고 있는 선악과 금령은 인간이 반드시 건짐을 받아야 할 죄의 본질에 대해서 정확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또 그래서 왜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인지도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말씀을 기독교 특유의 신화나 전설로 치부합니다. 하나님이 과일 하나 따먹었다고, 그것도 당신이 만들어서 인간의 눈앞에 두어서 따먹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해놓고 지옥 갈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반발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성경부터 인정하지 않으니까 그들로선 당연한 반응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아예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으면 타락도 없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꽤 많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이 말씀이 계시하는 중요한 의미들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구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동산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고서(9절) 최초 인간더러 그 실과는 절대 먹지 말라고 명하면서 만약 먹으면 ‘진짜로’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17절) 그런데도 아담이 그 과일을 따먹음으로써 그 후손들이 정녕 죽게 되었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입니다.
이는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전혀 성립되지 않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바로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도 그것을 어겼으니까 하나님에 대한 죄가 됩니다.
바꿔 말해 죄의 본질이 이웃과 사회에 여러 폐해를 끼치는 행동으로 지은 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전에 인간이 의도적 능동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뚤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역으로 한 번 따져보십시오. 인간사회 윤리로는 남편과 아내가 과일을 따서 서로 나눠먹는 것은 전혀 죄가 아니라 칭찬 받아야 할 선행입니다. 하나님과 성경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로선 선악과는 기독교만의 황당한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하나님이 계시고 그 분이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기에 그분에게 절대적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을 불복종했다는 차원으로만 접근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더러 이 땅을 당신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리라는 첫째 명령이 싫어서 그분을 자기 마음에서 지워버린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을 다스리겠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당연히 그 나무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야할 대상이니까 그분의 뜻대로 실과를 따먹지 말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한 근본목적부터 내팽개친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쳐버리고 자기가 이 땅의 주인이자 통치자가 되어보려 했으나 사실은 스스로 자기를 이 땅에 내팽개쳐진 존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신자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서 그대로 따르게 하는 것만이 목적이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 대적하여서 진노의 자녀가 되었다는 교리는 없습니다. 선행을 해서 신의 구원에 누락되지 않는 것이 신앙목표이고 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자신하니까 그런 인식이 아예 생기지도 않습니다.
인간사회 최고의 선은 전쟁이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을 두고 정죄는커녕 아예 문제 삼지도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데다 창조주는 아예 없고 인간은 우연히 물질에서 장구한 세월을 거쳐서 진화된 물질적 존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크든 작든 공동체의 유익을 해치지 않고 이웃에게 직접 피해만 주지 않으면 선이 됩니다. 실제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사회 최고의 선은 나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이며 최고의 악은 나라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나라라는 공동체가 가장 크고 나머지 모든 인간 공동체들은 나라가 굳건히 서야만 존속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교에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임금 스승 부모를 똑같이 존경하라고 가르칩니다. 임금은 개인과 모든 공동체들의 존속을, 스승은 자기 인격적 존재의 성장을, 부모는 자신의 육신이 성인이 될 때까지 책임져주는 존재입니다. 결국 그런 순서대로 중요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도하는 미국 CNN의 아침 방송에서 이런 뉴스를 하나 들었습니다. 외국에 체류하면서 SNS를 통해 전쟁소식을 전하며 러시아가 악을 범하고 있다고 반전운동을 벌리고 있는 아들에게 러시아의 어머니가 매국노 반역자라고 야단쳤습니다. 그런 아들을 둔 것이 너무 부끄럽고 앞으로 아들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조국으로 돌아올 생각도 말라고 저주하다시피 말하는 것을 미국기자가 인터뷰한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러시아 국내에 살다보니까 정부당국의 잘못된 정보에 속아 넘어간 면도 있지만 어쨌든 근본적으로 애국이 최고의 선이며 그러지 못하면 최고의 악이라는 관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 공동체의 갈등과 나라 간의 다툼에서 한 쪽의 영웅은 다른 쪽의 원수가 됩니다. 예컨대 이등박문은 한국에선 원수이나 일본에선 영웅입니다. 반면에 안중근 의사는 한국에선 영웅이나 일본에선 원수입니다. 물론 일본이 먼저 침공했고 우크라이나 전쟁도 러시아가 먼저 침략했기에 그들에게 근본적인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나 갓 20대가 된 러시아 청년 군인들도 너무나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고귀한 한 인생이 인간들과 독재자의 야망, 아니 헛된 망상에 소모품으로 희생되어도 된다는 법은 인간사회는 몰라도 하나님의 뜻 안에선 절대로 없습니다.
그렇지만 드넓은 만주 땅을 정벌해 국토를 크게 확장한 광개토대왕은 한국인에겐 지금도 가장 바람직한 왕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 당시의 국경을 그대로 유지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결국 일본과 러시아만 탓할 문제가 아니며 한국도 힘만 있고 국제정세가 무르익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사회의 최고의 선인 애국심이 최고 절정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우리 모두 생생히 목격하듯이 인간이 범해선 안 되는 최고 사악한 죄들의 집합체입니다. 인류 역사상 애국심의 최고봉은 독일 나치제국일 것입니다. 히틀러가 애국심을 고취시키려고 행한 일 중의 하나는 성경을 모아 불태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인간끼리 최고의 선을 실현한 궁극적인 결말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육백만 유대인을 독가스로 학살한 것입니다.
기독교가 죄의 본질이 하나님을 배척한 것이라고 정의하는 이유를 정말로 심각하게 받아 들여야 하는 생생한 근거입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장소의 인간 공동체들이 상대적 일시적 부분적 때로는 사악한 윤리를 갖게 된 근본적인 까닭은 절대적 진리이신 하나님을 멀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인간사회 최고의 선인 애국심이 최고의 악도 될 수 있다는 간단한 진리조차 아무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나면서 죄악의 덩어리라고 해서 매번 흉악한 죄를 짓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 내면에 죄로만 가득 차있어서 이런 간단한 하나님의 진리조차 들어설 틈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이 죄의 본질이면 구원은 하나님을 다시 가까이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대로 모든 인간은 이미 본성적으로 죄의 덩어리가 되어 있기에 스스로는 그런 화목이 도무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방법을 가르쳐 주는 스승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밤중에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가르쳐주었듯이 완악하고 견고한 인간 내면에 하나님이 직접 제2의 창조를 일으켜주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또 그래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고 선포했습니다. 영생 즉 구원을 얻는 길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일한 하나님이 유일한 아들을 십자가 대속 제물로 보내었으니 당연히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으로 알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지 말라는 차원을 넘어서 당신을 마음에서부터 절대로 배제 하지 말라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가 너를 창조한 목적을 잊지 말고 그 목적대로 평생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하나님을 배척하는 순간 곧바로 이 땅의 형통에만 집착하게 되고 그럼 온갖 인간관계 죄들을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죽으면 유족들에게 어떻게 위로합니까? 이 땅보다 훨씬 더 좋은 곳에 먼저 가 계시고 우리도 곧 따라가서 큰 기쁨 가운데 그들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너무 모순되는 말이지 않습니까? 평소에는 하나님이 아예 없다고 믿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놓고 막상 죽을 때는 이 땅과는 비교가 안 되는 너무나 좋은 곳이 있다고 합니다. 한 번도 하나님에게 진정한 순종과 항복은커녕 인정도 하지 않다가 모두 다 좋은 곳을 간다고 말합니다. 절대자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는지 어떻게 알고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설령 단순히 하나님이 안 계시고 고통과 슬픔만 없는 중립지대라고 해도 그곳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리고 인간이 가장 겸손해져서 진심으로 기도하는 때가 언제입니까? 정말로 완악하고 철저한 무신론자가 아닌 다음에는 죽기 직전입니다. 어쨌든 자기 영혼을 절대자에게 의탁하고 싶어 하고 마음속으로 그런 기도를 합니다. 평소에 종교가 없거나 어떤 믿음을 가졌건 그 때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께 구원 받으라고 하면 대체로 순순히 동의합니다. 최소한 그런 기도를 해주겠다면 거절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평소에 형제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서 상종도 않다가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함께 모이고 장례식 기간 동안에는 서로 싸우지 말자고 합니다. 현재 자신과 형제간의 형편이 어떠하든 부모가 자기들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혜에는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존재가 이 땅에 있게 된 것이 부모라는 것입니다.
그런 형제들이 자신이 죽을 때는 먼저 가신 부모를 만날 것은 소망하지만 자기 영혼을 그 부모에게 의탁한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절대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하면서 기도합니다. 진짜 부모이자 이 땅에 자기를 있게 해준 존재가 따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심이긴 하지만 평생 그분을 배척 대적해놓고 마지막 순간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행한 그 기도가 과연 받아들여질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 구원은 인간 실존의 문제다.
물론 다른 종교들도 하나님이 있고 선행한 자를 구원한다고 믿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살펴본 대로 인간 사회 최고의 선인 애국심의 절정이 전쟁입니다. 또 전쟁으로 인해 인간사회의 최고 의인인 엄마마저 자기 자식을 저주하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판국에 누가 선인인지 악인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두가 당신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죄인일 뿐입니다. 죄송하지만 안중근도 어쨌든 살인자이며 광개토대왕은 이등박문처럼 그 수십 수백 배의 살인자입니다.
예수님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들이 아니라 인간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인간을 더럽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며 말로 형제를 바보라고 욕해도 살인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불신자들을 전도해보면 인간관계 계명을 다 지켰기에 예수 믿을 필요 없다고 반발합니다. 행동으로 지은 잘못만 죄로 여기고 또 열심히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크게 두 가지 계명을 위반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다섯째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과 열 번째 이웃의 것을 직접 훔치지는 않았어도 탐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계명은 가장 먼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합니다. 그 첫째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 나머지 모두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선악과금령을 어긴 아담과 이브와 그 후손들의 아니 지금 우리 모두의 삶의 행적이 정확히 그러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말과 생각으로 지은 죄까지 합쳐서 윤리적으로 따지면 모든 인간은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결코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구보다 더 선하고 의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죄들을 절제하고 선을 행하는 방식의 구원도 죄송하지만 도토리 키 재기로 어느 쪽이 최고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지만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궁극적이고 완전한 구원을 절대로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런 구원이 옳다고 믿는 이유는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는 남들보다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거나 최소한 평균이상이 될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작 그 삶을 들여다보면 이 땅에서 형통과 출세만 추구하지 선하게 사는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으면서 말입니다.
선악과 금령은 인간이 정말로 인간이라면 과연 인생의 출발을 어디에 둘 것이냐를 묻는 질문입니다. 자신이 과연 물질에서 우연히 진화된 존재인지 심각하게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도 선하게 살 수 있다고 큰소리치고선 나중에 죽을 때 가서 뻔뻔하게 영혼을 당신께 의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이 땅에서 생명을 유지 존속하는 것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와 목적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라도 순순히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으로 안타깝게도 평생토록 자기 멋대로 살다가 죽음이 코앞에 닥치면 어쩔 수 없이 자기 영혼을 하나님에게 의탁합니다. 그마저 솔로몬이 한탄한 대로 해 아래에서 행하는 헛되고 헛된 수고일 뿐입니다. 우리 또한 똑같이 그런 패망의 길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님이 부패한 마음에 간섭하여서 그 길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구원이 죽은 후에야 판결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천국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해준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그 후 평생토록 행할 일은 그 사랑 안에만 거하면서 무슨 일에서나 끝까지 그분을 따르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5/15/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