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천국에 입성할 조건을 갖추었는가?
마태복음강해 (#178)
http://youtu.be/Bce9n74I0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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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나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이니라.”(마18:1-4)
본심을 들킨 제자들
사람의 말이란 반드시 그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다. 평소에 갖고 있는 가치관과 성품과 기질이 묻어나오게 마련이다. 작정하고 묻는 질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 누가 큰지 물은 질문도 마찬가지다. 그 질문에 드러난 생각은 천국까지 가서도 신분과 권세와 계급의 높고 낮음을 다투겠다는 것이다.
흔히들 군대 동기의 의리가 가장 세다고 한다. 그 힘든 일을 함께 고생하며 겪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한 스승을 모시고 3년간 동고동락한 사이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가장 중점적으로 배웠다. 천국에서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기에 지상의 삶과 다르다는 것도 배웠을 것이다. 성경 기록상으로 천국에 결혼이 없다는 것은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므로 아직 못 배웠다고 치자.
예수님은 제자들 모두가 천국에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인 침례 요한보다 더 크다고 이미 말씀하셨다.(마11:11) 침례 요한이 누구인가? 광야에서 메시야의 오심을 미리 선포했고, 모든 인간들 중에 예수님이 메시아인줄 가장 먼저 알았고, 심지어 예수님께 침례를 베풀었던 자다. 나아가 헤롯 안티파스의 잘못을 꾸중하다 참수형을 당했다. 정말로 인간 중에 이만한 의인은 없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높아지길 바란다면 아예 예수님과 동격인 자리에 오르겠다는 심보이지 않는가?
문제는 그들의 관심이 정말로 천국 자리다툼에 가있었다면 아주 좋은 신앙이다. 평소 생각이 질문으로 나오니까 천국에 대한 소망을 계속 키워왔다는 뜻이다. 우리 중에 신앙의 목표를 어서 빨리 천국에 가려는 데에 두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정말로 천국을 소망한다면 이 땅의 재물, 권력, 명예 등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특별히 어떤 큰 고난을 겪더라도 그저 불안, 의심,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 휩싸여 아등바등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제자들의 진짜 관심은 사실은 이 땅에서 높은 자리 차지하는 데 있었다. 본문은 “그 때에”라고 시작하고 있다. 그 때는 어느 때인가? 베드로와 예수님이 성전세를 함께 내고난 직후였다. 그 전에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제자만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는 영광을 목도했다. 또 그 전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일련의 과정 중에 베드로가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의 유별난 총애를 받는 것 같다.
거기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 후에 비로소 유대관원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에 대해 본격적으로 가르쳤다. 제자들은 아직도 부활에 대해선 너무나 생소해 실감을 하지 못했다. 단지 스승이 이번만은 아주 비장한 각오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마지막 사역을 할 것이라는 점은 눈치 챘다. 그래서 이제 곧 새 세상으로 바뀌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같은 기사를 다룬 마가는 제자들이 노중(路中)에서 “누가 크냐”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는데 예수님이 그 내용이 무엇인지 물었으나 아무 말도 않고 잠잠했다고 한다.(막9:33-37) 자기들이 토론한 주제가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러웠다는 반증이다. 누가는 그 때 예수님이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고 기록했다.(눅9:40-48) 예수님은 항상 그러하듯이 제자들의 심중을 이미 다 꿰뚫어 보셨던 것이다. 그래서 마태의 본문 기록은 자기들의 본심이 들킨 제자들이 그 부끄러움을 면해 보고자 살짝 주제를 바꾸어 천국에서 누가 큰지 물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논리적이고도 자연스런 흐름이 될 것이다.
너무나 한심한(?) 제자들
제자들의 모습이 너무나 한심해 보이는가? 결코 아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다. 아니 그들은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훨씬 낫다. 당시는 신약성경이 없음은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도 전이다. 부활의 천국 복음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자리다툼을 했어도 모순과 왜곡과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보려고 소망은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신분, 출신, 가문, 학력, 재산 등으로 차별 받는 썩어빠진 제도와 관습을 개혁하려는 열망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안일과 형통은 뒤로 하고 가족과 재산을 포기하고 3 년간이나 묵묵히 예수님을 따랐다.
반면에 우리는 골고다 언덕이 역사적 사실이요, 그 십자가는 영원하고도 절대적 진리 됨을 이미 받아들였다. 신약성경을 소지하고 공부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뜻과 계획을 비롯해 인류의 종말이 어떻게 진행될 지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도 왜 아직도 교회 안에서 서로 높아지고, 자신의 영향력을 더 크게 하여 자기편 사람들로 만들려고 다투는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도 거의 전부가 자신과 가족의 형통과 안일을 위한 것이지 않는가?
예수님으로선 제자들의 토론 내용은 물론 그 본심을 꿰뚫어 아셨기에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분명 들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 진리의 성령이 임하기 전이었기에, 다른 말로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의 미혹에서 완전히 풀려나지 않았기에 십자가 구속의 의미를 아직은 몰라서 그럴 수밖에 없음도 잘 아셨을 것이다. 제자들이 도리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더더욱 열심히 가르쳤던 것이다.
본문의 그 한심하기 짝이 없는(?) 질문도 자상하게 대답해주셨다. 천국에선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이가 크다고 했다(4절). 높은 자리를 다른 제자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이름도 없고 전혀 생색이 나지 않는 직분을 감사함으로 맡는 겸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전에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3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의 조건 자체가 어린아이가 먼저 되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서 어린아이처럼 낮아지라는 뜻이 아니다. 천국에는 모두 어린이 같은 신자들만 들어간다는 것이다. 결국 천국에는 전부 큰 자들만 있게 된다.
제자들의 질문은 천국에도 이 세상처럼 계급이나 서열 제도가 있는지 여부를 물은 것이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그런 제도는 없다는 것이다. 계시록에 보면 천국에선 모든 성도들이 하얀 세마포를 입고 면류관을 쓰고서 천국 보좌를 향해 똑같이 거룩, 거룩, 거룩이라고 영원토록 찬양하고 있다.
물론 24 장로가 앉은 보좌는 있다(계4:4). 구약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와 신약의 열두 사도들이 앉는 자리다. 그들은 분명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서 소중한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침례 요한이나 사도 바울은 더 높은, 최소한 동등한 자리에 앉아야 하지 않겠는가? 계시록에 기록된 내용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는 없다. 교회사적으로 그들이 맡았던 특별한 직책과 위치를 상징한다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 우리와 성정이 똑 같은 인간에 불과하다. 구약시대 선조들은 솔직히 우리보다 더 큰 죄를 지었다. 또 예수님이 제자들이 천국에서 침례 요한보다 더 크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 모두가 동등한 신분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수사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구태여 의미를 붙이자면 침례 요한은 십자가 복음을 알기도 전에 천국 갔지만, 제자들은 복음을 알고 그 은혜를 이 땅에서 누리고 간 것의 차이일 뿐이다.
천국에서 모두가 동등하다고 해서 공산당처럼 일사불란하게 단결하는 집단의 모습은 결코 아니다. 변화산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모습에서 천국 영광의 일부를 보여주었듯이 신자들은 가장 먼저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변화된다. 또 하나님과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면 하여서 일대일의 친밀하고도 진정한 인격적 교제를 나누게 된다. 이 땅에서와는 달리 이해타산, 욕심, 고집, 편견, 의심, 죄악 등이 단 한 치도 개입되지 않는 참 사랑으로 그 관계를 영원토록 지속할 수 있다.
주일학교로 돌아가라.
예수님의 답변에 숨겨진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제자들이 사실은 이 땅에서 높아지려는 욕심이 있었듯이 주님의 대답도 천국이 아니라 바로 이 땅의 삶에 적용된다는 것이다. 천국은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제대로 알 수 없다. 거기다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천국의 영광은 이미 확고히 보장되어 있다.
따라서 먼저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가 되라는 뜻이다. 어떤 자리를 차지할 지 관심을 갖는 자는 천국에 입성하기에 충분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 아직도 어린이처럼 자기를 낮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서 아무리 깊은 인간의 심중이라도 꿰뚫고 들어가 역사하신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사람으로선 전혀 알 수 없다. 바로 그런 사람의 속을 찔러 쪼개어 만물을 상관하시는 자, 하나님 앞에 온전히 벌거벗기어 드러내게 하신다.
천국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것은 자기는 인간으로서 최고로 높고 영예로운 위치에 올라가기에 합당하다고 자부하는 꼴이다. 최대한 양보해도 그렇게 꿈꾸는 자다. 바로 그런 자더러 먼저 어린아이가 되라고 하셨다. 당시의 어린이는 온전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 자기 친아들마저 노예로 팔아먹던 시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어린이가 먼저 되라는 것은 최고로 높다고 자랑하는 자를 최고로 낮은 자도 아직 안 되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그런 자는 세상에서 최고로 비천한 자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제자들은 저 같은 목회자나 장로에 해당된다. 또 그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 다툰다는 것은 아직도 그 신앙이 어린이 수준도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모든 신자들이 교회에서 제자반이나 사역자반에서 성경 공부와 훈련을 받는 것도 아주 중요하지만,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그 이전에 목회자를 비롯해 모두가 주일학교로 다시 돌아가라는 뜻이다.
어린아이 같이 낮아짐이란?
그럼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어린아이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인가? 먼저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어린이가 결코 겸손하지 않다는 것이다. 간혹 내성적인 아이는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모두가 서로 빨리, 많이, 좋은 것을 차지하려고 다툴 뿐이다. 사람이 커가며 욕심이 커진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 모습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친형제들, 아니 일란성 쌍둥이들 사이에도 서로 다툰다. 부모가 자기를 더 사랑해달라고 자기 자랑하기 바쁘다. 어쩌다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그대로 울어버리는 것이 아이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낮아지라고 말씀하셨는가? 예수님은 지금 비유법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유비(類比) 기법을 사용하셨다. 서로 비슷하거나 동등한 사물과 사안을 가지고 완전히 평행으로 대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린이와 부모의 관계를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입하여 설명했던 것이다. 쉽게 말해 어린이끼리 또 제자들끼리 낮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는 부모 앞에서, 제자는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는 것이다.
제자들은 천국에서 자기들 사이에 서열이 있는 것을 물었으나, 주님은 그런 높고 낮음은 없다고 했다. 신자들더러 천국에선 침례 요한보다 크다고 했지만 아무리 따져도 어찌 그보다 클 수 있겠는가? 모든 이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기에 다 크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여 교제하는 관계에서 크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본문에서 자기를 낮춘다는 의미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낮추는 것으로 해석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부모 말이라면 무조건 믿는다. 또 그대로 따른다. 콩을 팥이라 해도 믿는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싼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놓고 갔다고 말하면 그 다음 해에 부모가 아니라 싼타가 오길 학수고대한다. 어린이들은 주로 어떤 것으로 다투는가? 자기 아버지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벌며 힘이 센지 경쟁한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아이들에게는 슈퍼맨보다 더 위대한 자가 된다. 그러다 자기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친구의 아버지보다 약하다고 여겨지면 그 싸움은 진 것이기에 그 자리에서 울어버린다.
아이들 사회에서 아이의 정체성은 오직 아버지에 의해 정해진다. 자신의 능력, 신분, 위치, 서열 모든 것이 아버지와 완전히 일치한다. 실제로도 모든 일을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한다. 조금이라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부모에게 완전히 떠넘기고 전혀 걱정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맡겼다는 사실 조차 잊고 아예 생각지도 않는다. 무서운 사람이나 사건을 만나거나 슬프고 힘든 일이 생기면 한시도 망설이지 않고 엄마의 치마폭에 숨는다. 치마 뒤로 자기 몸을 숨기는 순간 울음은 그치고 금방 방긋방긋 웃음 짓는다.
어른이 다시 모태로 들어갈 수 있는가?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아니 오늘날의 신자들 모두에게 바로 그런 믿음과 낮춤이 있는가 묻고 있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엄청나고도 심각한 질문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지 않는가? 그것도 그냥이 아니라 결단코 못 들어간다고 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의 모든 인간은 오직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존재가 되었다. 무엇이든 자기 뜻과 계획과 고집으로, 심지어 기분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하나님마저 그런 일에 도움을 주는 한에만 하나님으로 인정한다. 최소한 방해를 하지 않아야만 하나님으로서 자격이 유지 된다.
심지어 예수를 믿은 후에도 그렇다. 고난이 닥쳐 새벽기도에 열심히 뜨겁게 기도했지만 전혀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힘든 일이 자꾸 더 겹친다. 그럴 때에 하나님 이 문제는 해결 안 해줘도 되니까 제발 더 이상 힘든 일만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투정 내지 불평하지 않는가? 계속 이러시면 교회 나오는 것 즉, 하나님 믿고 따르는 것조차 재고해보겠다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신자마저 이런 판국에 인간이 스스로 어린이처럼 낮아지려 할 리가 없고, 또 낮아질 수도 없다.
본문 3절의 “돌이켜”라는 헬라 원어는 순간적, 일회적, 결정적인 방향 전환의 의미가 있다. 평생에 한 번 가치관 인생관이 완전히 전도(顚倒)되는 것을 뜻한다. 삶의 방향과 인생의 목표가 지금까지와는 정반대가 되는 것이다. 성령의 간섭으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이다.
예수님을 모르고 하나님 없이 살았던 지난 삶이 아무리 현실적으로는 형통하고 출세했어도 그만큼 처절한 실패가 없었음을 철저히 시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완전히 두 손을 들고 항복하며 전적으로 그분을 믿고 무조건 신뢰 의탁하는 것만큼 큰 은혜와 성공이 없음도 잘 알기에 그렇게 사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은 바로 그런 자를 구원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구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는다는 의미가 바로 그런 것이다. 밤중에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가 예수님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한다는 대답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는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엄마의 모태에 들어갈 수 있는지 의아해 했다. 마찬가지로 이미 어른이 된 자가 다시 어린이로 돌아갈 수는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자 은혜일뿐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심중을 찔러 쪼개듯이, 살아 운동력이 있는 십자가 복음의 진리의 말씀이 한 죄인의 영혼에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 다가가게끔 성령이 역사해야만 한다. 그래서 어린이에게 부모가 알파요 오메가로서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와 근거와 능력과 생명 자체인 것과 동일한 모습으로, 신자에게는 예수님이 자신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
그런 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또 그런 자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다. 한번 가정 내지 상상해보라. 어린이가 엄마의 치마폭에 숨듯이 모든 신자들에게 예수님만이 처음이자 끝이 된 교회를 말이다. 자기의 자기된 것이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절감하고 이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대신해서 죽은 주님만을 위해서 살고 있는 그런 신자들의 모임 말이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는 신자라면 어떤 고난에도 무조건 주님을 신뢰하고 완전히 의탁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현실 형편과 여건이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상태라도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신자들이 과연 교회에서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고 자기 영향력을 확장하려 다투겠는가? 그런 일은 아예 있을 수도 없지 않겠는가?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그랬다.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서로 통용하며 어려운 자가 있으면 먼저 찾아가 도왔다. 함께 손을 잡고 찬양하며 기꺼이 산 채로 맹수의 밥이 되었다. 본문에선 너무나 한심한 질문을 했던 제자들도 성령의 권능을 입고 복음의 진리를 깨닫자 십자가에 달려서 순교하는 본을 먼저 보였지 않는가?
그들에겐 누가 큰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따져보지도 않았다. 아니 알아보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신자가 만약 자기를 자랑하고 영향력을 높이려고 노력하거나, 아니 누가 높은지 따져보려는 의도가 있다면 믿음의 소망과 목표를 처음부터 천국에 두지 않았거나 잠시 미혹되어 세상으로 한 눈을 팔고 있는 것 둘 중 하나다.
예수님이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합당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눅9:62) 교회 안에서 혹은 성도들 사이에서 자기를 높이려 든다면 엄밀히 말해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은 것 즉, 구원까지 의심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고난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이후로 주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할 것을 본격적으로 가르치셨다. 제자들로선 뭔가 새 세상이 올 것을 기대하고 자리다툼을 한 것은 사실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스승이 정말로 죽어버린다면 어쩌나 싶어 바로 이 일이 있기 직전에도 심히 근심했었다.(마17:23)
예수님이 그들더러 어린이처럼 낮아지라고 가르친 것도 실은 당신께서 이 땅에 더 이상 안 계실 때를 대비한 것이다. 제자들이 불안하고 염려될 때의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당신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자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에 예수님의 참 빛과 하나님의 참 생명 가운데로 걸어가야 한다. 아니 걸어갈 수밖에 없으며 또 그러면 흑암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마련이다.
불신 세상의 박해를 이겨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어린이처럼 낮아지는 것이다. 바꿔 말해 강하고 큰 믿음, 굳센 의지력, 뜨겁고 열정적인 기도와 찬양 등이 우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엄마 품에 무조건 숨는 어린이부터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고 무슨 일이든 그분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여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 신자로서의 정체성 뿐 아니라 삶의 기쁨, 행복, 만족, 안전, 지혜, 평강, 안식 등 모든 선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안에서만 찾아야 어떤 극심한 핍박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는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던 흑암의 세력에 노예가 되어 있는 불신 세상으로부터 훼방을 받게 마련이다. 예수님처럼 어린이의 유비를 들자면, 걸어가는 길마다 골목마다 깡패들이 돈과 옷을 뺏고 두들겨 패려고 기다리고 있다. 그럴 때에 어린이처럼 아무 힘없이 그대로 당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했듯이 말이다.
왜냐 하면 신자는 그들과 달리 천국에 궁극적 소망을 두고 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순간 천국의 영광은 보장되어 있다. 자신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올라가 있으며,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 이 땅에서 죽더라도 예수님이 이 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처소를 이미 다 마련해 놓으셨다. 예수님처럼 영화롭게 될 것이며 침례 요한보다 더 큰 자로 영원토록 그분과 교제할 수 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저를 비롯한 우리 대부분이 사실 아직도 그런 정도로 죽음을 감수할 믿음이 되지 못한다.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며 그분의 사역을 대행할 처지가 아니다. 당장 눈앞의 현실에 묶여 내 코가 석자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럴 때의 해결책도 바로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다. 흔들림 없는 굳센 믿음이 아니라 어린이가 무조건 엄마 치마폭 뒤로 숨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그늘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다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다시는 그 맡긴 일에 대해서, 아니 맡겼다는 사실조차 생각지 않고 잊는 것이다.
물론 신자가 사람들 사이에서, 특별히 교회나 성도들 사이에 자기를 높이지 않고 자발적으로 낮은 자리를 감당하는 것은 아주 귀한 일이다.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은밀히 보신다. 그러나 사람 사이에 낮아짐이 더 귀하다는 사실은 예수를 모르는 자도 알고 있고 실천하려 노력한다.
신자의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철두철미 자기를 부인하고 낮아지는 것이다. 신자의 이 땅에서의 기쁨과 행복과 안식과 평강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자기를 깨트리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또 그것이 바로 믿음의 출발이자 핵심이자 본질이다.
이는 신자의 개인적인 문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함에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열정, 의지, 능력, 믿음으로 그분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직접 하신다. 그것도 자신을 당신 앞에 완전히 죽이어 낮추는 자를 통해서만 말이다.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권세를 이길 힘은 하나님께로만 나온다.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든 다 크다. 정말로 자신을 낮추어 자기를 통해 하나님의 일이 실현된다면 바로 그 자가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되는 것이다. 또 그런 신자가 바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는 자인 것이다.
7/28/2013
음질이 좋지 않을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분을 위해서 본문 텍스트를 바로 함께 올리곤 했는데...
지금처럼 오디오와 텍스트를 조금 시차를 두고 올림으로써
일단 오디오로 듣고 혹시라도 분명하지 않은 의미가 있다면
다시 텍스트로 확인할 수 있는 이점은 있을 것입니다. 샬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