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부(淸富)사상을 설교하지 말라.
마태복음 강해 (189)
http://youtu.be/K7Ltriyc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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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3-26)
성경과 다른 청부사상
예수님이 낙타와 바늘귀의 비유를 통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는 말씀하지 않았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고 했지 돈 자체를 악이라고 정죄하지는 않는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현실적 축복도 많이 내리셨다. 특별히 신명기 28장에선 당신께 순종하면 들어가도 나와도 복을 받는다고 약속하셨다.
그래서 크리스천도 이왕이면 부자가 되어 사회적인 지도자 위치에 올라가는 것이 좋다고 가르친다. 열심히 번 돈으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전도와 선교 같은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라는 것이다. 단, 부정이나 탈법을 행하지 말고 성실하고도 정직하게 경영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이런 주장을 청렴한 부자가 되라는 의미로 청부사상(淸富思想)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니다. 그 주장하는 내용 자체가 틀린(bad) 것은 아니나,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다(different). 대부분의 신자가 교회 문만 나서면 세상의 죄악과 타협하고 살고 있기에 정말로 100% 정직하게 사업을 경영하는 신자가 이 시대에 절실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강단에서 그렇게 하라고 강조하면 자칫 기독교의 교리로, 최소한 성경이 지지하는 사상인 줄 오해 받을 수 있기에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권면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의도는 선하고 이해할 만하다. 이 땅의 인생을 무의미하게 여기며 재물을 사악한 것으로 매도하는 영지주의적 오류를 부인하는 것이다. 또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도록 독려한다. 나아가 정말로 정직한 경영을 하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자가 선행을 많이 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도 함께 증거 되기에 전도와 선교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선 그런 선한 의도가 달성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마이너스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난다. 성경이 말하지 않고 현실에서 효력도 그리 나타나지 않는 것을 구태여 강단에서 강조할 이유는 없다. 성경이 말하는 바와 다른 것 외에도, 청부사상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몇 가지 모순 때문에 필연적으로 부작용들이 나타나는데 그중 두드러진 것 셋만 살펴보자.
세상 법을 지킨다고 의로운가?
첫째, 세상의 법이라고 해서 결코 다 선하지 않다. 최근 한국의 최대 화두가 무엇인가? “경제민주화”이다. 가진 사람들의 횡포와 전횡을 막아서 못 가진 사람들의 권익을 보호 신장하기 위해서 기존의 법들을 뜯어고치려고 논의 중이다. 불신자들마저 하자가 있어서 수정하려는 법을 잘 지켰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은 결코 아니지 않는가? 비유컨대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시행하기 전에 신자가 노예 농장을 하는 것은 분명히 합법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노예를 소유하는 것은 분명히 악한 것이다.
성경은 상전은 종들을 의와 공평으로 잘 대우해주라고 했다.(엡6:9, 골4:1) 그렇다고 신자가 현실적으로는 기존 체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살 수밖에 없다고 변명할 계제는 아니다. 그런 말씀들은 당시의 인간사회의 악한 상황을 감안한 일시적 유보적 계명일 뿐이다. 하나님은 신자더러 잘못된 법 체제 안에서 안주하며 머물라고 하지 않는다.
법대로 지키는 것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성경은 악한 현실과 타협하거나 그 안에서의 차선의 방안을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평생을 투쟁하여 노예제도를 폐지시킨 영국의 윌버포스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하나님의 절대적이고도 영원하며 완전한 진리를 이 땅에 실천하라고 요구할 뿐이다. 우리 중 대부분이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해서 당연시하거나 핑계 거리가 결코 될 수 없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애통해 하며 회개해야 한다.
돈 버는 것이 일차 목표가 된다.
둘째는, 구제나 선교를 하기 위해 돈을 벌라고 가르치면 아무래도 사람들의 일차적 관심 내지 목표는 돈 버는 데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또 돈을 벌기 전에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된다. 거기다 일단 돈을 벌기 시작하면 부자 관원의 예에서 보듯이 그것을 지키고 키우려면 복잡하고 염려되는 일들이 더 많이 생기기 마련이다.
돈을 벌어야 더 효과적으로 사회를 개혁하고 전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럼 모든 신자가 다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그분이 기뻐하신다는 말이다. 그래야만 하나님 나라가 더 효율적으로 확장된다는 결론에도 이른다.
돈을 벌어 구제 선교하라고 하면 차츰 부정한 방식으로 번 돈이라도 구제나 선교 같은 의로운 일에 사용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오해하게 된다. 실제로 편법과 탈세로 돈을 벌어도 교회에 헌금과 봉사를 많이 했다는 한 가지 이유로 대접 받고 장로 같은 중직이 된다. 그 본인도 헌금 많이 하거나 선교 여행 다녀온 것으로 부정하게 돈 버느라 생겼던 죄책감 내지 양심에 찔렸던 점들을 씻는 방도로 활용하고 있다. 과연 하나님이 그런 헌금과 봉사를 기쁘게 받으시겠는가? 아니다. 창기가 번 더러운 돈으로 취급해 내칠 것이다.
물론 청부사상을 주장하는 분들이 그런 부작용을 의도하지 않았고 그렇게 가르치거나 허용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현실에선 그 반대적 결과가 나타났다면 그 사상 자체에 모순이 있으며 불완전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 자체에 모순이 있다는 것은 절대적 진리도. 온전한 선도 아니라는 것이다. 또 불완전하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라는 뜻이다.
특별히 인간의 죄의 본성이, 그 중에서도 돈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랑하고픈 욕심이 예수를 믿은 신자마저도 얼마나 끈질기며 강하게 묶고 있는지 전혀 감안하지 않은 단순하고도 어떤 면에선 유치하고도 어리석은 생각이다.
인간의 죄성을 지적하지 않는 것은 성경적 가르침이 아니다. 성경적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은 인간의 사상과 철학이라는 뜻이다. 또 인간의 사상과 철학이라면 다른 종교, 심지어 불신자들도 아는 상식에 해당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금 도덕적으로 그렇게나 타락한 한국의 불신자들마저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돕도록 법을 뜯어 고치려 하고 있지 않는가?
전도에 역효과가 나타난다.
셋째로, 돈으로 구제하고 선교했을 때에 그런 도움과 전도를 받은 불신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들이 과연 기독교와 예수님에 대해서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구제와 선교에 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강조되다 보면 기독교와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도 현실적 복락을 우선시한다고 오해 받을 소지가 많다.
예수님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강조했어도 당신께서 직접 돈으로 도와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예수님께 치유 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 중에 돌아와 감사 인사를 한 자는 한명 뿐이었듯이, 당신께 치유나 도움을 받은 자들이 다 하나님과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 중 대부분이 나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다.
부자 관원에게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는 것이 구제를 하라는 의미도 있지만, 모든 것을 다 없애고 난 후에 당신을 좇으라는 데에 더 초점이 모인다. 모든 소유를 팔고 거지가 되어야만 구원을 준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그럼에도 세상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 오히려 구원에 가깝다는 말씀임에는 틀림없다.
이 구원의 원리는 구제를 받는 가난한 불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들이 구제를 받느니 차라리 가난한 형편에 남아 있는 것이 구원 받는데 더 효과적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어른이 되어 예수 믿고 교회에 출석하는 자들의 10중 9는 고난이 계기가 되어서다.
몇 년 전 아이티에 너무나 참혹한 지진이 일어났고 지금도 그 쓰레기를 다 치우지 못한 비참한 상태다. 그런 황폐함 가운데 어떤 열매가 맺혔는지 아는가?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미국의 쾌적한 환경에 사는 우리 같으면 하루도 견디기 힘든 그런 열악한 현실에서 영적 부흥은 더 크게 일어났다. 십자가 복음의 열매가 활짝 열렸다.
바울이 유대인의 모함으로 아그립바 왕에게 재판을 받을 때에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행26:29) 죄수라는 법적인 신분과 사슬에 묶인 것 빼고는 다른 모든 것 즉, 왕이라는 직위가 없어져도 예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는 인생이 되라고 당당히 권유했지 않는가? 돈이 많아서 구제하고 전도하는 것은 믿음이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다. 또 그럴 때에 전파되는 것은 복음의 참 생명력보다는 돈의 위력이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역사적으로 청부사상이 처참하게 실패한 실례(實例)가 있다. 바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성행했던 기독교 식민주의다. 아프리카나 남미의 빈민을 구제하고 경제를 개발시켜 크리스천으로 변화시키려 시도했다. 부자 신자들이 들어가서 구제하면서 교회를 많이 세우고 선교 사역에 열심히 매진했다. 그러나 결국은 구제와 선교라는 미명하에 현지인들을 착취 수탈했다. 그 결과 안티 기독교만 성행하게 했고 지금 무슬림이 번창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헤아릴 수 없는 구원의 방식
성경은 엄숙히 선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창8:21)고 말이다. 그 본성이 철두철미 썩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재물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된 자는 거의 없다. 오죽 돈의 욕심에 묶여 죄를 범하면, “무소유의 철학”이 반성경적이고 하나님의 뜻이 아님에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심정적으로 동정하고, 심지어 기독교 교리인 양 착각하는 신자도 많다.
청부사상에 따라 처음에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돈을 벌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큰 일을 하려는데 왜 돈을 주시지 않습니까?”라는 말도 안 되는 기도를 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괜찮다. 비록 하나님께 불평을 했지만 아직 돈을 벌지 않았고 또 돈이 생기면 하나님 일을 하겠다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디까지가 자기 일이고 어디서부터 하나님의 일인지 구분을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일을 위해 돈을 달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인 양 착각하거나, 가장하고 호도하는 지경에 이른다. 인간은 그리 의롭고 영적 분별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다. 아니 만물 가운데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현실 체계 안에서 최선을 다했고 이웃 사랑의 계명도 성실하게 수행한 후에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부자관원에게 대답하신 예수님의 첫마디가 무엇이었는가?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했다. 모든 인간이 결코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구원에서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청부사상이 돈이 사회를 깨끗케 하고 전도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는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돈을 벌고 사용하는 신자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돈과 사회적 지위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아주 유용한 수단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틀림없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하나님만이 정하신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숫자만큼 많다. 앞으로 오는 모든 세대의 신자들도 포함해야 하기에 도무지 그 방식을 헤아릴 수 없다. 어떤 신자도 같은 방식으로, 같은 말씀으로 은혜 받은 자는 없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오직 그 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일대일로, 당신의 자녀로, 온전한 인격체로 대우하시고 사랑하신다. 우리보다 우리의 사정을 더 잘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태어나기 전부터 구원으로 예정하시고 구원의 전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께서 주관하신다. 하나님과 구원 받은 신자의 사이에는 두 사람만이 아는 비밀스런 구원의 방식이 있었다. 다른 어느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너무나 신비하고 풍성한 은혜의 통로를 통해 구원의 자리에 이른 것이다.
아직도 지키지 못한 계명이 남아 있다.
예수님은 신자에게 높은 자리에 오르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반대로 낮아지고 또 낮아지라고 했다. 낮아지다 못해 완전히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라고 즉, 죽으라고 당부했다. 부자관원에게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는 것도 이미 살펴본 대로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위치에까지 내려가라는 것이다. 또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는데 사실상 천국 갈 확률이 제로라고 말씀하신 셈이다. 그러니까 사람으로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다고 덧붙인 것이다.
예수님으로선 부자들을 너무나도 냉혹하게 정죄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따로 있었다. 그 관원이 계명을 다 지켰다고, 그것도 어려서부터 그랬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지키지 못한 계명이 하나 더 남았는데 그것이 바로 전 재산을 팔아 나눠주라는 것이었다.
물론 율법에 명시적으로 전 재산을 팔라는 계명은 없다. 예수님은 레위기 25장에 규정된 희년(禧年, Jubilee) 제도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매(每) 50년 마다 종을 해방시키고, 부채를 전액 탕감하며, 기업을 본 주인에게 돌려주라는 계명이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각 지파대로 사람의 명수대로 공평하게 땅을 분배한 그 상태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당시의 산업은 땅에서 나는 것이 전부였다. 인간이 생성하여 소유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것이다. 부를 이룰 자원은 물론 재물을 얻을 능(能)도 하나님이 주셨음을 깨달으라는 뜻이다. 너희는 단지 청지기일 뿐으로 창조 당시에 인류에게 처음 주신 문화명령 대로 이 땅을 하나님 대신에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리라는 것이다. 사람이 잘나서 또 사람의 힘으로 부를 이룬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50년 마다 처음에 공평하게 분배했던 그 상황에서 재출발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부와 가난을 3-4대에 이르도록 세습되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는 것이다. 희년 제도에선 재벌로 태어날 행운도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재벌이 될 수 없다. 부자 관원이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킬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거룩해서가 아니다. 그럴 수 있는 여유를 가졌기 때문인데, 예수님의 뜻은 그것이 하나님이 마련해주셨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네 부모, 네 조부모, 그전의 조상들이 이 희년 제도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세는 예수님보다 약 1,500년 전에 이 율법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그 동안에 약 30번의 희년이 시행되었어야 즉, 사회가 개혁되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 같은 빈부의 극심한 격차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구제할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일시적으로 부자와 가난한 자, 또 종이 생길 수는 있다. 그러나 부자가 정말로 청지기 의식을 철저히 가졌다면, 그래서 가진 모든 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 임시로 맡아 관리만 할 뿐이라고 온전히 믿는다면, 최소한 가지지 못한 자나 그 현실 형편의 열등함을 보고 멸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의 궁핍, 질병, 고난 등이 하나님께 저주 받기는커녕 그분의 사랑을 적게 받은 표시도 절대 아니며, 오히려 인간들의 죄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율법은 아들이 없고 딸뿐인 슬로보핫 가문을 위해 여자에게도 동등한 상속권을 부여했다 (민36장). 지금도 여성의 권리는 완전치 못한데 하나님은 무려 3,500년 전에 평등하게 보장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안다면 여자를 물건이나 성적 희롱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이혼증서를 주어 내어보내는 그런 사악한 짓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어린아이가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금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짓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온전한 안식(安息-Jubilee)
구약성경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현실적 축복을 부어주신 경우를 보아도 그 전부가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죄악을 철저히 멀리 했을 때뿐이었다. 특별히 하나님은 이스라엘 진과 함께 동거하고 동행하기에 공동체적으로 부어주신 복이었다. 죄와 공존할 수 없는 하나님이시기에 그 공동체가 성결하지 않으면 복을 주시지 않았다. 당신이 거룩하고 온전하니 이스라엘도 거룩하고 온전하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가장 자주 많이 나오며 하나님이 최고로 강조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공평과 정의다. 신약의 골로새서나 에베소서에서 상전더러 종에게 공평과 정의를 베풀라고 해서 하나님이 노예 제도를 허용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희년제도를 시행하기 전이라도 희년의 뜻대로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공평과 정의를 21세기 식의 용어로 바꾸면 바로 “경제 민주화”가 된다. 당시의 공평과 정의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과 동의어였다. 특별히 부자더러 자기가 가진 권력과 재물을 이용해 수탈 핍박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16:6) 이 시편의 찬송도 단순히 하나님이 나에게 조성해준 사람들 여건들에 대해서 감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가나안 땅을 줄로 재어서 사람의 명수대로 공평하게 분배하신 그 구역즉, 기업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희년 제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게 하여서 부자나 가난한 자의 차별 없이 서로 섬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너무 귀하고 또 그 뜻이 실제로 구현되는 공동체는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지금 그 관원에게 부자가 된 것이 본인의 잘못이라고 야단치고 정죄한 것은 아니다. 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희년제도를 지금 당장 혼자서라도 실행하라는 뜻도 아니다. 선한 이는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제대로 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부사이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서로 돕는 자로 만드셨다. 인간끼리는 절대로 시기, 미움, 저주, 분노, 분쟁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직 서로 사랑으로만 섬기라는 것이다. 혹시라도 재물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할 일이 생기게 되어도 희년 제도를 제대로 시행하라는 것이다. 부채를 탕감해주고 종을 풀어주고 땅을 다 돌려주어도, 부자 관원의 경우 재산을 다 팔아 나눠주더라도 먹고 사는 일은 오직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기에 인간끼리는 서로 사랑만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낙타와 바늘귀 비유를 통해 부자가 천국 가기가 힘들다고 했지만 부자를 멸시하거나 가난한 자를 편애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절대로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현실 체계 안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온전한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만이 인간의 만족과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재물과 권력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희년 제도 같이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오직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 그 사랑이 사람들 사이에 나눠질 때에 온전한 참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기독교적인 전도
지금 예수님은 부자는 천국조차 들어가기 즉, 구원 받기 힘들다고 했다. 그런데 청부사상은 부자가 사람들을 구원시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더 유력하다고 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물론 부자 신자들 가운데 온전한 믿음으로 정직하게 경영하는 자도 많다. 그러나 오늘날은 무한경쟁의 시대로 사람들의 기호, 유행, 풍조가 너무나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기업을 할 여건이 아주 안 좋기에 100% 법을 엄격히 지켜서 부자가 되기는 정말로 힘든 시대다. 청부사상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너무 낮다는 뜻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이 부자관원처럼 자기가 잘나서 어떤 계명도 지킬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교만한 자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자기가 부자가 되어서 구제할 수 있게 된 것이 사실은 희년제도라는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까닭인지도 모르는 그런 어리석고도 연약한 자마저 주님은 다 용서해주신다.
주님은 지금도 예수를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을 믿겠다고 큰소리치며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조차 사랑하시어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성령을 내주케 하신다. 참 빛이신 예수님을 그 속에 보배로 간직하게 하신다.
그 속에 예수님을 보배로 모시고 있으면서 주님이 자기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십자가의 진리를 온전히 깨달은 자는 자신이야 부하든 가난하든, 구태여 높은 위치에 있지 않아도 구제와 전도를 하게 된다. 희년제도 같은 율법을 몰라도, 청부사상의 설교를 듣지 않아도 스스로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주위에 드러내게 된다.
성령이 신자에게 내주한다는 뜻이 무엇인가? 예수님을 신자 속에 보배로 모시고 있다는 뜻은 무엇인가? 바로 그분의 심정, 마음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진 것으로 멸시 받는 소외 계층 뿐 아니라, 부자 관원이나 바리새인들처럼 교만하고 어리석은 자들 모두가 죄와 사탄과 사망의 세력에 묶여 있기에 한 결 같이 불쌍히 여기는 그분의 긍휼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다.
사회를 개혁하고 죄에 빠진 한 인간을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다. 또 그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만드는 성령의 역사뿐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기를 소원하여 때를 얻든 못 얻든 자신의 현실적 형편과 무관하게 복음을 전하는 신자를 통해서만 그 역사는 이뤄진다.
로마 카타콤 지하묘지 교회에는 왕족, 귀족, 노예, 이방인, 창기가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했다. 외모로 다른 이를 업신여김은 그곳에 발을 붙일 수 없었고 그렇게 업신여기는 자를 도리어 업신여겼다. 아니 불쌍히 여겼다. 모두가 예수님의 심정을 가슴에 품고 있어 그분의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슴 속에서 솟아나오는 예수님의 참 생명은 금할 길이 없기에 서로 나누고 누린 것이다. 십자가 복음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의 어떤 죄악으로도 막을 수 없다. 특별히 재물의 많고 적음에도 티끌만큼도 영향 받지 않는다.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은 너무나도 신비하고 오묘하며 풍성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기독교의 전도가 다른 종교의 그것과 가장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다른 종교의 신앙은 세상에서 재물을 많이 벌고 권력이 높아지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그렇게 출세한 사람이 포교하는 것이 가장 큰 효과를 얻는다. 그런 종교를 믿는 신자들로선 바로 그런 사람의 본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정반대다. 감옥에 있는 사형수를 불쌍히 여겨서 전도할 뿐만 아니라, 바울처럼 감옥에 갇힌 사형수가 간수를 전도할 수 있다. 정말로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는 신자가 그분을 온전히 순종하며 따라갈 때에 하나님 당신께서 놀랍고도 신비한 역사를 일으켜 주시기 때문이다. 인간으론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이다.
10/13/2013
첨언:
제가 Utah 주에서 유학생 교회를 담임하면서 앞으로 사회에 나가 지도자가 되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힘쓰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유학생 교회의 가르침이나 사역도 청부사상과 같은 맥락이라고 오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몇 마디 덧붙입니다.
근 20여 년 전에 미국에서 석사나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귀국하면 자연스레 지도적 위치나 직위를 얻게 됩니다. 그들은 또 이미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으로 왔고 저희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였던 자신의 선택이었던 간에, 이미 지도자가 되는 과정에 들어선 것입니다.
만약 한국에서 모든 학생들더러 이왕이면 미국에 유학 가서 박사 마치고 높은 직위를 얻어 월급도 많이 받고 그 돈과 위치를 이용해서 전도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라고 하면 청부사상이 됩니다. 모든 신자더러 부자나 지도자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를 더 힘차게 확장하라고 가르치는 꼴입니다.
이미 유학생이 되었고 나중에 지도자적 위치에 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하고, 또 공부 마치고 돌아가면 정말로 신자답게 거룩하게 살면서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유학생 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이 지금 세워주신 바로 그 상황과 지위에서, 부하든 가난하든 지위가 높든 낫던,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드러내어야 하는 것과 같은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관원에게 말씀하신 의미가 더 깊고 더 크심을 또 배웁니다. 율법의 그 아름다움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맘을 품은 공동체가 되기를 너무도 원하시는 부탁의 말씀인 것을, 그래서 희년제도를 명하셨고 함께 어울어져 사랑 가운데 그렇게 살아간다면 굳이 어려운 자가 따로 없어지는 더 근본적인 사랑을 가르치는 제도를 따르기를 부자관원에게 진짜 하시고 싶으셨던 말씀이였을 것임을 깨닫습니다.
지금도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맘을 품어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기를 너무나도 원하시는 주님의 맘을 부어주십사, 아직도 청부론이 좋고 고지론이 멋스러워 보일 때가 있는 신자의 자리에서 생명을 주시되 풍성히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물질이 있던 없던 율법의 아름다운 가르침에 순종하는 신자로 빚어 주십사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