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제4성전 건축에 숨겨진 비밀
마태복음강해 (223)
http://youtu.be/Sxtp-cfJ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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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24:1-2)
이 아름다운 건물이?
예수님은 23장에서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외식에 대해 일곱 번 질책한 후에 결론으로 성전이 파괴되고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했다. 제자들은 아직 그 말씀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 것 같다.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했다고 한다(1절). 단순히 믿음이 부족하여 스승을 의심했다기보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솔로몬이 BC 959에 세운 제1성전은 BC 586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함락할 때에 파괴되었다. 포로 귀환 후 BC516에 스룹바벨이 주도하여 재건한 제2성전도 BC168에 시리아의 안티오커스 장군에 의해 훼파되었다.
에돔 사람인데도 로마를 등에 업고 유대 왕이 된 헤롯대왕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스룹바벨 성전을 BC 19년부터 개축하기 시작했다. 약 10년 후에 지성소가 있는 성전 본채를 완공하여 봉헌식을 먼저 거행했다. 부속건물들은 예수님 당시에도 건축 중이었고 사후 약 30년간 공사를 더해 AD 63년 알비누스 총독 때에야 완공되었다. 개축임에도 그 규모가 엄청나 제3성전으로 불린다.
건축하는데 솔로몬 성전이 7년, 스룹바벨 성전이 5년 밖에 안 걸린데 반해 80년을 넘게 공사했으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절에서 성전 건물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한 까닭이다. 엄청나게 크고 흰 대리석을 사용했고 기둥과 건축물 상단이 황금으로 장식되어서 햇빛에 반사되면 장관이었다고 한다.
베드로가 나면서 앉은뱅이를 고쳐준 곳이 성전 미문(美門)이라고 사도행전 2장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문이라는 뜻이다. 큰 대리석들도 미석(美石)이라고 불렀다. “헤롯 성전을 보지 않았다면 아름다운 건물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속담이 생길 정도로 유대인들의 자부심을 고취시킴으로써 헤롯 대왕의 의도는 성공했다.
제자들로선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 당시의 세계 최강 로마의 협조 아래 아직도 건축 중인데 파괴된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다. 주님은 그래서 다시 미석이라 불리는 바로 그 돌들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실제로 완공 후 겨우 7년이 지난 AD 70 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지금은 헤롯 성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제2 성전을 둘러싼 서쪽 외벽의 극히 일부만 남아 있다. 유대인들이 그 벽을 붙들고 성전 파괴를 애통해하며 기도하기에 “통곡의 벽”이라고 불린다.
우연의 일치인가?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쌓아 올린 것은 아무리 크고 튼튼해도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얼마든지 다시 파괴할 수 있다. 옥상 전망대에 올라가 보지 않았다면 뉴욕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던 쌍둥이 빌딩도 비행기 두 대에 의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우리 모두 TV 중계로 생생히 지켜보았지 않는가? 폭약 몇 개를 기둥에 설치하면 수십 층 빌딩도 몇 초 만에 폭삭 내려앉지 않는가?
심지어 기술과 장비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도 무너뜨릴 수 있다. 중국의 만리장성이 지금도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고 있지만 제대로 외적의 침입을 막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왜 그런지 아는가? 수문장이 뇌물을 받고 문을 활짝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돌 하나 손상되지 않았지만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무려 80년이 넘도록 대역사를 한 헤롯 성전도 정말 한 순간에 파괴되었다. AD 66년에 일어난 유대 1차 반란 때에 전세가 불리해지자 유대군은 성전에 집결해서 마지막으로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로마의 디도 장군도 성전의 장엄함에 매료 되어서 군사들에게 건물과 기물을 절대 훼손하지 말고 적군 군사만 죽이라는 엄명을 내렸다.
야간 전투가 격렬히 벌어졌던 어느 날 한 병사가 들고 있던 횃불에 성전 휘장이 불붙었고 불을 보고 흥분한 로마 병사들이 지성소를 비롯해 성전 곳곳을 불 질렀다. 바로 그날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것이 꾸며낸 전설이 아니라 예수님 당대에 활약했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기록한 사실이다.
단순히 전쟁에서 다반사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한 병사의 우연한 실수인가? 유대력 아빕월 9일, 양력으로 치면 7-8월 경에 “티샤베아브”라는 유대 절기가 있다. 디도 장군이 헤롯 성전을 파괴한 일을 회상하며 회개하는 날이다. 전후 3주간은 결혼식이나 파티를 하지 않고 당일에는 모든 유대인들이 대속죄일처럼 금식한다. 통곡의 벽에도 관광객 출입은 금지되여 유대인들만 모여 회개의 집회를 한다.
그런데 그날이 솔로몬의 제1성전이 느부갓네살에게 파괴가 된 날짜와 단 하루도 차이 없이 똑 같다. 너무 소름끼치고 신기하지 않는가? 로마의 디도 장군은 성전을 파괴할 의사가 없었다. 문제의 그 병사가 유대 역사에 정통했을 리도 없다.
유대인들이 이왕에 패배할 것이면 같은 날에 당하자고 모의했을 리는 더더욱 없다. 로마에 1차 반란을 일으킨 중요 이유는 당시 로마 칼리규라 황제가 자신을 신이라고 선포하고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경배토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생명을 걸고 보존하려 했다. 제1, 제2 성전의 파괴 배경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신비하고 두려운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하지 않았다고는 어느 누구도 부인 못할 것이다.
제자들의 잘못
제자들도 제1, 제2 성전의 치욕적이고 비참했던 파괴가 하나님의 징벌이었음을 모를 리 없다. 인생 만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진리도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장엄함에 압도당해 하나님과 그분의 섭리를 잠시 잊었던 것이다. 거기다 그들의 결정적인 잘못은 하나 더 있었다.
예수님이 3년간의 공사역 기간 중 첫해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 때도 성전의 장사치들을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2:16)고 야단치며 쫓아냈다. 유대인들은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18절)라고 반발했다. 만약 그리스도라면 그 증거를 보이라고 요구한 것이다.
주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고 답했다. 유대인들은 다시 “이 성전은 사십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카겠느뇨”(20절)라고 비웃었다. 말하자면 주님을 미친 사람 취급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21절) 것이다. 그들이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더라도 삼일 만에 부활하시겠다는 뜻이었다.
당시 성전의 장사치들은 대제사장의 허락을 받았다. 그런 권위에 도전하고 또 성전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유대인들에겐 그와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신성모독이었다. 그들은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도 불경하다고 여기고 아도나이라는 이름으로 대체해서 부를 정도였다.
유대인으로 나서 유대교 배경에서 자라고 생활한 예수님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유대인들이 비난한 것처럼 미쳤거나 당신께서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말이다. 주님은 지금 신통력 있는 인간 선지자로서 성전 파괴라는 장래 역사를 예언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으로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당신께서 심판하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제자들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이라고 이미 고백했듯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랐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정말로 하나님 본체라는 사실을 미처 실감하지 못했다. 하나님으로서 주님이 어떤 일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에 대한 온전한 영적 분별력이 없었다. 쉽게 말해 이렇게 화려하고 장엄한 성전 안에서 이렇게 엄숙하고 경건하게 드려지는 제사를 받으시기에 하나님이 설마 성전을 무너뜨리겠는지 의아심을 가진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이 보이려한 것이 하나님이 실존하는지 여부는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이스라엘을 택해 보호하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역사를 어떤 뜻과 계획을 갖고 이끄는지, 당신의 백성을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는지, 당신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을 어떻게 구원하고 구원의 진리를 어떻게 깨우치게 해주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주님이 유대 지도자들은 일곱 번이나 질책한 대로 인간이 고안해 낸 유전으로 백성들에게 종교적 멍에를 지우고 자기들은 지키지도 않았다. 폭리를 취하려고 흠이 있고 저는 제물들을 바치도록 하여 교인들마저 배나 더 지옥 자식으로 만들었다. 천국 문을 닫고서 들어가려는 자도 못 들어가게 했다. 아무리 성전의 문을 황금으로 장식하여 인간의 눈에는 미문으로 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엔 지옥문이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일곱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성전 문을 닫을 자.
예수님은 앞장 34절에서 선지자들을 당신께서 보내셨다고 했다. 당신께서 BC 450 년경에 마지막으로 보낸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말1:10)라고 하셨다. 인간 중에 선각자 개혁가가 나올 것을 기대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예수님과 3년간 동고동락하며 천국복음을 배운 제자들도 성전이 무너질 리가 없다고 의심했다. 바로 눈앞에 서있는 독생자 하나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전혀 몰랐다. 오늘날 신구약 성경을 잘 아는 신자들도 마찬가지다. 목사가 교회 형편은 감안하지 않고 믿음으로 무리하게 교회를 건축하겠다면 하나님의 일로 여기고 심지어 빚을 내서도 참여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두려워서도 절대 성전 문을 닫지 못한다. 주님은 예수님 당대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교회를 개혁해야 할 지도자들이 죄를 범하고 있으니 교회 부패상을 개혁해야 할 자는 교회 안에선 한 명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반어법으로 한탄하신 것이다.
거기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의 죄악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족속으로 심판하겠다는 것이다. 시리아의 안티오커스는 성전 안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경배토록 했고 유대인들이 가장 부정하다고 여기는 돼지의 피로 성소를 더럽혔다. 일시적이긴 했지만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으니 성전 문이 닫힌 것이다. 그러다 로마의 디도 장군은 성전 문자체를 없애버렸다. 이 모든 역사를 예수님이 주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보이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는가? 제사보다는 상한 심령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다. 우리의 죄가 진홍 같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해주시는 하나님이다. 우리의 죄를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등 뒤로 던지시는 분이다. 동(東)과 서(西)가 영원토록 만나지 못하듯이 예수 안에 들어오면 더 이상 정죄는 없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불꽃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다. 금식과 십일조와 구제에 열심을 다했기에 그에 비례해서 하나님이 복을 주어야만 한다고 떳떳하게 가슴을 쳐들고 요구하는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귀를 닫으시는 하나님이다. 반면에 당시 형편상 어쩔 수 없이 세리의 일을 맡았지만 항상 동족에게 미안하여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소망한다고 고개도 못 들고 눈물로 간구하는 자의 곁에 계시는 하나님이다. 그 눈물을 닦아주시고 함께 한숨 쉬는 하나님이다. 그 때까지 바리새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틀렸기에 세리의 하나님으로 바꾸어 보여주셨다. 그래서 세리 과부 고아 창기 귀신들린 자 같이 비참하고 소외된 자들만 교제하며 사랑을 베푼 것이다.
유대인들이 아직도 하고 있는 기도?
그럼에도 지금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 모여 무엇을 기도하는지 아는가? 예수님이 하나님인 줄 몰랐던 것은 결코 회개하지 않는다. 작은 종이에 기도 제목을 적어서 성벽 틈에 끼우면 응답되어 형통한다고 여긴다. 로마의 트레비 분수에서 관광객들이 동전을 등 뒤로 던지며 소원을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는 식의 기도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죄를 당신의 등 뒤로 던지셨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나와 진심으로 당신께 항복하면 용서하고 구원해주신다. 반면에 인간들은 하나님의 의로운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자기의 탐욕을 이루려 자기 등 뒤로 기도문을 던져 하나님을 마치 자기 뒤에 따라오는 종으로 부려먹으려 하고 있다.
나아가 유대인들은 제4성전을 짓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아니 지을 준비는 다 되어 있는데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들은 원래 성전이 있었던 그 장소,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모리아 동산 위에 성전을 지으려 한다. 그런데 그곳에는 황금 빛 돔을 자랑하는 이슬람 사원이 있다. 모하메드가 승천했다고 알려진 그 장소다.
만약 그곳에 성전을 지으려면 그 모스크 사원을 무너뜨려야 한다. 그럼 아랍과 전 세계의 회교도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야말로 이스라엘을 멸절시키려 덤빌 것이다. 그럼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서방국가들도 대항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최후의 아마겟돈 전쟁까지는 몰라도 제3차 세계대전은 피할 수 없다.
이일 또한 너무나 절묘하고 신기하지 않는가? 단순히 국제정치 역학관계로 빚어진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이 전쟁을 막고 있는 것이다. 생명을 사랑하신다는 기본적 뜻 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심판하신 바로 그 곳에 인간이 다시 성전을 세울 수는 결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유대인들더러 모세의 율법을 소지했고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이기에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교만을 반드시 버리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메시아가 그 모스크 위로 강림해서 파괴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이스라엘만 모든 열방 중에 최고로 높여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슬림도 당연히 당신의 백성으로 구원해주신다는 것이다. 대신에 인간의 도덕과 종교로는 절대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구원을 얻은 후에도 현실의 형통만 구하지 말고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소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제발 깨달으라는 것이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성전
하나님은 성전이 이방 장군들에게 파괴되고 심지어 그 위에 이방사원이 세워지는 것도 허락하셨다.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두고 당신의 택한 백성들로 당신을 경배케 하는 신성한 장소에 우상이 세워지고 돼지 피로 더럽혀지게 했다. 당신의 몸이 짓밟히는 수모를 허락했다. 인간이 고안해서 지어낸 종교적 절기, 관습, 건물, 형식 모든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성전은 인간이 짓고 허물고 다시 지을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실 이의 표상(表象)일 뿐이었다.
때가 차매 그 표상이 실현되어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오셨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셨다. 가장 비참한 사형수의 자리에까지 낮아지신 것이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인간으로 하여금 그와 동일한 장소에까지 내려가 완전히 깨어지고 낮아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성전을 골고다 언덕 위에 우뚝 세웠던 것이다. 모든 입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케 하는 것으로 믿음의 출발로 삼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가르침대로, 또 걸어가셨던 그 걸음대로 살게 하고, 자기가 받은 그분의 사랑을 주위에 나눠주게 하려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게 하려는 것이다. 신자 안에 예수님이 보배로 임재하시어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거룩한 성전으로 바꿔주려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가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려는 것이다.
제자들은 지금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그 아름답고 장엄한 성전이 무너진다고 해서 아쉬워할 이유가 없다. 헤롯 성전보다 더 아름다운 성전이신 예수님이 직접 곁에 와계시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신자들도 3절 이하의 마지막 재앙과 심판이 닥친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님이 항상 함께 동행해 주시기 때문이다.
사람 위에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는다면?
만약에 예수님이 2절에서 돌 위에 돌 하나라고 하지 않고 “사람 위에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으리라”고 말했다면 어쩔 뻔 했는가? 그러지 않는 것을 진정으로 감사해야 한다. 물론 그럴 때가 언젠가 불시에 닥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막고 계셔서 아직은 아니다. 우선에 돌만 무너뜨리겠다는 것이다. 그 뜻이 무엇인가?
인간, 특별히 신자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 여건과 환경이 다 무너지는 일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절대 놓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한 사람이라도 새롭게 바꾸어 새 힘을 주어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 전에 모든 것을 무너뜨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 그 무너뜨림은 새롭게 세움을 가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있는 인생은 아무리 그 주변이 화려하고 장엄해도 모순, 왜곡, 상실, 낙심, 무질서, 불균형, 심지어 추함과 악함이 끊이지 않는다. 반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아무리 겉모습이 후패해져도 인간적 의로움과 자기만족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함, 아름다움, 깨끗함, 진실함, 활력, 기쁨, 만족이 날로 늘어난다.
헤롯의 황금으로 장식하여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던 성전도 티끌일 뿐이다. 이미 다 썩어 없어졌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인간을 포함하여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창조주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면 참 생명을 절대 얻지 못한다.
만약 제자들이 오늘날 이 땅에서 만리장성을 보았더라면 그 장엄함에 놀라고 또 놀랐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는 주님도 본문처럼 “이 모든 것을 너희가 보지 못하느냐”(2절)라고 힐난조로 반문하실 것이다. 돈 주머니 하나에 완전히 무너지는 역사상 최고의 헛된 낭비가 되었지 않는가?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으라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최고로 좋고 강력한 것을 다 동원해도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공로와 노력으로도 절대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유대 속담 식으로 표현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알지 못하고는 참 평강과 안식과 자유를 얻었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는 것이 내 주변의 골치 아픈 문제와 상처와 고난을 해결 해주는 수호신으로 모신 것 같은 단세포적 믿음이 결코 아니다. 그분의 힘을 빌려 내 주위가 형통해지면 나에게 행복이 넘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모른다. 솔직히 10년, 20년 교회 생활을 했지만 실제로 형통은 없고 도리어 차지도 덥지도 않게 된 지난 체험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유대인들도 바로 그런 신앙 때문에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는 처절한 실패를 겪지 않았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를 깊이 깨닫고 그 안에 들어오면 자유하고 승리할 수 있다. 세상의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세력에 당당히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이 신비하고도 오묘하게 이끄는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왜냐 하면 신자 각자의 인생도 바로 그런 신비하고도 오묘한 계획 가운데 인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소유한 황금으로 세상 앞에 자랑하는 것은 헤롯 같은 불신자들의 몫이다. 신자는 내 속에 채워진 예수님의 영광의 광채를 주위에 비취는 자다. 그래서 신자가 속한 어떤 공동체에서라도 신자가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썩지 않게 되고, 그 구성원들도 함께 그 빛으로 변화되고 힘을 합쳐 그 빛을 반사하게 되는 것이 바로 신자의 자랑이자 하나님께 받는 복의 참 실체다.
6/15/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