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온전히 믿고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48)



http://youtu.be/-ufaHw1PK-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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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그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 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마27:15-22)

빌라도의 아이러니

유대인들이 예수를 로마 법정에 고소한 죄목은 유대인의 왕 행세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기소 내용에 대해 가장 민감해야 할 헤롯왕과 빌라도총독은 콧방귀도 안 뀔 만큼 날조된 죄목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경찰이 사건을 검찰에 송치시킬 근거가 하나도 없어서 예수를 방면했어야 한다. 대신에 대제사장은 무고죄로 구속영장을 청구해야 할 것이다. 그런 엉터리 같은 재판이 본문에선 더욱 이해가 안 되는 이상한 모습으로 진행되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시기로 넘겨준 줄 잘 알았다.(18절) 총독이 될 만큼 사리 판단이 합리적이었다는 뜻이다. 그럼 당장에 재판을 중지해야 한다. 원인이 어떻게 되었던 남에게 질투와 미움을 샀다는 이유로 죽일 수는 결코 없다. 화해를 중재하든지 혹시라도 생길 불행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 상호 접근금지를 명령해야 한다.

그로선 유대 최고지도자들이 총동원되어서 떼를 쓰는 것을 묵살할 수 없어서 재판을 진행했지만 나름대로 예수를 지켜주려고 노력은 했다. 그러는 데는 아내의 흉흉한 꿈에 대한 경고도 일조했다. 그녀의 꿈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인지, 아니면 양심의 가책으로 불안해진 자기 심리의 반영인지는 알 수 없다.

이 꿈을 마태만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선 예수의 무죄함을 이방인 아녀자도 알고 있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것도 남편의 정치적 지위가 위협받을 만한 죄목으로 고소된 피고인인 예수를 변호하면서까지 말이다. “저 옳은 사람”(19절)이라는 말은 결점이 하나도 없는 완전무결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당시에는 메시야에게만 해당되는 표현이었다. 빌라도의 아내 클라우디아는 전승에 따르면 유대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지금 예수를 구하려는 노력을 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초기의 일부 동방교회에선 성자로 숭배했다고도 한다.

마태만 기록한 둘째 이유는 아내까지 나서서 만류하는데도 예수를 처형했기에 빌라도가 그만큼 비겁했다는 뜻이다. 지금도 일부 불신자들이 그러하지만 고대에선 의미심장한 꿈은 신의 경고로 여기고 어지간하면 그대로 따랐다. 빌라도가 나중에 황제에게 다른 일로 미움을 사서 귀향 보내어졌고 그곳에서 죽음으로써 어쨌든 꿈대로 되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는가? 빌라도는 로마의 황제에게 잘 보이는 것만이 그의 좌우명이자 인생관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황제에게 죽음을 당한 셈이니까 말이다. 로마 황제의 정책은 반역을 도모하지 않고 납세를 성실히 하면 식민지 주민을 공평하고 자유롭게 대해주라는 것이었다. 만약에 빌라도가 전후사정에 대한 정확하고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여서 예수를 황제에게 보내었다면 이전에 떨어졌던 신뢰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자기 자리를 보존하려는 치사한 탐욕에 눈이 어두워 그런 합리적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빌라도의 최후의 자구책

어쨌든 빌라도는 자기 양심을 지킬 최후의 자구책은 강구했다. 바라바와 예수 둘 중에 누구를 풀어줄까 유대인들에게 물었다. 바라바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에 대해선 학설이 분분하다. 로마에 반역을 도모하면서 여러 포악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유명한 죄인”(16절)이라는 표현은 아주 악명이 높은 자라는 뜻이다. 확실한 사실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인이었다는 것이다. 사형수라야 사면해주는 의미가 있지 않는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시인했기에 로마에 반역한 죄가 성립되고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이런 경우는 형량이 동일한 사람을 비교해야 한다. 연쇄살인범과 도로교통법을 위반한 사람 중에 누구를 살려줄까 물을 수는 없다. 빌라도가 유대인들 사이에도 악명이 높은, 어쩜 현재 투옥중인 죄인 중에 가장 포악한 자였을 바라바를 예수님과 대조시켰다. 유대인들도 아무 죄 없는 예수를 풀어주라고 요구하리라 기대했다는 뜻이다.

빌라도의 계책은 어느 정도 먹힐 뻔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무리를 선동했기 때문이다.(20절) 유대 대중들도 예수가 민형사상 잘못한 것 하나 없고 지금 고발한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도 사실상 해당되지 않음을 알았다. 만약 선동을 하지 않았다면 단 몇 사람이라도 예수를 풀어주자고 소리쳤을 수 있다. 그럼 빌라도가 너희 요구대로 예수를 풀어준다고 선언해버리면 대제사장도 더 이상 반발할 거리가 없어진다.

대제사장과 유대 공회원들의 죄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예수님에게서 “화 있을찐저!”라고 일곱 번 저주 받기 전부터 그들은 예수를 철두철미 미워했다. 어떤 재판 절차도 없이 사형이라고 먼저 결안 했다. 자존심이 구겨졌다는 이유 때문에 원초적 추악한 본성으로 앙갚음하려 든 것이다.

그런데 이날 저녁의 재판에 적극 참여한 자가 유대인과 로마 당국이 전부가 아니었다. 또 다른 제 삼의 중요한 당사자가 있었다. 성경이 기록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탄이 그다. 스승을 밀고한 유다나 부인한 베드로나, 시기에 가득 찬 대세자상과 공회원이나 그들의 선동에 넘어간 대중이나, 판단력이 흐려진 빌라도 모두가 사탄의 농간에 놀아난 것이다.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인간이 사탄의 조종에 따라 섬뜩한 집단적 광기에 휩싸였다.

빌라도가 아내의 꿈에 대한 경고를 전해들은 것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라고 한다.(19절) 이어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백성들을 선동했다.(20절) 그럼 무슨 뜻인가? 빌라도가 아내의 꿈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대제사장이 대중을 선동할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만약에 빌라도가 그럴 짬이 없이 곧바로 대중들의 의견을 물었다면 당장 얼떨결에라도 바라바를 죽이라고 대답할 자가 몇 명은 있었을 것이다. 어느 모임에 가나 눈치 없고 순진한 사람은 있기 마련 아닌가? 그럼 역사의 행로는 정반대로 흘렀을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빌라도의 아내가 꾼 꿈은 하나님의 계시거나 개인적 불안 심리의 반영이라기보다 사탄이 심어준 악몽일 가능성이 더 크다.

빌라도의 특별한 예수 호칭

그리고 본문에서도 몇 번 강조한 대로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목할 표현이 있다. 빌라도가 단순히 예수라 호칭하지 않고 17절과 22절에서 두 번이나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예수는 히브리 이름 여호수아의 헬라식 표현으로 당시에는 흔한 이름이었다. 소수의 사본에선 바라바의 이름을 예수 바라바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 주석가들은 빌라도가 두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해석하지만 조금은 불합리하다. 우선 빌라도가 그렇게까지 유다의 관습에 정통했을지 의심스럽다. 잘 알았다 쳐도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누가 누구인지 잘 알기에 그냥 바라바와 예수라고 해도 되었다.  

저자 마태가 후대 독자들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미리부터 세심하게 배려했을 리도 없다. 빌라도가 실제로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저자도 그렇게 기록한 것뿐이다. 빌라도가 그냥 예수라고 하지 않고 구태여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라고 부른 것은 그에게 숨은 의도가 있었다는 뜻이다.  

성경은 너무나 정미한 기록이기에 앞뒤 문맥을 잘 따져보면 정확한 뜻을 알 수 있다.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한 것 즉, 로마의 반역자라고 고발했다. 그러나 정작 빌라도 본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라 하는”이라는 표현은 자칭해서 그리스도라고 말한다는 뜻이다. 빌라도가 예수를 그리스도라 인정하지 않기에 비하와 멸시하는 의미를 내포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 행세를 한 것이 아니라 너희를 구원하러 온 메시아가 아니냐는 뜻이었다. 쉽게 말해 살인흉악범인 바라바와 종교사상범에 불과한 예수 둘 중에 누구를 풀어주어야 옳으냐고 물은 것이다. 어린아이가 판단해도 예수를 풀어주어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다. 너희 양심을 걸고 잘 판단해보라는 뜻이었다.    

만약 유대인 중에 한 명이라도 예수를 살리라고 말했다면 빌라도로선 너희 의견도 일치하지 않으니 너희가 데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다시 말할 참이었는지 모른다. 또 그 재판을 통해 처형을 시키더라도 아무 문제 삼지 않겠다는 뜻을 다시 내비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빌라도의 의도와는 달리 그 호칭은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의 불 붙어있는 예수에 대한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되었다. 그들로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예수가 메시아임을 끝까지 부인해야 했다. 특별히 십자가에 매달려 하나님께 저주 받는 모습으로 죽여야만 했다. 결국 대중을 강요와 협박과 선동하여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22절)라고 아우성치게 만들었다.  

사탄의 실패한 모략

빌라도가 스스로 의식은 못하고 자기로선 최선을 다했지만 사탄은 그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라고 거푸 지칭하게 만든 것이다. 사탄은 예수님이 말씀으로 군대 귀신을 쫓아내었고, 쫓겨나간 귀신들로 돼지 떼에 들어가게 했고, 또 그 돼지 떼마저 강물에 익사하게 만드는 것을 보았다. 지난 삼 년간 자기 부하들이 예수를 만나면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다 쫓겨났다. 사람을 더 이상 갖고 놀 수 없게 된 것이다. 표현이 이상할지 몰라도 사탄마저도 자기 밥그릇이 줄까 염려하여 예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이 재판의 인간 참가자는 자기가 선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 대제사장은 최고의 지략을 동원했다. 빌라도는 방법이 치사했지만 예수를 풀어주어서 자기 양심을 지키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의 아내는 자기 꿈의 출발이 사탄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남편을 걱정해서 충고해주는 아주 선한 일을 행했다.

거기다 사탄 또한 빌라도 아내의 꿈에 미리 경고하는 선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광명의 천사로 위장했다. 그와 동시에 빌라도더러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점을  강조하게 함으로써 유대인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자기 목적을 100% 달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당사자들을 초월하여서 궁극적으로 삼위 하나님이 창조 전 태초부터 작정하신 인간 구원의 계획은 완벽하게 달성되었다.

아담이 타락하자마자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깰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3:15) 사탄은 그 후로 과연 언제 메시아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항상 주시해왔다. 때가 차매 주님이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고 즉,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다. 비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자기와 동일한 처지의 가난한 사람, 창녀, 세리, 불치병자, 불구자 등과만 교제했다. 그 모습을 본 유대 지도자들은 주님을 멸시했지만 사탄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마가복음 1장에 따르면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가장 먼저 알아보았다. 그것도 예수님이 초자연적 이적을 일으키지 않고 단지 권세 있는 말씀을 가르친 것만으로 알아챘다. 그러다 주님이 차츰 놀라운 이적을 베풀어 그리스도임을 증명하자 사탄은 유대와 로마의 최고 권력층들을 동원해서 주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이 자리에까지 이끈 것이다.

예수님이 속수무책으로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자 사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은 지 삼일 후에 주님이 부활하심으로써 사탄의 흉계는 완전히 휴지 조각으로 변했다. 인간들과 사탄은 최고의 지혜와 모략을 다 동원하여 당사자들 모두가 스스로 만족할 결과를 도출해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권능이 실현되자 그 모든 것들이 최고로 사악하고 추한 죄악임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십자가의 권세

주목할 사항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그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신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서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주려는 뜻이었다.

비록 당신께서 재림할 때까지 사탄에 대한 심판이 보류되었고 대신에 공중 권세를 잡고 이 땅을 농간하는 것을 허락했고 인간도 그 추악한 본성에 묶여 있는 상태 그대로 두었지만 주님은 당신의 남은 자들을 이 땅에 두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로 당신의 십자가 사랑에 완전히 항복케 하시고 돈 대신에 당신을 주인으로 삼게 해주신다. 또 그런 자들은 주님이 책임지시고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신다.

세상에서 아무리 화려하고 풍성해도, 심지어 선하고 의로워보여도 예수님이 없다면 사탄의 거짓 궤계에 놀아난 것밖에 아님을 완전히 깨닫게 해주신다. 진정으로 예수를 주인으로 모신 자들로 자기 세대를 본받지 않게 하고 자기 몸으로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신다.

비록 때로는 신자가 게으르고 넘어질지라도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해주신다. 필요하다면 징계도 하시고 강권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게 해서 그분의 영광을 보게 하신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신자는 언젠가는 어떤 방식이 되었던 반드시 예수님 참 생명의 능력이 작동되어서 그분의 빛을 발하게 만드신다. 평생을 두고 사탄의 모든 훼방에서 지켜 보호해 주신다.

본문에서 인간의 판단과 선택과 결정은 100% 최선으로 작동되었고 사탄도 자기 능력의 100%를 발휘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양심을 따르기는커녕 상식적으로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역사상 최고의 불공평한 재판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인간 최고의 불행이자 죄악을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최대의 역사로 바꾸셨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말로만 자칭하는 자가 아니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스스로 점검해봐야 할 질문

지금 삼위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대신에 본문 기사에 비추어 우리 각자가 정말로 심각하고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볼 질문이 하나 있다. 우리가 이 현장에 있었다면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 대제사장의 선동에 넘어가 저부터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소리쳤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질문을 조금 바꿔보겠다. 그 순간에 가장 부러워했을 사람이 누구였겠는가? 솔직히 말해 대제사장과 로마 총독이 아니겠는가? 유대 대중이 그들이 부럽지 않았다면 그들의 선동에 넘어갔을 리 없지 않는가? 대신에 예수는 어느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바라바를 부러워했을망정 말이다.

그날 저녁에 그곳에는 예수를 미워했거나 불쌍히 여긴 두 종류의 사람뿐이었다. 예수가 부러워 그를 따르겠다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베드로가 스승을 부인하고 유다가 밀고한 이유를 신학적으로 복잡하게 따질 필요 없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예수를 우습게보았기 때문이다.

골고다 언덕과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까지 따라간 아녀자들도 예수를 안타깝게만 여겼지 아직은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단계는 아니었다.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에게도 예수가 너무나 아쉽다, 참 안 되었다는 미련만 남았다. 이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고 모순과 죄악이 많은 곳인지라 인간사가 결국은 이렇게 굴러갈 수밖에 없다고 체념했을 것이다.

바꿔 말해 이날 저녁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서 진동하는 썩어가는 죽음의 냄새를 맡기는커녕 그런 냄새가 난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 최고의 지혜와 도덕과 종교를 총동원하여 역사상 최고의 범죄를 저질렀고 또 방관했을 뿐이다. 거기다 그 모든 일이 사탄의 장난에 100% 놀아난 것이었다. 모두가 거짓의 아비 사탄에게 미혹되어 있었음에도 자신들이 그렇다는 사실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귀신이 제일 먼저 알아봤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통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간이 만든 종교가 아닌 하나님이 다스리는 신령한 세계를 모든 이로 볼 수 있게끔 하셨다. 당신의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모든 영혼들이 사탄에게 미혹당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셨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구원은 당연히 소지하고 있는 양 여겼고 성전제사와 율법준수를 성실히 행한다고 자랑했다. 주님은 그들을 오히려 멸망의 자식이라고 선포했는데 그 말씀이 십자가에서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게 성취되었다. 이 기묘하고도 가공할 악한 재판에 적극적으로 열렬히 참여하는 모습이 예수님 오시기 전의 모든 인간의 상태였다. 예수 십자가가 없기에 모든 인간이 절망과 죽음의 흑암 아래 있었다.  

예수 이전과 이후

예수 십자가 이후의 상태는 그 전과 당연히 정반대가 되어야 한다.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신자는 실제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흑암에서 빛으로 옮겨졌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신자가 아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선택하여서 교회와 목사가 시키는 대로 따르면 천국보험증서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차원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은 신자 한명 한명을 당신의 십자가 골고다 언덕으로 데려가서 살아 역사하는 말씀으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신다. 하나님을 몰랐던 이전의 헛되고 썩어가는 옛 생명을 완전히 죽이고 참되고 아름답고 진실하며 풍성한 새 생명으로 채워주신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만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질문함으로써 그가 스승을 세 번 부인한 죄를 용서해주셨다. 그 의미를 본문에 비추면 그 때 네게 대제사장과 로마 총독이 부러운 심정이 있었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또 그런 마음이 바로 너의 진짜 자아이자 영적 실체였음을 인정할 수 있겠느냐고 물은 것이다.

이젠 만천하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겠느냐? 네 인생을 주관하여 거룩하게 바꿀 수 있는 자가 과연 누구인지 깨달았느냐? 인간이 정말로 누구를 부러워해야 하느냐? 누구를 사랑해야 하며 누구를 따라야 하느냐? 지금 둘러싼 제자 즉,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네 전부를 걸고 대답해보라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 앞이었으니까 실제로 그는 하나님 앞에 선 것이다.

그때 베드로에게는 틀림없이 성령의 감동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스승을 세 번 부인한 후에 밖으로 튀어나가 통곡했을 때는 자신의 존재 전부가 무너져 내리는 울음이었다. 이젠 그 반대로 자신의  전부에 참 생명이 풍성하게 채워지고 새로운 존재로 변했음을 절감했다. 몸은 이 땅에 있으나 그 영혼은 하늘에 있음이 의심 하나 없이 온 몸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새로운 차원의 감격으로 가득 차서 속에서부터 새로운 울음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주님의 그 질문은 간단히 말해, 십자가 이전의 어둠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인지, 아니면 십자가 이후의 빛 속으로 들어올지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사탄의 거짓에 속아서 너의 추악한 본성에 묶여서 계속해서 멸망의 길로 걸어갈 것이냐, 아니면 나를 따라서 비록 좁고 협착하여 머리를 눕힐 곳도 없지만 하늘에 뻗쳐진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 갈 것이냐 택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후의 남은 인생을 너를 처음 불러냈을 때 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소명에 충성하며 살 것인지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십자가를 통과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절대로 시급하고 필수적으로 평생에 한 번은 통과해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러나 그 일을 단순히 인간 쪽의 선택과 결단의 문제로 간주해선 안 된다. 본문에서 바라바를 살리라고 말한 자들은 영원한 멸망에 처해졌다. 불행하게도 예수를 살리라고 말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십자가 영생의 축복은 하나님 쪽에서 선택하여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 없이는 완전한 죽음만 있을 뿐이다. 이날 밤 대제사장과 로마 총독을 부러워했던 자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세상에서의 재물, 권력, 명예, 지성이 아무리 풍부해도, 심지어 도덕과 종교가 아무리 경건하고 심오해도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에겐 절대로 구원이 없으며 아무 소망도 없다.

역으로 말하면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그 모든 것들이 없어도 예수 한 분만으로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다. 현실의 삶에서 실제로 아무리 궁핍해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며 책임져 주신다. 한번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신자를 선택했다. 또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했다. 그 후에 하나님이 작정해 놓은 하나님의 일을 시킨다. 그럼 하나님의 영광이 반드시 드러날 것은 너무나 당연나지 않는가?

일주일 내내 교회에 살다시피 하고, 찬양을 부르면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 가슴에 찔림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를 믿는 본질이 아니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 그래야 하지만 우리가 갖는 믿음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오늘날도 본문의 십자가 재판처럼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불의와 불공정한 일이 벌어질 때에 나 혼자만이라도 예수를 살리라고 소리치는 즉, 끝까지 억울한 자의 편에 서는 것이 믿음이다. 본문의 경우는 그랬다면 빌라도가 예쁘게 봐서 뒤를 보살펴 주었을 수 있겠지만, 그런 가능성마저 전무할 때에도 그래야 한다. 정말로 혼자만 완전히 세상의 왕따가 되고 집과 재산과 생명마저 잃어도 예수님이 자신의 알파요 오메가가 되어 있어야 한다. 정말 그분을 좋아하고 사랑하기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예수님 한분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하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다.

예수를 믿었다는 의미는 십자가 이전에 자신의 상식, 합리성, 이성을 총동원했어도 재물의 욕심에 양심이 도무지 이기지 못했던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양심이 비로소 양심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하게 살려는 소망은 있었으나 제대로 실행을 못했지만 이제는 실제로 선을 온전히 행하는 일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물론 때로는 힘들고 지치고 심지어 그 반대로 향할 때도 있지만 성령님이 간섭하여 결국에는 신자가 있어야만 할 제 자리로 돌려놓으신다.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밀어 넣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의를 맛보게 해준다. 신자가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면 세상이 알지 못하는 진정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맛보고 누리게 된다.

또 그런 기쁨을 누리고 있기에 세상에서 아무리 최고로 형통해 보여도 예수가 없다면 사탄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런 것에 어떤 미련도 갖지 않게 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정확한 의미는 한마디로 인간이 정말로 인간다워져야 하는 바로 그 모습으로 회복되어서 실제로 그런 인간답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어찌 감사해야 할 엄청난 축복이 아닌가?

12/14/2014

운영자

2014.12.16 19:26:04
*.63.152.149

제 홈피의 한국 서버의 운영이 잠시 다운되었고
거기다 제 컴이 서버에 부하를 유발하는 해외 IP로 분류되어
자동으로 접속금지로 처리 되는 바람에
지난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3일 간 홈피 작업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설교를 조금 늦게 올린 까닭입니다.

방문자 중에서 혹시라도 앞으로 저희 홈피만 접속이 안 되는 경우가 생기면
저처럼 서버가 자동으로 접속금지로 처리했을 수 있으므로
findip.kr에 들어가 본인 컴퓨터의 아이피를 확인한 후에
주 아사달 hosting@assadal.com 에 아이피와 함께 사정을 설명하면
곧바로 접속금지를 해제해 줄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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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면피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했던 까닭 (마태복음강해 #256 - 마28:11-15)

철면피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했던 까닭 마태복음강해 (256) http://youtu.be/EIg462NOoq4 (클릭하시면 You- 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여자들이 갈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

두 가지 종류의 죽음 (마태복음강해 #255 - 마28:1-10)

두 가지 종류의 죽음 마태복음강해 (255) http://youtu.be/9s-lOXKEruk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

누가 무덤의 돌을 옮겼는가? (마태복음강해 #254 - 마27:57-66) [1]

누가 무덤의 돌을 옮겼는가? 마태복음강해 (254) http://youtu.be/0118IV1svQQ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

바위를 터트리는 믿음을 가졌는가? (마태복음강해 #253 - 마27:51-56)

바위를 터트리는 믿음을 가졌는가? 마태복음강해 (253) http://youtu.be/FQxHP1k1Syc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하나님으로부터 진짜로 버림받은 적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52 - 마27:45-50)

하나님으로부터 진짜로 버림받은 적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52) http://youtu.be/GCJbzz19aj0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신자가 신년에 반드시 계획해야 할 사항은? (마태복음강해 #251 - 마27:38-44)

신자가 신년에 반드시 계획해야 할 사항은? 마태복음강해 (251) http://youtu.be/Uc5ekqUC1Ug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마태 판(版) Passion of the Christ가 강조하는 것은? (마태복음강해 #250 마27:27-37) [1]

마태 판(版) Passion of the Christ가 강조하는 것은? 마태복음강해 (250) http://youtu.be/sHYlgb3sKac (클릭하시면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

예수 믿어 얻은 가장 큰 축복 (마태복음강해 #249 - 마27:23-26)

예수 믿어 얻은 가장 큰 축복 마태복음강해 (249) http://youtu.be/SlHawHa5DZA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온전히 믿고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48 - 마27:15-22) [1]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온전히 믿고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48) http://youtu.be/-ufaHw1PK-0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그때에 바라바라 ...

심히 기이한 유대인의 왕 (마태복음강해 #247 - 마27:11-14)

심히 기이한 유대인의 왕 마태복음강해 (247) http://youtu.be/RVwNg7fM8Po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

목숨까지 버린 유다가 더 의롭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246 - 마27:1-10)

목숨까지 버린 유다가 더 의롭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246) http://youtu.be/qhSGponWju8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

예수님 때문에 심히 통곡한 적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45 - 마26:69-75)

예수님 때문에 심히 통곡한 적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45) http://youtu.be/ls8cu58O-RA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

너무나 웃픈 대제사장의 심문 (마태복음강해 #244 - 마26:59-68)

너무나 웃픈 대제사장의 심문 마태복음강해 (244) http://youtu.be/g-aGmG0H8A4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

교회 안에 가득 찬 가인의 후예들 (마태복음강해 #243 - 마26:57-62) [2]

교회 안에 가득 찬 가인의 후예들 마태복음강해 (243) http://youtu.be/_azfFGIzNqs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

겟세마네 체포에 숨겨진 하나님의 큰 역설(마태복음강해 #242 - 마26:47-56) [2]

겟세마네 체포에 숨겨진 하나님의 큰 역설 마태복음강해 (242) http://youtu.be/H89jS1RImZg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

주님이 십자가를 주저하신 이유는? (마태복음강해 #241 - 마26:36-46) [7]

주님이 십자가를 주저하신 이유는? 마태복음강해 (241) http://youtu.be/QuOrdCUer_w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

베드로에 대한 너무나 큰 착각 (마태복음강해 #240 - 마26:30-35) [2]

베드로에 대한 너무나 큰 착각 마태복음강해 (240) http://youtu.be/wVVorENsW28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

성찬식에 대한 더 결정적인 오류 (마태복음강해 #239 - 마26:26-29)

성찬식에 대한 더 결정적인 오류 마태복음강해 (239) http://youtu.be/aa-MY4J-_i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

성찬식에 대한 몇몇 오류 (마태복음강해 #238 - 마26:26-29) [1]

성찬식에 대한 몇몇 오류 마태복음강해 (238) http://youtu.be/1u-5doP862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우리 믿음의 치명적 약점은? (마태복음강해 #237 - 마26:17-25) [3]

우리 믿음의 치명적 약점은? 마태복음강해(237) http://youtu.be/Rm2tWIIkrWc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니이까 가라사대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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