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21:4-9) 미신 같은 놋 뱀 치유 사건

구약성경강해(42) / 민수기강해 (32)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21:4-9)

 

미신인가 은혜인가?

 

한국의 무속신앙에 따르면 원수나 대적의 형상으로 인형을 만들어서 침으로 찌르면 그 대상에 불행한 일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오래 전 궁중비화를 다루는 한 사극 TV 드라마에서도 암투가 심한 후궁들끼리 그렇게 하는 장면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성경에도 그런 미신적 행위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탈취했고 하나님은 그 지역에 독종을 창궐케 하는 벌을 내렸습니다. 블레셋의 제사장과 복술자들이 독종을 일으킨 쥐의 형상을 금으로 만들어서 언약궤와 함께 이스라엘 지경으로 돌려보냅니다.(삼상6장) 독종을 제거하려는 자기들 고유의 주술적인 방책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불 뱀에 물려 죽게 된 자들이 여호와의 지시에 따라 장대에 매단 놋 뱀을 쳐다봄으로써 치유되는 내용입니다. 언뜻 그런 고대의 미신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실제로 본문을 두고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스라엘이 고대 토템 신앙의 귀신을 쫓는 방식을 취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정통 신학은 본문 사건은 예수 십자가의 구원을 예표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을 원망한 죄를 범해 그 벌로 불 뱀에 물려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단지 쳐다보는 것만으로 나았습니다. 인간 쪽에서 아무 자격 공로 노력 없이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구원을 얻는다는 은혜를 상징한다고 익히 배워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말로 아무 공로 없이 구원을 주시려면 그냥 낫게 해주시면 될 텐데 꼭 그런 방식을 취해야 하는지 조금 의아합니다. 모든 성경 기록들은 현대 독자와 최하 이천 년 이상의 시간적 간격이 있습니다. 자연히 지역 문화 관습 언어 사상 종교 등에 커다란 차이가 따릅니다. 따라서 모든 성경 말씀은 반드시 그 기록된 사건 현장으로 되돌아가 당시 상황에서 접근 이해해야 합니다.

 

이 사건을 십자가 구원을 예표한다고만 이해하고 치우면 그 넓은 시간적 공간적 간격을 배제하고 익히 알고 있는 구원교리를 재확인 한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물론 모세도 예수님의 대속 죽음은 아예 상상도 못했기에 놋 뱀을 매단 사다리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처럼 연결시키지 못합니다.

 

신구약 성경을 다 배운 우리도 본문의 하나님의 역사가 미신과 비슷해 보인다는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합니다. 따라서 자유주의 학자들의 주장처럼 과연 당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역사를 미신적인 종교관으로 이해했는지, 또 하나님은 왜 구태여 그런 모습으로 구원했는지 반드시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 여종에 속은 나아만 장군

 

이 문제에 대한 해답도 항상 그러하듯이 성경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불치병인 문둥병에 걸렸습니다.(왕하5장) 이전에 이스라엘을 침공해 노예로 잡아온 여종이 사마리아 땅의 엘리사라는 선지자에게 가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간언했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와 치유를 요청하자 엘리사는 집 밖에 나오지도 않고 사환을 보내어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말만 전했습니다. 나아만은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왕하5:10)고 하면서 크게 화를 내었습니다.

 

엘리사의 조치는 이방인 나아만이 알고 있는 자기들 제사장의 치료를 위한 주술행위와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크게 세 가지 점에서 그랬는데 먼저 자기 같은 고관대작이 나오면 예의를 갖추고 영접해주리라 기대했습니다. 지위가 높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고관이나 부자일수록 그 보상으로 주는 복채의 액수가 크기 때문입니다. 나아만도 많은 선물을 준비해 왔습니다.

 

둘째로 나아만은 엘리사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제사장이 질병의 치료를 신탁하려면 반드시 경건하고 신령한 제사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그의 생각과 정반대였습니다. 엘리사는 얼굴도 비치지 않고 사환을 시켜서 이렇게 저렇게 행하라는 명령조의 말만 전했습니다.

 

셋째는 엘리사가 손을 자신의 상처 부위 위에 흔들어서 고쳐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제사장이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치료 행위를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냥 요단 강 물에 일곱 번 씻으라고 했습니다. 당장에 다메섹의 강들이 이 요단강보다 더 깨끗한데 내 스스로 내 몸을 물에 씻어서 나을 것 같으면 구태여 이 먼 거리를 올 필요가 없었다는 반발만 생겼습니다. 실제로 요단 강물은 그리 깨끗하지 못하고 흙탕물일 때가 많습니다.

 

나아만으로써는 이스라엘 계집종에게 속았다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종교관, 신관과 완전히 배치될 뿐 아니라 상식적으로도 치료가 될 가능성이라고는 아예 없는 방안이었습니다. 시간과 돈만 허비했다고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 자리를 당장 떠나려고 하자 따라온 시종들이 시쳇말로 밑져야 본전이 아니냐고 말렸습니다. “병을 낫기 위해선 더 어려운 일도 할 텐데 이는 너무 쉬운 일입니다. 일단 시키는 대로 해보고 만약 낫지 않으면 그 때 가서 크게 벌주면 되지 않느냐?”고 충고했습니다. 그는 마지못해 엘리사의 사환이 시키는 대로 했더니 놀랍게도 깨끗하게 고쳐졌습니다.

 

간혹 이 사건을 두고 이방인 나아만조차 믿음을 갖고 일곱 번이나 묵묵히 순종했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가르치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에 그런 언급이 전혀 없고 전후 사정을 보면 분명히 억지로 씻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아만은 요단 강물 자체에 신령한 능력이 있다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중에 강물이 아니라 흙을 싣고 돌아갔습니다.

 

나아만의 어리석음

 

그는 아람에서 자기들 제사장 주술사들에게 치료를 위한 절차를 백방으로 거쳤을 것입니다. 그래도 낫지 않아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멀리 사마리아 땅까지 온 것입니다. 그럼 지금 신탁하는 신부터 다르니 그 치료 방법도 다를 것이라고 여겼어야만 합니다.

 

아무리 군대장관이라는 지위와 체면이 중요하다고 해도 병의 치료가 더 급하지 않습니까? 말기 암에 걸렸다면 종교, 문화, 직위, 돈과 상관없이, 설령 지독한 안티 크리스천이라 해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유 기도원에도 찾아가지 않습니까?

 

나아만이 그 정도도 구분을 못하는 앞뒤가 꽉 막힌 벽창호는 아닙니다. 그는 당시의 이방 족속이 다 그러하듯이 각 지역을 다스리는 고유의 신들이 따로 있고 그 발휘하는 능력도 다르다고 믿었습니다. 세상 모든 신들이 그 속성에서 동일하나 그 능력은 지역 시기 전문분야 등에서 상대적으로 세거나 약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아람에서의 모든 치료에 실패해 히브리신을 찾아왔습니다. 그럼 병의 치료에선 더 큰 능력을 가진 신일 것이므로 엘리사가 행하는 신탁과 치료 행위도 훨씬 더 신령하고 거창하리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또 그래야만 그 신이 더 큰 능력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신은 반드시 인간이 바치는 제물과 치성과 희생이 커야만 그와 비례해서 크게 보상해준다는 것이 그의 신관이었습니다.

 

반면에 엘리사가 꺼내놓은 처방전은 아람에서의 주술 행위들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너무 간단하고 초라했습니다. 엘리사는 신에 바치는 제물도 치성도 전혀 없었기에 치료는 아예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나아만은 그렇게 해선 도리어 히브리신의 기분을 거슬릴 수 있다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부하들의 말에 일리가 있어서 못 이긴 척 요단강에 몸을 담갔습니다. 처음 여섯 번까지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는 정말로 분노를 참으며 이젠 곧바로 저 거짓말만 하고 아무 능력 없는 제사장을 단 칼에 죽여야지라는 마음까지 먹었지 모릅니다. 그런데 너무나 놀라운 결과가 일어났습니다. 완전수 일곱이 채워지자 비로소 또 순간적으로 전신이 완벽하게 깨끗해졌습니다. 그 초라하고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신탁이 지금껏 어떤 신도 실현해보이지 못한 엄청난 능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주술 행위나 제사 절차 하나 없이 말씀대로 행했는데도 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직접 부르거나 그 이름으로 안수도 하지 않는다는 조금 전의 자기 불만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도 그 사환도 자기들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그냥 대언해서 전해준 것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능력이 온전히 나타났습니다. 히브리 신은 인간이 바치는 정성과 제물과 비례하기는커녕 그것과 전혀 관계없이 능력을 실현하는 신임을 깨달았습니다.

 

거기다 바로 직전까지 그 신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원망과 불신을 잔뜩 품고 있던 이방인을 낫게 해주었습니다. 세상 천지에 이런 신은 없습니다. 능력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능력이 더 크면 신탁과 제사와 치유 행위를 더 크게 해야 한다는 자신의 종교관 신관은 완전히 산산조각 났습니다.

 

엘리사와 자신의 여종이 믿고 따르는 이스라엘의 신은 인간의 소원과 정성과 무관하게 오직 당신의 뜻대로 완전히 자유롭게 행하는 위에, 이방인 대적에게도 긍휼을 베푸는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여종은 자기가 이 신의 땅을 침공해서 노예로 잡아왔고 적국의 군대장관으로 그 백성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던 나아만입니다.

 

치료에 대한 보상의 의미도 있지만 자기 잘못이 크니까 일단 그 신의 노여움부터 풀어야 한다고 믿고 엄청난 선물을 준비해 온 그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치료가 완료되고 나아만이 정중하게 청하기 전까지는 집 밖에 얼굴도 비취지 않았습니다. 그 선물에도 전혀 관심도 없었고 끝까지 고사하며 받지 않았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신이자 그 제사장이며, 지금껏 어느 나라에도 없었고, 단순히 능력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신과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왕하5:15)라고 고백하고 또 아람으로 돌아가서도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왕하5:17)고 맹세한 것입니다.

 

놋 뱀만으로 치유하는 여호와

 

이제 본문으로 돌아와 여호와가 놋 뱀으로 치유하는 모습에서 이방 무속신앙과 다른 점을 찾아내어야 할 차례입니다. 이미 해답을 말씀드렸기에 가장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놋 뱀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니요, 심지어 백성들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쳐다보는 행위 때문에 나타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당신의 말씀 한 마디로 고치시는 분이며, 모세에게 그 말씀을 할 때에 이미 치유의 능력은 말씀과 함께 이스라엘에게 임한 것입니다. 모세도 엘리사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한 것뿐입니다.

 

백성들이 놋 뱀을 쳐다본 것은 나아만이 요단강에 몸을 씻은 것에 해당됩니다. 이방 신관을 지닌 나아만조차도 그 강물에 신비한 효력이 있다고는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그런 미신처럼 보이는 행위를 하도록 요구한 것입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신앙상의 의문이 들 때는 그 반대 경우를 추정해보면 도움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만약 놋 뱀을 장대에 매달지 않고 모세가 그냥 하나님의 말씀만 대언하여서 낫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연의 일치이든지 아니면 모세 본인의 능력이 있다고 오해하게 됩니다.

 

놋 뱀을 바라보게 하는 것은 모세가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고 당신만 전적으로 의지하게 하려는 뜻일 뿐입니다. 모세도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시했다고 전하는 대변인의 역할로 그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모세가 바위를 두 번이나 세게 침으로써 마치 지팡이나 모세에게서 능력이 나오는 양 백성들로 오해하게 만드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본문에선 그런 잘못마저 다시 바로 잡으시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면서 전제 조건으로 어떤 정성 치성 열성 제사 희생을 바치라고 절대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 은혜를 받고 싶다는 소망과 믿음의 반응은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남들 앞에서 자기 믿음을 담대하게 시인 고백하는 모습은 보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쉬운 예로 신자가 기도하지 않아도 신자가 지금 어떤 상황과 사건에 처해있고 얼마나 고달픈지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또 신자를 안타깝고 불쌍히 여겨서 구해줄 마음도 벌써부터 갖고 계십니다. 나아가 신자의 기도와 무관하게 당신만의 방식으로 당신 백성을 사랑하고 끝까지 품어주십니다.

 

바꿔 말해 기도 자체가 당신의 은혜를 받는 조건이거나 능력을 이끌어내는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만 행하시는 유일하게 자유로운 분입니다. 당신의 뜻에 맞지 않는 기도는 결코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당신의 그런 당신다우심을 철저히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을 하면서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는 뜻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놋 뱀을 바라보라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의 이방신들의 제사와 그 제사장 주술사들의 행태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모세의 놋 뱀을 바라보라는 지시에 나아만이 처음 보였던 반응을 할 자도 틀림없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아만의 표현을 빌리면 “모세가 직접 아픈 자들을 찾아와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 물린 상처 위에 손을 얹어서 고쳐주어야 하지 않느냐, 아니면 우리가 뭔가 상처 위에 짐승의 피를 바르면서 여호와 앞에 신령하게 제사를 드려야 하지 않느냐, 그냥 쳐다본다고 나을 리가 있느냐”라고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에 몇몇 사람들이 그런 의심과 불평을 쏟아내며 쳐다보지 않자 틀림없이 곧바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심한 상처를 입은 자가 나아만처럼 밑져야 본전이라고 여기고 잠시 쳐다봤는데 즉시 나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백성들이 너도 나도 놋 뱀의 장대를 쳐다보고 다 나았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정말로 꼭 기억해야할 사항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직접적인 대적인 나아만이 억지로 엘리사의 말을 따랐어도 낫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지금 그 동일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도 온전한 믿음 없이 마지못해 쳐다보는 자들까지도 다 낫게 해주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여호와를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왜 세상의 모든 신들과는 전혀 다른 신인지 구별할 수 있습니까? 왜 예수 십자가 사건이 이 놋 뱀과 연결되는지 정확히 깨달을 수 있습니까?

 

원수마저 치료해주는 하나님

 

로마서 5:8 &10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믿어서 구원 얻은 것이 아닙니다. 아주 철저한 안티 크리스천이라 예수 믿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아주 싫어했던 자였습니다. 어느 날 주님이 먼저 찾아와서 저의 지난 모든 완악함과 패역함을 용서해주는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주셨습니다. 제 모든 일이 실패하고 식구들 먹여 살릴 길이 없는 와중에 교회에 처음으로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방으로 출구가 하나 없이 꽉 막힌 제 인생을 회복하여서 다시 제 멋대로 활개쳐보려고 반신반의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나갔습니다.

 

하나님에게 죄인이자 원수였던 그런 저에게 살아계시는 말씀으로 부어주시는 은혜는 저의 심령을 찔러 쪼개어서 제 폐부를 완전히 발가벗겨 드러냈습니다. 속에서 솟구치는 눈물 없이는 설교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라곤 아예 없었던 저에게 예수님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당신만의 권능과 사랑을 퍼부어주었습니다. 제 모든 것을 기꺼이 바쳐 항복 의탁하도록 주님이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완전히 믿고 나니까 하나님은 제가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저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시면서 기어이 그런 자리로, 본문으로 치면 억지로라도 놋 뱀을 바라봄으로써 온전히 치유 회복되는 자리로 당신께 이끄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네게 일어난 모든 일들, 특별히 고난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려는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놋 뱀의 치유가 다른 신들의 미신적 양태와 전혀 다르고 아예 비교가 안 되는 더 중요한 이유들이 따로 더 있습니다. 나아만의 경우에 보듯이 이방신들의 치유는 우선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시작되기에 인간이 더 많이 치성을 바쳐야 하고 그 결과도 인간의 현실적 유익만을 위한 것입니다. 치유를 베푸는 주체도 주술사 인간 아니면 그 뒤에서 조종하는 사탄입니다.

 

반면에 엘리사나 본문의 치유 과정의 외적인 모습도 이방 제사장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지만 가장 크게 치유의 근본적인 동기와 의미와 결과가 전혀 다릅니다. 신자가 정상으로 회복되긴 동일하지만 치유를 베푸는 주체는 인간 의술이 전혀 아니고 정말로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치유의 목적이 현실적 풍요나 안락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불 뱀을 보낸 뜻이 무엇입니까? 본문 4절 말씀대로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해” 여호와께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돔 땅을 우회하게 된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형제 나라와 다투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회하는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이자 거룩한 뜻입니다. 그런데도 불평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그 조치가 마음에 안 든다고 대놓고 대든 셈입니다. 말하자면 형제들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싸우고 죽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광야 사십 년을 방황하는 그 장소로 다시 돌아온 셈인데 왜 꼭 불 뱀으로 심판했겠습니까? 갑자기 그곳에 없던 불 뱀을 애굽의 메뚜기 재앙 때처럼 심판을 위해 딴 곳에서 몰고 온 것입니까? 그렇게 못하실 분이 아니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거의 대부분 일상적인 상황에서 일상적인 모습으로 일어납니다. 여태까지도 불 뱀은 이스라엘 곁에 항상 있었으나 물지 않도록 하나님이 지켜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이전 광야를 거치게 되면서 이번은 그 보호 장치를 작동해주지 않은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지금껏 광야를 지나면서 뱀에 물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래서 발이 부르트지 않게 그 사십 년을 인도하셨다고 고백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이 박한 식물 즉, 만나를 이제 너무 지긋지긋해서 못 먹겠다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는 그 길, 즉 제사장 백성으로써 형제와 화목하여서 열방 앞에 여호와의 평화를 증거해야 하는 그 길이 너무 황량해서 싫다고 합니다.

 

치유 이적의 두 가지 목적

 

나아만의 치유 사건은 그로 여호와만이 유일한 참 신임을 인정하게 했습니다. 심지어 금 쥐 형상을 만든 블레셋 복술자마저도 젓 떼지 않은 두 암소가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이스라엘 지경으로 옮기는지 시험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신의 권능으로 독종이 발생했고 자기들 신들보다 더 권능이 커다는 점을 인정하겠다는 뜻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끄는 모든 기적의, 아니 그분의 모든 역사의 첫째 목적은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더러 자신들의 죄악을, 특별히 당신의 영광을 높이지 못한 잘못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당신의 백성답게 거룩하게 살게 하려는 뜻뿐입니다.

 

본문에서도 그러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원망하는 패역을 또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은 벌만 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회개케 하려는 목적으로 지금껏 불 뱀을 잘 보호해주다가 물게 버려두었습니다. 지금껏 받아누렸던 은혜와 비교해보라는 뜻입니다.

 

백성들이 진정으로 회개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당장 죽게 되었으니 모세에게 와서 여호와와 당신께 범죄했으니 여호와께 기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7절) 하나님도 그들의 믿음과 상관없이 아무 공로 없이 놋 뱀을 쳐다만 봐도 낫게 해주었습니다. 백성들로 다시금 온전한 믿음으로 범사에 당신만 소망하게끔 끝까지 긍휼을 베푼 것입니다. 양보하고 또 양보하고 또 양보해도 재고가 바닥나지 않는 하나님만의 자비였습니다.

 

하나님의 치유가 가장 하나님답게 드러난 것은, 다른 신들이 아니 다른 신은 아예 없으니까 다른 종교가 절대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모습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찔림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고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 사함과 영생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모세에게도 반석을 두 번이나 지팡이로 쳤던 잘못을 다시 깊이 회개했을 것입니다. 말씀만으로 역사하는 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말씀만으로 역사한다는 것이 단순히 권능이 크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격 조건 공로 열성 종교적 의지적 믿음조차도 당신의 역사하심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분만 전적으로 의탁하고 마음을 완전히 푹 내려놓기만 하면 됩니다. 원수조차도 구원해주시는 광대한 긍휼을 지니신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말씀만으로 역사함은 당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더러 당신만의 영원한 진리를 깨닫기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며, 무엇보다 당신의 백성을 향한 사랑의 깊이 높이 넓이 길이가 얼마나 엄청난지 정확히 알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진리를 통해 진리가 더 진리 되게 하기 위해서 성령의 권능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의 역사가 신자로 이끄는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오직 신자가 거룩해지고 하나님을 온전히 온 백성 앞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솔직히 자신을 되돌아보십시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주님의 놋 뱀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쓰러지고 또 넘어져도 다시 그분께로 진정으로 돌아가면 언제든 일으켜 세워 당신 자녀답게 살게 해주는 그분을 온전히 의탁합니까? 엘리사처럼 이방에 없는 전혀 다른 신을 믿는 자다운 모습을 세상 앞에 보여주고 있습니까? 나아만 같은 불신자 중의 최고 권력자나 최고 부자가 양심에 크게 찔림을 받을 만큼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으로 거룩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까?

 

아니면 본문의 이스라엘처럼 지금 서있는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해 있습니까? 최근에는 인생살이가 더 삭막해지고 먹고 사는 일조차 많이 버거워지긴 했습니다. 현재 서있는 길이 현실적으로 아주 어려울 수 있습니다. 식물이 너무 박해 먹기도 지겨울 수 있습니다. 물이 갈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언제 그 길이 끝날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길이 바로 하나님이 지시한, 세우신 길임을 믿습니까? 그것도 오직 당신을 닮아 거룩해지고 그 거룩해진 모습으로 세상과 사람들 앞에 당신을 증거하라고 그곳에 세우셨음을 믿습니까?

 

혹시라도 치유 받기 전의 나아만처럼 신에게 선물을 많이 바쳐야 받을 복도 많으리라 기대하는 마음으로 교회생활에만 열심과 충성을 다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어쩌면 아직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불 뱀에 물릴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은 놋 뱀을 만들어 그 차제가 능력이 있는 양 우상으로 섬겼으나 히스기아 왕이 종교개혁을 하면서 파괴했습니다.(왕하18:4) 또 그런 우상숭배가 결국은 유다 왕국의 심판을 불러왔음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본문 사건을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바라보니까 나았다고 해석해선 많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조건 없는 은혜가 먼저 베풀어지고 이스라엘은 단순히 그에 반응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은 항상 먼저 실현됩니다.(요일4:10) 인간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느냐 않느냐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으로 신자와 불신자가 나눠지며, 그래서 신자의 매일의 삶은 그 오묘하고 엄청난 사랑 가운데 붙잡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9/15/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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