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5:8-10) 하나님은 코로나 사태를 기뻐하신다.
돌아온 탕자 시리즈 (3)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15:8-10)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세 가지
성경을 읽을 때는 반드시 앞뒤 문맥을 관통하는 의미의 흐름부터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본문의 해석조차 저자가 의도한 내용과 달라질 소지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사회에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세리와 죄인과의 교제를 아무렇지 않게 행했습니다. 그것을 비난하는 유대인들에게 당신께서 그러시는 이유를 세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주제를 세 번이나 강조했다는 것은 당연히 주님이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세 비유에서 되찾는 대상이 각기 다릅니다. 첫째 비유에서 양은 가축을, 둘째인 본 비유에서 드라크마는 재물을, 셋째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가족을 상징합니다. 누구나 가축보다는 재물을, 또 재물보다 가족을 더 귀하게 여기므로 그 순서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세리와 죄인을 모든 인간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그 셋에 해당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꿔 말해 주님은 유대인들을 이렇게 꾸중한 것입니다. “너희도 그 셋을 평소에 아주 소중히 여기고 있지 않느냐? 그 중에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끝까지 찾을 것이고 찾으면 크게 기뻐하지 않느냐? 내가 지금 그렇게 했을 뿐인데 왜 너희가 나를 뒤에서 손가락질 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 회당에 들렀더니 마침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율법으로 꼬투리 잡으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지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마12:11-13)
인간이 짐승이나 물질보다 소중한 것은 어린아이도 아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회에서 소외되어 아무도 만나주지도 않는 비천한 사람을 정말로 너희가 소유한 가축과 특별히 돈보다 더 귀하게 여기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정말로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이라면 친구나 가까운 이웃이 아니라 아무도 상종 않으려는 자들에게 너희가 가진 가축을 잡고 돈을 소비해서라도 한 끼 식사를 따뜻하게 대접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은 안식일에 양을 건지고 병자를 고치는 것은 선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하나님과의 교제보다도 그 일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 됩니다. 인간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이 세 비유처럼 하나님은 잃어버린 죄인을 너무 사랑하기에 찾으면 크게 기뻐하시는데 신자더러 그런 기쁨에 참여하고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예배이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법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결혼반지를 찾는 여인
이런 전체적인 맥락에서 둘째 비유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가장 먼저 드라크마를 찾으시는 여인 즉,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드라크마는 헬라 화폐인데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로마 화폐로 바꾸면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데나리온과 맞먹습니다. 비유이긴 하지만 하루 일당밖에 안 되는 적은 돈을 끝까지 찾아야만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고대에선 하루치 양식을 조달하는 것이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에게 기도의 모범을 가르치면서 유일하게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기도하라고 한 것이 바로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가진 전 재산인 한 고드란트를 헌금하자 예수님이 그 믿음을 칭찬했습니다.(막12:42) 고드란트는 드라크마의 1/64정도였으니 한 드라크마만 해도 당시로선 아주 소중했습니다.
무엇보다 열 드라크마에서 하나를 잃은 것은 당시 관습으로 따지면 단순히 돈이 없어진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너무나 중대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남자가 여자를 아내로 맞으면 사랑의 증표로 열 드라크마를 줄에 꿰어서 주면 여자는 그것을 자신의 머리에 매달아 장식했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을 서약하는 결혼반지인 셈입니다. 줄에 꿰었으니까 가끔 잊어버리는 일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열 드라크마라고 말했을 때 현장의 유대인들은 그 머리띠를 떠올렸을 것이며 하나라도 잃어버린 여인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쉽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반지를 잃어버린 여인에겐 결혼생활 나아가 인생을 잃은 것 같은 안타까움이 생길 것입니다. 어떻게든 다시 찾으려 할 것이며 원래 가격보다 더 많은 현상금도 걸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집은 일반적으로 창문이 거의 없는 방 한 칸에 부엌 거실 침실을 함께 쓰는 구조로 주로 흙으로 지었습니다. 그래서 낮에도 컴컴할 수 있고 먼지가 바닥에 쌓여 있습니다. 잃어버린 동전을 찾으려면 등불부터 켜고 혹시 먼지에 덮였는지 모르니까 일일이 쓸어내야 하고 필요하면 집안의 모든 가구를 들어내야 합니다. 기어이 결혼반지를 다시 찾은 기쁨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데 주님은 지금 그런 기쁨으로 세리와 죄인을 만나서 교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가 아니라 회심
반면에 잃어버려진 양이나 드라크마로선 목자나 여주인을 스스로는 절대 찾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에선 그와 반대되는 의미로 말했습니다. 두 비유 모두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기뻐한다고(7, 10절)고 합니다. 양과 드라크마 스스로는 목자나 여인을 찾아갈 수 없는데도 세리나 죄인이 회개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스스로 모순되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말 번역이 조금 잘못된 것입니다.
회개(悔改)는 도덕적으로 잘못한 일들을 반성하여서(悔) 고쳐나가는(改) 것을 뜻합니다. 만약 스스로 회개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죽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십자가 은혜의 구원과 반대되는 스스로 노력해서 취득하는 자력(自力)구원이 되고 율법주의 도덕주의 신앙으로 변질합니다.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율법을 준행하는지 여부로 구원을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회개로 번역된 헬라 원어 메타노이아는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바꿔 먹는 것으로 한자로 치면 되돌리는 ‘회’(回)와 마음 ‘심’(心)을 합친 회심입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인간 중심에서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살아서 인간만사를 통치하시므로 그분의 백성이라면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최고로 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게 된 상황에 비추어보면 회심한다는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은 평소부터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들에게 지은 죄가 많다고 반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지라 양심은 그런대로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비추어서 구원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 외에는 어떤 다른 가르침도 없었고 그들의 규정이 옳은 것도 같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상 그들은 구원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유대 사회에 정말로 충격적인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마9:9) 세리인 마태는 꿈도 꾸지 않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먼저 제자로 불러냈습니다.
이는 당시로선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단순히 식사 교제하는 것만도 추궁당하고 함께 출교당할 수 있는데도 랍비가 세리를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유대사회에 금방 소문이 퍼졌을 것입니다. 일개 이름 없는 목사가 소속 교단에서 헌법으로 규정해 놓은 것을 대놓고 어겼습니다. 당장 목사 자격은 박탈당하고 이단으로 공고되어 파문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태도 그 부름을 받자마자 돈을 많이 벌고 로마 당국의 권세까지 행사할 수 있는 그 좋은 직업을 버리고 곧바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일차적으로 성령의 권능이 마태의 심령에 강력히 역사했기 때문입니다. 틀림없이 마태 쪽에서도 자기 직업에 대해 크게 회의하고 있었고 또 자신이 받고 있는 유대사회에서의 차별대우에 대해 부당하다고 느끼고 하나님에게 구원의 길을 묻고 있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 얼마 후에 마태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이 많이 참석한 식사교제를 했고 그로 인해 바리새인과 본문과 동일한 논쟁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마태는 주님을 따르면서 말씀으로 율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고 무엇보다 외적 조건으로는 사람을 절대로 차별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동료 세리와 같은 처지의 죄인들에게 이 유별나고 긍휼이 많은 랍비에 대해 넘치도록 자랑했을 것입니다.
당시의 랍비 교육은 함께 숙식을 하면서 스승이 가르치고 행동으로 본을 보이면 그대로 따라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스승 예수님이 세리를 제자로 삼아 교제를 나누니까 제자 마태도 예수님을 꼭 만나게 해주고 싶어서 세리와 죄인을 초대한 것입니다. 그 잔치 이후로 세리와 죄인들은 계속해서 주님과 편안한 마음으로 교제를 나눈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4:16)고 선포했습니다. 자신의 신령함과 경건함을 자랑하려는 교만이 아닙니다. 율법에 능한 랍비 출신인지라 이전의 그런 교수법을 연상한 것입니다. 그 본문에서 바울의 뜻은 서로 사랑하는 차원에서 자기를 본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참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로 새 사람으로 변했고 또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체험한 신자라면 주님의 본을 따라 이웃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기는 오직 예수님만 따르고 있으니 너희도 나처럼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뜻이었습니다.
권세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가식적 형식적으로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추종자를 모아서 종교적 권력을 형성하려는 의도도 전혀 없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주님이 자기들 때문에 핍박당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뒤에서 비난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그들이 틀렸다고 세 비유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들로선 이 분은 끝까지 자기들 편에 서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과 함께라면 자기들이 어떤 비방 멸시를 받아도 좋다는 생각으로 맨 앞자리로 담대히 나온 것입니다.
갑에게 항상 당하기만 하는 을의 입장에선 두려움이 몸에 배어서 함부로 갑에게 맞서지 못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그런 타성을 충분히 이겨낼 만큼 예수님의 말씀에 위로와 힘이 넘쳐서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으로 자기들을 보호해 주리라 믿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하나라도 빠트리지 않으려고 맨 앞에 자리 잡은 것입니다. 예배당 맨 앞에 앉는 사람이 담임목사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새겨들으려는 열성과 소망이 있듯이 말입니다.
지금껏 어떤 랍비도 이런 마음을 생기게 해준 적이 없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 중에는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 같이 온유하고 합리적인 사람도 있었고 또 율법도 아주 잘 가르치는 랍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도 많이 들어봤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와는 차원이 전혀 달랐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사역초기인 산상수훈을 들을 때부터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9)고 하면서 크게 놀랐지 않습니까?
똑같이 모세 율법에 관해 가르쳤는데도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설교였습니다. 평생 처음 느끼는 평강과 기쁨이 세리와 죄인에게 넘치도록 부어졌습니다. 자기들이 스스로 노력해서 혹은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는 감동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이었습니다. 요컨대 세리와 죄인은 자기들을 하나님이 절대로 기뻐해줄 리 없다고 포기했는데 이제 하나님이 자기들도 아주 기뻐해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이 노력했거나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느낀 것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바꿔준 것입니다. 따라서 7절과 10절은 한 사람의 죄인이라도 예수님으로 인해 회심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또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맨 앞으로 나왔듯이 주님의 그런 기쁨을 적극적 능동적으로 받아들여야하기에 죄인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인 신자
이 드라크마의 비유는 결혼 풍습에 비춘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유비합니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결혼으로 맺어지는 것은 인생에서 최고로 즐거운 일입니다. 현실에선 결혼생활이 많은 난관과 다툼을 동반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부부관계는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이브의 경우처럼 정말로 하나 숨길 것 없이 평생토록 순전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이브를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고 불렀듯이 서로를 자기와 똑같이 귀하게 여기고 끝까지 아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관계를 전제로 해서 구세주로서 당신의 신부를 찾으려 오셨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지금 예수님의 신부로 간택된 것입니다. 양의 비유에선 목자가 자기 생명을 걸고서라도 찾아오는 데에 초점이 있었다면, 드라크마 비유에선 그렇게 찾아서 주님과 개인적인 관계가 맺어지면 평생 결혼생활을 하는 것과 같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믿어 구원 얻는 것은 그분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 후에 신앙 생활하는 것도 매일매일 그분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 비유에선 똑같이 찾는 자 즉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주제를 강조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으로 택한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성자 하나님이 그 택함 받은 자를 기쁨으로 영접하고 교제할 때에 성령 하나님이 그들 안에 하늘의 기쁨을 심어주십니다. 그럼으로써 회심한 자가 하나님을 기뻐하면 그 모습을 하늘에서 보시고 하나님도 크게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유대사회에서 세리와 죄인들을 상종조차 않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으로 잘못한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잔치를 훼방하여서 그분의 큰 기쁨을 큰 분노로 바꾸는 일이 됩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을 차별한 것은 자기들이 그들에 비해 조금 우월하다고 여기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사회적인 신분과 계급은 물론이고 인간됨의 성품 품위 등에서 자기들과 완전히 다르고 도저히 따라올 수준이 안 되기에 밥도 함께 먹기 싫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잔치 상을 뒤엎은 크나큰 죄인지라 예수님이 당신의 공사역 중에 유일하게 그들과 또 그런 행위를 크게 야단친 것입니다.
외모로 차별하지 말라.
구원은 인간 쪽의 선행과 치성으로, 나아가 간절한 회개와 뜨거운 믿음으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확증했습니다. 우리에게 외모로 구원 받을만한 기쁜 점이 전혀 없었기에 하나님만의 주권적 선택에 따라서 선물로 주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구원 받는 신자도 당연히 주님이 세 비유에서 가르치듯이 외모로 남을 차별하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자기를 본받으라고 권면한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성도는 교회 안에서부터 남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는 연습을 한 후에 세상에 나가서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이웃과 성도를 외모로 차별한다면 사실상 믿음이 없거나 완전히 힘을 읽은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을 온전히 체험적으로 받아 본 것이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너무 심하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태처럼 아무 소망 없던 세리였는데 예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당신의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전적으로 공짜로 받은 선물이었습니다. 성도는 같은 선물을 받은 자이고 불신자는 아직 그 선물을 받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뭐가 더 잘났다고 남을 차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거기다 신자가 된 후에도 조금만 나쁜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지 않는 것 아닐까라는 의심과 불만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럼 그분이 나를 정말로 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물론 여전히 고달픈 현실 삶에 묶여 있고 어리석고 연약한 본성에 제한 받는지라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종종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리였던 마태가 제자로 부름 받았는데도 주님과 함께 생활하는 삼년 내내 주님에 대해 의심하고 불만을 가지는 꼴입니다. 신앙상의 어떤 잘못을 범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십자가 구원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좋고 예쁜 구석이라곤 단 하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그분이 당신의 권위는 물론 자존심 다 없애고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골고다에선 권세 있는 말씀도 잠시 멈추었습니다. 대신에 당신의 몸 전부를 던져서 당신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실현하셨고 당신의 기쁨 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한 것이 구원입니다.
지금도 그 기쁨은 단 한 치의 감소가 없이 여전히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을 때는 그분을 대적하며 원수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된 후에는 어쨌든 모든 면에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최소한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어려울 때마다 그분에게 기도를 합니다. 그럼 주님은 더러운 옷 그대로 입고 있던 처음 믿을 때보다는 우리를 분명 더 기뻐하실 것 아닙니까?
주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도 사실은 아주 엄청난 일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생각과 노력으로 회개한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완전히 뒤집는 회심의 은혜를 주셨기에 비로소 가능했던 우리 인생의 최고의 기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고 찾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주님은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고 그에 합당하게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주님이 신랑이고 내가 신부로서 한 집에서 스물네 시간 삼백육십오 일을 함께 지낸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우리가 어떤 기쁨과 은혜 가운데 있는지 또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상상할 수 없는 주님의 기쁨
주님의 인간을 향한 기쁨은 우리가 추측 기대를 넘는 것은 물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합니다. 코로나 사태에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질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은 일을 기뻐할 리는 없습니다. 코로나가 아니라도 사람은 누구나 언제가 죽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코로나로 인해 당신께로 돌아오는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에 기뻐하십니다.
이번에 다들 목숨이 너무 연약하며 아무리 재물과 권력이 많아도 스스로 자기 삶과 인생을 절대 통제할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풍요보다 더 중요한 무엇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영원한 것을 소망하거나 최소한 탐구해볼 마음들이 생겼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성경판매가 늘어났고 영적 문제에 관심이 더 생겼다는 것이 통계로 입증되었습니다.
최근에 많은 신자들이 트럼프에 실망했습니다. 트럼프를 하나님의 종으로 착각했기 때문인데 그를 하나님이 들어 사용한 것일 뿐입니다. 트럼프에게 실망하게 된 것 자체가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와 성정이 똑같고 죄에 찌든 한 인간이 자기 권세와 능력으로 보장해주겠다는 기쁨을 절대로 소망 혹은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 한에는 해 아래서 하는 아무리 거창하고 의로운 일이라도 헛되고 헛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트럼프를 통해서 절감했지 않습니까?
잃어버린 양과 드라크마의 비유를 예수님의 다른 말씀으로 풀자면 이렇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6:29,30) 세리와 죄인이라도 하나님에겐 들풀보다 훨씬 더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면 솔로몬의 모든 영광을 입어도 들풀보다 못합니다. 솔로몬이 지은 화려한 성전만 자랑하고 그곳에 모여 제사만 고집하며 그 제사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을 자기들이 규정해서 차별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기쁨에 결코 참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와 신자가 혹시라도 이런 모습이 아닐지 정말로 진지하고 심각하게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올해, 아니 평생토록 이런저런 현실적 고난이 겹칠 것입니다. 신앙으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뿐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나는 영원한 예수님의 기쁨 안에 들어와 있는 그분의 신부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신부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이 생겨도 내 삶과 인생을 주님께서 더욱 아름답고 활기차고 기쁘게 만들어 가기 위한 필연적인 하나의 과정일 뿐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나 사태에도 오히려 평강과 기쁨을 잃지 않고 세상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의 빛을 더욱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이 예수님입니다. 우리와 결혼한 증표로 열 드라크마로 꿰어 만든 줄을 예수님이 당신의 머리에 붙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잃어버릴 리는 전혀 없습니다. 신자가 세상에 미련을 못 버리거나 자기 자존심 세우려다 줄이 터져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 끝까지 찾아내어 그 줄에 다시 꿰어주실 것입니다. 더 이상 내 삶과 인생에 대해 걱정할 필요나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1/24/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