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5:20,21) 믿음의 본질은 뻔뻔함이다.
돌아온 탕자 시리즈 (6)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눅15:20,21)
아들을 먼저 알아본 아버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뒤에서 수군거렸습니다.(눅15:2) 그 비난을 듣자 주님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세 가지 비유로 대답했습니다. 인간 랍비라면 오랜 시간 궁리해도 도저히 지어낼 수 없는 아주 정교한 스토리에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계시할 수 있는 영적 진리가 풍성히 내포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세 번째 비유는 기승전결을 갖춘 두 가지 이야기로 아버지와 두 아들의 관계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우선 탕자인 둘째 아들은 타국에서 돼지사료조차 얻어먹지 못해 완전히 굶어 죽을 판국이 되자 비로소 고향 집이 생각났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 군이 얼마나 많은가”(17절)라고 말했습니다. 평소에 아버지는 종들로 배불리 먹게 해주는 인자한 분이었을 뿐 아니라 고국에는 흉년이 들었다는 소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자 아버지가 기뻐서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큰 잔치를 벌려주었으나 그로 인해 큰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비유의 내용이 현재의 상황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세리와 죄인은 자기들이 둘째 아들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첫째 아들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곧바로 눈치 챘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에겐 주님의 비유는 따뜻한 위로가 된 반면에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는 엄중한 경고로 찔림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럼 세리와 죄인에 해당되는 비유 속의 둘째 아들을 통해서 그들이 과연 어떻게 따뜻한 위로를 받았을지 살펴봐야만 할 것입니다.
가장 주목해야 할 말씀은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0절)입니다. 탕자의 비유만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잘 드러내는 것도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바로 이 구절 때문에 그러합니다. 예수님이 세 비유를 통 털어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가 이 한 구절 안에 다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알아봤습니다. 시력으로 따지면 늙은 아버지보다 아들이 훨씬 더 좋았을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 집을 향해서 걸어오고 있었고 아버지는 이민 가버린 아들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일상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종들을 많이 거느린 아버지는 그 지위와 재산에 합당한 채색 옷을 입고 있었을 것이며 아들은 완전히 거지꼴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따져도 아들이 아버지를 먼저 알아봐야 할 상황인데 예수님은 그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거리가 멀다는 표현은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사람이라는 형체까지는 몰라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식별할 수 없는 거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들인줄 당장 알아보고 측은히 여기고 달려갔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가 아들이 이제나 저제나 돌아올까 항상 기다리면서 집으로 오는 길을 수시로 쳐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하자면 제가 30여 년 전에 가족을 데리고 미국에서 새출발해보려고 이민 왔습니다. 나중에 어머님께 들었는데 그 후로 아버지에게 생긴 일상적인 습관이 아침저녁으로 먼 동쪽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들 구실을 제대로 못해 걱정만 끼쳐드렸던 저는 물론이고 사랑하는 손자들을 한시도 잊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비유에서도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이민 간 나라의 소식을 항상 귀담아 들었을 것입니다. 저희가 미국 온 이후로 TV에서 미국에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매번 부모님이 먼저 안부전화를 걸어오셨던 것과 같습니다. 마침 큰 흉년이 들어서 돼지 먹일 사료마저 사람이 먹어야 할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아들의 모든 것을 꿰뚫어 아시기에 돈을 탕진하고 실패할 것을 예상했던 터라 이제 얼마 안 있어 아들이 돌아오리라 짐작했을 것입니다. 수시로 대문에 서서 먼 길을 쳐다보는 것이 매일 행하는 습관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들의 행색이 형편없었을 텐데도 먼저 알아봤습니다. 흔히 부모는 자식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아들의 체격, 신장, 걸음걸이, 몸짓 등이 비디오 영상처럼 찍혀져 아버지의 기억에 명료하게 저장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속속들이 아들보다 더 잘 알지만 자식은 부모를 그렇게 알지 못합니다.
한국의 아이돌 그룹의 오래된 노래에 어머니는 짜장면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는 아주 유명한 가사가 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짜장면을 하나만 시켜서 아들에게 주고는 당신은 싫어한다고 거짓말 했지만 아들이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커서 철이 좀 들자 비로소 엄마가 거짓말 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자식의 부모 사랑은 부모의 자식 사랑과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표피적이고 감상적입니다.
진정성이 부족한 회개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계기를 다시 살펴봅시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7절) 제일 먼저 스스로 돌이킨 내용은 아버지 집에 양식이 많으니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것도 돼지가 먹는 열매조차 얻어먹지 못하게 되자 비로소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입니다. 스스로 돌이키긴 했지만 아버지 집의 양식부터 그리워진 것이지 자신이 행한 잘못을 먼저 뉘우치지 않았고 아버지를 떠올린 것도 아닙니다.
그 후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18.19절)고 말했습니다. 가장 먼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차한 모습으로 아버지께 돌아오게 된 경위를 그렇게 변명하리라고 작정했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말은 순전한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분노를 진정시켜보려는 방안이자 핑계였던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일차적인 목적은 품 군이라도 되어서 생존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비록 쫄딱 망했을지라도 자기 재산을 자기 생각대로 소비했으니까 지난 삶에 대해 자기에게 잘못이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송구한 마음조차 느끼지 못하는 몰염치한 자라는 뜻은 아닙니다. 아버지에게 효도 한번 못 했고 비참한 꼴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도무지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타국에서 고생하고 멸시 받는 동안에 아버지와 형의 생각도 가끔 났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생적으로 가족에 대해선 아주 애틋한 감정을 갖게 되고 또 하나님의 거룩하신 형상을 닮게 지어진지라 잘못을 범하면 도덕적 가책도 느끼기 마련입니다.
아버지나 하늘에 죄를 지었다는 것이 빈말은 아닐지라도 풍성한 양식부터 먼저 떠올렸으니 이 아들의 회개에는 진정성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다시 아들로 받아줄 지에 관해선 전혀 자신이 없었고 단지 일꾼으로 받아만 주어도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고 불효했기에 아들로 자격이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몫의 유산을 다 받아서 탕진했으니 아들로서의 신분마저 소진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더 이상 받을 재산은 없고 온전한 사랑도 기대할 수 없으니 아들이라는 신분이 회복되리라고는 아예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마저 사회적 경제적 여건에 따라서 중지 내지 취소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요컨대 그의 인생관은 오직 풍부하게 먹고 마시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모든 일을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자기 뜻대로 시행하려들었습니다.
제가 아이들의 끼니를 이을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쫄딱 망한 후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 때에 제가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바로 이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것과 똑 같았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인생이 너무 허망하다든지 하나님을 더 알고 싶다는 영적인 갈증도 분명히 있었으나, 그에 대한 진정성과 심각성이 현실의 고통을 해소하려는 소망보다 훨씬 약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아들처럼 하나님의 저를 향한 마음은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나를 속속들이 알기에 먼저 나를 알아보고 달려와서 안고 입을 맞춰 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교회에 출석하게 된 배경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간섭이 일일이 작용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실제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성인이 되어서 교회를 출석하게 되는 이유의 대부분이 현실적 고난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많은 종교들 중에서 기독교가 병이 낫고 사업이 흥하는 등 기도의 응답이 잘 되는 것 같아서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불신자들로선 성경을 자세히 읽거나 배워볼 기회라곤 없으니 너무나 자연스런 생각이고 결정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핵심 주제인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죽음이 의미하는 바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따르고 뜨겁게 기도하면 내 형편이 나아질 것이라고만 기대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이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고 세상에서 착하게 살면 큰 복을 주고 그 반대이면 벌을 주는 분으로만 인식한 것입니다. 신자들이 전도하는 주된 내용도 예수 믿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형통하니까 일단 교회에 나오시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될 줄 믿고 교회에 나왔지만 막상 성경을 파고 들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고 또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키스
아들은 지금 누가 알아볼까봐 부끄러워서라도 아버지 집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먼저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동안 하도 굶어서 피골이 상접했고 옷은 다 헤지고 먼 길을 걸어오느라 먼지를 잔뜩 덮어쓰고 있습니다. 거지 중에 상거지 꼴이고 몸에서 냄새도 나니까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고 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멀리서 먼저 알아보고 버선발로 뛰어와서 안고는 입을 맞추어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엄청난 꾸중을 들으리라 예상하고 잔뜩 기가 죽어서 고개도 못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전혀 아랑곳 않고 한마디 말도 없이 끌어안아 주셨습니다. “아들아 네 처참했던 처지와 현재의 심정을 잘 안다. 늦게라도 너무 잘 돌아왔다. 이제 맘 놓고 푹 쉬었다가 다시 시작해보자.”라는 것이 그 포옹의 의미였을 것입니다.
고대에 남자들끼리 입을 맞추는 것은 상대에 대한 호감과 존경을 드러내는 일상적인 인사법이었습니다. 고용주가 품꾼에게 그런 키스를 하는 법은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않고 아들로 다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입을 맞춘 것입니다. 탕자가 그 키스에 담긴 뜻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아니 그전에 아버지의 달려오는 모습과 그 얼굴 표정에 이미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읽었을 것입니다. 그 안에 분노 야단 추궁 심문 하는 의미는 단 하나 없음도 눈치 챘을 것입니다.
그 입맞춤 후에야 아들은 진정한 회개의 고백을 합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21절) 품 군이 되겠다는 언급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아들의 자격이라곤 없는 자기를 전혀 꾸중도 않고 어떻게 다시 아들 취급해주실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줄이면 “어찌 나 같은 자를?(Why me?)”이라는 뜻입니다.
비로소 아버지와 아들의 인격적 관계를 바탕으로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친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로 받아들였다고 당신의 행동으로 이미 선언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엔 구태여 말로서 서로 묻고 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눈빛만 봐도 서로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돌아오려고 출발할 때에는 자기가 생각해도 치사한 변명부터 하리라 계획했으나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아버지를 너무 몰랐던 아들인지라 쓸데없는 걱정만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키스 한 번으로 완전히 파산 되었던 그의 인생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허랑방탕했던 지난 세월의 모든 허물도 단번에 지워졌습니다. 이제 다시 출발할 일만 남았고 아버지가 재산을 나눠줄 때부터 계획했던 대로 이전과 같은 잘못은 앞으로는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자신의 호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상대가 자기를 무시했다고 크게 화를 냅니다. 지금 둘째 아들이 오해한 것처럼 아버지를 온전한 아버지로서 대우하지 않는 것만큼 큰 불효이자 죄는 없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잘못은 그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가 에덴의 주인이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잘못이자 그 원죄 하에 태어나는 불신자들이 하나님에게 범하는 죄입니다.
저처럼 교회에 처음 나올 때는 삼시 세끼라도 해결 받고 싶어서 즉, 하나님을 오해한 채로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대해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으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복음을 순전히 받아들인 신자들의 공통적인 고백이 하나 있습니다. 이전부터 자기가 있었어야만 했던 곳에 이제야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고 저절로 눈물이 고인다는 것입니다. 왜 진작 빨리 교회에 나오지 않았는지 후회까지 됩니다.
현실적 형편이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고 여전히 고난이나 질병 중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전처럼 그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했던 상태와는 전혀 달라집니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마음에 평안이 가득 찹니다. 쉽게 말해 아버지 집에 내가 돌아왔다는 인식이 들며 무슨 문제든 아버지가 해결해주실 것 같습니다. 혹시 해결 안 해줄지라도 그렇게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편안한 기분이 듭니다.
그러면서 세상이 줄 수 없는 그런 평안이 어떤 연유인지도 알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피에 힘입으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된다고 선언합니다.(히10:19) 그 담력의 근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기시면서 죄 사함을 받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진 사건 때문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매년 지성소에 희생양의 피를 뿌려야만 했으나 완전한 제물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를 흘리셨습니다. 하나님께 영단번의 완전한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그 은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모든 죄의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집니다. 성막의 휘장 가운데로 길이 활짝 열려졌기에 대제사장의 중보 없이도 신자 각자가 성령의 인도로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신자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던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리면 주님은 이 비유의 아버지처럼 큰 기쁨으로 맞아주시기에 신자는 주님의 평강과 안식에 함께 들어가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한 가지
원죄 하의 인간은 오직 자기만 높이려 드니까 세상은 무한 경쟁을 펼치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 모든 것을 희생할만한 진정한 사랑은 부모 자식 간에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최근 한국에선 자식에게 유산을 절대로 미리 나눠주지 말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자기 몫을 미리 받으면 효도하지 않으니까 끝까지 받을 몫을 기대하게 만들어야 잘 섬긴다는 웃지 못 할 슬픈 현실을 반영한 말이지 않습니까? 이천 년 전의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가 아버지마저 돈으로 따지는 21세기에도 변함 없는 인간의 본성을 생생히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은 물론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은 돈만 주인으로 모실 것입니다. 여호와를 믿고 따랐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누구나 돈이 지배하는 이 땅에서 이 땅의 질서와 관습대로 살 수밖에 없지만 진정한 평강과 안식은 하나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모든 선하신 것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데 그분을 배제하면 평생을 아무리 재산을 많이 모아도 갈급하고 허망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당신을 떠나서는 어떤 선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겸손히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처지에 빠져있던 당신께로 두 손 들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인정만 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본문의 탕자처럼 죽지 않기 위해서 먹고 마실 것을 구하러 와도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전적으로 무력하고 무지하기에 하나님만이 나를 살려주실 수 있다는 진실한 고백과 함께라면 말입니다. 당장은 하나님의 속성과 섭리하시는 원리를 잘 몰라도 됩니다. 그분의 그분다우심만 순전히 믿으면 성령이 역사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이 예수 십자가를 통해 베풀어지고 이전의 교만하고 완악했던 심령을 깨끗케 해주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회복시켜서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
이 탕자는 세상 어느 누구도 인간 취급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친형마저 그를 미워했습니다. 오직 아버지 즉 하나님만이 그를 온전히 사람으로 나아가 아들로 대우해주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유대사회에서의 처지가 바로 그랬는데 유일하게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사랑으로 아들처럼 그들과 교제해주셨습니다.
성경의 하나님께 쓰임 받은 큰 인물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었던 자라곤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세는 살인자였고, 다윗도 충직한 부하의 아내와 간음하고 그 남편까지 죽였고, 바울마저 스데반은 물론 예수 믿는 자를 죽이는 자였지 않습니까? 도덕적 종교적으로는 도무지 의롭다 칭할 수 없고 예수님 당시의 세리와 죄인과도 비교 안 될 큰 죄에 빠진 자들인데도 주님은 사랑해주셨습니다. 인간의 상식과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하나님만의 사랑인지라 그들 모두도 “어찌 나 같은 자를?”이라는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허랑방탕하게 살았어도 이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들이 아니었던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끝까지 타국에 남아서 자기 멋대로 살았다면 아버지 사랑은커녕 그 심정도 평생 알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끝까지 완악하게 거역하는 불신자의 운명입니다. 돈만 주인으로 모시고 살았던 때처럼 죽어서도 아버지와 아무런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살아서도 죽어서도 사탄의 나라에서만 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의 십자가 긍휼을 끝까지 믿지 않아 심판받게 되는 이유를 당신께서 빛으로 오셨으나 빛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선언했습니다.(요3:19) 이 탕자도 처음에는 아버지보다 돈을 더 사랑했기에 사탄이 지배한 다른 나라로 가버렸던 것입니다. 그대로 두면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이 돼지 취급도 받지 못하게 만들어서라도 기어이 당신의 자녀로 다시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
비유에서 주목할 사항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탕자가 아버지께로 되돌아가게 된 계기가 아주 극적인 상황인 것 같지만 사실은 흔히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흉년은 고대에선 자주 있었습니다. 아버지 유산을 미리 받을 수도 있고 사업하다가 망하는 것은 너무 흔한 일입니다. 돈이 있으면 주변에 사람이 몰리고 없으면 돼지 취급도 안 해주는 것이 유사 이래의 인간사회의 변함없는 관습입니다. 초자연적인 사건이 사실상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꿰뚫어 아시고 실패하고 언제쯤 돌아오리라는 것까지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갔지만 아버지가 먼저 달려와 안아주었습니다. 인생이 자기 뜻대로 행하는 것 같아도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다 주관하십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도 일 년 365일 24 시간 즉, 일상적 상황에서도 한 결 같이 신자에게 베풀어집니다. 그분이 일상적인 모습으로 신자와 항상 함께 하고 계시니까 신자도 힘들거나 갈급하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당신께로 나갈 수 있고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가 말하는 대로 내가 지금 처해 있는 사건과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실제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로 되돌아갈 수 있는 담력, 쉬운 말로 바꿔서 뻔뻔함입니다. 아무리 죄로 넘어졌고 지금도 세상과 사람과 죄악과 사탄이 물고 늘어지고 있어도 예수님이 내 편이고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고 나는 그분의 사랑받는 백성이라고 큰 소리 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정말로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야만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은 일부러 비굴함을 가장 하거나 자기 권리처럼 강요할 성격이 전혀 아닙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한다는 것은 아들 또한 정말로 아들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숨긴 것 하나 남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어서 완전히 맡겨야 합니다. 그분께 숨길 수 있다거나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 반대로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죄책감과 자책감에 휩싸여도 그분 앞에 나가는 것을 절대로 주저해선 안 됩니다. 죄를 씻는 문제나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문제나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으니까 더더욱 있는 그대로 주님께 하나 빠짐없이 아뢰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주셨고 당신의 모든 수치까지 다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유일하게 예수님만이 세상 모든 이에게 남이 모르는 수치, 억울함, 고난, 자책, 죄책, 염려, 분노 등등 모든 것을 당신께 다 털어놓으라고 요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떤 경우에도 나를 사랑하신다는 자신감이 있습니까? 그분은 내가 심지어 큰 잘못을 범해도 끝까지 내 편이라는 뻔뻔함이 있습니까? 그래서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게 돌아가도 평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들에 주저 없이 예스라고 대답 못해도 됩니다. 탕자는 인간사회에서 완전히 실패해 죽기 직전에 돌아왔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아무 말씀 없이 십자가에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신자가 자기 믿음을 점검하는 기준은 사실상 하나입니다. 돈과 예수님 중에 누가 진짜 자기 주인인지 여부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수시로 돈에 눈길이 가더라도 다시 정신 차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배짱이 있는지 여부입니다.
(2/14/2021)
이번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항상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이해할 때마다 예수님의 구원자 되심, 주님되심,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는 깊이 묵상했지만,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대한 체험적 이해가 상대적으로 얕고 피상적인 것 같아서 늘 마음에 아쉬움과 죄송스러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비해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다소 부자연스러웠습니다. 저 역시 탕자처럼 회심과 회개의 깊이가 많이 모자랐던 모양입니다. 또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역시 아버지가 되어보는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계시하시고 잘못된 길로 치우칠 때마다 말씀과 권면으로 채찍질해주셔서 늘 감사할 길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또 목사님과 같은 훌륭한 선생들을 다방면으로 보내주셔서 성경을 깊이 깨닫고 새로이 이해하도록 눈을 열어주셔서 더더욱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창조주이시지만, 그분이 아버지이신 이유는 창조주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분은 창조를 행하기 이전부터 아버지셨습니다. 아버지인 이유는 아들이신 성자께서 영존하셨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으로 된 분'이시기에 진정한 사랑이시고 진정한 긍휼이시고 진정한 은혜이시며 진정한 아버지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온전히 나누던 무한한 사랑. 그 부족할 것 없는 귀하고 완전한 넘치는 사랑을, 단지 부어주고 나누어주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아들 되심을 넘치도록 공유해주시기 위해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의 창조는 하나님의 본질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하나님 사랑의 무한한 이타성을 증명해주는 걸작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저와 모든 분들께 더 가까이, 아빠로서 가까이 느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박 목사님. 돌아온 탕자 시리즈 참으로 은혜롭게 읽고 있습니다. 이번 시리즈 속 본문은 수십년 신앙생활하면서 말씀으로 듣거나 혹은 직접 읽어본 내용들이지만 목사님처럼 비유를 이처럼 해석한 것은 개인적으로 처음인 것 같습니다. 시리즈를 읽는 내내 목사님의 깊은 묵상에 그저 감탄만 쏟아져 나올 뿐입니다.... 앞으로 어떤 설교 시리즈가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되신다면 예수님의 다른 비유들도 지속적으로 강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무쪼록 늘 은혜로운 말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