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8:31-34) 올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았는가?
새롭게 읽는 신약 성경 (22) / 2024 송구영신 예배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8:31-34)
현실만 돌아보는 연말연시
신년 예배드린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또 다른 새해가 코앞에 닥쳤습니다. 많은 신자가 연초에 소망하고 계획했던 일들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연말을 맞게 되었다는 아쉬움을 가질 것입니다. 거기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며 새벽 예배 때마다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많은 문제와 고난이 여전히 쌓여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마저 생깁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면 내년에도 특별히 나아지리라 큰 기대는 하지 않으나 어쨌든 다시 마음을 다잡고서 새해 계획을 알차게 세워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연말연시를 맞는 모습에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큰 잘못이 하나 있습니다. 대체로 현실적 사안들을 질적 양적으로 점검 계획하는 것으로만 그친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신년 계획에 아주 엄청난 축복은 전혀 포함시키지 않았으므로 당면한 이런저런 고난에서만은 꼭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자기 계획을 최소치로 낮추었으므로 하나님도 최소한 이 계획만큼은 들어 주셔야 한다는 식입니다.
물론 올해 일어났고 내년에 일어날 모든 일을 하나님이 주관 통치하시긴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이 그분과 실제로 연결되는지 따져보지 않습니다. 그 일들을 하나님과 상의해서, 최소한 기도하며 시작한 것도 아닌데도 내심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부진한 사업 실적, 회사에서 승진 누락, 싸움이 잦은 부부 사이, 갈등이 늘어나는 자녀들과의 관계, 예상치 못한 큰 병의 발생, 성도 간의 불편한 교제와 심지어 불만족스러운 교회 등등에서 하나님이 꼭 책임져야 할 이유나 근거가 과연 있을까요?
당신과 전혀 상의하지 않고 행한 일들에서 생긴 문제를 단지 새벽마다 기도했다고 해서 반드시 올해 안에 해결해 주어야 할 책임은 하나님에게 없습니다. 그분은 램프를 문지르면서 소원을 말하면 다 해결해 주는 푸른 거인 ‘지니’가 아닙니다. 설령 처음부터 기도하면서 시작한 일이었다 쳐도 자신의 욕심과 교만이 개입되었거나 지혜가 부족해서 잘못되었을 수 있습니다. 어떤 고난이든 자신에게 그 원인이 있지 않는지 먼저 파악하고서 고쳐나가는 것이 순서입니다. 오히려 불신자는 그러는데 신자는 하나님에게 모든 탓을 돌립니다. 문제가 일어난 후에 빚쟁이가 청구서 내밀듯이 무조건 하나님더러 해결해 내라고 떼를 씁니다.
범사를 기도하며 시작하는 신자라도 때와 방식만은 그분께 전적으로 맡겨야 합니다. 그분의 때를 신자가 해가 바뀐다고 해서 한해씩 잘라 제한할 수는 없습니다. 올해 이뤄지지 않은 일도 정말로 그분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면 내년에, 아니 언젠가 그분의 때에 반드시 더 풍성한 은혜와 함께 성취될 것입니다.
연말까지 남아있는 문제와 고난을 해결해 달라고 또 내년에 행할 자기 소원과 계획을 이뤄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올 한 해를 결산하고 내년을 준비하는 내용이 전부 자신과 자기 주변의 현실적인 문제들뿐이라면 불신자와 같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거기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신자가 소원하고 계획해서 기도했으니까, 하나님도 당연히 응답해 주어야 한다고 여기면 아주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
실제로 예수 믿은 후로 무엇이든 구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큰 착각이자 영적 무지에 빠진 신자가 꽤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라고 약속은 하셨습니다.(요14:13) 문맥상의 의미를 정확히 따져야 하는데, 앞에서 주님의 일을 하면서 그 일을 위해 구하는 모든 것이라고 밝혔고(12절), 뒤에선 그러면 너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된다고 했습니다.(16절) 주님은 신자의 소원과 계획이 과연 당신의 이름에 합당한 일인지 반드시 따지십니다.
많은 신자가 본문의 약속도 잘못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최고로 소중한 존재인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주셨으므로 그 은혜를 믿고 그분의 자녀가 된 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끼지 않고 주신다고만 이해합니다. 그래서 어떤 큰 소원도 기도하면 이뤄진다고 믿고 새해 계획을 짜고서 그대로 이뤄달라고 열심히 기도만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신자에게 무조건 모든 것을 주신다고 말하지 않았고 “그 아들과 함께” 준다고 했습니다. 여러 의미를 지니는데, 문자적으로만 따져도 주님을 믿은 후라도 혹시 주님과 함께하지 않고 있다면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 전에 정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성령 안에서 거듭난 신자여야만 한다는 절대적인 전제 조건이 붙은 것입니다. 십자가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쭉정이 신자는 아무리 교회 활동에 열심을 바친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요컨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의미에 합당한 경우에 한해서 모든 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구하는 것마다 다 주면 신자가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은 신자의 종이 됩니다. 굳이 이런 원리를 몰라도 신자들 스스로 모든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숱하게 경험했습니다. 올해 연말도 썩 유쾌하지 않은 까닭이 응답받지 못한 기도가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주신다는 약속에 바로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문맥상 하나님이 주실 모든 것을 풀어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합니다.(33절) 그럴 수 있는 근거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참소자인 사탄에게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신자를 위해서 중보기도해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34절)
따라서 하나님은 세상이 신자를 고발하고 정죄하는 일에서 지켜주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목적 자체가 죄에서 구원해 주려는 것이었으므로 계속해서 그 목적대로 신자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속한 문맥상의 주제도 구원 이후의 성화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다시 죄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데에 필요한 모든 조처를 해주시고, 특별히 사탄이 조종하는 어두운 세상 세력을 이기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죽어서 천국 가는 그날까지 또 마지막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구원이 영광스럽게 완성되기까지 십자가 복음의 은혜와 권능이 그 삶에 충만하게 실현되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현실에서 소망하고 필요해서 기도한 것들도, 비록 처음부터 당신과 의논하지 않았다 쳐도, 만약 그런 방향과 목적에 부합된다면 응답해 주고 그렇지 않으면 응답되지 않는 것입니다.
혈과 육의 씨름이 아니다.
신자가 연말에 회상하는 내용과 기준이 올해부터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었거나, 시험과 유혹을 미리 막아주었거나, 사탄의 세력과 세상의 죄악에서 승리하게 해준 일들이 있는지부터 되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어떤 사악한 시험과 유혹을 이겨냈으며, 특별히 현실적 환난 중에도 하나님만 믿고 의지했기에 내 죄와 욕심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영적 승리를 기억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그리스도처럼 닮게 자라가고 있는지도 측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평소에 그런 문제를 두고 꾸준히 기도하고 있었고 또 실제로 죄와 싸워나간 체험들이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신자도 연약한 신체를 지녔고 죄의 본성이 남아있는 채로 세상의 현실적 체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연말연시에 세상 삶의 차원에서도 점검하고 반성하고 수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연말에는 그 현실적인 일들에 과연 주님이 함께했었는지 잘 따져봐야 하고, 연초에는 처음부터 주님이 틀림없이 함께해 줄 일만 계획하여 시행해야 합니다. 최소한 주님이 그 일을 정말로 기뻐하셨는지 또 앞으로 기뻐하실지 만이라도 따져봐야 합니다.
무엇보다 굳이 올해다 내년이다 해를 구분짓지 말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신자의 외부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적 문제와 고난을 해결해 주려고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마지막 승천하시기 직전까지도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해주길 바랬으나 너희는 땅끝까지 복음만 전하라고 명했습니다.(행1:6-8) 공사역 중에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백성들이 당신을 왕으로 삼으려 했으나 주님은 그 자리를 멀리 피해버렸습니다.(요6:15) 대신에 현실적 문제는 일용할 양식만 있으면 충분하고 또 그것은 기도하면 채워준다고 약속했습니다.(마6:11, 31-34)
바울도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어둠을 주관하는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싸움이라고 가르쳤습니다.(엡6:12) 현실의 어려운 고난에 대해 완전히 손발을 놓고서 영적 문제에만 전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세상 문제의 근본 원인이 인간이 사탄의 꾐에 넘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된 후에도 타락한 세상과 사탄의 훼방은 물론이고 자기 속에 남아있는 죄의 본성에 져서 현실적 고난들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약소국 이스라엘이 최강국 로마에 침략당해 억울하게 박해받고 있는 사정을 외면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로마도 이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현실적 고난이 양쪽 다 계속 생긴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여 현실 고난에서 건짐을 받는 것도 아주 중요하고 귀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에만 믿음을 소진하면 암에 걸린 것도 모르고 진통제만 계속 먹는 꼴입니다. 더 이상 연말연시를 그런 식으로 어리석게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신사임당의 심정
바울 사도가 지금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간절하게 호소하는지 제대로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내어준 목적부터 정확히 알아야 하는데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에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 하라는 과거시험 준비는 하지 않고 계속 놀기만 하니까 어머니가 어떻게 훈계했는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종아리를 걷고선 회초리로 피가 나도록 스스로 때렸습니다.
그 상황은 어쨌든 엄마가 피해자이고 아들이 가해자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엄마가 잘못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평소에 신사임당은 틀림없이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에 관해서 정확하게 훈계했을 것이며 당신의 삶으로도 하나에서 열까지 본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들이 전혀 말을 듣지 않고서 장난꾸러기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도낏자루 썩는 줄도 모르고 놀기에만 바빴습니다.
아들의 그런 모습을 보는 엄마로선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자기 종아리를 때릴 때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자기가 자신을 봐도 너무 한심하고 비통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정신 차리지 않고 계속 놀기만 한다면 더 이상 다른 방안은 없기에 자식과 절연하는 수밖에 없다고 단단히 결심했을 것입니다.
엄마가 평소에 아무리 훈육을 해도 아들이 끝까지 놀고먹으면 자식 스스로 자기 신세를 망치는 것입니다.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엄마로선 자식이 그렇게 타락해 인생을 망치는 꼴을 도저히 두고볼 수 없었기에 최후의 고육지책을 동원한 것입니다. 그 방안은 엄마의 모든 사랑이 최고로 완전하게 농축된 결정체였고 그것보다 당신의 사랑을 더 확실하게 증명할 방안은 없습니다.
자기 때문에 또 자기가 잘 되라는 뜻에서 엄마의 종아리에서 피가 흐르는 모습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은 아들은 천하의 후레자식입니다. 천벌을 받아 마땅한데 옛날에는 동네 어른들이 먼저 돌로 쳐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율곡은 진심으로 회개하고서 과거에 급제하여 나라를 위해 큰일을 행함으로써 후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천하 만물을 각기 합당한 목적과 계획에 따라 만드셨습니다. 특별히 인간은 당신을 대신해서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릴 청지기 직분을 맡기려고 당신의 형상을 닮게 지었습니다. 인간을 만들고 나서 심히 기뻐했는데, 인간과 참 기쁨으로 교제 동행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혼자 세상 모든 것을 독차지하여서 자기만 높이려고 당신의 그 사랑의 품에서 뛰쳐나간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모든 인간이 아무 의미와 기쁨 없이 인생을 허비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대에도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 인생을 망치고 있으면서도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고 향락과 죄악에 취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는 아예 관심조차 없습니다. 이 땅이 전부인 줄 믿고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풍요와 출세만 지향하는 돈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자신부터 물질에서 우연히 진화된 물질적인 존재라고 규정하기에, 물질을 최대한 고급스럽고 풍요롭게 축적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현명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불신자들은 그래서 연말에는 올해 현실 삶에서 물질이 얼마나 풍부해졌는지만 점검하고 내년에는 더 많이 벌 수 있는 수단과 방법만 궁리 계획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정
그런 아무 소망 없이 죽어 있는 인간들을 살리려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골고다 십자가에 매달아 그 생명까지 우리에게 완전히 내어주셨습니다. 사탄에 미혹되어서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이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며 인생을 허비하는 모습을 하나님이 너무나 애처롭고 안타깝게 여긴 것입니다. 그대로 두면 살아선 아무 소망 없이 항상 갈등 고뇌하다가 절망과 좌절에 빠지고, 또 죽어선 끔찍한 고통이 그치지 않는 춥고 어두운 곳에서 사탄의 노리개가 되어버립니다. 십자가는 죄에 빠져서 당신과 원수가 된 죄인도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오래전 멜 깁슨이 만든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the Christ) 영화에서 보듯이, 주님의 경우는 신사임당처럼 종아리 피부가 살짝 찢겨서 피가 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로마 군병들로부터 사십에 하나 감한 만큼 채찍을 맞아서 살점이 찢겨 나갔고, 이마에 가시 면류관이 박혀서 온몸에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손목과 발목에 굵은 대못이 박혔고, 나중에는 창으로 허리를 찔려서 온몸의 피를 쏟고 물까지 흘러내렸습니다.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세상에는 도무지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전부 완벽하게 농축된 절정이자 완성으로,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으로서도 그 이상 당신의 사랑을 표현할 방도는 없습니다. 오죽하면 아주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헬라인들이 그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려고 ‘아가페’라는 단어를 새로 만들어 내어야만 했습니다.
그런 너무나 엄청난 희생적인 사랑을 보고서도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은 인간은 엄마의 희생을 보고도 공부하지 않는 자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부모 말을 듣지 않는 자도 천륜을 어긴다고 해서 동네 사람의 린치를 받을 판인데, 예수님이 생명까지 내어준 것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당연히 자신의 영원한 생명이 걸린 형벌을 받습니다.
흔히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데 어찌 지옥을 만들어 심판하느냐고, 심지어 기독교계 내에서도 비판하며 영원한 심판을 부인하려 듭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 죄인을 너무나도 끔찍이 사랑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마저 거역 대적하는 자가 어찌 그에 대한 아무 추궁도 받지 않고 온전하길 바랄 수 있단 말입니까? 율곡이 엄마의 자책하는 모습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계속 놀면서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뻔뻔하게 대드는 꼴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자기 인생을 그 위에 세워야 할 기초는 둘뿐입니다. 최대한 빨리 골고다 십자가 앞에 겸손히 엎드리며 예수님께 자기 전부를 의탁하든지, 아니면 끝까지 사탄의 노예로 살다가 마지막에도 사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물질 둘 중의 하나만 주인으로 모실 수 있으며 절대로 중간 회색지대는 없고 또 둘 다 주인으로 모실 수도 없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신사임당의 회초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끝까지 거부하는 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평생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맛보지 못합니다. 아니 그런 사랑이 있다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해마다 주변 사람들과 시기 질투 미움 다툼으로 지샜기에 연말에는 올해의 삶도 그저 허무하기만 했다는 회상밖에 할 수 없습니다.
성경 진리에 목숨을 거는가?
문제는 불신자가 아니라 오히려 신자입니다. 솔직히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전부 다 주신 것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아니 그 의미조차 잘 모릅니다. 물론 처음 믿을 때는 그 의미도 깨우쳤고 그 사랑을 확신했으나 그 후의 자기 삶과 인생을 그것에 기초해서 쌓아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신사임당 이야기를 직접 보지 못해도 책에 적혀 있으므로 완전한 사실로 믿고 감동하여 자기 삶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적용합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성경에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로 기록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에는 왜 삶에서 제대로 반응하지 않습니까?
신사임당도 율곡이 회개했다고 기분이 좋아져서 좋은 옷과 유흥비에 사용하라고 돈을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에 세상 쾌락에 대한 미련을 끊고 잡념을 물리치며 과거 준비에만 몰두하라고 작은 움막과 일용할 양식만 대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인생을 더더욱 그런 모습으로 이끌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불신자들처럼 해마다 현실 삶에서 물질적 풍요가 얼마나 늘었는지 줄었는지 그것만 점검하고 또 계획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꿔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준 자가 신자입니다. 율곡도 열심히 노력하여 과거 급제했는데, 어찌 하나님에게 사나 죽으나 십자가에 상응하는 보답을 하지 않습니까? 물론 순교는 특정한 일을 수행하려는 비상한 경우에 무엇보다 그것을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허락합니다. 순교 당하는 순간 스데반처럼 담대히 이길 힘과 믿음도 주십니다. 우리는 그래서 순교는 몰라도 최소한 예수님의 삶을 비슷하게나마 흉내는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신자로서 종교적 의무가 절대 아닙니다. 율곡이 공부 열심히 한 것은 자기에게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이 처음 지으시고 소명을 부여한 대로 이 땅을 아름답게 다스리는 청지기 직분을 회복하고서 충성할 때만 인생의 참된 의미와 가치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신사임당이 그랬듯이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죽기 전 삼 년간 참된 인생의 삶을 정확하게 가르쳤고 또 실제 삶에서 철저하게 본을 보였습니다. 신자도 주님처럼 살아가느냐 아니냐로 그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확연히 나뉩니다.
신자가 되어서도 현실 삶에서 물질로 서로 다투고, 자존심부터 세우려 들고, 자기 욕심과 감정이 앞서면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온갖 갈등 다툼 미움 좌절 등이 따라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라면 그분처럼 어떤 사람도 인간 세상이 적용하는 기준인 외모로 차별하지 않고 끝까지 참아주며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무엇보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보면 얼마나 충족한 삶인지 생생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이 너무나 좋기에 도무지 다른 방식으로는 살 수 없으니까, 세상의 핍박도 기꺼이 인내할 수 있고 순교까지도 감사와 찬양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신자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고 가르치면서 결론을 어떻게 내렸습니까?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신자가 올해를 되돌아볼 때 세상 사람과 흑암의 세력이 나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을 못 받도록 훼방했으나 절대 성공할 수 없었다는 그런 고백이 많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일대일 대화
물론 여전히 연약하여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데에 내가 봐도 너무 부끄러운 수준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어쨌든 그 중심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었다면, 알게 모르게 주님의 십자가 은총이 올해도 넘쳤고 내년에도 넘칠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드린 대로 연말연시를 보내는 관점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혈과 육의 싸움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올해부터도 그 신묘하고 풍성한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은혜를 사역 내내 누렸던 바울인지라 로마의 감옥에 억울하게 갇혀서도 성도들에게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권했습니다. 현실적으로 가장 궁핍하고 비천한 처지를 넘어서 처형당할 수도 있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로선 평생에 한 번이라도 겪기는커녕 상상도 못하는 고난입니다. 그런데도 항상 기뻐하면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당신의 평강으로 기도한 신자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했습니다.(빌4:4-7) 현실 형편을 호전시켜서 염려를 없애 주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로 인해서 평강이 임하기에 현실에 대한 염려는 자연히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빌립보 교인들에게 어떻게 권면했습니까?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을 생각하라.”(빌4:8)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도 아끼지 않았으니까, 주님과 함께 신자에게 모든 것을 준다는 내용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올 한 해에 하나님이 주님과 함께 우리에게 주신 선물 꾸러미에 과연 현찰, 부동산, 사업 대박, 건강, 외모, 명예 등이 담겨 있었습니까? 아니면 진리, 경건, 의로움, 정결함, 사랑 등이 실현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까? 연말에 내가 과연 어느 쪽 선물을 더 많이 받았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온갖 불치병을 주님의 기적적인 치유로 나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주님은 그들을 물러앉게 한 후에 산상 수훈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 첫마디가 무엇이었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불치병이 나은 것보다 더 큰, 문자적으로는 세상 최고의, 복을 주겠는데 그것은 바로 천국을 소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그러기 위해선 심령이 가난해져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은혜를 소지한 것으로 이미 최고로 좋은 모든 복을 받았기에 현실의 풍요나 궁핍으로는 더 이상 생각과 감정이 흔들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올해 얼마나 심령이 가난해졌는지 되돌아보고 내년에는 더욱 심령이 가난해지길 계획하고서 실현하려고 결심해야만 신자의 참된 연말연시입니다.
마침 일본의 한 온천 여관에서 연말연시를 특이하게 보내는 모습을 TV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북해도의 깊은 산중에 사방이 숲으로만 둘러싸인 온천으로 전기가 일절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불통이고 TV도 없으며 호롱불을 켜놓고 어두컴컴하게 지내면서 나무를 때어 취사하는 여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한번 투숙해 본 자들의 SNS를 통해 세계 각지에 알려짐으로써 많은 외국인이 연말연시를 보내러 몰려들었습니다. 현실 삶의 염려를 잠시 잊어버리고 자기 인생 전체를 진지하게 돌아보려는 뜻이었습니다. 가족끼리 온 자는 서로 진솔하게 대화했고, 혼자 온 자는 자연과 또는 자신과 대화했는데 모두가 일 년 중 최고 좋았던 며칠이라고 만족했습니다.
신자도 최소한 연말연시를 오직 하나님과 일대일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누며 보내야 합니다. 당장의 현실은 잊고서 자기 존재와 남은 삶 전체를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다시 천천히 조망하셔야 합니다. 죽음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게 된 예수를 따르는 신자라는 이 엄청난 신분과 특권을 재확인해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지금도 천국 보좌 우편에서 신자를 위해서 간구하고 있다고 선언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올해도 내년도 아니 죽기까지 주님이 맡겨준 청지기 직분을 어떻게 잘 감당할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아서 조금이라도 자라 갈 것인가, 최소한 죄와 흑암의 세력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갈지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껏처럼 미련만 남는 올해와 크게 기대하지 않는 새해가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12/29/2024)
너무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을 더욱 풍성히 누리는 새해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