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4:12-15) 기도하면 예수님보다 큰일을 할 수 있다.

기도 시리즈 (1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2-14)

 

기도에 관한 가르침의 완결판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때에도 유다가 스승을 팔려고 나간 후부터 제자들에게 설교하고 또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었습니다. 주님으로선 제자들과 보내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이라 유언하는 차원에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노쇠하여 중병에 걸려 죽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당신을 죽이려는 사악한 계략은 물론 방금 유다가 작별인사도 나누지 않고 당신을 팔러 나갔다는 사실까지 다 아시고도 기꺼이 우리를 위해 당신을 십자가 제물로 바치려하고 있습니다. 그 심정이 얼마나 비장하겠습니까? 정말 말씀 하나하나에 당신의 피가 묻어나오는 절규와 다름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요한복음만 기록하고 있는데 통칭 다락방 강화라고 부르며 13:31에서 시작해서 17장 끝까지 길게 이어집니다. 기도에 관해서도 같은 내용으로 여러 번 강조하셨는데 본문은 그 첫 번째로 너무나 귀하고 중요한 약속도 함께 주셨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설교였으므로 본문도 예수님이 공사역 중에 기도에 관해 가르쳐왔던 내용의 절정이자 완결판이 됩니다. 신자는 이 말씀을 온전히 믿고 그런 바탕에서만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다 들어주시고 당신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혹시 아무리 성경이 증언했어도 주님보다 더 큰일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여기십니까? 그래서 교회에서 충성 봉사하고 있으니 주님의 일을 잘하고 있다고 믿습니까? 그 겸손한 마음은 이해되지만 교회생활이 과연 주님의 큰일인지 따져봐야 하고 또 굳이 기도하지 않아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입으로 분명히 기도하면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항상 그러하듯이 주님은 대화와 논쟁에서도 당신이 의도하신대로 자연스럽게 논리를 전개시키며 강조하려는 주제도 뚜렷하게 드러내십니다. 이 놀랍고도 엄청난 약속의 의미를 정확히 알려면 앞뒤 문맥의 흐름부터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이상야릇한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

 

다락방 강화는 실제 유언처럼 당신께서 가는 곳에 제자들이 따라올 수 없다고 하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당부로 시작합니다.(요13:31-35) 그러자 잘 아시는 대로 베드로가 목숨을 바쳐서 따라가겠다고 나섰고 주님은 새벽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예언해주었습니다.(요13:36-38) 제자들 모두 베드로와 같은 각오일 텐데 주님의 이 예언으로 전체 분위기가 아주 어색하게 바뀌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선 제자들이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겠다고 가르친 말씀을 여전히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니까 아버지 집으로 너희들을 위한 처소를 마련하러 간다고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런 후에 다시 와서 그들을 영접하여 그곳으로 데리고 가니까 남아 있는 동안에도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당신을 믿으라고 다짐해주었습니다. 나아가 당신께서 가는 곳으로 이르는 길을 너희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요14:1-4)

 

그러자 의심 많은 도마가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지금 성경을 읽는 독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잘 알기에 이 질문이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거나 크게 긴장되는 경우에 맞닥뜨리면 머리가 하얗게 변해 이성적 추론이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제자들에겐 지금이 딱 그러한 상태입니다.

 

도마는 주님이 십자가에 죽는다고 수차 말씀하신 것을 들었고 지금도 스승에게서 비장한 기색을 분명히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늘 또는 천국이라는 표현 대신에 아버지 집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그가 주님의 출신 고향이나 아버지 요셉에 대해서 몰랐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이 이 땅과 다른 차원인 줄은 짐작되지만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지 알고 싶어진 것입니다. 또 주님이 죽으신다면 어떻게 다시 오신다는 것인지도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죽으면 음부에 들어가 마지막 부활 때까지 아무 의식 없이 자는 듯이 기다린다고 믿었으니 더더욱 가는 곳과 가는 길이 궁금해진 것입니다.

 

다락방 강화의 첫마디도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요13:31)라고 시작했습니다. 오늘 저녁에 주님이 십자가에 달릴지도 모르는데 그 일로 당신과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다니 처음부터 난해하기만 합니다.

 

자기들은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해야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에게는 물론 스승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스승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말씀하십니다. 이해도 안 되는데다 지난 삼년 간 추종한 것이 억울하고 슬프고 화까지 나서 괜히 퉁명스레 트집 잡았을 수 있습니다. 도마의 지능이 낮거나 믿음이 약하거나 의심이 많아서 판단력까지 낮아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주님과 제자들의 문답

 

도마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변도 제자들의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로마 경비대와 총독 관저로 야간 기습 작전을 하려면 이런 저런 길로 쳐들어가고 그 전에 군대를 이렇게 저렇게 조직하자는 것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습니다. 당신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단정적으로 선언하고선 당신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한걸음 더 나아갔습니다.(6절) 말미암는다는 헬라원어 ‘디아’는 광범위한 용례가 있지만 크게 원인과 통로를 뜻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서만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스승이 말하는 영광이 자기들이 바라는 이스라엘의 현실적 회복이 아니라 자기들 각 자의 영원한 구원이고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뜻하는 줄 어렴풋이 눈치 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는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을 것인데도 당신을 통해야만 하늘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럼 스승을 따라 십자가에서 함께 죽어야 한다는 뜻인지 오히려 도마가 질문하기 전보다 생각이 더 복잡해졌을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곤혹스러워하는 줄 아시고 제자들더러 당신을 알았다면 아버지도 알 수 있는데 이제부터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다고 설명해줍니다.(7절) 너희가 당신을 정확히 알았다면 아버지도 알 수 있었다고 했으니 그동안 주님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여러 번 실현해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당신을 정확히 모르고 있으니까 아버지와 그곳으로 가는 길도 모른다고 깨우쳐준 것입니다.

 

이번에는 빌립이 나서서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면 족하겠다고 요청합니다.(8절) 주님은 방금 나를 알았다면 아버지를 보았다고 가르쳤는데 다시 같은 내용을 질문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절)고 꾸짖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아버지와 당신의 하나 되심을 설명한 후에 그 사실을 못 믿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믿으라고 깨우쳐 주셨습니다.(10,11절)

 

지금 시종일관 예수님은 당신은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로 서로 하나 다를 바 없다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요한은 서론에서부터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고 분명히 밝혀놓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이방족속은 당연하지만 유대인들마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몰라서 잘못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말하고 행동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서 행한 바였다는 것입니다. 빌립이 삼년간 함께 기거하며 바로 곁에서 주님의 모든 것을 지켜봤다면 실제로 하나님을 본 것인데도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이 몰랐고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것은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으로 당신께서 인간으로 와있으니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면 당신이 행한 일을 잘 따져보라고 덧붙였습니다.(11절) 지금은 삼년의 공사역을 마친 때이므로 당신의 부활 빼고는 모든 기적을 행하신 후입니다. 문둥병자, 귀신들린 자, 앉은뱅이, 장님 등 불치병을 고친 것은 약과입니다. 이만 명이 넘는 사람을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배불리 먹이셨고, 말씀 한마디로 폭풍우를 잠재우고 당신께서도 물 위를 걸었고, 죽은 지 나흘 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게 했습니다. 어떤 인간도 행할 수 있기는커녕 흉내도 못내는 이적들입니다. 인간생명과 자연현상을 당신의 뜻대로 생성 소멸 시킬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뿐입니다. 잠시만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주님이 하나님이시라고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보다 큰일을 하려면?

 

그러고 나서 당신을 믿는 자는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본문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단순히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문구로 끝내라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만약 그래서 다 응답된다면 기도가 아니라 주문입니다.

 

주님이 제자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근거가 특이합니다. 당신께서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12절) 제자들은 스승이 이 땅에 더 이상 안 계시므로 슬프고 두려운데 주님은 거꾸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슬픔과 염려를 그치라고 권면합니다.

 

그럴 수 있는 까닭도 이미 말씀하신 대로 당신께서 행하는 일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하는 일’의 원어는 사역(works)이라는 명사로 굳이 시제로 따지자면 영원한 진리를 의미하는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이라고 미래형으로 말한 한 문장 안에서 너희가 하나님을 ‘알았고 보았다’고 과거형으로 설명해준 것입니다.(7절)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세대에게 다 적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일어날 일도 잘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교제하게 되면 기쁨이 충만할 것이며 그럼 슬픔과 염려의 기간도 만 이틀로 끝날 것입니다. 승천하시는 모습까지 보면 아버지 집으로 자기들 처소를 마련하러 간다는 가르침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아버지가 당신 안에 당신이 아버지 안에 있음을 완전히 확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이 약속은 도마와 빌립이 주님에 대해 갖고 있던 것과 같은 의문들이 다 해소되어진 순전한 믿음의 바탕에서 기도해야 할 것을 전제로 합니다. 정말로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구원의 진리로 참 생명 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다른 길은 전혀 없으므로 예수님만이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부터 먼저 보고 알아야만 합니다. 실제로 성경기록을 보면 제자들이 십자가 특별히 부활 전과 이후로 모든 면에서 확연이 달라졌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식사까지 나누며 직접 교제했으니 그럴 수 있겠지만 성경의 문자적 기록만으로 간접적으로 예수님을 배우는 우리에겐 너무 어려운 일로 여겨집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신자가 행할 수 있다고 약속한 큰일의 성격부터 정확히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큰일이 산이 바다에 빠지거나 불치병을 고치거나 죽은 자를 살리는 등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기적은 아닙니다. 간혹 하나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면 신자의 기도를 통해서 엄청난 이적도 일으켜 주시지만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비상사태에 한정됩니다. 본문 안에서 주님은 어떤 것이 큰일인지 설명해주었습니다.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계명에 관해서도 다락방 강화를 시작할 때 이미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그래서 본문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다시 상기시켜준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새 계명을 충분히 실현할 것이고 바로 그것이 주님이 말하는 큰일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지 못한 오늘날의 신자도 서로 사랑하는 일에선 주님보다 얼마든지 더 큰일을 할 수 있고 또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소원하는 모든 일을 간절히 기도하면 그대로 이뤄준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새 계명을 지키려면?

 

따져봐야 할 중요한 사항이 하나 더 남았는데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새 계명은 아니지 않습니까? 모세에게 주신 모든 율법에서부터 그 기본 맥락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레위기에선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18)는 구체적인 계명까지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불러내면서 그와 맺은 언약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굳이 새 계명이라고 말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우선 살펴본 대로 제자들이 아직도 주님을 온전히 몰라봐서 하나님의 뜻도 모르기에 온전한 참 사랑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이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해줄 것을 기대하면서 먼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누가 큰지 마지막까지 서로 다투었지 않습니까? 더 정확한 이유는 예수님은 새 언약에 기초한 것이라 새 계명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34,35)

 

그런데 여기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씀 또한 새 언약이 아니라 구약이 시종일관 계시한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가 새 언약이라고 칭한 이유 셋을 스스로 어떻게 설명합니까? 첫째 백성들의 마음에 기록되게 하고 둘째는 그래서 이웃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모두가 하나님을 스스로 알게 되고 셋째는 하나님도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새 계명이라고 칭한 것도 이 언약과 같은 맥락입니다. 돌 판에 새겨진 율법에도 분명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적혔으나 이스라엘이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에 이제 그들의 마음에 새길 것이라는 뜻입니다.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돌아가신 당신을 보고 새 계명이 마음에 새겨지면 성경을 통해 당신을 알고 하나님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서로 사랑하는 일을 실현하려고 기도하고 실제로 헌신하는 신자에겐 더 이상 하나님의 정죄는 당연히 없고 하늘에 거처할 집도 이미 마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 내용은 동일하지만 마음에 새김으로서 새 언약과 새 계명이 된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성령님이 역사해주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그 심령이 실제로 거듭난 신자라야 새 언약에 동참한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또 그런 신자라야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도 온전히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바로 이어서 주님은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신다고 약속했고(16절 이하) 전체 다락방 강화의 주제도 성령의 오심과 그 역할에 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 땅에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하지 않지만 대신에 성령을 보낼 테니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죄에 찌든 인간들이 하늘의 처소에 올라갈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의인인 니고데모도 구원의 길에 대해 예수님께 물으러 밤중에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된다는 사실은 성령님이 죄인의 내면에 굳어진 사탄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지 않고는 절대 깨닫지 못합니다. 아무도 자기 이성과 종교성만으로는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어 마땅한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단순히 도덕적 차원에서 죄인이라고 시인은 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천벌을 받아 지옥으로 떨어져야만 하고 그 심판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진리는 결코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유다는 스승을 배반했고 베드로도 부인했으며 자신들의 그런 영적무지를 주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몰랐습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다운 표시가 나는가?

 

유감스럽게도 작금 교인들이 진정한 회심을 하지 않아서 예수님의 대속죽음의 진리 은혜 권능을 온전히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 복음의 의미마저 정확히 모르고 성경도 진지하게 읽어볼 시도조차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교회에 충성 봉사했다는 구실로 그저 뜨겁게 기도하면 고난이 해결되고 현실적 복을 받는다는 식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기 열성으로 교회를 잘 섬겨서 복 받으려는 교인은 많으나 성령으로 거듭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완전히 뒤바뀐 신자는 드뭅니다.

 

그 필연적인 결과로 교회와 성도들 사이에 번창하는 온갖 부정 불법이 예수님이 성전을 청소할 때와 방불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양식이 있는 신자들이 교회를 멀리 하고 집에서 혼자 예배 보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왜 두세 사람이 당신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당신도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을까요? 엄밀히 말하면 그렇게 모이지 않는 곳에는 주님이 함께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말하자면 집에 혼자 지내면 하나님의 큰일을 할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사람이 많고 돈과 자원 등이 많아야 하나님 일을 더 잘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주님이 유언으로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실천할 기회가 거의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자가 많아도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지 못하면 어떻게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며 나아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계명은 언제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의 랍비의 교육법은 스승이 말하고 행하는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라 제자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 스승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서로 사랑하면 당신의 제자인 줄 알리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라고 약속했습니다. 신자는 주님이 하신 일을 해야 하고 또 그보다 큰일도 당연히 주님이 하신 일을 뜻합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나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길을 확신하는 자가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행하신 일을 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대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당신의 안일과 형통을 위해서 기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새벽에 기도하는 시간 외에는 항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에만 진력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로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소외된 사람들을 만나 교제 위로 치유 구원해주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 말씀을 두고 신자가 소원하는 일을 기도하면 무엇이든 이뤄주신다고 가르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큰 잘못입니까?

 

예수님도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고 고백했지 않습니까? 또 그래서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늘에서 이뤄진 뜻을 이 땅에 이뤄지게 해달라는 기도부터 하라고 명했습니다. 예수님 당신부터 하늘에서 이미 이뤄진 뜻을 이루려고 이 땅에 오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주님보다 더 큰일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부터 오순절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을 회심시켰습니다. 무엇보다 기독교 교리와 체계를 확립시킨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고 선포했습니다.

 

이는 그가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뵙기 전에는 결코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예컨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진다고 펄펄 뛰던 그였습니다. 또 그래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자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주님처럼 사흘 간 죽었다 살아나는 것 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자기 안의 견고한 사탄의 진이 성령에 의해서 무너진 후에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던 진리입니다.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과의 인격적 대면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그제야 정확하게 보았고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늘에 자신을 위한 처소가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마련되어 있고 그곳을 가는 길도 오직 예수님 때문임을 체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초기 기독교는 거의 전부 그의 선교 사역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세 번의 선교여행으로 곳곳에 교회를 세워서 순전한 복음을 전파하고 성경을 가르쳤으며 신약성경의 반을 저작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온갖 멸시 고난 핍박을 받았으며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습니다. 지금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주님보다 더 큰일을 했고 또 큰일을 하느라 주님과 방불한 큰 핍박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그대로 걸어갔기에 주님이 겪은 고난도 그대로 이어받아서 십자가 순교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바울이라고 해서 특출한 사람은 아닙니다. 죄의 법에 수시로 무너지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고백했듯이 우리와 성정이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넘어졌던 그 자리에 주저 않아 있지 않고 구원 후에도 자기를 구원할 자는 오직 예수님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육신에 져서 육신의 생각에 빠지는 자기를 성령님께서 다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게 이끈다고 고백했습니다.(롬7:21-8:4)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또 그분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만이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그 확신이 생기고 그 후에는 성령님이 내주해주십니다. 회심 이후로는 하나님 당신께서 거룩하니 신자도 거룩해지고 나아가 당신의 거룩한 일을 하게 하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신자를 흔들 것 하나도 없다면 신자로선 실제로 거룩하게 살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할 일만 남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온전한 자격이 있습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누구나 무엇이든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는 응답을 받으려면 성령에 사로 잡혀서 주님의 거룩한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거창하고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말하고 행동한 것이 정말로 참 인간답게 살아가는 가장 고귀한 길이라는 확신이 있으면 자연히 그런 일을 따라 하기 위해서 기도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자신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았고 알았다면 하나님을 아는 자답게 살아야겠다는 헌신과 실천이 반드시 따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너무나 연약해 수시로 세상과 죄악에 져서 무너집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 속에 내주하고 계시기에 절대로 그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해주셔서 반드시 다시 회개와 기도와 헌신과 실천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기에 끝까지 당신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주님이 피를 토하듯 비장한 심정으로 본문의 약속을 주셨기에 신자도 정말로 비장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느냐만 관건입니다. 요컨대 주님처럼 세상에서 소외된 비천한 자는 물론 사탄에 미혹된 심령을 볼 때마다 안타깝고 긍휼한 심정이 드느냐는 것입니다.

 

(4/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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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세상 비극을 위해 중보 기도하다 너무 지쳤습니다. master 2023-11-28 18
177 기도에 관한 몇 가지 의문들 master 2023-05-30 42
176 신자가 개인적 현실적 기도를 해도 되는지요? master 2023-01-25 31
175 기도로 타인의 죄도 용서받는가? master 2022-10-03 25
174 한 가지 일을 두고 양쪽의 기도가 상충하면? master 2022-08-23 26
173 (창12:1-3) 소명을 붙들고 기도하지 못해도 master 2022-07-25 53
» (요14:12-15) 기도하면 예수님보다 큰일을 할 수 있다. master 2022-07-25 32
171 (눅11:5-13) 끈질기게 기도하면 무엇이든 응답된다. master 2022-07-25 120
170 (막11:20-25) 기도하면 무엇이든 받은 줄로 믿으라. master 2022-07-25 54
169 (마18:15-20) 합심하여 기도해 무엇이든 풀어라. master 2022-07-25 231
168 (마6:9-15) 세 가지 단계로 기도를 발전시켜라. master 2022-07-25 32
167 (창22:1-8) 믿음이 완성되어야 기도도 완성된다. master 2022-07-25 26
166 (창20:1-7 & 17,18) 생명을 살리는 선지자로 기도하라. master 2022-07-25 16
165 (창18:23-26) 주기도문의 구약성경 버전 master 2022-07-25 60
164 (창18:16-25) 기도에 대한 통념을 완전히 바꾸어라. master 2022-07-25 21
163 (창14:13-16) 기도응답 잘 받는 최선의 방안 master 2022-07-25 24
162 (창13:14-18) 우상의 본거지에 거주하고 있는가? master 2022-07-25 13
161 (창13:1-4) 기도내용을 계속 바꿔야 응답받는다. master 2022-07-2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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