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비극을 위해 중보 기도하다 너무 지쳤습니다. 

 

[질문의 전제] 

 

최근에 심해지는 자연재해가 단순한 자연현상이거나, 인간이 환경을 파괴한 죄악의 결과이거나, 그 둘이 함께 작용했기에 하나님에게 책임을 물어선 안 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선하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재앙이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의 의로운 간섭을 구하는 기도를 간절하게 꾸준히 해보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어서 너무 지치고 심지어 아래와 같은 의심과 죄책감까지 생겼습니다. 

 

[답변의 전제]

  

우선 어떤 제목이든 간절하게 꾸준히 기도했으나 하나님이 침묵하는 것처럼 여겨지면 연약한 인간 신자로선 자연히 무력감이 들고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원망은 물론 불신까지 생깁니다. 전후 사정을 잘 알고 스스로 극복해보려 노력하고 있는 개인적인 고난에 대한 기도도 응답이 지연되면 지치기 마련입니다. 오랜 기도에는 일종의 생리적인 피로감이 어쩔 수 없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한 사항이라 오래 침묵하거나 끝내 응답하지 않아도 그분만의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시적인 열매가 조속히 확실하게 열리지 않는다고 해서 죄책감과 무력감까지 느끼며 괴롭다면 엄밀히 따져서 그분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부족한 것입니다. 신자의 의로운 행위에는 반드시 정당한 대가가 따라야 한다는 율법주의 내지는 기복주의적 신앙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며, 더 깊이 따지면 자신의 의를 앞세우려는 원죄가 일부 작용한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면식도 없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에게 일어난 자연 재앙, 그것도 구조대의 힘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을 호전시켜 달라는 기도는 솔직히 기도할 때부터 간절한 열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꼭 해야 하는지 확신조차 서지 않는 신자들도 많습니다. 거기다 세계 각처에서 참극이 계속 일어나고 있으니 더더욱 그렇습니다. 질문자님은 어쨌든 재앙이 일어날 때마다 꾸준히 기도하셨다니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무력감이나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하나님더러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는 신자 쪽의 간청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땅과 인간들을 어떻게 다스리는지부터 정확히 알게 되면 질문하신 문제도 쉽게 해결될 것입니다. 자연 재앙이나 인간사회의 비극을 어떻게 접근 이해할지에 대한 나름의 전제를 말씀해주셨는데, 그보다 더 중요하며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하나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마지막 날까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구원의 은혜로만 이 땅과 모든 인류를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선악과 금령의 뜻부터 그러하며, 창3:15의 원시 복음에서 시작해서, 당신의 백성과 여러 번 언약을 갱신하며 그런 원리를 조금씩 더 밝혀주시다가, 골고다의 예수님 십자가에서 완전히 확증하고 실현하셨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크게 나누어 “창조, 타락, 구원, 완성”이라는 네 단계에 따라 이끄시는 중입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의 맥을 잡자” 시리즈에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이 땅의 인간 공동체와 개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대소사를 예수 믿는 당신의 백성을 중심으로 각 단계 별로 진행해 나가십니다. 구원과 완성 사이에 거하는 신약 신자는 이미 도래했으나 아직은 미완성인 천국 사이의 긴장 아래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앞으로 완성될 궁극적인 천국을 간절히 소망하며 이 땅에선 고달픈 나그네와 같은 삶을 기꺼이 감수해야만 합니다. 구약시대 인물도 사실상 예수를 믿고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히11:13-16, 26)

 

요컨대 인류와 신자를 향해서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은, 몇 번 강조한 대로, 현실적 형통과 안락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로지 당신께서 구원하신 당신의 백성을 예수님을 닮게 변화시키고 그분이 이 땅에서 걸었던 삶을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사회의 현실 삶을 건전하게 발전시키고 지금 겪고 있는 온갖 참극을 미리 방지하여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사는 이 땅과 죄 중에 있는 인간을 창조 당시, 타락 전의 에덴동산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이 땅과 죄인의 구원 완성이라는 목표를 신자들로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모형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는 방식으로 통치하고 계십니다. 신자를 세상 앞에 십자가 복음의 증인으로 세워서 전도하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고전1:21) 

 

하나님이 타락한 이 세상에 세워나갈 그리스도의 몸에 포함될 구원받은 신자의 숫자나 그 나라의 크기나 모양은 오직 그분의 절대적 주권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완벽한 계획과 섭리에 따라서 신자가 그 소명에 충성하는 데에 필요 충분한 만큼 때에 따라 현실적 궁핍과 풍요를 적절히 베푸십니다.(빌4:10-20) 현실적 고난이나 풍요나 그 자체가 그분의 최종 은혜나 목적이 아닙니다. 구원의 완성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시적 수단일 뿐입니다. 신자는 그래서 현재 자기 주변과 이 땅에 일어나는 재앙에 관심을 쏟기보다는 범사를 하나님의 구원 역사라는 네 거대담화의 관점에서 분별 해석하여서 자신의 믿음 생활에 적용 실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항은 하나님이 당신의 일꾼으로 불렀다고 신자들만 편애하거나 특혜를 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백성의 잘못부터 먼저 아주 냉정하게 심판하십니다. 결과적으로는 종종 불신자에게 오히려 더 긍휼을 베풀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입니다. 흔히들 애굽만 하나님께 가혹한 심판을 받았다고 여깁니다. 절대 그렇지 않고 그 반대입니다. 억울한 고난을 겪은 쪽은 오히려 이스라엘입니다. 

 

우선 당신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에서 사백 년이나 노예로서 온갖 멸시와 박해를 받게 했습니다. 마지막 출애굽 시킬 때의 열 가지 재앙도 하나님이 애굽과 바로에게 어떻게든 회개의 기회를 주려고 그들이 믿는 우상 신의 권능을 하나씩 무너트려 가면서 끝까지 열 번이나 참아준 것입니다. 마지막 열 번째 죽음의 사자가 모든 장자를 죽이는 심판은 애굽의 최고 신으로 숭배받는 바로의 권세를 깨트리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때도 이스라엘 백성 또한 당신 안에선 똑같은 죄인으로 함께 죽어야만 했으나(이스라엘을 포함해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 이스라엘은 오직 자기들 문에 바른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죽음의 사자가 건너뛰어(踰越, passover) 준 것뿐입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즉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인류 역사를 주님의 재림 시의 구원 완성을 향해서 삼위 하나님이 오직 십자가의 원리로만 통치하신다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과 국가와 개인을 그 목적에 합당한 대로 당신의 주권과 섭리에 따라 이끄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 몰라도 세상을 사탄의 권세 아래 두게 했고, 또 죄인들의 무한 경쟁터로 묵인하고 있으며, 때에 따라 필요하면 엄청난 비극도, 대부분은 인간의 잘못과 책임이지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모든 세상사를, 자연 재앙이나 억울해 보이는 개인적인 비극까지도, 그 배경에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어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의와 사랑의 원리가 완벽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나아가 그런 참극 가운데도 신자는 세상에서 따로 불려 나온 십자가 군병이라는 신분과 특권에 감사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 예수님의 향기를 드러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순교까지도 각오해야 하고 어떤 억울함도 감수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때는 일반 신자들조차 그랬으며,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자면 오늘날의 모든 신자도 사악한 세상으로부터 온갖 모양의 박해를 받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주신 질문들에 답하자면;

 

 

질문 1. 눈을 뜨고 돌아보면, 전 세계에는 항상 비극적인 일의 투성이이다. 

 

자연재해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기도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기도한다고 해도, 제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매 순간' 누군가는' 살해당하고 강간당하고 자연재해에 당하고 끔찍한 일을 당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끝까지 기도해야만 하는지 최근에는 너무 지쳐서 의심이 좀 생깁니다. 

 

답변 1. 

 

그런 비극적 재앙의 99.9%가 인간의 부주의나 죄악 때문입니다. 최근의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도 인간의 무분별한 탐욕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막아줄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거기다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 죽게 마련입니다. 그 재해 중에 살아날 사람은 살고 죽을 사람은 죽습니다. 신자가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그런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재앙에서 기적적으로 간섭해주는 경우는, 설령 믿음이 아주 좋은 신자가 피해자에 포함되었어도, 거의 없습니다. 반드시 그분만의 특별한 목적이 있는 아주 비상한 경우에 한합니다.

 

대신에 신자 피해자는 영광스러운 천국에 일찍 먼저 올라간 것입니다.(사57:1,2 꼭 찾아서 읽어보십시오.) 여러 번 간절히 기도했는데 지쳤다는 뜻은 기도하면 상황이 단번에 아주 호전되고 생존자가 급격히 늘어날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 기대는 사실 불합리합니다.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불신자 희생자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 없이 살다가 영원토록 그분과 아무 관계 없는 곳으로 떨어져 고통만 당할 뿐입니다. 죄송하지만 어차피 갈 곳으로 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렇게 작정되었으므로 기도한다고 바뀔 상황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신자라면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맹장염은 간절히 기도한다고 곧바로 낫지 않고 반드시 수술받아야 하고 또 쉽게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의사가 실수하여 부작용이 생기지 않게, 또 환자도 믿음으로 담대하게 그 병에서 빨리 쾌차하라는 뜻으로 기도합니다. 자연 재앙에서도 기도한다고 재앙의 피해가 신속히 중지 혹은 크게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현지 사정을 잘 알지는 못해도 구조대가 더 많은 사람을 빨리 찾아서 쉽게 구조할 수 있게, 구조대도 사고당하지 않고 지쳐서 병에 걸리지 않게, 지하나 물속에 빠졌으나 아직 생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의 의지와 용기와 믿음을 되살려 달라고, 더 많은 구조의 손길과 자원을 조달해 달라고, 구조된 사람들도 나중에 그 재앙이 큰 상처로 남지 않고 정서적으로 잘 회복되고, 피해자의 유족들에겐 하늘의 위로가 임해 달라는 등의 많은 의미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주 드물게 기도로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수년 전에 태국의 보이스카웃 단원들이 여름 수련회 중에 홍수가 나서 동굴에 갇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전 국민은 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까지 한마음으로 각기 종교는 달라도 기도해주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기도의 응답이었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어쨌든 각처로부터 더 많은 구조 인력과 장비가 동원되었고 세밀하고도 올바르게 대응하여서 모두 무사히 구출시켰습니다.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게 일어나지만 어쨌든 어떤 재앙에도 결말이 어찌 되든 모두 기도해주어야 한다는 단적인 예입니다. 

 

신자로선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이 사탄의 음흉한 모략과 훼방을 어떻게 다스리고 그래서 이 땅의 물질계에 어떤 방식으로 반영되는지 모르니까 범사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실현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늘에서 뜻이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 이뤄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작정하신 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지 모르니까 더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결과가 어리석고 연약한 인간 신자가 바라는 모습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거룩함을 온전히 믿고서 결과는 그분께 완전히 맡겨야 합니다. 기도는 신자의 책임이고 그 열매는 하나님의 뜻에 달렸습니다. 자기 개인 일도 아니고 보편적인 재앙의 경우마저 그 결과가 자기 뜻이나 기대에 못 미친다고 따지기 시작하면 금방 지칩니다. 기도를 왜 해야 하는지 확신도 없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 의심만 늘어납니다. 

 

질문 2. 항상 기뻐하라고 하지만, 이런 일에 대해 중보기도를 할수록 항상 슬퍼하게 된다.

 

“'항상 기뻐하라'(살전5:16)는 말씀을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벌레 같은 나를 구원해주신 것이 너무나 감격스럽고 기쁜 일이기에 항상 기뻐해야 하고 또 기쁨으로 전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어떤 선교사님이 단순히 자신의 구원 받은 기쁨으로만 전도할 것이 아니라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안타까워하며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고 깨우쳐주셔서 큰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 전 세계의 비극적인 사실을 전해 들을 때마다 마음 아파서 중보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가 끝이 없고 항상 슬픈데다, 간혹 제가 즐거운 일이 있어서 웃다가도 지금도 누군가는 큰 고난 중에 있는데도 나는 웃고 있다는 죄책감이 듭니다. 제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비극은 1초도 끊기지 않을 텐데 항상 기뻐하라'라는 말씀을 실천하면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절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닌가요? 중보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죽을 때까지 근심으로 기도하고 근심하면서 매 순간 무겁고 우울하게 살아가야만 하나요? 그렇다고 중보기도를 해주었으니 마음 놓고 기뻐해도 되는지요? 

 

답변 2. 

 

어떤 심정인지 충분히 이해는 됩니다. 그러나 한 시도 빠지지 않고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자는 바보나 정신질환자 둘 뿐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더러 그런 사람이 되라고 요구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공사역 중에 그러지 않고 슬퍼하거나 불같이 화도 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항상, 모든, 전부, 전심 등의 표현은 그 대부분이 하나도 빠짐없는 100%를 의미하지 않고, 아주 많다는 것을 강조하는 관용적인 표현임을 아셔야 합니다. 나아가 항상이라는 말에는 항상 기뻐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전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도 슬픈 일, 힘든 일, 상처받는 일 등이 생기면 자연히 슬픔, 분노, 염려, 짜증 미움 등의 감정은 생기는데 그것은 아무 잘못도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외부의 사건과 환경과는 신체의 감각기관(오감)을 통해 일차적으로 접촉하기에 감정이라는 반응이 가장 먼저 생깁니다. 너무 추우면 괴롭다, 재앙이 생기면 슬프다는 감정이 자연발생적으로 따라오는데 이는 가치중립적이라 선악 간의 도덕률을 적용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에 대해선 “감정을 살려라”-연재 중단 중이지만- 사이트의 글들을 참조하십시오.) 신자의 책임은 그 일차적인 온갖 감정을, 특별히 부정적인 감정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어떻게 해석 판단 적용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오히려 이런저런 고난 가운데 겪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마저도 잘 승화시켜서 그분의 일에 충성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도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는 (살전5:16) 계명에 한 가지 조건을 붙였습니다. 무조건 언제 어떤 일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바보처럼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살전5:18)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가 그 조건입니다. 답변의 전제에서 설명해드렸듯이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실현되는 목적과 방향으로만 세상사와 신자 개인의 인생사를 주관 통치하십니다. 따라서 비록 슬픈 일이 생겨도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지만 반드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역사한 일이므로 신자는 슬픈 가운데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 개인의 비극이 대부분 자신의 부주의나 잘못된 생활 태도가 그 원인이지만, 때로는 순전한 동기와 굳건한 믿음으로 행했음에도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 때도 궁극적으로는 나에게 오히려 유익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반드시 드러난다고 확신하면 기뻐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계명도 함께 제시했고, 더 중요하게는 힘든 일에는 아무래도 기쁜 감정이 쉽게 생기지 않으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보라고 명한 것입니다.

 

요컨대 신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고 또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의 재앙과 비극을 기뻐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그분은 마지막 날에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완성하실 이 땅의 영광스러운 구원만을 기뻐하시며 지금도 역사를 기쁨으로 주관하시기에 신자는 그분의 그런 기쁨에 항상 동참해야 합니다. 

 

질문 3. 그래서 그런 마음에서 무력감을 느낍니다.

 

중보기도해도 또 기도해야 할 일이 계속 생깁니다. 끔찍한 일들이 진정되었거나 해결되었다는 소식이라도 매번 들리면 힘을 얻겠습니다만 허공에 삽질하는 것 같은 중보기도가 과연 의미가 있는지, 나의 중보기도와는 무관하다는 무력감을 느낍니다. 저의 이런 괴로움 때문에 타인에 대한 관심을 끊겠다고 하는 것도 비성경적인 것을 압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답변 3.

 

이미 상기 답변의 전제와 질문 1과 2에 대한 답변에서 거의 다 설명해드린 셈입니다. 간단히 한마디로 대답하자면, 신자가 그런 기도를 하지 않으면 누가 이 고통스러운 땅과 죄에 빠진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해줄 수 있습니까? 역으로 말해서 신자는 기도하면서 그런 무력감과 공허함을 수시로 느끼라고 세상에서 불려 나왔습니다. 성경에 중보기도의 올바른 모습이 신구약에 각각 하나씩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모세(출32:32)와 바울(롬9:3)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걸어가며, 심지어 지옥 심판 받아도 좋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일대일로 맞짱을 뜨듯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목할 사항은 단순히 자연 재앙이나 인생 비극을 그쳐달라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동족의 죄를 용서해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가 정작 온 힘을 다해 기도할 제목입니다. 기도의 거인이라고 불리는 죠지 물러는 그런 구원의 기도에 전념했는데 죽을 때까지 불신자 친구 몇 사람의 구원을 위한 중보기도는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그 친구들이 영적인 찔림을 받아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고 전해집니다. 신자가 죽은 이후에도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이 다른 이의 구원을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낼 때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은 개인적으로는 그가 죽을 때까지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평생 무력감을 느끼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기도 시리즈에서 자세히 설명했음) 그로선 자기가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역사에 자기가 맡은 역할이 있다고 확신했고, 그 일에 적극 동참 충성하기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9/19/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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