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요?

조회 수 2037 추천 수 80 2006.02.16 00:2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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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질문은 어떤 분이 개인적으로 이멜로 질문해 오신 것이지만 일반적인 주제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질문]

우리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싶어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복음을 전하고 나서 아이들이 커나가는 과정 속에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 수가 더 많은 환경 속에서 1주일 2시간이라는 시간 속에 “우리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기에 내가 그 오는 생각들을 어떻게 분별하고 어떤 믿음으로 주님의 모습으로 살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먼저는 가르치는 자가 우리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을 부족한 모습이지만 사랑합니다. 얼마나 어떻게 좋으신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싶어요. 고아가 낳은 부모를 묻는 심정이라 하나님께 죄송하지만 알고 싶습니다.

[답변]

하나님을 안다는 의미는?

참으로 귀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자라는 아이에게 하나님을 바로 전해주어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게 하려고 부모가 먼저 제대로 알아야겠다니 하나님도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우선 아이들이 몇 살이나 되었는지 잘 몰라 그 연령층에 맞추지 못하고 일반적인 답변을 해 드리겠습니다.

질문자님께서는 하나님은 당연히 좋으신 분이지만 과연 얼마나 좋은 분인가를 알고 싶어하셨습니다. 이 또한 너무나 바른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수록 그분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의 성경적인 뜻을 정확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쉽게 접근해보기로 합시다. 전세계의 누구라도 부시 대통령이 텍사스 출신에 사업을 하다 주지사를 했고 미국 대통령에 연임하여 연일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보수적 가치관을 지닌 크리스찬이라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시가 그 사람을 알고 있느냐는 전혀 별개입니다. 부시가 상대의 신상에 대해서 훤히 알고 언제든 서로 만나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라야 부시를 안다고 감히 남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 관해 아는 것은 그 상대에 대한 지식적 앎입니다. 그러나 누구를 아는 것은 반드시 서로가 서로를 잘 알아야 합니다. 쌍방간의 체험적 앎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을 두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 않습니다. 불신자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이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것 정도는 압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그분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신앙이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기보다 그분이 분명히 나에 대해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그분을 아는 것보다 그분이 나를 훨씬 먼저 알았고 더 많이 안다는 것에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교리적, 종교적, 관념적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실의 실제적 삶에서 그분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 생생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나도 언제든 그분을 찾아가 이야기 할 수 있고 그분도 언제든 저에게 말씀하실 수 있는 사이라야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셨고 우주 만물을 지금도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무소부재하시다, 자비와 인자가 많으시다, 선하고 공평하시다, 거룩하고 영원하시다, 스스로 자존하신다 등등 일반적인 그분에 대한 지식만 갖고선, 아무리 신학 박사를 했어도 그분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눈물 흘리고 한숨 짓고 기뻐하며 즐거워한 실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교리적 지식은 없어도 심지어 성경의 책이 전부 몇 권이지 몰라도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너무나 좋은 하나님(Amazing Grace)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됩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권능은 무한하시다, 그분의 사랑은 다함이 없기에 좋다고 아는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직접 그분의 사랑을 많이 체험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질문자님께 제가 하나님의 좋으심에 대해서 아무리 정확하고도 섬세한 설명을 드려도 질문자님이 그런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 분의 사랑을 가장 많이 체험하게 될까요? 기도해서 암에서 낫고 부도가 난 사업이 다시 흥하고 아이들이 일류대학에 붙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그분이 우리를 먼저 알고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두말 할 것 없이 당신의 나라 백성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까지 인도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우리 죄를 깨끗케 해야 합니다. 죄로 더럽힌 자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분의 영원한 처소인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말 찬송가 405장을 작시한 존 뉴톤이 그 제목을 “경이로운 은혜(amazing grace)”라고 부친 이유를 아시지 않습니까? 천하에 방탕한 죄를 다 지은 아프리카 노예 상이이었던 그를 하나님은 폭풍우 치는 깊은 바닷물 속에서 살려 주었습니다. 그로선 정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단순히 육신적 생명을 살린 것이 은혜가 아니라 자기 같이 죽어 마땅한 자를 살려내신 그 뜻이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착한 자는 천국 가고 악한 자는 지옥 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자기 같이 악한 자를 하나님이 알고 있고 나아가 구원을 베푸셨다는 그 한량 없는 사랑이 너무나 경이했던 것입니다. 그는 험악한 바닷물 속에 허둥거리는 자기 곁에 주님이 자비로운 미소를 띄고 임재해 있음을 틀림 없이 느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보십시오. 하나님으로 봐선 복음을 훼방하는 천하의 배역 죄인인데 죽음의 벌을 면하도록 해주신 것뿐 아니라 오히려 가장 위대한 사도로 세워주셨습니다. 이 찬양을 작시한 존 뉴톤이 구원 이후 복음의 사도가 되었듯이, 바울도 아마 틀림 없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고 찬양했을 것입니다. 뉴톤이나 바울이 알았던 하나님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더 이상 좋을 수 없이 좋았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 이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주님의 일에 헌신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롬5:21) 좋으신 하나님을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끝이 없습니다. 요한 사도가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고 말한 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기록이 많아도 본인이 체험으로 알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도 주님이 나를 먼저 알고 사랑한다는 확신 가운데서 읽지 않으면 말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으신 하나님을 알려면 가장 큰 은혜를 받는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또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길 밖에 없습니다. 기도해서 암이 낫는 이적적 치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병을 치유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인 환자를 고치러 온 것입니다. 전인격체로서의 인간,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배역하던 죄로 부패한 한 영혼을 영원한 진노에서 건져 주시러 온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를 믿을 때에 신자는 자기는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 중의 괴수였음을 확실하게 인식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교리적 인정이 아니라 정말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꼭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전 심령에 오직 애통함과 처절함으로 채워져)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연약하고 더럽고 추한 존재인지 철두철미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알기 전에는 아무리 몸부림 쳐도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죄를 씻고 영혼의 갈급함을 채워 줄 수 없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이전의 자기가 완전히 깨어져 죽고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이런 체험과 확신이 없으면 아직은 하나님이 진짜로 얼마나 좋으신가를 모르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말씀과 기도에 열심을 내고 도덕적인 삶을 산다고 주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성령의 구원 역사는 일어날 수는 있지만 말씀보고 기도한다고 참 신자가 된 표시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든 신자는 처음 믿을 때에 뉴톤이나 바울처럼 “어찌 나 같은 자도 이렇게 사랑해서 구원을 주시는가?”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자신의 전 존재와 삶과 인생을 그 분께 온전히 바쳐 앞으로 하나님을 위해서만 살겠다는 결단과 헌신이 따라 나오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중생한 증거입니다. 말하자면 처음 믿은 그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큰 은혜와 사랑을 받아서 너무나 좋으신 그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들 모든 신자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의 감격을 다시 맛볼 수 없을까 안타까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불가능한 일을 소망하는 셈입니다. 신자가 된 후에 아무리 큰 환난이 있어도 처음 흑암에서 광명으로, 죄에서 의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진 은혜만큼 큰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신자가 구원을 얻게 된 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푼 은혜인데 하나님은 그런 구원을 두 번 베풀 필요도 없고 또 그러시지도 않으니까 신자에게는 동일한 감격이 다시 생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자는 자꾸 자기가 믿은 양 착각하니까 좀더 잘 믿으면 그런 감격이 또 생기지 않을까 미련을 가지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든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영원토록 동일하므로 수치적으로  따져서 우열이나 강약을 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느끼기에는 자기가 처한 곤경의 크기에 따라 사랑이 다르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처음 예수를 믿을 때의 하나님이 가장 좋으신 하나님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또 그런 큰 감격에 겨워 정말 순수하고도 단순한 마음으로 기도했고 그때마다 적절하고도 유익한 응답을 받았으니 초신자 시절이 더 좋았다고 회상되는 법입니다.

한 마디로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인가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설명, 더 정확하게는 체험은 십자가 보혈을 통과하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한 마디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주실만큼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자녀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제 자녀에게 어떻게 이 좋으신 하나님을 알게 할까라는 문제도 자연히 해결되었습니다. 부모가 교리를 정확히 가르치거나 어떤 좋은 설명보다도 자녀가 직접 체험으로 그분의 좋으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자녀 자신이 죽을 죄에서 건짐을 받는 중생의 은혜를 반드시 체험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선 자녀들이 아주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알고 믿기 때문에 질문자님 같은 고민이 생기게 됩니다. 아직은 자녀가 어려서 죄가 무엇인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어떤 효력을 지니는지,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말로서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모릅니다. 나아가 자신이 죽을 죄인이라고 아직은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더 거하게 할 수 없습니다.(롬6:1) 자녀들로 일부러 죄를 지으라고 부추기거나 죄에 빠져도 내 몰라라 할 수 없습니다. 죄에 빠져 봐야 나중에 더 철저한 회개를 하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은 당연히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또는 암 같은 중병에 걸리거나 대학 시험에 떨어져 처절한 실패도 겪어 봐야 된다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경우를 겪게 되면 당연히 하나님에게 매어 달리고 또 그분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회는 되겠지만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소위 말하는 모태 신앙의 자녀가 겪는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선 절대로 부모가 신자라고 자녀를 우격다짐으로 종교적 도덕적으로 양육시켜선 안 됩니다. 성경을 의무적으로 외우고 교회 행사에 억지로 참석 시키려 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성경이나 교회를 멀리 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스스로 성경을 읽고 교회 가는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재미를 느끼게 해 주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강요하지 않아도 교회는 당연히 가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또 신앙 생활이 자기 삶과 연결되어 실제적인 유익과 즐거움이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만화로 된 성경을 먼저 읽게 한다든지, 교회 행사도 아이의 적성에 맞는 것부터 참여 시키고, 친한 친구들이 있고 또 교리를 교육시키기 보다는 봉사와 체험을 강조하는 주일학교를 선택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녀를 위해서 기도해 주면서 동시에 아니 더 우선적으로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자녀 스스로 기도하여 응답 받는 체험을 쌓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흔히들 부모가 기도해 주는 것으로 마치 신자 부모로서 의무를 다한 양 생각하는데 자칫 부모의 믿음만 자라지 아이의 믿음이 제대로 성장할지는 의문입니다. 물론 부모가 응답 받은 것을 나눌 수는 있고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교육 효과는 간접 체험보다는 직접 체험이 훨씬 효과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신앙의 문제를 제삼자가 대신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남편도 그렇지만 자녀도 엄마 치마 자락 잡았다고 천국 가는 법은 절대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모가 반드시 성경 대로 사는 모습을 자녀들 앞에 본을 보여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설명해 주는 것보다 부모들의 삶으로 그들 앞에 보여 주는 것입니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특별히 아이들은 귀는 닫지만 눈은 결코 닫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문답 사이트 #55 "안 보이는 하나님을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도 함께 참조 바람)

그리고 그것은 부모가 기도해서 집 안에 축복을 받는 모습도 좋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실망하지 않고 소망을 잃지 않는 모습으로 보여 주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환난 가운데도 즐거워 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체험을 자녀가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집안에 환난이 닥치면 본인 뿐 아니라 자녀의 신앙 체험에도 정말 좋은 기회를 주셨구나라고 감사하셔야 합니다.

나아가 자녀에게 항상 주님의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축복과 격려와 은혜의 말로 정말 가슴을 열고 진정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서로 손을 잡고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매일 의무적으로 가정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자녀 자신이 하나님을 조금씩 조금씩 알아 나가는 것이 자녀의 신앙을 더 성숙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자녀는 나중에 커서도 무슨 일이 생겨도 좋으신 하나님을 놓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각오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자란 자녀는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와 보호 속에 자라게 됩니다. 말하자면 아주 큰 환난과 고통을 겪지 않고 평탄하게 자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이 되어서야 믿은 자보다 하나님에 대한 극적인 체험이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대로 큰 은혜 받으려고 큰 고통을 자청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대신에 순수하고도 올바르게 자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더 큰 축복입니다. 이런 점을 자녀에게도 잘 주지 시켜야 합니다.

극적인 체험이 없을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자녀를 기도하며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스스로 알아가도록 키우셔야 합니다. 암이나 교통 사고 같은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 사소하고도 일상적인 어려움 뿐이라도 더욱 기도로 하나님께만 의지하여 이겨내는 체험을 쌓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수치적으로 따지면 안 되지만 작은 은혜를 많이 겪으면 기적적인 체험 하나 보다 낫습니다. 나아가 큰 기적을 겪은 사람은 큰 일에만 그것도 기적 같은 큰 은혜만 기대하는 경향이 생길 수 있지만, 작은 은혜를 많이 겪은 자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항상 기도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모가 자녀를 위해 절대 잊지 말고 계속 기도해 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녀 스스로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을 눈물 흘리며 만나는 순간이 언제 될지 끝까지 자녀를 지켜 보아야 합니다. 모태 신앙으로 자라면 아무래도 더럽고 추한 죄에 빠지는 경우가 드물겠지만, 그래도 한 인간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벌거벗고 엎드려야만 하는 순간이 반드시 있습니다. 원죄 하에 태어난 죄인으로서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발견하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할 때가 사람마다 시기는 다르지만 하나님이 사랑하여 선택한 자녀라면 언젠가는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사 내 자녀도 중생의 체험을 하고 주께 그 일생을 스스로 헌신하는 때가 오도록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질문자님의 자녀가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을 정말 제대로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는 질문자님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을 처음 만나 전인적인 구원을 체험할 때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질문에 대해 한 문장으로 압축한 제 답변입니다.    

2/15/2006

사라의 웃음

2012.10.28 22:49:24
*.109.85.156

하나님을 제가 알면 하나님도 저를 아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말씀에만 매진하며 교회생활에 충성스런 특심만 있으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함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를 아신다는 것의 의미가 ,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여 주셨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도하시고 계시며, 늘 곁에서 함께 웃고 우시며 자상스레 가르치시고, 죄악의 자욱들도 스스로 인정하도록까지 가르치시고 회개하여 또 바른길로, 또 가르치시고 또 바른길로... 그렇게 하나 하나 섬세히 간섭하시는 그 사랑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이심을 자세히 설명하여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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