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질문]
얼마 전에 교회의 한 집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저의 이런저런 개인적인 고충 및 신앙적인 고민들을 들으시더니, 갑자기 "형제님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으신 것 같네요!" 하시더군요. 전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예수님을 내가 만난 적이 없다고, 저를 잘 알지 못하시는 분이 말하는 것을 듣게 되니 마치 제가 낙동강의 오리 알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좀 더 이성적인 반론을 펴고 싶었지만, 매일 근심하며 넘어지면서 살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이 어쩌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니었기에, 인정하는 마음으로 그냥 묵묵히 듣고 있었습니다.
집사님이 자신의 과거를 간증삼아 말씀하시면서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셔서 .. 했다." 이런 식의 표현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어떤 식으로 그분께 말씀하셨는지' 말입니다. 기도 중에 음성이 들린 것인지, 마음이 동한 것인지, 말씀을 보다가 확신을 얻은 것인지..
제가 질문을 올리는 요지는 이렇습니다. 교회에서 많은 분들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습니다.", 혹은 "하나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즉 모든 것을 굉장히 주관화(?)시켜서 전달하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런 주관화된 식의 내용을, 듣는 사람들도 이해하고 주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마치 '바보 (혹은 outsider)'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말 자신은 믿음이 없는 건가 하는 의심도 들게 되고요.
저는 하나님을 본적도 음성을 들은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항상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지내왔습니다. 때때로 삶이 고단해지면 '하나님이 정말 계실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성경을 믿고 죄인임을 깨닫고 속죄의 은혜로 밖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믿고 끝까지 붙잡기를 원합니다. 무엇이 '예수님을 만난 것인지요?' 무엇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특별히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좀 더 뚜렷하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답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뜻은?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우연한 조우(遭遇)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특정한 목적을 갖고서 어떤 방식이 되었든 상호 간에 뭔가를 주고받기 위해서 만나는 것입니다. 또 그런 만남이 있고난 후에는 장기든 단기든 지속되는 관계가 형성됩니다. 일회로 그치는 거래라고 해도 일단은 서로에 대해 알고 또 서로에게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만남과 전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반드시 그분께서 찾아와 먼저 만나 주셔야만 그 만남이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죄에 찌든 인간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그분에게 영향 끼칠 것은 사실상 거의 없으며 그분 쪽에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거의 전부입니다.
예수님 쪽에서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이 무엇입니까? 믿음을 갖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은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벧전1:9)이며, 또 구원은 한 죄인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자는 반드시 구원의 확신을 갖고서 그분의 자녀답게 변화 성숙되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과 만났던 방식은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시는 그분의 절차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 다릅니다. 하나님이 제 멋대로 일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은 반드시 세상에 오직 그 한 사람만 있는 양 일대일로 친밀하고도 고유한 방식으로 대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과 동일한 방식, 시기, 경험이라면 도리어 그분과의 만남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제는 이미 예수님을 주로 모신 자들 가운데도 많은 분이 그분의 자녀답게 변화 성숙되는 부분에 그리 자신이 없으니까 그분과의 만남조차 의심하려 듭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변화와 성숙이란 말 자체가 점진적인 과정이지 단번에 완성된다는 뜻이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기독교에선 구원을 세 단계로 나눕니다. 먼저 죄의 형벌에서 면제되는 칭의입니다. 이는 신분상의 변화로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단번에 구원 받는 일도 있지만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어쨌든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나면 다시 되풀이 거듭나는 일이 없다는 뜻에서 일회적입니다. 천하 죄인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으면 천국 가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 그분이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나오게 해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죄의 권세에서 평생을 두고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성화의 구원으로 칭의와 달리 완성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계속 자라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신자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스스로 노력하는 과정입니다. 셋째는 천국에 가면 죄와는 완전히 결별하고 그리스도처럼 영광스럽게 변모되는 영화의 구원입니다. 첫 번 칭의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만 단번에 이 땅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 셋 중에서 통칭 “인격적 만남”이란 칭의의 구원 즉,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에만 해당됩니다. 성화 중에는 매일 말씀과 기도를 통해 그분과 만나 교제하는 것이기에 그분의 인도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또 그런 한 번의 거듭남이 있으면 성화와 영화는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신자 본인보다 하나님이 더 큰 열심과 능력으로 신자를 천국에 입성할 수 있도록 바꾸어주십니다.
바꿔 말해 믿은 후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크게 변화 성숙되지 않았다고 해서 인격적 만남이 없었다고는 절대 단정 짓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죄를 멀리 하고 주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으면 이미 성화의 과정 중에 있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성화에서 완성되는 자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얼마나 많이 닮아 가느냐의 싸움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의 특징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이뤄졌다는 더 확실한 검증 기준은 따로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어떻게 됩니까? 무엇보다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철두철미한 죄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 없이는 도무지 구원의 가능성이 없음을 절감합니다. 그분의 은혜를 갈망하며 하나님 앞에 완전히 부복하여 그분의 긍휼만 바라보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시간적 전후 순서는 따질 필요 없음, 지금까지의 삶이 완전히 헛것이었음을 고백하면서 자기 옛사람으로부터 돌이키는 회심이 따릅니다. 그 동안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었거나 아예 무시하면서 이 땅의 물질 우선적 삶이 전부인 줄 알아 자신의 평안과 형통만을 목표로 살았습니다. 이젠 거룩한 주님의 뜻에 따라 보호 인도 받으며 남의 유익을 구하며 그분의 나라를 이 땅에 확장시키려고 인생의 목적이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자에게 반드시 나타나는 큰 특징을 정리해 보자면: 1)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고백, 2)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어 영원한 형벌이 면제되었음에 대한 확신, 3) 무신론적 과거의 삶을 벗어버리고 오직 주님만 따르려는 결단 4) 실제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함, 5) 자기 인생에 주시는 주님의 소명을 깨달아 그대로 이루려고 하는 것 등입니다.
여기서 첫 셋은 필수적입니다. 혹시라도 초자연적인 신령한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이 셋으로의 변화가 없다면, 설령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들었다 해도 그분과의 인격적 만남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셋은 어디까지나 본인과 하나님만이 아는 일입니다. 제 삼자가 나서서 판단해줄 수 있는 성질이 되지 않습니다.
인격적 만남이란 한마디로 두 당사자의 전인격이 마주쳐서 상호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신자는 반드시 이성, 감성, 의지 전부를 동원해 예수님에 대해 반응 결단 시행해야 합니다. 예수님 쪽에선 그 믿음과 순종의 진정성을 보시고 걸맞은 은혜를 반드시 베풀어 주십니다. 요컨대 예수 믿기 전과 후의 삶을 스스로 점검해 볼 때에 인생을 살아가는 방향이 정반대로 달라졌다고 자신할 수 있다면 확실하게 그분을 만난 것입니다.
반면에 4, 5의 특성은 그런 만남 이후 평생에 걸친 진행형이기에 여전히 미성숙한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려고 마음만 먹었지 구체적으로 전혀 실행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지금 죄에 지고 있어도, 그것도 죄인 줄 알면서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있어도 진정으로 심령 깊숙이 애통해하며 어떡하든 빨리 회개하고 주님 뜻대로 살아야겠다는 소원이 있다면 여전히 예수님을 만난 자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종교적인 실력과 업적을 많이 갖추었어도 자신의 의만 앞세운다면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을 수 있는 것입니다.
떨기나무 불꽃에서 모세의 여호와 대면, 어린 사무엘의 성막에서 불려나감, 이사야 선지자의 성전 구름 속에서의 주님과 대면,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함, 같은 사건은 특별한 사명을 맡기려는 자에게만 그것도 아주 드물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신약시대엔 그런 초자연적 대면은 거의, 전혀는 아님,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신에 성경 말씀을 통해, 대개 설교나 성경공부의 방식임, 시간적으로도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삶에서의 체험이 수반하여 그 만남을 확증시켜 줍니다. 초자연적 체험이 먼저였던 자는 나중에 말씀을 통해 십자가 진리를 확신케 해주고, 또 말씀으로 먼저 예수님을 믿게 된 자도 실제 삶에서 그분이 인생의 주인임을 절감케 해줍니다. 그분과의 초자연적 대면 체험도 반드시 성경에 비추어 그 진위여부를 재점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계시의 주관화?
상술한 내용에 입각하여 질문자님이 의아해했던 문제에 대해 간략히 답변드리겠습니다.
- “매일 근심하며 넘어지면서 살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이 어쩌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니었기에,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다는 지적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그냥 묵묵히 듣고 있었습니다.”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상기의 첫 세 가지 변화가 있었다면 분명히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성화는 아무도 완성된 자가 없을 뿐 아니라 현실 고난에 대해선 누구나 염려합니다. 심지어 바울, 아니 예수님도 곧 닥칠 고통에 대해 두려워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하는 방향과 지속성의 문제이지, 매순간의 도덕적 종교적 영적 업적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주제를 성경문답에서 가장 많이 다뤘습니다. #93 “믿은 후에도 자꾸 죄를 지어 너무 괴롭습니다.”, #102 “자꾸 죄의 유혹에 넘어가 절망하고 있습니다.”, #157 “복음 안에서도 자꾸 죄를 짓는데요?”, #164 “신자가 죄를 지으면 믿음이 없는 표시인가요?”, #171 “신자가 죄 지으면 천국 못 가는가요?”, #204 “어떻게 하면 더 거룩해질 수 있을까요?” 등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셔서 .. 했다.’는 말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어떤 식으로 그분께 말씀하셨는지, 기도 중에 음성이 들린 것인지, 마음이 동한 것인지, 말씀을 보다가 확신을 얻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주님과의 첫 인격적 만남의 경우는 세 가지 변화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믿은 후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주님과 교제할 때는 주로 내적인 미세한 음성, 실질적으로는 생각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오는 근원은 여럿입니다. 진짜 성령이 주시는 뜻일 수 있지만, 잡생각, 기도했던 문제에 관한 추가적 연상, 다른 사람의 영향, 세상일에 대한 반응, 심지어 사단이 심어주는 생각 등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동안 기도했던 일이나 묵상했던 주제와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일관된 진리와 비교해 그 들은 음성(생각)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성령님이 알게 해준 뜻이라면 우선 마음에 확신, 기쁨, 평강, 자유가, 그중 일부든 전부든 간에, 넘치게 됩니다. 또 실제 삶에서 나중에 그대로 실현되어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 “다른 이들의 주관화된 내용을 듣는 사람들도 이해하고 주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마치 '바보 (혹은 outsider)'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말 자신은 믿음이 없는 건가 하는 의심도 들게 되고요.”
하나님 말씀을 자주 듣는다고 다 믿음이 좋고 그렇지 않은 자는 믿음이 안 좋다고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됩니다. 정말 하나님 뜻을 온전히 깨닫고 듣는다면, 그래서 반드시 의의 열매를 맺는다면 그럴 수 없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원이 불명한 채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 - 직관마저 하나님 말씀이라고 주관화하는 것은 오히려 믿음에 불균형을 이루 수 있고, 심하면 신비주의적 성향과 합쳐서 이단으로까지 빠지게 됩니다.
설교와 큐티와 기도와 묵상과 찬양 등 모든 신앙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라고 스스로 주관화시킨 말씀은 오히려 반드시 성경 말씀에 비추어 객관화 시켜야 합니다. 객관적인 진리에 부합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으면 그야말로 주관화로만 그칠 뿐입니다. 나에게 그런 주관화시키는 실력이 없다고 소외감을 느끼거나 믿음에 자신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말씀을 읽고 그대로 따르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그 깨달은 객관적 진리대로 열심히 사시면 됩니다. 그런 음성을 듣고 안 듣고는 중요한 사항이 아닙니다. 음성을 듣고 실천 못하면 더 나쁜 것이며, 또 그런 자에게 하나님이 들려줄 리도 없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계시라도, 직접적인 음성이나 환상이든, 말씀 묵상을 통한 깨우침이든, 기도 중에 들은 성령의 미세한 내적 음성이든, 순간적으로 내 생각과 무관하게 떠오르는 직관이든, 주위 사람을 통한 충고이든, 되어져 가는 환경을 나름대로 이해 분석한 결과이든 간에, 성경과 위반되면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은 반드시 “성도가 거룩해지며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는 방향으로만 결과 맺게” 마련입니다. 이것 외에 그분의 음성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다른 기준은 없습니다.
(비슷한 주제를 다룬 #20 “하나님의 예언자는 더 이상 나올 수 없는가요?”, #127 “오늘날도 선지자적 기능을 특정인이 수행 할 수 있는지요?”, #208 “성경말씀이 어떻게 살아 역사하는가?” 등의 글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9/20/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