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구원 받았는가?

조회 수 4937 추천 수 16 2011.01.01 03: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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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구원 받았는가?


[질문]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혼은 그들의 한 가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로 떠나갔지만(행5:1-11), 영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천국으로 인도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영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판단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한 특정한 죄로 인한 한순간의 심판과, 죄사함으로 인한 영혼의 구원은 엄연한 별개의 사안이다. 십자가 복음의 능력이 일순간의 죄 하나로 인해 도말되지는 않는다. 물론 본문의 내용 자체로는 판단이 어렵겠지만,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초대교회 성도의 일원이었기에, 한번 이루어진 구원이 일시적인 한 사건으로 철회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의견을 접했습니다. 과연 그들은 구원을 받았을까요?

[답변]

많은 신자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입니다. 솔직히 저부터도 주일날 헌금할 때마다 손이 부끄럽습니다. 어떤 때는 얼마를 해야지 마음을 먹고선 막상 헌금봉투에 수표나 돈을 집어넣을 때는 절반은커녕 훨씬 이하로 깎는 치사한 짓(?)도 마다 않습니다. 이에 반해 이들 부부는 비록 일부만 냈다 하더라도 갖고 있는 땅을 팔았는데 하나님이 단번에 죽이시다니 너무 잔인한(?) 분 같습니다. 그것도 핍박을 무릅쓰고 갓 출범한 초대교회에 동참한 신자였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과연 그들이 구원 받았을 지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생기며, 위와 같이 구원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게 됩니다.

성경 난제에 대한 전제

먼저 답변을 드리기 전에 분명히 해둘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누가 구원받았는지는 오직 하나님과 본인만이(때로는 본인도 모를 수 있음) 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를 두고 제 삼자가 구원 받았다, 받지 않았다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비록 이단의 가르침은 분명 틀렸을지라도 그 중에도 예수님을 성경대로 순수하게 믿는다면 구원 받을 자가 있으며, 반대로 아무리 정통 개신교회의 목사라도 복음 안에 온전히 들어오지 않았으면 구원 받지 못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래 드리는 답변도 구원의 성경적 진리에 관한 이해를 돕는 차원으로만 이해해야 합니다. 미리 답을 드리자면 구원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거의 다지만 어디까지나 최종 주권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또 우리가 천국에 가면 그들의 구원 여부와 이유를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천국에서 우리의 관심은 이미 그런 주제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정말로 거룩하고 영원한 차원에 가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당신의 신비한 경륜과 절대적 주권에 따라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만 선물로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측 입장에서 벗어나 구원의 의미나 구원 받은 여부를  따지면 그 자체로 이미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구원 받은 자가 잘못을 범하면 구원이 취소되는지 따지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틀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최소 되지 않는 구원을 이미 받았는데, 인간들이 취소 가능성을 논의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따라서 물어야 할 질문은 “그 사람이 구원 받은 신자인지”여야지, “신자가 이런 짓을 했으니 구원이 취소되는지”여선 안 됩니다. 이 주제에 관해서도 초대교회 신자로서 복음을 받아들였으니까 당연히 구원 받았을 것이라고 전제하면 따로 따질 필요조차 없이 자동적으로 답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초대교회 신자라는 진술에 이미 정답이 내포된 것입니다. 그보다 이부부가 초대교회 ‘교인(church members)’이었어도,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여 중생한 ‘신자(true believers)’인지 여부가 논의의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알기 쉽게 설명해 설령 헌금을 수백만 불 속였더라도 이미 신자라면 마땅히 구원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믿은 후에 잘못한 행위로 구원이 취소된다면 모세나 바울을 비롯해 인류 가운데 단 한명도 구원 받을 자 없습니다. 천국은 영원토록 삼위하나님만 계시고 보좌 아래는 텅텅 빈 채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 부부에 관해, 아니 모든 성경 사건에서 그런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됨을 먼저 고찰해야만 구원여부를 더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성경에 신학적 판단을 내리기 힘든 애매모호한 사건들이 많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분명하고 간단합니다. 신자로 혼란한 가운데 방치해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꾸만 인간을 미혹하게 만드는 것은 사탄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성경을 읽기만 하면 영적인 현인이 된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깊이 묵상하며 때로는 세밀하게 연구해 가면서 읽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영적 진리에 관한 해답을 찾기는 힘들어도,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문제된 구절이 포함된 전체 문맥 안에 혹은 다른 성경 책 안에서 정답을 도출할 수 있는 힌트는 반드시 숨겨져 있습니다. 또 그런 힌트들을 추적 연결해서 정답을 얻고 나면 무릎을 칠 정도로 그 내용이 간단명료합니다. 진리는 복잡하거나 애매모호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어떤 성경의 난제라도 성경으로 풀면 풀린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살인자들

성경을 성경으로 풀기 위해 이와 유사한 케이스를 찾아봅시다. 교회와 돈이 연결된 문제라고 해서 시몬의 경우(행8:18-24)와 비교하면 핀트가 어긋난 것입니다. 말하자면 솔직히 헌금 속이는(?) 죄를 더 많이 범하는 우리의 경우와도 비교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질문의 초점은 죄를 짓는 바람에 하나님께 큰 벌을, 그것도 죽음의 벌을 받았을 때 구원 여부를 따지는 데 있으므로 그와 비슷한 경우를 찾아 비교해봐야 합니다.    

우선 모세, 다윗, 바울의 경우를 봅시다. 다들 살인한 죄인으로 죄의 질만 보면 헌금 속인 것보다 더 중합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비록 징계는 받았어도 죽음의 심판은 받지 않았습니다. 잘못한 후에 시간을 두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다윗의 경우 하나님이 불륜의 소생인 어린 아들이 죽는 벌은 내렸지만 정작 당사자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살인 같은 큰 죄를 범했어도 이들이 구원 받았음을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구원을 의심할 만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그분의 일에 크게 쓰임 받았던 종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죄를 짓는 현장에서 혹은 직후에 죽음의 벌을 받은 경우는 어떠합니까? 고라당의 반역 사건(민16장), 아이성 전투에서의 아간(수7장), 사자에게 물려 죽은 유다에서 온 선지자(왕상13장) 등을 보십시오. 그들이 구원 받았을 것 같습니까? 전혀 아니지 않습니까? 이들 또한 성경 기록에는 그들이 구원 받았을 만한 힌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라당, 아간, 선지자 모두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신약시대로 치면 교인이었음에도 죽음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벗어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요컨대 교인이었어도 신자는 아니었다고 봐야 합니다. 신구약 시대의 구원의 방도가 행위와 은혜로 나눠진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 원칙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그 구분은 어디까지나 인간 쪽에서 이해하는 관점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자에게 당신께 진심으로 항복케 하는 은혜를 베풀어 구원할 뿐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과 더 유사한 경우로 가룟 유다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3년간 동고동락했고 직접 대면하여 복음을 들었습니다. 거기다 숫자가 얼마 안 되지만 그 공동체의 돈궤를 맡았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교회 재정부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주님을 배반, 밀고하는 인류역사상 최고의 죄를 지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밑져야 본전 식의 심보로 주님을 배반했을지 모릅니다. 유대관원들이 잡으러 왔을 때 스승이 진짜 그리스도라면 큰 능력으로 물리쳐서 로마 압제에서 동족을 구해줄 것이고, 그러지 않는다면 어차피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니까 배반이 큰 문제가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못한 십자가에 달리시는 방안으로 구속을 완성시켰습니다. 결국 유다는 자기 양심에 못 이겨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그가 구원 받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명시적으로 밝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요13:10,11) 예수님은 유다를 구원하려고 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열두 제자로 복음을 가까이서 자주 들었던 그도 스스로 택한 길이긴 해도 자기 죄로 죽음의 벌을 받았기에 구원 받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애매모호한 성경 기록으로 신자로 당혹케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비슷한 케이스를 상호 비교해 보면 일관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죄로 인해 곧바로 죽음의 벌을 받은 자가 구원 받았으리라는 힌트를 성경은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성경은 아주 명료하다는 것입니다. 또 성경원리를 제대로 알기 위해 여호와의 율법을 항상 묵상하라고 성경 자체가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의 경우는 다릅니다. 어떤 큰 죄를 지었어도 천국으로 입성시킬 당신의 자녀이기에 반드시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신자는 순교, 환난, 사고, 질병, 노환으로는 구원하시지만, 죄를 짓는 즉시 죽음의 심판을 내리는 방식으로 구원(?)하실 하나님은 아닙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인간 됨됨이

“한 특정한 죄로 인한 한순간의 심판과, 죄사함으로 인한 영혼의 구원은 엄연한 별개의 사안이다. 십자가 복음의 능력이 일순간의 죄 하나로 인해 도말되지는 않는다. 물론 본문의 내용 자체로는 판단이 어렵겠지만,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초대교회 성도의 일원이었기에, 한번 이루어진 구원이 일시적인 한 사건으로 철회되지는 않을 것이다.”

상기 진술은 복음의 절대적 진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반드시 이 부부가 구원 받았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그 전제가 맞는지 따져보기로 합시다.

성경에는 문맥 뿐 아니라 본문 안에도 행간(行間)의 의미 즉, 명확한 진술이 없는 구원여부에 관해 합리적으로 추적해 개연성 있는 해답을 찾을 수 있는 힌트가 반드시 숨겨져 있습니다. 본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성경은 너무나 정미한 기록입니다.    

먼저 성경 원본에는 장절이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바로 앞부분에 바나바의 헌금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저자가 바나바는 순수한 마음으로 헌금한 반면에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고 대조하려는 의도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지 시기 질투심으로 자기들도 교회 안에서 이름 한 번 내보자는 뜻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요셉을 두고 권위자(바나바)라고 칭찬해준 것을(4:36) 듣고서 땅을 팔았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그 값에서 얼마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5:2)고 합니다. 아내와 공모했습니다. 부부가 한 통속 즉, 같은 인격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말렸어야 합니다. 최소한 양심의 가책은 느껴야 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4절)한 것이었습니다.

남편 아나니아가 먼저 죽고 아내 삽비라도 이어서 죽음의 벌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분명히 그녀에게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8절)라고 물었는데도 시침 떼고 그렇다고 했습니다. 단순히 거짓말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회개할 기회를 받았음에도 전혀 뉘우칠 기색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물었기에 어느 땅을 얼마에 팔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거나, 최소한 시세가 얼마쯤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감히 속이려 들지 말라고 미리 힌트를 준 셈입니다. 어쩌면 교인들의 칭찬을 받을 욕심에 땅 팔기 전부터 어느 땅을 팔아 그 전부를 헌금하겠다고 부부가 미리 떠벌리고 다녔는지도 모릅니다. 회개할 기회가 수차 있었음도 가룟 유다의 경우와 같지 않습니까?  

더 결정적인 힌트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남편 아나니아에게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4절)라고 다그쳤습니다. 아나니아가 자기 땅인데도 팔아서 헌금하는 일에 자기 임의로 하지 않고 다른 입김이 작용되었다는 것이 전제된 말입니다. 앞선 구절에서 아내도 알더라는 기록과 또 삽비라더러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라는 말을 보더라도 이 범죄에 아내가 더 앞장섰을 수 있습니다.  

그럼 요즘의 장로나 목사가 회의로 이미 결정된 사항을 사모의 말에 넘어가 번복하는 죄와 같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아담과 이브의 범죄와 유사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최초 부부의 경우도 분명 아내가 선도하고 남편이 맞장구 쳤으며 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 옷을 직접 지어 입혔습니다. 회개할 기회도 주었고 하나님이 구원해주셨다고 믿을만한 명시적 기록입니다. 그것도 원죄를 범하여 모든 인류를 당신의 죽음의 형벌 아래 몰아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반면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구원을 받았다면 확정적 표현이 아니라 해도 최소한 추측할만한 힌트를 반드시 성경에 포함시켜 놓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오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이지 않습니까?

결정적으로 잘못된 구원관

그리고 질문하신 내용 중에 구원관에 결정적인 하자가 하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혼은 그들의 한 가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로 떠나갔지만 영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천국으로 인도되었을 것이다.” 혼은 심판 받고 영은 구원 받았다고 말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한 인간을 두고 일부분씩 구원하고 심판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말을 하신 분의 진짜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고, 부주의로 우리 말 표현을 세밀하게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을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 혹은 영혼육의 삼분법으로 묘사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특성이나 신앙 원리를 쉽게 설명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하나의 전인적 인격체로만 다루십니다. 플라톤 식의 영과 육이 분리된 인간을 절대 논하지 않습니다. 비록 신자가 죽어서 육신은 이 땅에 남기고 그 영(육체와 반대되는 내면이라는 뜻)만 천국으로 가지만, 마지막 때에는 완전한 육체의 부활이 있습니다.

육신의 부활은 기독교 구원만의 특징입니다. 바꿔 말해 죽어서 육신이 이 땅에 남는 것은 물질이 영계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 이 땅에서 그 육신이 썩는 것도 단지 물질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 전에 신자의 육신 죽음도 원죄의 저주로 인한 결과이지만, 특정한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의미는 없다는 뜻입니다.  

혹시라도 혼은 지정의를 의미하는 정신이고, 영은 하나님과 무의식중에 교통할 수 있는 영이라고 분류하여 죄를 범한 혼은 심판 받고 영만 천국에 간다는 주장을 하면 아주 이단적 발상이 됩니다. 우선 천국에서도 신자의 지정의는 정상적으로 작동해야만, 당연히 죄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을 찬양하며 그분과 세세토록 왕 노릇할 수 있습니다.

또 죄지은 혼만 심판 받으면 십자가 복음이 아니라 윤리적 구원관이 됩니다. 나아가 그런 원리의 일관성이 유지되려면 불신자의 경우도 동일하게 혼만 심판 하고 영은 구원해 주어야만 합니다. 인간의 일부는 나쁘고 일부는 좋기에 구원과 심판도, 혹은 죄의 구분도 그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전부 반성경적입니다.

한 인간 전부가 구원 혹은 심판받는다면 필연적으로 그 부차적인 진리도 도출됩니다. 즉 하나님이 육체만 따로 떼어서 심판을 하지 않는다면, 역으로 따져 특정 죄에 상응해 곧바로  육체가 죽는 심판을 받았다면 사실상 그 사람 전부가 즉, 영도 심판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예에서 보듯이 즉사하는 심판을 받은 자는 구원을 못 받은 반면, 아무리 살인죄를 지었어도 회개의 기회를 얻어 돌아온 자는 구원 받은 것입니다. 아니 이미 구원한 자라서 회개의 기회를 준 것입니다. 앞에서 신자는 순교, 환난, 사고, 질병, 노환으로만 죽지 심판의 죽음은 없다고 말한 까닭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의 기록을 보십시오. 심판 받아 죽은 자는 물론 자살한 자도 없지 않습니까?

성경 기록의 목적

성경의 모든 구절은 그 기록된 특유의 목적이 있으며 또 그 목적을 완벽하고도 명료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그 목적은 물론 후대 독자더러 우주만물을 통치하고 세상만사를 주관하는, 특별히 인간의 구원과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뜻을 정확하게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사건을 두고 이렇게 상반된 해석이 나온다면 과연 본문이 기록된 목적에 맞는지 역으로 추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과연 이 사건이 하나님께 죄를 지어도 그 육신(내지 혼)은 심판 받아 죽어도 영은 구원 받아 천국으로 갔다는 것을 후대 독자더러 깨달으라는 뜻이겠습니까? 나아가 초대교회에 소속된 교인이라면 일단은 다 구원 받았다고 봐야 합니까?

아니면 특정한 죄로 인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육신이 죽는 심판을 받으면 그 인간 전체가 심판 받은 것으로 이해시킬 목적이겠습니까? 또 초대교회에 소속된 교인이라도 전부 다 구원 받았다고 가정해선 안 되는 것이 합리적이겠습니까?    

물론 성령이 아주 강력하게 역사했고 또 기독교를 하루 속히 견고히 세울 필요가 있었다는 초대교회의 특수성은 감안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사역과 교회 전체에 성령의 역사가 충만했지 시몬의 경우를 보더라도 교인 전부에게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또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따르면 교회에 적극 참여했다가 핍박에 못 이겨 교회를 떠난 자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가라지와 알곡을 심판 때까지 함께 두라고 했으며, 또 반석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이나, 씨 뿌리는 비유를 가르쳤겠습니까? 초대 교회 교인들 중에도 오늘날과 같이 중생하지 않은 즉, 구원 받지 않은 신자들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처음부터 구원 받지 않는 자로 봐야 함이 더 타당합니다. 그 근거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살펴본 대로 그들에게도 회개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회 앞에서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실토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바로 즉사하는 심판을 내릴 줄은 꿈도 꾸지 못하고 끝까지 버티면 넘어가게 되리라 예상했던 것입니다.

금액을 속이지 않았음을 우기고, 그 결과 땅 팔아 그만큼이라도 헌금한 것이 얼마나 장한 일이냐는 칭찬을 교인들로부터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괜히 속였다는 것을 실토하느니 끝까지 오리발 내면 다 잘 해결될 줄 믿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눈치만 본 것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역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도 그들과 똑 같은 잘못을 범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들켜서 하나님 앞에서 실토하라고 하면 한두 번은 망설이겠지만 결국은 자백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라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성경이 왜 구약의 아간의 범죄나. 신약의 유다의 배반 사건을 회개하는 기회를 여러 번 주었다는 동일한 형식으로 기록했겠습니까? 그 기록의 목적은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치를 보았기에 구원 받지 못했다는 원리를 후대 독자로 깨닫게 하려는 뜻 아니겠습니까?

구원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의 차이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느냐는 두말할 것도 없지만, 과연 그 안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느냐의 여부입니다. 비록 경건의 실천이 더디고 여전히 죄도 짓지만 죄 지을 때마다 두렵고 부끄러워지기에 회개하고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려는 소망과 열심이 생깁니다. 구원 여부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관건은 이젠 이전의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은 스스로는 분명히 안다는 것입니다. 또 그 사실을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만은 아시기에 그런 자가 어떤 죄를 지어도 반드시 회개의 기회를 주지 바로 그 자리에서 죽음의 심판을 내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후에도 죄를 지을 수 있으며 또 그로 인해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한 진리입니다.(최근에는 이마저 부인하는 교단과 목회자들이 있습니다만....) 그런데  그런 진리를 성경이 증명하는 예로서 모세, 다윗, 바울, 베드로, 같은 자들로만 해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구태여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으로 증명할 필요는 전혀 없지 않습니까? 대신에 똑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 아간의 범죄와 비교하라는 뜻 아닙니까?

이 사건은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행5:11)로 결론지어집니다. 이 부부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록이라면 이런 기록이 결론으로 첨부되어선 안 됩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충만히 임했고, 또 진정한 신자로만 교회를 거룩하게 구성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셨고, 나아가 후대 독자들로 교회의 귀중함과 거듭난 신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치려는 것이 그 기록 목적이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당시 이 사건을 보고 들은 불신자들과 교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자들은 기독교 하나님의 참 하나님다우심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또 이미 성령의 간섭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에 감사하며 그 믿음이 더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첨언할 것은, 신자는 결코 남의 구원여부를 섣불리 단정 지어선 안 되며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보다 본인부터 성경을 연구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신 십자가 구원 진리를 깊이 깨닫고 항상 그분 앞에, 특별히 너무나 정미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서야할 것입니다.

12/11/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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