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어 벌 받을 기도하는 교회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대하7:14)
본문은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기도하는 자의 태도를 깨우치는 말씀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신자는 당연히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하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겸비하여져서 기도해야 합니다. 또 오직 전지전능하신 긍휼의 하나님만 바라보며 정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 하늘에서 들으시고 죄도 사하고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너무나 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단순히 개인적으로만 적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겨도 이 말씀대로 기도하면 고쳐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맞습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모든 기도에, 그것도 악을 제하고 겸비하게 간절히 드린 기도라면 당연히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성전을 봉헌한 솔로몬에게 여호와께서 성전이 갖는 의미와 목적을 말씀해주신 내용입니다. 즉 솔로몬이 성전봉헌식에서 이미 드린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성전을 “내게 제사하는 전으로 삼았다”고(12절)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이 당신께 경배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기본적 의미를 넘어서 이스라엘의 성전봉헌을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응답한 것입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土産)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13절) 기도하면 하늘에서 듣고 땅을 고치겠다고 합니다. 이는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면서 길게 기도드린(6:12-42) 내용을 한 마디로 줄여 반복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전의 두 번째 기능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기도드려 하나님이 고쳐준 내용이 무엇입니까? 기근, 메뚜기 재앙, 염병입니다. 셋 다 당신의 인내의 한계가 넘치도록 백성 전체가 죄악을 범하는 바람에 그 공동체에 벌을 준 내용입니다. 그럼 성전에 나와 기도할 우선적이고 주된 내용도 반드시 공동체로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솔로몬이 성전봉헌 할 때에 길게 기도한 내용은 이방인이 와서 기도해도 응답해달라는 것과 전쟁에서 보호해 달라는 간구를 빼고는 전부 백성들의 죄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성전이 담당할 기능을 이스라엘 백성들로 제사장 나라에 충성하는 일에 한정시킨 셈입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이스라엘부터 악을 제하여 거룩해지도록 하며, 이방인들에게는 여호와만이 상천하지의 유일하신 하나님인 줄 알게 만드는 일을 성전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백성들 개개인에게 적용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며, 자신의 죄를 씻고 겸비해지며, 세상 앞에 여호와를 증거하는 자로 서는 일을 성전에서 배우고 훈련하며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초점은 오로지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죄를 떠나 거룩하게 자라는 것 하나에 모였습니다. 바로 오늘날의 교회가 감당할 역할입니다.
분명 교회도 예배드리며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기도는 넘칩니다. 그러나 정작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거의 모두가 자신의 형통과 안락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문제 해결과 환난에서의 구원입니다. 반면에 자신과 백성들을 죄악에서 돌이키려는 기도는 거의 없습니다. 이 땅을 즉,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거룩하게 고쳐달라는 기도는 더더욱 드뭅니다. 자기 정욕과 계획조차 단순히 겸비하고도 간절하게만 기도하면 되는 줄 압니다. 본문에 “그 악한 길에서 떠나”라는 권면이 가장 먼저 나온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가장 먼저 하신 권면을 지키지 않으면 그 다음 것들에 아무리 충실해도 소용없지 않습니까?
역으로 따지면 본문 말씀대로 교회에서 자신과 공동체의 죄악을 사하는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는 죄를 범하는 셈이지 않습니까? 또 계속 그렇게만 기도하면 즉, 그런 죄악을 쌓아서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면 오히려 그 교회공동체에 기근과 메뚜기 재앙과 염병의 벌을 내리시지는 않을까요?
솔로몬의 성전봉헌기도에 놀라운 간구가 나옵니다.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기도의 내용입니다. “무릇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6:33) 무엇이든 기도하는 대로 다 응답해달라는 간구이지 않습니까?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향해선 한 마디도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무조건 기도하는 대로 복을 다 주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에 나와서 하는 기도만 다 응답해 주라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선 아무리 기도해도 전부 우상이었으니까 응답이 될 리도 없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에게 대하여도 저희가 주의 큰 이름과 능한 손과 펴신 팔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32절)이라는 단서를 미리 붙였습니다. 이방인이 여호와 하나님의 큰 이름을 듣고 그곳 전까지 와서 진심으로 경배하며 기도하면 무엇이든 응답해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방인에게 갓 생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연약한 믿음을 더 견고하게 세워주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처럼 경외하게 하옵시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33절)라고 덧붙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 앞에 제사장 나라로 서야 했으며 솔로몬의 기도도 그런 뜻이었습니다.
그럼 막상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는 “무릇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일부러 환난을 주어서 연단을 시키려는 뜻입니까? 주의 백성은 당연히 손해 보며 고생 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일용할 양식과 필요한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십니다. 제사장 나라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한 구태여 그런 문제는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시고 지켜주십니다.
약 천년 후에 당신 백성들에게 직접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희미했던 구약의 계시를 예수님이 명확하게 밝혀주었지 않습니까?
재차 강조하지만 교회공동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일은 먼저 성도들로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케 하고, 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사역이 성령의 간섭으로 교회 안팎에서 활발히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결국 죄 씻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죄 있는 상태의 경배는, 최소한 경배 중에 그런 역사가 일어나야 함,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교회는 십자가 복음만 선포, 증거, 실천해야 합니다. 죄가 얼마나 추하고 더럽고 무서운 것이지 깨닫게 만들고, 인간의 비참한 영적 실체를 정확하게 파헤쳐서, 누구라도 심령에 찔림을 얻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 얻기를 소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중생의 역사가 충만히 임하며 동시에 인간의 진정한 회심이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이미 구원 얻은 신자는 스스로는 날마다 악을 제거하며 겸비하게 주를 바라보면서 교회 밖의 자기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서 제사장이 되어 그 땅을 고치는 첨병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교회에 죄에 대한 통박과 저주와 회개에의 촉구가 없이 성도들 각자의 문제만 기도하여 해결 받으려 한다면, 아무리 그 모임에 숫자가 많고 뜨겁고 간절한 기도가 넘쳐도 솔로몬의 구약성전보다 못한 것 아닙니까? 신약 교회와 성도들이 예수님이 지적한 이방인의 수준밖에 안 되면 당신의 십자가 죽음이 헛된 것 아닙니까? 그보다는 하나님이 신자의 필요도 몰라보는 바람에 자꾸만 내일 일을 염려하게 되면 당장 신자부터 손해이지 않습니까?
8/5/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