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28:22-25 성전 문을 닫는 신자들

조회 수 675 추천 수 50 2009.09.11 04:53:16
성전 문을 닫는 신자들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가로되 아람 열왕의 신들이 저희를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케 하였더라 아하스가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모아 훼파하고 또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단을 쌓고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다른 신에게 분향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대하28:22-25)


다윗은 블레셋을 무찌른 후 그들의 신상을 바로 불태웠습니다. 아마샤는 에돔과의 전쟁에는 이겼지만 그 우상을 가져와 자기 신으로 삼아 경배했습니다. 아마샤의 약 55년 후의 유다 왕 아하스는 아예 나라 전체가 앗수르의 신들을 섬기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여호와의 전의 문을 닫고 전국 방방곡곡에 우상들을 세웠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형식적으로나마 여호와를 다른 신들과 함께 섬겨 왔으나 이제는 완전히 여호와마저 버려버렸습니다.

그렇게 한 계기와 결과가 흥미롭다 못해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에돔과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를 치자 앗수르 앙 디글랏 빌레셀에게 원군을 청했으나 오히려 앗수르는 유다를 포위 공격한 후에 막대한 공물을 요구했습니다.(16-21절) 눈앞의 환난을 당시의 최강국에게 기대어 극복하려 했으나 실패한 것입니다.  

그 후 아하스가 기껏 생각하기를 앗수르가 저렇게 강해진 이유는 다메섹의 신들 때문이라고
보고 그들을 숭배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도리어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케 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 하나님 여호와는 외면한 채 세상의 거인에게 기대려다 실패하자 그 거인이 믿고 있는 신에게 의지하려 했습니다.

아하스가 단순한 생각에 힘이 더 센 신을 섬겨보자고 했는지 모르지만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짓이었습니다. 앗수르 왕은 어떻게 하든 주변 열국들을 점령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기 신을 섬겼습니다. 말하자면 유다도 점령하려고 아침저녁으로 그 신에게 빌었을 것입니다. 그런 신에게 유다 왕이 아무리 간구해 봐야 그 신이 앗수르와 유다 왕 중에 누구의 소원을 들어주겠습니까?  

물론 우상은 헛것이라 인간사를 전혀 주관하지 못하지만 논리적으로 조그만 따져 보면 얼마나 그 짓이 헛수고인지 금방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어리석은 짓을 자행한 이유는 바로 우상은 없지만 그 우상의 뒤에 있는 사단이 아하스를 완전히 노예로 묶어서 조종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을 외면하고 사단에게 갔으니 사단의 놀음에 놀아날 수밖에 없으며 동시에 모든 인간사를 전적으로 주관하는 이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든지 사단의 음흉한 조종을 받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있으면 자동적으로 사단의 조종에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신자의 경우는 더 그렇습니다. 이미 사단의 종이 되어 있는 불신자는 사단이 특별히 건드릴 필요가 없지만 신자는 사단이 언제나 자기 종으로 삼으려는 표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하스 왕이 여호와의 전의 문을 닫기까지 한 것은 보통 작심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사단에게 미혹되어 있어도 조상 대대로 믿어 온 여호와를 완전히 외면하기란 두려워서라도 그렇게 하기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호와가 다메섹의 신에게 힘도 한 번 못 쓰보고 계속해서 지고 있다고 판정을 내린 것입니다. 아예 다메섹의 신들이 여호와와 비교해서 월등하게 센 신이라고 보지 않고는 감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로선 갈 데까지 간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곤고해진 이유는 두말 할 것 없이 현실에서 자꾸만 외적의 침입을 받아 온갖 시달림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 원인은 유다가 우상 숭배와 온갖 죄악으로 여호와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회개하여 여호와께 되돌아갈 생각은 전혀 않고 오히려 더 강해보이는 신을 섬기다 못해 아예 여호와의 전의 문까지 닫았습니다. 도저히 회복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전기가 누전되어 불난 것을 Rm려고 물을 부은 것과 같습니다. 도망갈 퇴로마저 스스로 막는 것이자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 격입니다.            

지금부터 2천여 년 전 유다 땅의 한 바보 같은 왕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입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갈 때에 우선 하나님을 찾지만 금방 응답이 없습니다. 신자가 바라는 방법과 때에 아무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잘못의 원인은 사단의 방해, 세상의 모순, 자신의 실수나 죄악, 하나님의 연단 등 여럿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세상만사를 주관하고 자기는 그 분의 자녀이므로 원인이 어디에 있든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힘든 일이 생기자마자 하나님이 바로 고쳐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니라 도깨비 방망이에 불과해지는데 하나님이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어디에 원인이 있는지 깨달아 고치고, 세상과 사람 앞에 믿음으로 담대하게 서며, 고난 가운데 더욱 믿음이 굳어져 주위에 더 힘든 사람을 도와주기를 원합니다. 또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이끌어가는 필수적 과정이자 다른 더 큰 은혜가 반드시 예비되어 있습니다.

신자로선 그 구체적 방법과 때만 알 수 없을 뿐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인내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소망해야 합니다. 요컨대 신자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겨도 심지어 자신의 목숨이 달아날 정도의 위급한 경우에 처해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물론 신자는 연약한 인간인지라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기도나 말씀에 전혀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영적으로 피폐해지는 경우를 때때로 겪습니다. 정말 머리에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하얗게 지워진 것 같아서 무엇부터 기도해야 할지 모르고 성경을 펼쳐도 글이 한 자도 눈에 안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수록 억지로 무릎 꿇고 “주여!”라는 외마디라도 계속 부르짖어야 하고 성경에 한 문장이라도 일부러 소리 내어서 읽어야 합니다. 영적인 궁핍이 없어도 기도하고 말씀 볼 때에 사단의 방해가 많으므로 의지적으로 집중해야 하는데 궁핍할 때는 더더욱 그래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영적 빈곤 현상은 항상 악순환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멀리하면 멀리할수록 더 멀어집니다. 대신에 또 조금이라도 가까이 하면 할수록 더 가까워집니다. 하나님을 멀리한다는 것은 사단 쪽으로 향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가까이 했다는 것은 사단 쪽을 멀리했다는 것입니다. 양쪽의 흡인력 내지 영향력은 인간인 신자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니까 당연히 어느 쪽으로 향하든 가속도가 붙게 마련입니다.

사단을 향한 영적인 빈곤이 악순환 된다면 역으로 말해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풍요도 선순환된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항상 영적으로 빈곤해져 기도와 말씀에 게으른 자를 우는 사자같이 노리고 있습니다. 죄에 빠진 자를 노리지 않습니다. 죄에 빠진 것은 이미 사단의 흉계에 넘어간 것인데 노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신자가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멀리하게 되면 사단의 온갖 노림수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정확하게는 사단은 신자가 영적으로 풍요할 때도 사방팔방에 모든 종류의 덫을 설치해 놓고 있었지만 신자의 눈에 전혀 보이지 않다가 영적으로 빈곤해지기 시작하면 그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덫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그런 덫이 신자 주위에 널려 있는 줄 알고도 제거해 주지 않습니다. 당신의 자녀가 항상 스스로 기꺼이 당신을 찾기를 원하십니다. 결코 강제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신자들은 하나님이 언제나 자기를 어미 독수리가 큰 날개로 새끼를 품듯이 품어주기만 바랍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절대로 새끼를 자기 등에 태우거나 날개 밑에 품고 살지 않습니다. 둥지에서 보살피다 어느 정도 크면 높은 곳에 올라가 수직으로 낙하시켜 버립니다. 그러다 새끼가 도저히 날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겠다 싶을 때만 쏜살같이 날라 와 큰 날개로 받아 주지만 또 다시 공중 낙하시킵니다. 어미로선 새끼가 혼자서 나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입니다. 새끼 독수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수리가 아무리 작아도 혼자 날 수 있는 정도면 세상에 어느 새가 감히 건드릴 수 있습니까? 아니 근처에 오지도 못합니다.    

신자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신자 혼자서 말씀 보고 기도할 수 있기를, 그것도 빠르면 빠를수록 더 좋으니까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자꾸 훈련시킵니다. 신자가 영적으로 궁핍해져 사단이 쳐 놓은 덫에 자꾸 걸려 넘어져도 그대로 두시는 이유입니다. 그러다 도저히 그대로 두어선 아예 영적으로 사망하겠다 싶을 때만 직접 건져주십니다. 그러나 또 다시 어미 독수리처럼 공중에서 수직낙하 시켜버립니다. 빨리 혼자 날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제쳐두고 신자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가 혼자서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여 당신과 일대일로 인격적이면서도 생생한 교제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아무리 현실에 환난과 고통이 닥쳐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줄 알기에 사단 쪽으로는 고개가 전혀 돌아가지 않는 일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영적으로 빈곤해질수록 하나님 쪽을 향한 기도와 말씀 외에는 절대로 탈출구가 없음을 철저하게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스스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면 마치 독수리를 어느 새도 건드리지 못하듯이 세상의 어떤 더러운 세력도 신자를 감히 흔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어리석게도, 믿음 없게도, 심지어 자신이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영적으로 피폐해지면 신자 스스로 성전의 문을 닫습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우상 신들에게 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나서서 우상들을 모셔오지는 않지만 성전 문이 닫히면 우상 밖에 보이지 않으니 부지불식간에 영향을 받고 또 사단이 시키는 대로 따르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신자가 성전 문을 닫는 순간 즉 기도와 말씀에 게을리 하는 순간 완전히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의 손아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반면에 그 문을 조금이라도 여는 순간 그 속에서 새어나오는 영광의 빛이 세상의 모든 우상들을 가려버립니다. 아니 가리는 정도를 넘어서 그것들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혹시라도 영적으로 메마릅니까? 현실의 환난과 고통이 겹쳐서 완전히 힘이 빠졌습니까? 그래서 기도와 말씀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을 정도입니까? 다른 특별한 수단이 없습니다. 그럴수록 더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는 수 말고는 절대로 없습니다. 성전 문을 스스로 닫는 어리석음만큼 신자가 저지르는 큰 잘못은 없습니다.  

10/19/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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