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9:37,38) 돌들이 소리지르리라.(2)

조회 수 842 추천 수 49 2010.01.20 17: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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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들이 소리지르리라.(2)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되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눅19:37,38)


예수님이 공생애를 마감하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유대인들은 호산나 찬양을 높이 부르며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라고 찬양했던 바로 그 입술로 단 일주일 만에 극심한 저주를 퍼부으며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물론 대중들이 예수님을 시기한 유대종교 당국의 사주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로마 압제에서 구해 현실적으로 부강케 해달라는 자기들 요구를 예수님이 무시했다고 여긴 것입니다.  

본문도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찬양했다고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동안 행했던 이적들을 보면 충분히 로마 당국도 물리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셨고, 말 한마디로 폭풍우도 잠재웠으며, 죽은 자도 살려내신 분이 앞장선다면 자기들도 목숨 걸고 뒤를 따를 테니까 로마를 물리쳐보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럼 이 찬양이 로마와의 전쟁출정을 격려하는 군가 같은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어리석은 대중의 속마음은 그랬을지라도 성령이 역사하여 하나님을 진정으로 높이는 찬양을 부르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작용하여 당신의 너무나 크신 사랑이 드러나게 했습니다. 어쩌면 성경에 기록된 중에 가장 은혜로운 찬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없지만 다른 세 복음서에 동일하게 기록된 “호산나”(주여 구원하소서) 외침은 삼대 절기에 성전에서 부른 대찬양시인 시편118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24-26절)

그래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나오는 구절이 어떠합니까? “하늘에는 평화요.” 뭔가 이상한 면을 발견할 수 없습니까? 특별히 예의 시편과 비교해서 말입니다. 그 시편을 그대로 인용했다면 당연히 “호산나 이제 형통케 하소서”라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땅의 형통” 대신에 “하늘의 평화”를 외쳤습니다.

물론 유대인들로선 여호와의 택한 백성이 로마 압제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나님도 기뻐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아마 그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아무 생각이 없거나 자기들 뜻대로 찬양을 불렀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찬양 예배 때에 온전한 믿음이 없거나 가사의 깊은 의미를 모른 채 부를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탄생할 때에 천사들이 부른 찬양과 비교해 보십시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예수님이 아기로 이 땅에 들어오실 때나 이제 사역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가려는 시점에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인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탄생 시에는 분명히 땅에서 구원 받을 자들 중에 평화가 임한다고 한 반면에 이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하늘에 평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둘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탄생, 사역,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리 등등 모든 것이 하나님께는 영광입니다. 그분의 영광의 광채를 모든 사람들이 육안으로 볼 수 있도록 이 땅에 비췬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특별히 그분의 죽음으로 죄인의 구속사역을 완성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은 완전히 실현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오심은 당연히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를 주시려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죄를 감당하시고 대신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 평화가 임한다고 합니다. 그분은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에 묶여 신음하는 인간들의 처지를 너무나 안타깝게 여기셨다는 뜻입니다. 첫째 인간 아담의 타락 이후로 둘째 인간 예수님의 골고다 죽음의 때까지 한 시도 시름을 놓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혹시 구속사역이 실패하면 어쩌나 염려한 것은 아닙니다. 때가 찰 동안에 인간이 사단에게 농간당하여 더러움과 추함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을 애끓는 긍휼로 바라보면서 참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다 마침내 구원이 완성될 시점에 이르렀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셈입니다. 오히려 그 때까지 구원을 미루고 인내하신 것이 더 힘들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로마에서 구원해주리라 믿고 기뻐서 찬양했지만, 하나님은 사단의 완전한 패배를 앞두고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에서 사단과 그 졸개들의 방해가 극심했는데 그조차도 하나님은 지금 이 때를 대비해 계속 묵과하셨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영역에서도 이제 사단은 마지막 불 못에 던져질 순간만 기다리는 너무나 초라한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으로 심히 좋아하셨던 창조 이래 처음으로 하나님은 진정한 안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땅에선 아직 진정한 평화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 마시는 일에만 목숨을 걸고 있었습니다. 호산나 찬양을 소리 높여 부르던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이제 곧 주님께 침을 뱉고 돌을 던질 것입니다. 사단도 여전히 이전보다는 못해도 공중 권세를 잡고서 인간을 혈과 육의 싸움으로 내몰아갈 것입니다. 이런 판국에 하나님이 어떻게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당신의 공의를 위해 독생자를 죽여 놓고 혼자서만 좋아하는 비정한 성부 하나님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이 평화를 얻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당신께서 성육신 하실 때에 하늘에서 천사들이 찬양한 그대로 당신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평화를 얻게 됨으로써 충분히, 아니 온전히 가능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가 하나님과 완전한 화평을 이룰 때에 하나님은 평화를 얻습니다. 또 신자가 구원 이후에도 모든 사고, 말, 행동을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에 바탕을 두고 행하면 그분께 영광이 됩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먹고 마시든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낼 때 하늘에는 평화가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우선 그렇게 열광하며 따르던 대상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순식간에 저주를 퍼붓는, 아니 떼로 몰려들어 죽여 버리는 인간이란 존재가 너무나 가난하고 비참하지 않습니까? 또 그런 탐욕에 사로잡혀 주님에게 어서 빨리 오병이어 같은 이적을 다시 보이라고 요구만 했지 수난 받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는 그 완악한 심령마저 하나님은 간섭하여 주님의 주님 되심에 대해 온 세상에 정확히 선포토록 하셨지 않습니까? 한 줄의 찬양 안에도 현실적 형통만 끝까지 고집하는 인간의 실체가, 반면에 그런 죄에서 구원을 주시려고 간절히 소원하는 하나님의 열심이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주님은 재물 욕심으로 돌처럼 굳어 있는 즉, 돌이나 다름없는 유대인들더러 이미 당신의 당신 되심을 찬양토록 했습니다. 설령 그들이 조용했어도 진짜 돌들로도 당신을 찬양케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신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못하면 돌들로도 그렇게 하실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늘에는 평화가 없어지고 땅의 평화도 더 이상 존속할 의미가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요컨대 인간을 창조하여 심히 기뻐한 뜻이 아예 사라지니까 노아 때처럼 또 다시 인간을 지으심을 심히 한탄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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