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6:3,4) 사람들 눈치를 보아야 한다.

조회 수 982 추천 수 46 2010.01.25 17: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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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눈치를 보아야 한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쌔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행16:3,4)


유대교에선 이방인이 개종을 원하면 반드시 할례를 하도록 했습니다. 반면에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예수교에선 어떤 입교 절차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방인의 사도 바울은 구원 받아도, 혹은 받기 위해선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는 교회 안의 유대주의자들을 향해 다른 복음을 전하기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갈1:6-10)

그런 바울이 지금 자신의 말과 완전히 상반되는 행동을 했습니다. 부친이 헬라인이고 모친은 유대인인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엄마가 유대인인지라 반(半) 유대인으로 인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의 부친이 헬라인인줄 알기에 즉, 디모데를 이방인으로 자타가 인정했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할례를 시킨 것입니다.

나아가 바울은 이방인 신자는 할례 받을 필요 없이 우상,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 네 가지만 멀리하면 된다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규례를 여러 성에서 가르치며 지키게 했습니다. 이젠 장소와 사람에 따라 앞뒤가 맞지 않게 행하고 다닌 꼴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을 정죄하는 이유를 바울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여 사람을 기쁘게는 하지 않겠다고 큰소리친 바울이 분명 사람들 눈치를 본 것 아닙니까?      

바울로선 새로 방문한 지역의 유대인들과 최소한의 충돌마저 피하고 그들의 호의를 이끌어내어 복음 전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아마 아직은 예루살렘 공의회의 새 규례의 홍보가 미처 덜되었을 것입니다. 또 그래서 바울은 방문한 여러 성마다 그 규례를 열심히 가르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9:20)

그런데 정작 주목해야할 이유가 하나 더 있는 것 같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조수로서 복음을 가르쳐야 할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반 신자와 다른 위치였던 것입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신자와 술의 관계와 같습니다.

술 마시는 것과 구원 받는 일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신자가 된 후에도 잘만 절제하면  도덕적 종교적인 하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술에 취하지 말고 인박히지 말라고만 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신자가 술을 마셔도 된다고 가르치면서 자신도 술을 마신다고 가정해 봅시다. 술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신자들도 분명 있을 텐데 그들이 생각하기를 목사가 자신이 술을 마시니까 저렇게 가르친다고 반감을 가질 것 아닙니까?

또 술이 구원과는 관계없어도 강한 중독성이 있어서 어지간해선 절제가 되지 않으며 술 마시는 만큼 하나님과의 온전한 영적 교제가 방해 받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름답고 건강하게 가꾸어야 할 육체에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선 가능한 술을 금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술 마시는 목사로선 이런 이야기는 평생 꺼내지도 못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목회자는 술을 마시지 말아야 제대로 가르칠 수 있게 됩니다.    

할례도 신자가 구원 받고 또 성화를 이루는 일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할례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좋은 점도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는 가르치는 자로선 받는 것이 훨씬 유익하며, 아니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살을 벰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과의 영원한 언약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부여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선, 이미 할례를 받은 지도자는 복음이 그 언약의 완성이라고 제대로 풀어 가르칠 수 있으며 가르침의 신뢰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할례에 어떤 종교적 영적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 자들을 대상으로 그들 생각이 옳다고 동조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례 받지 않는 자가 가르치면 자신의 입장에 맞추어 편의적으로 가르친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습니다. 자기 믿음과 다르게 할례 받았다는 의구심에 대해서도 유대인들을 얻기 위한 조치라는 설명으로 납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신자 개인이 구원 받아 성화를 이룸에 술이나 할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복음은 모든 율법적 멍에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했습니다. 한 개인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면 그분과의 성령 안에서 아름답고 풍성한 교제와 거룩한 동행만 요구될 뿐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가르치는 자의 입장은 판이한 것입니다. 아직은 할례에 대한 인식이 모든 이에게 온전히 정리가 되어있지 않는 상태에선 더더욱 그러합니다. 오늘날 할례와 신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비록 그 의미는 새길지라도 가르치는 자라도 의식을 치룰 필요는 전혀 없다고 누구라도 인정하는 상황과는 달리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 자신의 말대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고전9:27) 두려워해야 합니다.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고전8:13)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것이 과연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 신자 또한 불신자에게는 제사장 나라라는 신분에서 불신자를 말과 행동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할례가 전혀 필요 없음에도 받았던 디모데처럼 행해야 합니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해야”(빌4:8)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고전10:33) 해야 합니다.
  
작금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거창한 핑계(?)로 사람들의 눈치는 막무가내로 무시하는 신자들이 꽤 있습니다. 또 그러는 것이 뜨겁고 좋은 믿음이라고 오도되고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말로 전해지는 복음에는 귀를 막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지만 신자가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모습에는 절대 눈을 감지 않습니다. 신자가 복음을 전함에 정작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전해진 그 복음이 과연 실제로 자신의 삶에 온전한 영향을 미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그분의 죽음과 우리의 새 생명이 맞교환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무슨 짓을 해도 그분의 피로 맺어진 하나님과의 부자(父子) 관계는 절대 손상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에 구태여 그리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요컨대 불신자에게 참 생명과 온전한 기쁨을 누리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악하지 않는 수단이라면 무엇이든 동원해야 합니다. 신자 자신이 그들에게 거리낌이 되어 있지 않는 한에는 바울처럼 사람의 눈치도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오히려 복음의 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해 그 은혜로 초대하려는 열정이 적다는 표식일지 모릅니다.

1/25/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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