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려면?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오늘날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삼상26:23,24)
다윗은 자기 손 안에 완전히 들어왔던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살려 줍니다. 본문은 두 번째 경우로 사울 일행이 진 치고 있는 가운데로 다윗은 심복 아비새만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누워 자고 있는 사울 왕 바로 곁에까지 가서 죽이지 않고 그의 창과 물병만 들고 나옵니다. 그리고선 반대편 산에 올라가 사울 왕에게 추격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언뜻 보면 앞뒤 말의 논리가 모순되는, 나아가 아주 황당한 내용이 나옵니다. 다윗이 사울의 생명을 중히 여겼으면 당연히 사울에게 자기 생명을 중히 여겨달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앞에선 자기가 왕의 생명을 중하게 여겼다고 하고선 뒤에선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그럼 그가 자신의 의로운 행동을 하나님께 자랑하거나 고하면서 그 보상을 달라는 뜻입니까?
바로 앞부분의 말을 보면 더 미심쩍어집니다. 여호와가 왕을 내 손에 붙였지만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여호와는 사울 왕을 죽이라고 자기에게 붙여 주었지만 자기가 거절한 양 되었습니다. 마치 살인을 적극 권유 내지 명한 여호와보다 원수를 사랑으로 대한 다윗의 의가 더 높아져버립니다. 그럴 리는 없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약의 예수님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끝 부분에서 비록 여호와께 드리는 간구의 형태가 되었지만 여전히 사울에게 한 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사울이 틀림없이 다시 자기를 추격하러 올 것을 염려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겁을 준 것은 아닙니다. 세 번째 이런 기회를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그때는 나도 어쩔 수 없이 죽일 것이라고 엄포를 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단순히 고대 사람들이 무슨 일이나 여호와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방식을 취한 것도 아닙니다.
다윗의 진의(眞意)는 사울 왕더러 제발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간곡한 부탁이었습니다. 한 번이라면 우연의 일치일 수 있지만 두 번이나 완전히 죽을 뻔했던 기회가 생긴 것만 해도 여호와 하나님이 간섭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두 번이나 살았으니 당연히 자기도 살려주는 것이 그분의 뜻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울 왕 당신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종이니까 더더욱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같으면 절호의 찬스를 두 번이나 스스로 포기하는 우를 과연 범하겠습니까? 오히려 그 동안 기도했던 응답이라고 철석 같이 믿고 단 칼에 사울을 죽였을 것 아닙니까? 자기가 죽이기 뭣하면 부하들 권유를 못이기는 척하고선 자기 칼에는 피한방울 안 묻히고 부하를 시켜서 산뜻하게(?)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말하자면 과연 다윗에게 그런 유혹이 단 한 톨도 들지 않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도 우리와 성정이 똑 같은 자였습니다. 본문에 그런 낌새가 보이지 않습니까? “나는 손을 들어 사울을 치기 원하지 않았다”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단순히 추측하는 뜻이 아닙니다. 처음 사울을 살려준 성경기사를 보십시오.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삼상24:4,5)
처음에는 부하의 권유대로 정말 하나님의 응답인줄 믿은 측면이 있습니다. 왕인데다 장인이라는 관계로 선뜻 단 칼에 죽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 후에 다윗의 마음이 찔렸다고 합니다. 또 마음에 찔린 후에 부하들더러도 사울을 치지 말라고 금했습니다. 양심의 가책만 느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확실히 깨달은 것입니다.
만약 처음부터 겁주려고 옷자락만 벨 심산이었다면 마음에 찔렸을 리는 없습니다. 또 옷자락을 베기 전부터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칠 수는 없다고 부하들 권유를 거절하는 말을 먼저 했어야 했습니다. 이 단계에선 비록 사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 뜻인 줄 온전한 확신은 없었고 또 그럴 의도도 확고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이 흔들렸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다시 또 그런 기회가 왔다면 우리라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전번에 내가 주저하다가 살려 준 것이 오히려 나의 잘못된 인간적 생각이었다고 판단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또 이런 절호의 기회를 주실 리는 없다고 믿지 않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다윗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의 차이점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상황 판단력이 우리보다 뛰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두 번 다 하나님의 직접적 응답을, 미세한 성령의 음성이었든 간에, 들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는 두 번이나 생긴 절호의 기회보다 처음에 자기 마음에 찔린 것을 더 중요시 여겼던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눈에 보인 여건을 판단의 최우선 혹은 최종적 기준으로 삼기 쉽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우리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 믿음의 미성숙, 순종하려는 열의의 부족, 헌신하는 의지력의 약함 등을 듭니다. 물론 그것들도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다윗과 비교해 우리에게 모자라는 것은 처음과 끝이 동일한 일관성입니다.
다윗은 자기 마음에 확신과 평안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하지 않은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면 순전히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너무나 지당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라고 진짜, 진짜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한다면 순종하지 않을 자 있겠습니까? 쉽사리 순종 못한다면 최소한 끝까지 거역하거나 나태해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엄연히 살아서 나의 구원과 심판을, 죽은 후만 아니라 이 땅의 세밀한 일상사까지 이끄신다는 데 전혀 의심이 없다면 두려워서라도 그럴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한마디로 절대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믿는다면 결코 등한히 하지 못합니다. 바꿔 말해 우리의 불순종은 아직도 자신이 해야만 할 하나님의 일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사실은 발견할 열망이 없거나, 이미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대부분의 신자가 하나님의 일과 자신의 일을 구분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자기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 전체를 동원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확신이 없습니다. 특별히 더 의로운 도덕행위, 경건한 종교적 봉사, 심오한 영적 성찰 등만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런 하나님의 일이 자기에게 명해지면 순종하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아직은 그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여깁니다. 대신에 하나님께 간구하여 당장 자기 급한 일 처리하기 바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능력만 보태려 하면서도 기도라는 경건한 종교적 행위를 했으니 하나님의 일을 했다고 믿습니다. 사실은 자신의 일을 한 것뿐인데도 말입니다.
다윗은 사울에 의해 천부장과 그의 사위가 되는 순간부터 그를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중간에 살짝 흔들리긴 했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끝까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자신의 소명을 확실히 붙든 자는 순종하지 않으려 해도 않을 수 없습니다. 목사 선교사가 아니라도 일반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바라는 바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순종하라는 권면이나, 어떻게 하면 순종을 잘하는지 자꾸 거론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바칠 생각은 없고 그 몸을 화려하게 치장할 생각뿐이거나, 앞섰기 때문일 것입니다.
4/5/2010
자신의 필요를 위해 철야기도 새벽예배에 열심이 특심인 자들이 기도라는 경건한 종교적 행위를 했으니 하나님의 일을 했다고 믿고 있는 세상, 사실은 자신의 일을 한 것 뿐인 것을...
순종 또한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한 방편이 되지 말아야함을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