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영원한 두 진리
“저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케 하시며 내 날을 단촉케 하셨도다.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년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시102:23,24)
세상사람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진리가 둘 있습니다. 반박의 여지가 생길 수가 전혀 없는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진리임을 확신하지만 교회 밖에는 부인 배격하는 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 우주에는 십자가보다 더 근본적인 진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선 하나님은 영원하시다는 것입니다. 또 그분 외는 어떤 것도 점차 쇠타하다가 결국은 다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엄밀히 따지면 모두가 동의하는 진리는 하나인 셈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조차 부인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누가 뭐래도 진리로 인정될 것입니다.
언젠가 인류는 멸망해도 지구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아니 지구는 멸망해도 우주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니 우주마저 다 소멸해도 하나님은 영원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너무 거창하게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지구나 우주가 얼마나 존속할지 여부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입니다. 대신에 한 개인으로선 자신의 운명에부터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죽습니다. 그렇다고 그 후의 심판을 걱정하라는 권면을 드리려는 뜻도 아닙니다. 여전히 사후 심판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없어질 인생이라면 과연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죽어야 할 운명이니까 부평초처럼 되는 대로 살아도 되는 것입니까? 세상이 자기 기대대로 부응하지 않으면 스스로 미리 목숨을 끊어도 되는 것일까요?
죽게 마련인 인생을 보는 관점과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잠시 살다 어차피 없어질 인생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실상 아무 뜻이 없습니다. 비록 죽음이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고 하지만 죽음을 인생의 가장 큰 전제, 아니 인생을 이끄는 근본 힘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살아 있어도 죽음 안에서 사는 셈입니다.
다른 말로 아예 무(無)에서 출발하여 무로 살다가 무로 끝나는 인생입니다. 아무리 육체와 정신을 갖춘 실재(實在)로 살아가도 스스로 자기를 보는 관점에선 출생과 삶 모두가 무일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과 연결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보는 인생이 어찌 무가 아니겠습니까? 물질에서 출발하였기에 물질로 존재만 하는, 아니면 허수아비 내지 좀비로서 그저 되는 대로 움직이는 것 뿐입니다.
솔로몬의 잠언 서두처럼 헛되고, 헛되고, 또 헛된 인생입니다.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에 어떤 의미도 생길 수 없습니다. 태어난 것 자체가 짐이요 고통이 될 뿐입니다. 아무리 자기 나름대로 가치를 부여해도 기억해주는 이도 없습니다. 기쁨을 느끼는 순간만 자기만족으로 끝날 뿐입니다. 간혹 기억해주는 이들이 있어도 그들 또한 소멸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 반대로 단 한번 뿐인 인생에 주목하는 관점이 있습니다. 정말로 한 번뿐이니까 절대 허비할 수는 없습니다. 한번 뿐이고, 그것도 아주 빨리 지나간다면 더더욱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인생을 서너 번 살 수 있다면 한두 번은 시행 착오해도 될 여유가 있지만 한번 뿐인지라 절대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정말로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출생부터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근거를 두는 길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전 존재와 삶과 인생을 그분께 거는 것입니다. 인생의 전제 내지 이끄는 힘이 전적으로 하나님입니다. 유에서 출발하여 유로 사는 인생입니다. 겉모습만으로는 무로 끝나는 것 같지만 출발이 영원한 하나님에게서 시작했기에 마지막도 그분께 연결되는 영원한 인생입니다.
따라서 살아 있을 동안에는 당연히 그분의 섭리 아래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도 영원하신 그분의 품 안에서 이뤄집니다. 완전히 소멸되어버리는 물질이 그 인생의 종말이 될 수는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기에 영생을 생전에 이미 얻은 것입니다. 출생 때부터 영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택하심의 은혜가 얼마나 귀합니까?
이 시편 기자의 절규를 들어보십시오. 아마 중년에 큰 병을 얻은 모양입니다.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년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라고 기원했습니다. 저자를 포로 후기의 사람으로 보기에 자신이 당한 큰 환난을 이스라엘 전체에 빗대어 예루살렘의 회복을 간구하는 내용으로도 해석합니다. 어쨌든 저자는 인생의 연약함과 특별히 짧음을 절감하고선 자기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에게 다시금 의탁되어지는 은혜를 간구했습니다.
그가 단순히 장수의 축복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유에서 출발한 신자라도 지난 삶 동안에 시행착오를 여러 번 겪을 수 있습니다. 그 허물과 잘못이 너무 후회스럽고 안타까워 얼마 남지 않은 생애라도 정말 의미와 가치 있게 살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낸 것입니다. 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저자이기에 이스라엘의 그간의 영적 타락을 진심으로 회개하고서 하나님의 회복시키는 권능을 간절히 소망한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 가운데 있음을 확신하면서도 너무나 자주 주저앉고 넘어집니다. 한 번뿐인 인생임을 알고도 수없는 실패의 자국들을 남깁니다. 그러나 신자는 넘어져만 있을 수 없습니다. 한번 뿐인 인생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또 비록 자신은 모자라고 어리석어도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얼마나 무궁무진하며 거룩하고 완전한 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택하신 백성이 쓰러져 있는 것을 하나님 당신께서 더 안타깝게 여기기에 계속해서 일으켜 세우시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손을 당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바울의 이 고백이 모든 신자의 진정한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가 의미하는바 앞에서 잡아야 할 근본 푯대는 천국에서의 부활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 지나간 일은 아예 잊고 부름의 상을 향해서만 전진할 것이라고 합니다.
신자의 궁극적 목표가 천국이라고 해서 고달픈 이 세상에서 하루 빨리 탈출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앞으로 살아야할 생이 지나온 생보다 길든, 짧든 간에 주님과 동행하는 여정을 정말 뜻 깊게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더 거룩하고 의롭게 바뀌어져 천국에 입성하겠다는 열망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출생하여 그 품 안에서 산 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완성되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소원하는 장수(長壽)는 이 땅에서부터 그런 완성의 징조와 예표를 미리 최대한 많이 누리려는 뜻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피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자존하시는 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뿐입니다. 불신자들은 세상 모든 것이 쇠퇴하다 소멸된다는 절대 진리는 인정해도 그것이 처음부터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졌기에 그렇다는 점은 끝내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무에서 출발한 인생인지라 그 사고 또한 무에 그치고 맙니다.
불신자의 잘못을 탓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영원과 연결되어져 절대 무로 끝나지 않을 신분이 되어 있음에도 조금만 힘들어도 그저 실망, 원망, 불신으로 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신자로서 나약함이자 큰 잘못인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짧고 한번 뿐이긴 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이 지금 이 인생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럼 그 후로는 그 주신 분이 알아서 책임져 주실 것 아닙니까? 또 종국에 기다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 아닙니까?
신자는 그래서 당장은 내 연약함과 불신앙으로 쓰러지더라도, 현실에선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어려움이 계속 닥치더라도, 그 결과 내가 주님을 찾을 기력조차 없을지라도 나의 인생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안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절대 잊어선 안 됩니다.
불신자가 헛되고 헛되다고 뇌까릴 수밖에 없는 삶의 질곡을 신자 또한 똑 같이 겪고서 넘어지고 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반드시 일어나고 또 일어나야 합니다. 앞에 너무나 영광스런 푯대가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생 중년에, 아니 말년에 큰 환난이 닥쳐 남은 생이 너무나 짧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7/10/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