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그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마27:16-18)
간혹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죄를 감당하시고 죽으셨다는 진리를 그리 실감하지 못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기독교 교리로만 간단하게 배워 종교 지식적으로만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교리적으로도 주님이 비록 너무나 억울한 죽음을 당하긴 했지만 과연 세상 모든 죄를 다 짊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어디에서 찾아야할지 잘 모릅니다. 본문에선 그런 의아심을 상당부분 제거해줄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바라바를 유명한 죄수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가 일으킨 민란과 살인은 당시 유대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는 뜻입니다. 또 그는 유대 율법으로 따지면 사람을 죽인 죄인이요, 로마법으로 따지면 그 위에 제국에 대한 반란죄가 추가 됩니다. 어느 법에 적용해도 사형을 면할 길이 전혀 없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유대 명절이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정죄하러 온 유대 무리들 앞에 바라바와 예수 중에 누구를 놓아줄까 물었습니다. 무리가 누구를 지정하기 전에 그가 먼저 바라바를 예수님과 대조시켜서 둘 중 하나만 뽑으라고 했습니다.
그로선 유대인들이 당연히 그 유명한, 말하자면 어느 모로 견주어도 죽어 마땅한 흉포한 바라바보다는 예수를 풀어주라고 요구할 줄 기대했던 것입니다.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바라바는 무죄와 살인죄로 아예 비교 내지 대조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단순 확률로만 따져도 50%의 회생가능성을 예수님께 부여한 셈입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이 그간 도무지 죄라고 없는 예수를 시기했다 쳐도 일말의 양심이 살아있다면 그래도 바라바와는 결코 비견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물은 것입니다. 총독으로서 어지간히 혼쭐은 놓아줄 테니 이제 그만 미워하고 풀어 주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법리적으로 따져서 다른 이를 시기한 죄와 살인죄 중에 어느 것이 더 중한가를 물었던 것입니다.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르는 자라도 이 질문에는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라도 백이면 백, 오답이 나올 수 없는 질문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사태는 빌라도의 기대와는 전혀 엉뚱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가 가졌던 상식, 이성, 논리, 양심과 또 그 사회가 유지 발전되는 울타리로 삼는 제도, 관습, 법률, 도덕 모두를 깨트리는 방향으로 치달았습니다. 아니 그 모두를 아예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결말이었습니다. 그것도 유대 무리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선동에 넘어가서 말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결말 아닙니까? 유대 관원들이 교활하고 대중들이 어리석었다는 단순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이 단지 시기하는 이유만으로도 아무 주저 없이 살인을 자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마디의 반대 목소리도 없이 만장일치로 말입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저지른 인류 최초의 살인도 바로 동일한 이유였지 않습니까?
감옥에 가있는 살인 죄인은 그나마 명분이 좀 서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바라바가 저지른 살인만 해도 성경에 명시는 없지만 로마에 반란하여 폭동을 일으키는 가운데 저질렀을 수, 그 대상이 로마인인지 유대인인지 불명해도, 있지 않습니까? 또 우발적 살인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십자가 사건처럼 오래 동안 아무 죄 없는 아니, 오로지 선행만 했던 사람을 누명을 씌우려 수많은 사람이 공모한데다 마지막에는 거의 억지타시피 죽인 경우는 죄질이 훨씬 더 무겁습니다.
그들이 누구였습니까? 유대사회에선 도덕적으로 가장 의롭다고 존경받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가장 으뜸이었고, 백성들을 그분의 구원으로 인도할 책임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오히려 살인을 교사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미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로 하여금 말입니다. 살인은 유대 율법으로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결국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까? 도무지 용서받지 못할 죄인 바라바는 풀어주고, 도무지 죽일 죄라고는 단 한 치도 없는 의인은 가장 고통스럽고 저주받은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렇게 한 자들이야말로 도무지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선한 일을 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에 반해 빌라도는 누구입니까? 유대 사회로선 철천지원수이자 이방신을 믿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 대제사장들보다 더 의롭게 판단 행동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스스로 살인하는 죄는 범하지 않으려고 무진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무리 참 하나님을 몰라도 소위 말하는 천벌(天罰)을 두려워하는 양심이 조금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가 양심적인 의인이었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종국엔 그도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허락합니다. 사형을 언도할 수 있는 권한을 지금 스스로도 말도 안 되는 경우에 남용했습니다. 자기가 지금 살인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습니다. 오죽하면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살인죄를 안 범하려고 끝까지 무진 애를 썼기에 몽땅 너희들 책임이라는 궤변까지 늘어놓았겠습니까?
자기 가진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남의 목숨까지 희생시켰습니다. 자신만 배부르고 등 따습게 하려고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자기 권한으로 살인을 얼마든지 막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위치임에도 말입니다. 이 땅에 썩어 없어질 물질, 명예, 권세를 지키느라 영원한 생명을 놓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들어가는 가장 큰 우를 범했습니다.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자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였습니다.
요컨대 인간 세상에서 현실적, 지성적, 도덕적, 종교적 모든 면에서 최고의 것을 다 갖춘 자들의 의가 겨우 이 정도 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제사장들과 총독 같은 자의 죄만 예수님이 감당한 것은 아닙니다. 죄가 인류를 묶고 있는 권세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다양했습니다. 예수님은 진짜로 그 모든 죄책을 다 짊어졌습니다.
예수님의 공사역 동안에 만났던 모든 사람들을 살펴보십시오. 단 한 명이라도 의로운 자가 있었던지 말입니다. 죄에서 자유로운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더 치사하고 유치하며, 또 더 음흉하고 교활한 죄들을 지었습니다. 제자들마저 하나님 본체로 오신 구세주 앞에서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싸웠습니다. 말하자면 빌라도나 대제사장이 못되어 안달했습니다. 열두 명밖에 안 되는 가운데도 한 명은 돈 때문에 스승을 팔았고, 다른 열 명은 자기만 살려고 스승을 버리고 도망갔지 않습니까?
그나마 수제자 베드로는, 비록 도독고양이처럼 살며시 뒤따랐지만, 법정까지 가서 전후 동정을 살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비참하게 세 번째는 저주하면서까지 스승을 배반했습니다. 끝까지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던 빌라도나, 마지막까지 스승을 배반하지 않고 혹시 기회가 닿으면 스승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지켜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실패한 베드로나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스승을 못 지켜 준 것이나, 십자가 사형을 선고한 것이나, 직접 집행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살인죄를 범한 셈이지 않습니까? 단 한 명도 죽을 죄인이 아닌 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주위 사람들에게 전혀 분노하거나 미워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죄인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알면서도 스스로 의롭다고 교만에 가득 찼고 인간의 유전으로 백성들을 오도하는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선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그마저 마지막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는 그들이 자기가 지금 행하는 일이 인자를 살인하고 하나님 그분을 대적하는 줄 몰랐기에 용서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대신에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를 대신해 십자가 사형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이 어찌 그분이 모든 인간의 죄 값을 감당하지 않은 것입니까?
문제는 이런 너무나 합당한 설명도 불신자들에겐 기독교 고유의 교리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자연인은 눈과 귀는 가졌어도 보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마저 거부할 뿐 아니라 그를 전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말입니다. 예수님도 심지어 지옥에서 살아난 자가 생생한 간증을 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우리 모든 죄를 다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진리를 언제 어떻게 온전히 믿어집니까? 오직 한 가지 경우뿐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야말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죄인임을 절감했을 때부터입니다. 다른 말로 그 전에는 자신이 결코 그런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도덕적 죄는 조금 지었지만 죽어야할 만큼 심각하고 교활하고 음란하고 흉포한 죄인은 아니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간섭이 아니고는 자신의 도덕성에 대한 그런 옛 믿음을 십자가 안에서의 새로운 믿음으로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빌라도나 유대관원들처럼 예수님을 거부한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너무나 엄정한 진리를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자기에겐 아무 소망이 없었다는 진리를 바로 그분의 영이 우리로 깨닫게 해주고 또 그 이후로도 그 진리를 붙들게 만들어 주실 뿐입니다.
세상은 언제 어디서나 빌라도처럼 바라바와 예수 중에 너는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는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 질문에 우리는 아직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수시로 빌라도나 대제사장의 자리로 뛰어가고 싶은, 아니 뛰어가는 자들입니다. 최대한 잘 봐주어 베드로의 실패는 거의 중단 없이 되풀이하는 우리입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조차 여전히 십자가 보혈로 용서하고 사랑해주십니다. 우리 모든 죄를 감당하신 그분의 긍휼이 아니고는 믿은 후라도 인간이 깨끗케 될 길은 도무지 없다는 것을 그분께서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 크신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또 계속 그 안에 머물게 해주시는 이 귀한 은혜에 그저 무한 감사할 따름입니다. 세세토록 모든 경배와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 이 아침에도 송축합니다.
7/12/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