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믿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21:21,22)
신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예수님의 약속 중에 하나이지만 동시에 실제로 적용하기가 가장 곤혹스런 말씀이기도 합니다. 분명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해서 진정으로 믿고 구하지만 다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혹시 자신의 믿음에 의심 혹은 불신이 내포되어 있는지, 또 야고보 사도의 지적처럼 정욕이 개입되었는지 새로이 점검하고선 모든 지난 잘못을 회개하고 탐욕스런 부분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간구하는 정도를 약간 낮추어서 순전한 믿음으로 다시 기도해 보지만 여전히 현재의 문제와 환난이 사라질 기미는 없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비유는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이라고 여깁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기도해도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것 같은 일은 일어날 리 없다고 간주합니다. 그러나 주위에선 간절히 기도하여 말기 암 같은 불치병에서 치유되고 마약 중독에 갱 짓을 하던 아들이 단 번의 기도로 완전 새사람이 되었다는 간증을 심심찮게 듣습니다. 그럼 내 신앙에 뭔가 하자가 있는지, 믿고 기도한다는 것이 과연 어떻게 한다는 뜻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오해는 이 비유를 잘못 해석한데서 기인합니다. 산이 바다에 빠지는 것 같은 엄청 큰일도 기도를 통해 일어난다고 하니 어떤 일도 믿고 기도하면 이뤄진다고 이해하고 치웁니다. 그러나 막상 일용할 양식만 구했는데도 응답이 잘 안 되니까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산이 바다에 빠지는 것은 인간으로선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또 하나님만이 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비유의 초점이 언뜻 이해하듯이 기도가 응답되는 내용, 그것도 양적으로 아주 큰일을 강조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당신이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단 신자의 확신에 찬 기도를 통해서만 말입니다.
이 미세해 보이는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역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은 너무나 광대합니다. 인간이 도무지 계산, 추정, 가상, 상상도 못할 정도로 크십니다. 또 그 광대하신 능력으로 신자의 어떤 기도에도 진지하게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적은 것을 간구해도 하나님은 그 동일하신 광대한 능력으로 만나주십니다.
이를 다시 역으로 또 쉽게 표현해 봅시다. 우리마저 꼭 큰 믿음을 갖고 큰일을 간구해야만 큰 능력으로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그렇게 해야만 좋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또 그런 맥락에서만 이 비유를 해석하려 듭니다. 그러니 기도 응답이 잘 안 되면 곧장 믿음이 떨어지고 신앙여정도 종내 미로를 헤매는 듯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당연히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여기까진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래서 진짜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만 하나님께 맡기려 듭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능력의 크기로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모든 성경구절도 이 고질적인 잣대로만 판단하려 듭니다. 결국에는 그 크신 하나님이 이 작은 일도 못해준다 말인가라는 푸념으로 끝납니다.
순전한 믿음이란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겸비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일상적 능력으로 이미 부여하신 일, 예컨대 먹고 마시고 숨 쉬는 일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런 작은 일까지 하나님은 온전히 통치하십니다. 인간 스스로 얼마든지 숨 쉴 수 있지만 그것을 멈추게 하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시지 않습니까? 요컨대 범사가 그분의 완벽하고도 절대적인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을 확신한 바탕 위에서 삶에서 온전하게 반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무엇이든 믿음으로 기도하면,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라도 다 이뤄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우리가 가진 능력과 처한 여건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또 당신께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을 당신이 이루실 뿐입니다.
조금 더 실제적으로 비교해 봅시다. 거의 모든 신자는 이 약속에 따라 기도하기 전에 자기 믿음을 상향조정하려 듭니다. 아무리 자기 힘에 부치는 일도 “하나님은 크신 분이니까 얼마든지 이뤄주실 꺼야, 문제는 내가 그 진리를 의심하는 것이지, 이런 불신앙 내지 의심부터 없애고 기도해야지, 저는 응답해 주실 것에 대해 절대 의심하지 않을 테니 하나님도 그에 맞추어 꼭 응답해주세요.” 하고 기도합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그분을 순전히 믿은 것입니까? 또 응답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스스로 마음가짐을 조금 강하게 다진 정도밖에 안 됩니다. 솔직하게 풀이하면 과연 이 기도 제목을 이뤄주실까 의심에 가득 찬 채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그렇게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아니 저를 비롯한 우리 믿음의 수준이 사실은 그밖에 안 됩니다. 또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때로는 의심과 불신에 싸여 기도하더라도, 하나님은 당신만의 진정성을 갖고 다 듣고 계십니다. 또 당신만의 광대하심으로 응답해주실 준비를 하십니다. 나아가 계속 기도하다 보면 과연 그 기도가 응답될지 안 될지 깨닫게 됩니다. 그런 분별력도 사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일차적이고도 가장 기본적인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럼에도 기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 일은 우리와 상관없이 당신께서 이루시고야 만다는 확신입니다. 또 그 일이 언제 어떻게 드러날지 구체적으로는 전혀 모르지만, 지금 내가 드리는 이 기도 제목들부터 당신의 일로 반드시 바꿔 주실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를 자신의 기도에 해석 적용하는 방식이 확연히 둘로 나뉩니다. 우선 하나님은 산도 바다에 빠트릴 만큼 크신 분이니까 내 모든 기도를 응답해 주시리라 굳세게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니까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당신께서 반드시 이룬다고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시작하는 믿음이 다르니까 그 진행과 결과도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의심을 제거하면서까지 믿고 기도했음에도 작은 일도 응답 안 되니까 곤혹스러워집니다. 그래서 어떡하든 자기 믿음의 양적 질적 수준을 업그레이드 하는 데만 신경을 쏟습니다. 요컨대 기도를 더 세게 하면 응답이 따르리라 믿는 것입니다. 응답 받는 것만 신앙의 목표입니다. 기도하기에는 능통한데 응답에는 자신이 없는 교인이 되어버립니다.
후자는 자기의 아무리 작은 기도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큰일로 바꿔주신다고 믿고 기도하므로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그분의 일에 관심이 먼저 가게 됩니다. 자연히 기도로 하늘의 신령한 것과 그분의 일을 추구하는 데에 신앙을 동원합니다. 기도하기 전부터 범사를 그분의 거룩하신 뜻과 완전하신 주권 아래 완전히 맡기는 믿음을 소유한 것입니다. 당신의 뜻은 반드시 드러나고야 만다는 확신을 갖고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이 이미 된 것입니다.
지금 아무리 큰 기도 제목이라도 응답되리라 굳세게 믿고 기도하십니까? 아니면 자신이 당면한 어떤 힘들고 추한 일도 하나님이 당신만의 방식으로 당신의 거룩한 일로 바꿔달라고 기도합니까? 요컨대 내 기도한대로 응답 되는 것과 내 연약한 기도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이 세상 앞에 드러나는 것과 어느 쪽에 더 목말라 합니까?
7/1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