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진짜 소원은 무엇인가?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시37:1-3)
많은 신자들이 시편을 진짜로 시편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다소 있습니다. 인간 저자가 하나님과 인생사에 대해 품었던 생각과 느낌을 상징, 암시, 과장, 비유, 같은 수사법을 동원해 저작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영적 진리를 객관적으로 논술한 경전이라는 확신은 적고, 대신에 신자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운율에 맞추어 묘사한 문학작품으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저작된 그분의 절대적이고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시편이 비록 정서적 반응부터 이끌어내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놀랍도록 다양하고 풍성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영적 진리가 인간 지성을 넘어 감정에도 호소하기에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 은혜롭게 만들며, 특별히 침체에 빠져있는 신자에게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다시 채워줍니다.
다윗은 지금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고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측면이 있지 않습니까? 전반 말씀대로 행악자 때문에 공의가 굽어진다면 그들과 사회와 또 올바르게 치리해 주지 않는 하나님께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반에선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신자가 자기도 불의를 행하지 못해 시기, 질투할 리는 만무합니다. 불의를 행하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떵떵거리고 대접받으며 호사스럽게 사는 악인에 대해 심사가 뒤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에 공의가 굽어지는 현상에 대해 비판한다고 괜찮은 신앙이라고 간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명 “행악자”로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정작 불평하는 대상이 “죄악” 그 자체가 아니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진짜로 죄악과 죄악이 만들어 내는 결과를 저주하는지 죄인만, 그것도 형통하는 죄인만 미워하는지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 문법은 같은 내용을 용어만 달리해 반복하는 표현법을 자주 사용하기에 이 둘은 같은 의미라고 봐야 합니다. 따라서 행악자가 불의를 행하면서도 형통하는 꼴을 보고 시기심이 생겨서 하나님께 불평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횡행하는 죄악을 제거하는 데는 관심이 없거나 덜하면서, 악인이 형통하게 사는 꼴만은 도무지 못 봐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신자로서 마땅히 행할 바 선만 행하면 되는데도, 그러지 못한 점을 회개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악인은 신자들보다 훨씬 못 살아야만 이치에 맞는다는 것입니다. 뒤집으면 진짜 속내는 신자 또한 세상에서 그들처럼 형통하며 호사스럽게 살고 싶다는 뜻일 뿐입니다.
성경은 지금 신자라면 그 대신 어떻게 하라고 권합니까?.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이 또한 후반부가 의미심장합니다. 땅에 거하여 여호와의 성실로 식물을 삼으라고 합니다. 신자가 식물(食物) 즉, 매일 먹고 마시어서 생명의 원천으로 삼아야 할 것이 “여호와의 성실”이라고 합니다. 흔히들 소원하고 간구하는 대로 초자연적 이적이나, 몇 십 배의 풍성한 은혜 등이 아닙니다. 그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과 공의의 신실하심만 의지하라고 합니다. 신실하심(faithfulness)은 처음부터 끝까지 원칙에 절대적으로 충실하면서 아무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악인이 도리어 형통하고 신자는 궁핍에 처해도 주님의 신자를 향한 보살핌은 시종일관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더 실감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신자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아주 사소한 모습으로, 그것도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런 가운데도 주님의 권능과 사랑은 신비로운 모습으로 넘치도록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신자를 성숙시키어서 당신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모시키는 방식이 바로 성실하게 하루하루의 진보를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더러 왜 이리 더디게 조금씩만 은혜를 주느냐 불평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그릇이 사실은 그렇게 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는” 실상이 너무 보잘 것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윗은 이어서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4절)고 했습니다. 무슨 소원이든 기도하면 다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지레짐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도 이왕이면 소원을 크게 잡고 또 믿음도 그에 맞추어 크게 잡아서 말입니다.
분명히 “여호와를 기뻐하라”고 했지, 여호와께 네 마음의 소원을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더라도 최소한 여호와를 기뻐하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성실로 식물로 삼으라(3절)고 번역된 원문도 여호와 그분을, 그것도 아주 강조하면서, 식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로 양식 삼는다는 표현이 오해를 살 수 있어서 그분의 성실이라고 덧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4절도 여호와 그분을 기뻐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조금 더 살펴보면 그 뜻이 더 확실해집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5-7절)
이 땅에서 신자가 행할 일은 선(善)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 후 바로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고 남겨 두시는 이유도 신자의 의를 빛같이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악인이 세상에서 형통하여 공의가 굽는 것 같아도 투기는 물론 불평도 하지 말고 잠잠히 참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또 그럴 시간과 여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여호와가 신자더러 아무리 현실적 형통과는 거리가 먼 아주 사소한 일을 반복시키더라도 참고 기다려야 하며 그 중에도 의의 빛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악인은 의를 빛내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기에 여호와의 성실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악한 꾀를 내어 부를 축적합니다. 여호와와는 어떤 관계도 생길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여 권능을 베풀고 의를 빛같이 드러내어주는 대상은 오직 신자, 그중에서도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자입니다.
그렇다고 신자만 희생하고 손해 보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길을 여호와께 완전히 맡기면 그분이 이끌어 주신다지 않습니까? 그럼 설마 그분이 우리를 사망은커녕 실패로 이끌 리도 만무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성실이 우리의 식물이 되게 하신다지 않습니까?
요컨대 신자가 그분의 큰 은혜만 바라거나 기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당신을 진짜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불평하고 투기할 틈은커녕 마음도 생기지 않으며, 자연스럽고도 기꺼이 선을 행하게 되며, 어떤 환난과 낙심 가운데도 그분만 잠잠히 기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앞으로 나아갈 길은 그분께서 거룩하고 아름답게 이끄실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당신은 그분의 성실과 보상 중에 어느 쪽을 더 소원하는지요?
4/30/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