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깨어 근신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5:6-10)
로마서를 필두로 그가 지은 서신서들에서 보듯이 바울은 탁월한 논술가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신비한 경륜을 인간의 말로 물 흐르듯이 풀어나갑니다. 성령이 인간의 영혼에 역사하여야만 이뤄지는 구원의 비밀조차 그 중생의 은혜 안에 이미 들어온 자에게는 이성적으로 이해되고 확신할 수 있도록 충분히 논리적입니다. 그가 전하는 온전한 복음에선 정말로 생명을 좇아 생명에 이르게 하는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그의 뛰어난 논술가적 자질은 본문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 짧은 구절 안에 ‘잔다’는 동일한 단어가 세 번 등장하는데 각기 그 뜻이 다릅니다. 인간에게는 세 종류의 잠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워 잔다’ 혹은 그에 따른 상징적 의미로 쓰이는 ‘카듀도’라는 헬라어 한 단어만 사용했기에 우리말(잔다)이나 영어(sleep)로도 한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조금만 주의해서 읽으면 세 ‘잠’의 뜻을 구분하여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6절의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에선 하나님과 관계가 끊겨서 생기는 “영적 무지”를 뜻합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신약성경 중에 가장 먼저 AD 51 년경에 쓰인 책입니다. 주님이 돌아가신지 20 여년이 채 안된 시점이었습니다. 그분의 다시 오심에 대한 기대가 아직 왕성할 때였습니다. 또 그런 열정이 지나쳐 잘못된 종말관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서신은 당시의 오도된 종말관을 바로 잡고 재림에 대한 소망을 더 견고케 하려는 목적으로 저술 된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시기는 아무도 모르기에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들은 당연히 자지 말고 오직 깨어서 근신해야할 것입니다.
둘째로 7절의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의 잠은 실제로 누워 자는 것을 뜻합니다. 자고 취하는 것은 밤에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밤을 영적 무지에, 낮을 깨어 근신함의 은유로 사용했습니다. 재림에 대한 소망은커녕 믿음도 없이 방탕히 사는 자는 밤에 술에 취하여 자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자는 낮에 속한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영적 비밀을 이미 깨달은 자이기에 그 소망을 가꾸어 나가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0절의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에서의 잠은 육신적 죽음을 뜻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까지 음부에서 자는 것이라고 간주했던 유대인들의 죽음에 대한 개념에 부합시킨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한번 구원을 주신 성도와 사나 죽으나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지금 당장 오셔서 심판을 하더라도 아무 염려 말라는 것입니다.
최근 극심한 세계적인 경제 불황, 이상 기후에 따른 전 지구적인 자연재앙, 원인 모를 질병들의 발생, 인간관계의 단절 내지 파괴 등으로 인류의 종말이 닥친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현대인들이 귀담아 들을 만한 말씀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에게는 우이독경(牛耳讀經)이겠지만 신자라면 정말 자신이 깨어서 경성하고 있는지 점검해봐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5월 21일 휴거가 온다는 거짓 예언으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실례(實例)를 보더라도 더더욱 그러합니다.
올바른 종말관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재림의 시기는 아무도 모르니까 현재 자기가 처한 곳에서 최선을 다해 신자답게 사는 것입니까? 물론 하나 틀림없는 정답입니다. 모두 다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선교사로 평생을 헌신할 필요는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드러내면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주 흥미롭게도 우리가 정말로 올바른 종말관을 가졌는지 바로 이 세 종류의 잠을 가지고 스스로 점검할 수 있습니다. 바로 세 잠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좋고, 어느 것이 가장 싫은지 따져 보면 됩니다.
혹시 육신이 죽는 잠이 가장 싫고, 밤마다 취하는 잠이 가장 좋은 것은 아닙니까? 물론 일차적 감성적 반응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끝까지 그렇다면 불신자의 선호도와 전혀 다른 것이 없지 않습니까? 본문 말씀이 불신자에게는 우이독경일 것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는데 바로 그런 상태일 뿐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말씀으로 역사하지 않은 셈입니다.
신자는 불신자와는 정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육신적 죽음이 가장 좋고, 밤에 자는 잠이 가장 싫어야 합니다. 육신적 죽음이야 천국과 이어지므로 정답일 수 있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까? 이미 말씀드린 대로 밤에 자는 잠은 수사법 상의 메타포일 뿐 실은 영적 무지를 뜻한다는 맥락에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가장 좋아해야 할 잠은 천국에서 영화로운 변화요, 가장 싫어해야 할 잠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어야 합니다. 불신자는 이 땅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아니까 육신적 죽음이 가장 싫고, 또 일신의 안락과 형통만 목표로 사니까 밤에 자는 잠이 가장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다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므로 영적으로 소경이 되는 또 다른 종류의 잠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4:17-18, 5:8)
신자라면 바울의 이 고백이 바로 자기의 진정하고도 절실한 고백이어야 합니다. 천국의 영광을 목표로 살아야만 죽지 않을 뿐 아니라 잠자지 않고 깨어서 경성하고 있는 삶이 됩니다. 이단들의 비뚤어진 종말주의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정도로 바른 종말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일반인들도 그들이 틀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다 압니다. 천국을 이 땅보다 더 좋아하고 소망하지 않는다면 아직도 우리는 완전히 깨어 경성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순교하든지 죽기를 바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 미지의 세계에 들어감에 대한 두려움과 이 땅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육신적 이별에 대한 슬픔은 올바른 종말관을 가진 신자라도 자연스레 갖게 됩니다. 신앙적으로 전혀 잘못이 없습니다. 그보다 천국이 정말 소망스럽긴 하지만 하나님이 이미 영생을 선물로 준 우리를 여전히 이 땅에 남겨두신 목적에 맞추어 살고 있어야만 종말관이 올바르게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후5:1-3)
신자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벗은 자들로 발견케 되면” 안 된다고 합니다. 재림을 대비해 깨어서 경성하는 모습의 본질입니다. 현실적 환난은 잠시이고 또 경(輕)하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주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우리와 자나 깨나 항상 함께 하시므로 어떤 일을 만나도 요동치 말아야 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어떻게 권면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라고 합니다.(5:1) 말하자면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라”(2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알아야”(3절) 합니다.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재림에 대비해서 깨어서 경성하고 있습니까? 세 가지 잠 중에 어떤 것이 가장 좋고 또 가장 싫습니까? 바꿔 말해 이 땅에서의 내 겉 사람이 자꾸 후패해지는 것과 속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싫은지 묻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내 겉 사람이 날로 후패해지는 것이 너무 싫어서 종말의 시침을 빨리 돌리고 싶거나, 천국 갈 날만 카운트다운 하고 있다면 아무리 종말을 소망해도 깨어 경성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 보배로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질그릇 같은 나를 깨트리고 겉으로 나와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 비춰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 공동체가 그 빛을 보고 아주 조금씩이나마 밝아져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덧입어야만 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러지 않고 그리스도의 힘만 빌려서 내 겉을 화려하고 풍성하게 치장하려 들수록 세상은 속아줄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오히려 더 벗은 자로 발견될 뿐입니다.
7/27/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