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17: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지난 시간에는 베뢰아 사람들이 성경을 신사적으로 살피는 자세를 생각해 봤었습니다.
오늘은 베뢰아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는 그들만의 자세가 아니라, 성경을 바르게 아는 성도들은 늘 그렇게 했다는 것에 대하여 조금 더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고전14:29절입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고린도 전서는 AD 50-55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예언자들의 예언이 필요했습니다. 마치 구약시대처럼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했습니다. 물론 구약보다는 많이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복음으로 명확해졌고, 신약의 예언은 복음을 부연하는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사람은 둘이든 셋이든 다른 성도들에게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들은 반드시 “분변”해야 했습니다! 그냥 받아들이거나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변”에 해당되는 원어(디아크리노)에는 ‘구별하다, 판단하다.’의 뜻만 있는 게 아니라 ‘의심하다, 논쟁하다, 분쟁하다, 주저하다.’라는 의미까지 포함됩니다.
분변의 대상은 교회에서 선포되는 모든 말(예언이든 설교든)입니다. 그리고 분변의 잣대는 구약성경과 사도들이 전해 준 복음입니다. 모든 말은 구약과 복음에 비추어 수용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신국제역(NIV)은 고전14:29b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and others should weigh carefully what is said.” 매우 정확한 번역입니다.
‘others’는 예언을 듣는 이들입니다. ‘what is said’는 예언자들이 전한 예언입니다. 듣는 자들은 들은 예언을 ‘주의깊게 비교검토’(weigh carefully)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언자들이 아무리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주장하더라도, 그 말만 믿고 또는 그 말 한마디에 무조건 동의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딛1:16절도 살펴야 합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개역성경은 정확히 번역되었다 보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NIV를 참고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딛1:16a만 인용합니다. “They claim to know God, but by their actions they deny him.”
여기서 “저희”는 바로 앞의 14절에 나옵니다.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는 사람들”입니다.
아주 조심할 것은 13절의 “저희”와 16절의 “저희”를 동일 인물군(人物群)으로 보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13절의 “저희”는 그레데 성도들로서 디도가 보호해야 할 대상입니다. 16절의 “저희”는 14절의 사람들(성도를 유혹하는 자들)입니다.
아무튼, 그레데 성도들을 유혹하는 자들(저희)의 특징은 ‘스스로 하나님을 안다.’고 강변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강력하게 ‘하나님의 사람’임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 증거는 오직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유혹자들의 또 다른 특징은 ‘행동으로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딛1:16절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 역시 ‘사람의 말만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말이든 예언자의 말이든, 반드시 성경에 비추어 봐야만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자세(성경을 상고하는 태도)가 신약성경에서만 요구되는 성도의 자질일까요? 아닙니다. 구약성도들 역시 동일한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먼저, 겔14:10절입니다. “선지자의 죄악과 그에게 묻는 자의 죄악이 같은즉 각각 자기의 죄악을 담당하리니”
14장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거짓 선지자는 당연히 하나님이 벌하시지만, 거짓 선지자에게 속는 자도 그 죄를 묻겠다고 선포하시는 부분입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는 오히려 제사장보다 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제사장은 인간을 대표하여 인간의 필요를 하나님께 전달(중재)하는 역할이었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선포)하는 임무였습니다. 후자의 책임이 더 컸습니다.
따라서 일반 백성은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의 말까지 분별하라고 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있으니 절대 넘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계십니다.
다음, 말2:12절입니다.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리라.”
말라기서는 십일조와 관련하여 매우 왜곡되는 성경 중의 하나입니다만, 이곳에서는 그것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주제와만 연계하여 조금 살피겠습니다.
말라기서 전체는 제사장들을 향한 하나님의 질책입니다. 당연히 2장도 같습니다. 7-8절에서 꾸중 듣는 이들이 규정되는데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는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다 12절에 와서 정리를 하는데, 그 내용은 ‘그릇 행하는 제사장들과 그들을 따른 자들’ 모두를 벌하겠다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잘못된 지도자를 따르면 함께 망한다.’는 진리를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올바른 자세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우리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말만 들으면 무조건 ‘아멘’했습니다. 참 신실해 보이는 이 태도야말로 위험천만한 무지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차용한다 할지라도 받는 자가 이를 성경에 비추어 확인하지 않으면 이는 멸망으로 가는 직행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 전한 자는 말할 것도 없고, 잘못 들은 자도 함께 망한다(마15:14)는 사실을 위에서 살펴봤던 것입니다.
우리는 베뢰아 성도들의 자세를 철저히 배워야 합니다. 신사적인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신사적인 자세를 견지하지 않는다면 야만적인 성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미개하여 문화가 유치한 사람’일 뿐 아니라, ‘도의심과 교양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제사장이나 사도나 예언자나 목사가, 아무리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주장하더라도 무조건 수용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경과 일치하는지를 검토한 다음에 수용여부를 결정짓는, “신사적인” 성도가 되어야만 합니다.
총정리 하겠습니다.
행17:11절에서 규정된 “신사적인” 성도는 ‘사도의 말이라 할지라도 성경에 부합하는지를 면밀히 살핀 다음에 수용하는 자, 즉 듣는 바를 살피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와 반대 개념인 ‘야만적인’ 성도는 ‘누구의 말이든 성경과 하나님만 빙자하면 무조건 수용하려는 자, 즉 들은 것을 살펴보지 않는 자’라는 뜻입니다.
신사적인 성도로 성장할 것인지 야만적인 성도로 전락하고 말 것인지는, 순전히 개인의 선택일 것입니다.
단단한 식물을 마음껏 먹는 “선생”이 될 것인지, 겨우 젖이나 빠는 “어린아이”에 머물 것인지(히5:12-14)는 스스로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까지도 분명한 죄악임을... 아멘!
늘 말씀을 성경과 비교하여 찬찬히 살피는 습관을 들임이
참으로 중요한 일임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아보는 지혜도 너무나
필요함을 함께 배웁니다. 감사합니다.